# 178
17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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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12. 닫히는 세계
-스칸다의 종말을 선고하는 존재인 니드호그가 쓰러졌습니다. 스칸다의 삶은 계속될 것이고 다시금 부흥할 것입니다. 세종 시민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고 그들의 종말도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는 당신도 떠나야 할 때입니다. 이곳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가십시오.」
-이 임무는 메인 시나리오입니다. 에어리어를 개방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해내야 하는 임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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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이유 없이 순환하고 열매를 맺는다.
오늘은 스칸다를 위해 싸우다 죽어 간 사람들의 영결식이 있는 날이다.
쏴아아아아.
대륙 곳곳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늘, 바스카리에 모인 이들은 함께 비를 맞았다.
어린 아이와 노인, 임산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우산을 쓰려 하지 않았다.
지금 멀리 떠나야 하는 이들이 비를 맞고 있었으니까, 그들에게 구원받은 자들은 함께 비를 맞기로 했다.
회수할 수 있었던 시신은 전부 회수했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성진이 목격했던 죽음의 횟수는 그보다 몇 배는 많았다.
“오늘 이곳에…….”
성진과 최별, 그리고 송하린은 니드호그와의 전쟁이 끝나자 각자 올랐던 계단에서 내려왔다.
교황, 태양왕, 맹의 한 축에서 홀연히 내려와 다시금 이방인의 신분이 되었다.
성진 일행은 이 세계가 단순히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영결식에 진지한 마음으로 참여했다.
시청자들은 그들의 행동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이런 사례가 있었다.
스칸다 당시에 한 유저가 NPC와 사랑에 빠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를 이해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단순히 인공지능이라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눈빛과 전해지는 마음.
그것을 가짜라 여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끝은 비극이었다.
여인의 살던 마을은 마적단에 습격당해 몰살당했다.
남자는 마적단에 복수를 한 뒤, 다시는 접속하지 않았다.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여흥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절실한 머무름이었다.
이런 사례들이 있고 난 뒤부터는 이 세계에 머무르는 동안엔 그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맞다라는 의견이 주류가 되었다.
때문에 성진 일행이 사람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은 없었다.
성진 일행은 스칸다가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세종 시민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될 때마다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바스카리 인근에 잔뜩 모였던 세력들은 흩어져서 저마다의 삶을 찾았다.
그들은 마치 오랜 터널을 지나온 것처럼 빛을 향해 더 다가서려 애썼다.
-3일 뒤,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스칸다는 성진 일행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이제 3일.
3일 뒤에는 스칸다를 영영 떠나게 될 것이다.
셋은 지금 이민상의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노인인 그대로였다.
“하아…… 하아…….”
“민상아.”
“괜찮아요, 형…… 나는 괜찮아요…….”
스칸다는 일전, 성진의 부탁을 들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늙고 쇠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래도, 차원의 틈을 이용한다면 다시금 젊음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차원을 넘을 때의 시공간의 법칙은 보존되지 않는다고 했다.
차원을 넘을 때 뒤틀리는 에너지의 폭풍에 몸을 맡기면 어쩌면 인간의 젊음 정도는 되찾을지 모른다고.
기대할 방법은 그것뿐이었고 이마저도 부작용은 있었다.
-대부분을 잃을 것이다. 힘도, 기억도. 전부를 잃지는 않더라도 힘은 조각조각 흩어질 것이고 기억은 편린만을 가지고 살아가겠지.
이민상에게 이것을 전하자, 그는 웃었다.
“형…… 그렇게 할게요.”
“…….”
“내가 다 잊어도 형은 기억하잖아요. ……그러면 된 거지.”
“그래.”
“대신에 날 찾아와 줘요. 이번엔 형이.”
“……알았어.”
“조금만…… 쉴래요…….”
이민상은 깨어 있는 시간이 고통스러운지 쇠가 갈리는 목소리를 내며 거친 숨소리를 잠재웠다.
3일 뒤에는 그의 운명이 결정지어질 것이다.
성진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공터에 앉아 종일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꺄하하!”
“저런 거 함부로 만지는 거 아니야.”
공놀이를 하는 아이부터 아이를 안고 돌아다니는 부모까지.
세계는 제 모습을 찾기 위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잊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종말의 순간, 많은 이들을 잃어야 했던 아픔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 더 맹렬히 살아가는 것이다.
성진에게 몇 가지 의문이 남았다.
‘종말 거부 장치는…….’
종말 거부 프로토콜이 종말 거부 장치가 없는데도 가동되었다.
성진은 정유리와 스칸다에게 물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물었다.
-순수의 힘이다. 네가 넘긴 그 힘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지.
“순수란 말은 신격과 같은 뜻입니까?”
-그것은 아니다. 신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순수지만 순수라고 하여 모두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종말 거부 장치를 만든 이들이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순수에 오른 자들일 것이다.
가장 먼저 의심이 가는 것은 데자뷰였다.
성진은 이제 점점 진상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몸을 회복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지만, 여러 경험을 하며 그 안에 의심이 싹텄다.
이것은 게임이 아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무슨 목적일까?’
이 게임을 만든 목적과 자신이 선택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또.
지혜의 샘을 마시고 보았던 여인과 니드호그를 추격하며 만났던 여인은 누구일까.
누구기에 자신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낯설지 않다고 여기는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서울에 도달하면 알 수 있을까.
“하아…….”
방법이 없었다.
그저 부단히 걷는 것 밖에는.
성진이 공터에서 빠져 나와 로브를 쓰고 걸었다.
이제 그는 없는 사람이 될 생각이었다.
스칸다의 사람들도 그들이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한참을 걸어 별나무 앞까지 왔다.
별나무는 이제 신목(神木)이 되어 사람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을 관리하는 이들도 필요치 않았다.
스칸다가 스스로 관리했으니.
길게 둘러진 나무 울타리에 다가가자 울타리가 저절로 물러나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성진이 안으로 스며들 듯 들어섰다.
별나무 앞에는 여전히 세 자루의 검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송하린과 최별이 서 있었다.
둘은 허리를 살짝 굽혀 뭔가를 하고 있었다.
“형님?”
“오셨어요?”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성진이 이곳에 온 목적과 둘의 목적이 같은 게 분명했다.
송하린의 천마도에 활금강 버튼이 붙은 삿갓이 씌워져 있었다.
반대로 최별의 엑스칼리버에도 투구와 함께 덧댄 천에 활금강 버튼이 붙어 있었다.
-이 녀석들 ㅋㅋㅋ 낭만을 아는 청년들이구만.
-아 겜 접는다고 ㅋㅋ 템 뿌립니다!
-저거 스칸다할 때 주웠으면 저게 다 얼마야;;
-꼬라지 보니 스칸다 재오픈은 제 희망사항이겠죠?
-정확하십니다.
성진은 로브에서 뭔가가 그려진 천을 꺼냈다.
세 자루의 검이 교차한 그림이었다.
성검회의 기(旗)였다.
그는 검에 그것을 두른 후 마찬가지로 활금강 버튼을 붙였다.
셋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검들을 지켜보았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떨어져 당황했던 것도 잠시, 시청자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성장했다.
데칸 산맥의 그리핀을 처치했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그리핀들을 퇴치하고 설을 얻게 해 준 것도 시청자들이었다.
설은 니드호그와의 교전 중에 사망했다고 들었다.
성진이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엥?
-네?
-뭐시여?
‘우리쵸코는안물어’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저거, 저거! 나, 나한테 한 말이죠?]
‘빤쓰까지다벗겨요’ 님이 5,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당연히 나한테 한 말이잖습니까. ㅡㅡ]
-빤쓰좌가 5,000원 줬으니까. ㅇㅈ
-암만 1,000원은 인정받기 힘들짘ㅋㅋㅋ
-헐, 근데 진짜 누구한테 감사하다고 한 거야?
대삼림에서 시조를 퇴치할 때, 동부에서 심상을 배울 때, 서부에서 별자리 관을 지날 때, 자금을 끌어 모을 때와 스칸다를 벼려 낼 때, 마지막으로 시초의 유적에 남겨졌던 좋은 친구들까지.
모두 시청자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성진 혼자서는 이 거대한 세계를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세계는 어쩌면 성진 일행만으로는 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스칸다 사람들과 성진 일행, 그리고 그걸 지켜보던 시청자들이 모두 힘을 합했기에 종말을 막을 수 있었다.
“시청자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성진이 말하자, 상황을 짐작한 최별과 송하린도 말했다.
“고맙소이다. 돈은 잘 썼소.”
“감사했어요. 덕분이에요.”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채팅 창이 난리가 났다.
‘여러분들 먼저 갑니다’ 님이 10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나님 먼저 성불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 그렇구나’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크라우드 펀딩 리워드가 지금 도착한 거구나. ㅋㅋ]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기분 ㅈㄴ 이상하다 진짜;; 내가 막 세계 구한 것 같고 막 이래. ㅋㅋ
-응 너 펀딩 안 했지?
-응원했습니다. 선물은 가치보다 마음이죠!
-그래서 님 마음이 무가치하다는 거죠?
‘세상에 이런 날이 오다니.’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나 시청자로 태어나길 잘했어. ㅠㅠ 요즘 우울했는데 갑자기 폭풍 오열 중. ㅠㅠ]
‘우리는 하나’ 님이 1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다, 형제들이여! 늘 함께야!]
-너랑은 하나 되기 싫은데;
-하나는 좀…….
-그냥 집단으로 하자…….
-긁적긁적…….
‘스칸다에 꼴아 박은 인생’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후회하지 않는다! 엄마 죄송해요! 취업은 조금만 기다려 줘!]
-어머니 다른 의미로 폭풍 오열 중.
-부모님 등골에 치명적인 타격!
-우리 밀수는 본인이 정의라고 믿는 거야! 그렇기에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지!
돌이켜 보면 정말 긴 시간이었다.
성진은 스칸다에 와서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게임을 플레이하며 웃고 울었던 기억은 단연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잠시의 여운이 지나고 약속된 그날이 왔다.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성진 일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시는 건가요?”
“네, 갑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갱이 웃었다.
“하하하하! 왜 이리 다들 울상입니까, 좀 웃자고.”
그의 말에도 사람들은 웃지 못했다.
다시 공석이 된 교황 자리.
물의 추기경인 실바가 성진에게 물었다.
“저…… 교…… 아니, 이방인 님. 우리는 어떤 사이일까요?”
“…….”
“……친구일까요?”
성진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의 곁에는 침상에 누운 이민상, 그리고 최별과 송하린이 함께했다.
그 말에 안심한 실바가 한숨을 쉬었다.
실바가 성진 일행에게 말했다.
“이방인들이여, 약속드립니다. 당신들의 선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또한 저희들의 잘못도 마찬가지고요.”
“…….”
“언젠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그러지 마세요.”
“……네?”
성진이 말했다.
“잊으세요. 그리고 살아가세요. 그러면 됩니다.”
“…….”
“친구잖아요.”
스칸다의 목소리가 바스카리에 울려 퍼졌다.
-이제, 돌아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고맙다, 다른 세상의 아이들아.
꽃의 사제들이 울면서 성진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성진에게 물었다.
“저희에게 무, 무언가 남기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성진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그들에게 말했다.
“행복하세요.”
“……여전하시군요. 알겠습니다.”
스으으윽.
흐릿해져 가는 신형.
이마의 용 각인이 순식간에 지워지고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민상이 갑자기 발작하듯 말했다.
“소, 손을!”
“뭐?”
“손을 잡아 줘…… 이번에는…… 꼭…….”
성진 일행은 이민상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이민상은 그제야 안심이 된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꼭…… 찾아 줘.”
“민상아, 꼭 찾을게.”
“고마워……. 고마워, 형.”
-고마웠습니다, 스칸다!
-잘 지내요. 스칸다! ㅠㅠ
-혜선♥정익 다녀감.
-어글리 코리언 쳐 내!
-잘 놀다 갑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ㅠ
-밀수에게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는데…….
-그 말이 제일 슬프다고
-데자뷰! 이거 보고 있으면 다시 스칸다 오픈 하라고 ㅡㅡ 내 돈 가져가!
성진 일행이 사라졌다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간 그들은 곧 정신을 잃었다.
자연스럽게 방송이 종료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함을 느낀 것은 바로 직후였다.
등불들의 접속도 그 시간을 기점으로 종료되었다.
예견하지 못한 사태에 대해 데자뷰는 곧 입장문을 발표하기로 했다.
입장문은 한국 서버의 진행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견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잠시 서버 운영을 중단한다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딱 한 달 후까지 올빼미의 방송은 켜지지 않았다.
-chapter 6-12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chapter 6-12을 클리어합니다.
-보상으로 펄스의 융합이 이루어집니다.
-펄스 : 스톰을 깨우칩니다.
***
이민상의 몸은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변화를 맞이했다.
축 처져 주름이 가득했던 피부는 서서히 펴져 탄력 있게 변모했고 손톱과 발톱은 모두 빠진 후에 새롭게 돋아났다.
하얗게 새었던 머리는 다시 검은 색으로 돌아왔고 듬성듬성 빠졌던 이도 새로 돋아났다.
지혜와 후회를 담았던 그 눈망울은 패기와 정열을 품었고 굽었던 척추는 올곧게 펴졌다.
그리고 힘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기억은 조각나서 흩어졌다.
“허어어억!”
크게 숨을 들이키며 일어난 이민상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쉿, 어른한테 그렇게 손가락질 하는 거 아니야.”
‘여기는 어디지?’
이민상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탐문했다.
몸을 움직이는 게 불편했다.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삐거덕거리는 기계처럼.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것, 자신이 이민상이라는 것과 올빼미라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는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문제는, 올빼미가 누구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다시 절뚝이며 길을 걸었다.
이곳은 활기를 띄지만 동시에 묘한 두려움을 간직한 곳이다.
눈에 띄는 주소지를 확인하자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세종시?’
이민상은 지금 세종시에 와 있었다.
이민상은 세종 시민들을 기억하지 못했고, 그것은 세종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민상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마치, 오랜 꿈을 꾼 것 같았다.
아주, 아주 오랜 꿈을.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문득, 손을 들어 손바닥을 살폈다.
길고 두꺼운 손자국이 나 있었다.
얼마나 꽉 쥐었으면 이런 자국이 나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누구지?’
이민상은 걸었다.
***
“그게…… 그게 무슨 소리에요?”
“최성진 씨는 현재…….”
정신을 차릴 수 없다니.
매주의 마무리를 웃는 얼굴로 함께했는데.
“시, 식물인간이 된 거예요? 또?”
“그때와는 상황이 약간 다릅니다.”
“뭐가 다르다는 거예요?”
“그것이…… 캡슐 치료를 병행하던 도중 원인 모를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게 말이에요?”
“죄송합니다.”
“……일어날 수는 있는 거죠?”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시면…… 뇌파가 점차 안정화되고 있습니다. 매일 수치를 기록하고 있으니 큰 문제가 없다면 스스로 깨어날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을 가지라는 거예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5년을 죽은 사람처럼 지내며 그의 곁을 지켰다.
기필코 보답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성진이 깨어나 그녀에게 웃어 줄 때 그녀는 해묵은 감정을 떨쳐 냈다.
비록 그가 걷지 못할지라도, 언제까지고 그와 함께할 각오를 다졌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녀가 그렸던 미래는 그렇게나 과분한 미래였던 것일까.
끼이익.
신아름은 성진의 병실로 들어섰다.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은 마치 좋은 꿈을 꾸는 듯했다.
남겨진 그녀는 이제 다시 악몽을 꿀 것이지만.
어쩐지 조금 허탈해졌다.
스르륵.
하얀 벽에 등을 기댔다가 무너졌다.
차가운 바닥이 엉덩이를 쓸쓸하게 했다.
자연스럽게 무릎을 안은 그녀는 그날 조금 울었다.
펑펑 울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5년이란 세월을 견디며 얻은 그녀의 작은 지혜였다.
앞으로 울 날이 많을 것이기에 눈물을 아껴 두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남은 시간을 버텨 내지 못할 테니까.
짝!
“정신 똑바로 차리자, 신아름…….”
분명히, 상태가 회복되고 있다고 했다.
전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적어도 기다림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성진이 누운 곳은 이제 침상에서 캡슐로 바뀌었다.
단지 그것만 바뀌었다는 게 우스웠다.
“……내일도 올게.”
이제 다시 성진은 혼자가 되었다.
말할 수 없을 것이고,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매일 와 그를 볼 것이다.
차는 움직이지 않으면 퍼지고 집은 머물지 않으면 병든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돌보지 않으면 망가진다.
그녀는 그날 이후로 매일 성진의 병실을 찾았다.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다.
결단코 다시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쩔 것인가.
3일이 지났을 때, 깜빡 잠이 든 그녀는 커튼을 살랑이게 한 바람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혹여, 이 바람이 그의 손길인 줄 알고.
그것을 기대한 자신이 허무해져 그녀는 아껴 둔 눈물을 조금 흘렸다.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의 옆 탁상에 꽃병 물을 갈아 주었다.
기분이 울적해져 내친김에 꽃도 화려한 색으로 골랐다.
꽃을 꽃병에 꽂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조금 더 향이 진한 것을 고를 걸.
그랬다면 꽃향기를 맡고 그가 깨어날 수도 있을 텐데.
“무슨 생각을…….”
미련한 생각이었다.
2주일이 지났을 때 그녀는 조금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다.
병원비야 어쨌든 성진의 이름을 통해 들어온 비용으로 전부 충당할 수 있었고 오히려 넘치기까지 했다.
그러니, 자신은 마음과 시간만 내면 되었다.
고작 그것뿐이었다.
지금 나이의 신아름에게 시간과 마음은 함부로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 혼기를 놓칠 것이다.
이것은 선택이다.
그녀는 이번 생에서 성진을 택했다.
그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시간과 마음을 마음껏 쏟아도 되었다.
어차피 그가 아니라면 버려질 시간과 마음이니까.
시간이 조금 더 흘러 4주일이 되었을 때, 그녀는 회식이 끝나고 그를 찾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성진의 경우 면회가 가능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그것을 허가했다.
“헤헤…… 술 냄새 나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쪼끔…… 쪼오끔…… 마셨어. 푸후우…….”
캡슐 옆에 놓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구두 굽 높이가 안 맞아 앉을 때 휘청거리며 쓰러질 뻔했다.
“어? 아이…….”
구두 굽이 또 부러져 있었다.
이제 고쳐 신는 것도 한계인 것인지, 자꾸만 굽이 부러졌다.
이 구두는 성진이 사 준 것이니 함부로 버릴 수가 없었다.
성진이 돌아왔을 때, 그녀의 구두를 사 주려 했다.
결국에는 다시 잠들게 되었지만.
“몸 건강히 일어날 거라며……. 거짓말쟁이.”
그녀는 캡슐에 손을 포개 올려놓고 안에 잠든 성진을 바라보았다.
“우리 오빠…… 참 잘생겼네. 뉘 집 자식인지 참 잘났다…….”
그의 침묵이 대답했다.
“일어났으면 해…… 나 조금 힘들어…… 오빠…….”
그녀는 그렇게 한참이나 훌쩍거리고는 떠났다.
한 달이 되는 날, 그녀는 언제나처럼 그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쏴아아아아아.
날이 궂었다.
검은 하늘은 계속해서 비를 쏟아냈다.
불길해진 그녀는 평소보다 한참 일찍 퇴근하고 그에게 갔다.
마음이 급해 우산보다 걸음이 먼저 나갔다.
덕분에 그녀는 비를 좀 맞았다.
끼이익.
“어?”
쏴아아아아.
창문이 열려 있었다.
비가 병실 안으로 조금씩 들이쳤다.
“간호사 언니가 깜빡하셨나?”
탁.
탁.
소리 나게 창문을 닫으며 주의 깊지 못하다며 불만을 투덜거린 그녀는 캡슐을 살폈다.
“…….”
없다.
성진이 없었다.
“……뭐야?”
그녀는 재빨리 담당의를 호출해 물었다.
담당의는 그녀의 말에 그녀보다 더욱 놀랐다.
“김 간호사! VIP병동 환자 중에 움직인 환자 있었나?”
“교대할 때도 자리를 안 비웠었는데 따로 입구로 나가시는 분은 없었어요.”
웃기는 소리다.
사람이 증발이라도 했다는 건가.
그녀는 병원 측에서 찾아보겠다는 말에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1층의 접수원이나 경비원들도 그런 사람은 못 보았다고 했다.
쏴아아아아아.
“헉…… 허어억……. 뭐야…….”
당연히 우산은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가 이 병원 어딘가를 헤매고 있지는 않을까.
누군가 그를 해코지하기 위해 데려간 것은 아닐까.
불길한 상상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들을 계속 훔쳐 내며 달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진은 없었다.
찾아볼 곳은 전부 찾아보았다.
스타킹은 보기 흉하게 찢어졌고 신발은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쏴아아아.
비에 흠뻑 젖은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하늘이 그녀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힘들다고 얘기하지 말 걸.
어쩐지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아 조급함이 배가 되었다.
“어!”
환자복을 입고 비를 맞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다급하게 달려가려 했다.
찰팍.
철퍽.
기운이 다한 건지, 발이 꼬인 건지 비가 고인 바닥에 그대로 넘어졌다.
그녀는 흙탕물을 뒤집어써도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사람은 성진이 아니었다.
뿌예진 두 눈은 이제 확실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쏴아아아.
툭.
투두두둑.
투두두두두두.
비가 내리는 소리가 아니다.
우산이 비를 막는 소리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넘어진 자세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다.
성진이 정장을 입은 차림으로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어 그녀에게 쏟아지는 비를 막았고, 다른 한 손에는 구두로 보이는 쇼핑백과 튤립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빛을 잃었다.
성진에게서 신아름으로 옮겨진 우산 때문에 비에 젖었으니까.
“왜…… 왜…….”
“…….”
“말도 없이 사라져, 이 자식아!”
“일찍 올 줄 모르고…….”
신아름은 그를 격하게 껴안았다.
비에 흠뻑 젖은 그녀였지만 성진은 그녀를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뒤로 돌았다.
신아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멀쩡했을 때 종종 했던 행동이니까.
말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너무 큰 등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꼭 이 세상의 모든 부정한 것들을 막아줄 것만 같았다.
“……온 거야?”
“응.”
“이제…… 어디 안 가는 거지?”
“……응.”
“기다렸어…….”
“고마워. 이제 기다리지 마.”
신아름이 성진의 우산을 대신 들었다.
투두두두.
이미 젖을 대로 젖은 그들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 자신들의 관계일 거라 생각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고난을 이겨 내며 견뎌 온 것.
그 오랜 시간이 지나 신아름과 성진은 마침내 보상 받았다.
성진은 그녀를 업고도 가뿐하게 걸었다.
그렇게 둘은 걸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