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176화
전투원들이 떠난 스칸다의 세계는 황량했다.
스칸다에 퍼지던 회색빛 종말은 성검회가 차원 문을 넘자 급속도로 범위를 넓혀 갔다.
“무, 무서워요.”
“괜찮아. 엄마가 옆에 있잖아.”
“다들 어디 간 거예요?”
“응, 다들 멀리. 아주 멀리 갔어.”
“왜요? 왜 우리를 두고 간 거예요?”
“우리는 싸울 수 없어서야.”
“난 싸울 수 있어요! 알통도 이만큼 있어요!”
아이의 엄마는 그 모습이 귀여운지 아이의 볼을 꼬집었다.
“아야!”
“아빠가 말해 주지 않았어? 약한 존재가 강한 존재와 싸울 때 필요한 3가지!”
“말해 줬어요! 어…… 용기 그리고 또…… 힘! 어…… 마지막은 뭐였더라?”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이유. 싸워야 하는 이유.”
“아, 맞아요! 그거였어요! 이유!”
“아빠에게는 시원이랑 엄마가 이유인 거야. 그러니까 3명분의 힘을 내서 싸우러 간 거고.”
“그렇구나! 힘드실 거예요. 으…… 시원이는 아빠 없으면 심심한데…….”
“아빠가 가기 전에 약속했잖아. 시원이 데리고 돌아가기로. 돌아가서 시원이가 좋아하는 거 다 해 주겠다고 했잖아.”
“괜찮아요! 시원이는 그런 거 괜찮아요. 그냥 아빠가 보고 싶어요.”
“……엄마도.”
이유.
세상이 부딪히는 데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다.
스칸다가 멸망해야만 하는 이유.
반대로 스칸다가 무너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
“쿨럭……. 하아…… 하아…….”
“상태는 어떤가?”
“유리온 님…… 이분은 숨이 붙어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에요. 어떻게 이런 몸으로 모두를 저 너머에 보낸 건지…….”
“되었다. 내가 잠시 자리를 지킬 테니 너는 나가 보도록 하여라.”
“하지만…….”
“…….”
“알겠습니다. 문 앞에 대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다.”
유리온은 가만히 서서 이민상을 바라보았다.
숨을 헐떡이는 그에게 많은 시간이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아주 짧은 시간만이 그에게 남겨졌다.
“허억…… 하아…….”
“무엇을…… 무엇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순수여.”
“하아…… 하아…… 히히히…….”
“…….”
“유리온, 하아…… 기적이 온다는 것을 믿습니까?”
“기적?”
“나는 믿지 않았지요…… 또한, 오랜 세월 그것을 잊었어요.”
“…….”
“난 아주 오래전에…… 기적을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리온은 가만히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기침이 잦아들었는지 이민상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었지요. 아무 힘도, 지혜도 없는……. 어디에나 있는 소년.”
“…….”
“그런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은 어떤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초모입니까?”
“네, 그 사람은 아무도 믿지 않던 상황을 바꾸기 위해 몸부림쳤죠. 나는 그것을 비웃고 의심했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적은 옵니다. 내가 믿든 믿지 않든 그 남자가 가는 곳에는 항상 기적이 일어나요.”
유리온이 지켜본 초모도 그랬다.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뤄 내거나 늘 그의 주변이 그를 도왔다.
“그의 곁에 서고 싶어 이렇게 달려왔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무 빨리 달려왔나 보군요……. 저는 다시 또 그를 지켜볼 뿐입니다.”
“충분히 많은 힘이 되었을 겁니다.”
“그를…… 그를 믿습니다. 돌아와서 미소를 짓고 모든 일이 끝났다며 저를 일으켜 줄 것을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쿨럭!”
다시 이민상의 기침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말을 끝마칠 생각인지 계속해서 말했다.
“수고……했다고.”
“……꼭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 상관없더라도…… 그래서 믿을 겁니다.”
이민상은 약 기운에 취해 다시 잠이 들었다.
통증을 줄여 주는 약이었지만 그에게 별다른 효과를 가져다주진 못할 것이다.
그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믿는다…….”
유리온이 별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한차례, 나무를 눈여겨본 그가 나무에 빨려 들어갔다.
그도 믿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먼 곳으로 떠난 이들의 이유를 지킬 것이다.
우드드드득.
거대한 나무 장벽이 바스카리 인근의 터전까지 둘러쌌다.
다가온 회색 기운은 나무를 괴롭게 했지만, 그 영역을 넘지는 못했다.
악룡 니드호그와의 전투가 한창인 와중, 스칸다는 진정한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
“와아아아아!”
“지원군이 합류했다! 용을 쫓아!”
그 평원이다.
지혜의 샘에서 보았던 그 평원.
보았던 광경과 다른 점은 균열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수들이 없다는 점이고, 또 성검회의 몇몇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방인들…… 그리고 무지개 사원과 전쟁 병기가…….’
다른 것을 떠나서 전쟁 병기가 합류하지 못한 것은 큰일이었다.
모험가들과 산왕의 수하들의 외침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하는 소리였다.
전쟁 병기가 없으면, 용이 날아올랐을 때 성검회가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성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균열이 열렸다.
지지직.
지직.
거대한 균열을 천천히 넘어온 존재는 아군이 아니었다.
온갖 괴이한 마수들이 성검회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으로 균열이 열리고 있었다.
다만, 니드호그가 날아오르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아까 그 여인에게 당한 충격이 오래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성진이 신성력을 모아 일거에 터트렸다.
화아아아아!
한줄기 서광이 진영에 내리 앉으며 모두를 따사롭게 했다.
또한, 그들의 무장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게 했다.
그 모습이 꼭 질서정연한 신들의 군대 같아 보였다.
침묵하던 수뇌부가 소리쳤다.
“싸워라!”
“패배하면 내일은 없다!”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병사들은 그 외침에 귀가 멎을 것 같은 굉음으로 화답했다.
너무 큰 소리는 아예 없는 침묵과도 닮아 있었다.
귀가 먹먹해져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돌아가자!”
선두에 선 것은 성진 일행이었다.
니드호그가 아직 날아오르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이 전쟁 병기가 없더라도 타격을 줄 수 있는 기회라는 뜻이었다.
니드호그가 균열을 지켜보다 성진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온전한 하나의 눈이 분노를 담았다.
지이이이잉.
마법진이 평원에 그려지고 그곳에서 뼈로 이루어진 병사가 만들어졌다.
가가각.
용아병(龍牙兵)들이었다.
카앙!
“큭!”
“단단해요!”
성진 일행은 외침과는 달리 쾌속하게 전진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용의 이빨로 만들어진 용아병들은 그런 성진 일행이 주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화르르륵!
최별의 태양의 불꽃이 용아병들의 틈을 헤집었다.
용아병들은 불타오르며 일부가 녹아내렸지만, 자리를 비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공격에는 속수무책으로 나뒹굴었다.
우드드득.
콰직!
콰아앙!
갑자기 발밑에서 자라난 거대한 식물의 줄기들로 인해 용아병들은 중심을 잃고 흩어졌다.
가가각.
성진 일행은 이미 나무를 딛고 니드호그에게 향하고 있었다.
후욱.
니드호그가 콧김을 뿜자, 용아병들이 한데 뭉쳐 뼈의 창으로 변했다.
쒜에에엑!
그 창이 성진 일행에게 쏘아졌다.
혼자서는 그 창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몸을 뒤틀어 3명이 함께 창을 받아 냈다.
기기기긱.
뼈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 3자루의 검은 뼈를 두 동강 냈다.
곧바로 다시 니드호그를 추격하자 니드호그는 질렸다는 듯이 자신의 앞에 균열을 형성했다.
지지직.
균열을 넘어온 것은 거대한 손이었다.
콰지지지직!
거인의 손인 듯한 그 손은 성진 일행을 한 손에 쥐려 했지만, 3개의 검이 손가락에 이어 손목까지 자르자 난동을 부렸다.
콰아앙!
콰아아아앙!
갑자기 균열이 난동을 부리는 괴물의 팔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라졌다.
그 때문에 잘린 거인의 팔이 꿈틀거렸다.
“뛰어!”
일행은 지금 앞으로 뛰어가고 있으니 위로 뛰라는 말일 것이다.
성진은 의심하지 않고 일단 신형을 위로 띄웠다.
니드호그의 꼬리가 균열에 시야가 제한된 틈을 타서 휘어져 공격해 왔다.
다행히 높이 뛰어 꼬리를 피한 그들은 그대로 니드호그에게 떨어져 내렸다.
쩌정!
날아오는 마법을 쳐 낸 송하린과 일행은 이번 기회에 니드호그에게 큰 상처를 입히려 했다.
화염이 계속 쏟아졌기에 셋이 함께 움직였다.
검은 화염은 잠시라도 방심하면 몸을 순식간에 재로 만들 것처럼 보였다.
“저기!”
셋은 틈이라고 생각한 곳으로 돌진했다.
오른쪽 날갯죽지.
저곳을 끊어 내거나 큰 상처를 입힌다면 당분간 날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니드호그의 어깨에서 불쑥 사람의 모습을 한 뭔가가 튀어나왔다.
그자의 검은 손톱이 길게 자라더니 성진 일행의 검을 막았다.
카아앙!
카앙!
“크윽…….”
콰아아아앙!
“컥…….”
“으아악!”
성진 일행은 이어 가던 공세가 저지당하자 곧장 니드호그가 휘두른 날개에 휩쓸려 날아갔다.
그 뒤에는 작은 차원 문이 열려 그들을 맞이했다.
지지직.
쿵.
쿠웅!
날아가 몇 번 부딪힌 다음 그들이 떨어진 곳은 다시 전장이었다.
분명 니드호그와 손대면 닿을 듯한 거리까지 갔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다시 성검회 진영의 한가운데였다.
멀리서 니드호그가 조소하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가 안 돼.’
이민상이 왔다면 달랐을까?
아마 달랐을 것이다.
순수에 오른 그는 혼자서도 니드호그와 전면전을 벌일 수 있을 만큼 강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나이 든 몸이, 수명의 등불이 꺼져 가는 그 껍데기가 그를 이곳에 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를 대신해서 니드호그를 상대해야 했다.
“형님…… 옵니다.”
“불길이에요! 막아야 해요!”
성진 일행과 거리가 벌어진 니드호그가 거대한 불길을 준비했다.
죽음의 늪에서 맞섰던 불길보다 더 큰 힘이 담겼다는 것이 먼 거리임에도 느껴졌다.
‘막을 수 있을까?’
부정적인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우선 행동해야 할 때다.
성진 일행은 재빨리 진영의 전면에 서서 불길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곧, 니드호그의 입에서 불길이 토해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3자루의 검이 교차해 마찬가지로 검은 막을 형성했다.
하지만, 불안하게 흔들렸다.
지지지지지직!
“으으윽…….”
“힘이…….”
초인적인 힘을 지녔다지만, 그들도 결국 사람이었다.
니드호그와의 싸움이 지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벌써 몇 개의 차원을 넘나든 건지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지익…….
지지직.
디딘 곳이 파이며 발이 밀려났다.
잘못하다가 검은 불꽃에 휩쓸리면 모든 게 끝이었다.
‘못…… 버티겠어.’
그때, 진영 쪽에서 새로운 균열이 형성되었다.
니드호그는 불길을 내뿜는 와중이었기에, 아마도 그가 부린 수작은 아닐 것이다.
‘그럼 누구…….’
성진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모, 보조하겠다. 힘을 가다듬어라.”
카이.
용인 수도사 카이의 목소리였다.
카이는 아수라를 운용해 불길을 막는 셋의 호흡을 안정시켰다.
카이가 왔다는 것은, 다른 이들도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지개 사원의 홍예, 그리고 수도사들.
또.
이방인들.
“으아아아아!”
“힘을 합쳐!”
이방인들은 힘든 싸움을 벌였는지 목소리가 지쳐 있었다.
하지만 성진과 함께하자 금세 우렁찬 소리와 함께 전투를 보조하려 했다.
검은 불길을 막는 셋의 몸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이선익이 둘렀던 그 힘.
마침내, 니드호그의 불길이 멈췄다.
“허억…… 헉.”
“전선은?”
“…….”
성진이 거친 숨을 들이마실 때 카이가 물었다.
대답은 갱이 대신했다.
“다른 것도 문제지만 전쟁 병기가 단 하나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쪽에서는…….”
“우리 쪽에 있던 병기는 모두 부서졌다.”
“이런…….”
마력 폭탄을 사출할 방법도, 니드호그가 비행할 경우 견제할 방법도 없었다.
신관들과 마법사들이 니드호그의 마법을 전부 막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상황이 점점 최악으로 변해 갔다.
“힘을! 힘을 냅시다!”
“집에 돌아가자고 했잖아요!”
“스칸다를…… 스칸다를 지켜야 해요! 우리의 세계를!”
“나는 괜찮지만…… 우리 아이들은 아직 어려요!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고요!”
“으아아아아아아!”
그들의 열망만으로 상황을 뒤집을 순 없었다.
쏟아지는 마법과, 지금은 좀 줄어들었지만 계속 앞을 막는 마수들.
새로운 균열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지만, 지금 넘어온 마수들만으로도 성검회와 백중세였다.
전투는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성진 일행이 돌파를 시도하면 번번이 니드호그의 함정에 몸을 빼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거나 마수들에 둘러싸여 다시 튕겨 나왔다.
그동안 본진의 상황이 희망적일 리가 없었다.
이미 전투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꽤 되었고 마수들과의 전력 균형은 깨지려 했다.
“도, 도와줘! 누가 우리 좀…….”
마수에 둘러싸인 스칸다인들이 흐느꼈다.
지친 그들은 눈앞을 막은 마수를 넘어서 본진에 합류할 수 없었다.
부우웅!
“안 돼에!”
콰지익!
마수의 꼬리를 누군가 대신 막았다.
이마의 용 각인.
그들을 구한 건 이방인들이었다.
“물러나! 물러나라고!”
“가, 감사합니다!”
“빨리! 얼마 못 버텨!”
붉은 기운을 몸에 두른 이방인이 고슴도치를 닮은 불꽃의 마수를 상대했다.
하지만, 그도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푸슈슈!
가시가 사방으로 길게 뻗어 나가 모든 것을 꿰뚫었다.
“컥…… 커어억…….”
가시에 꿰뚫린 이방인의 눈이 시커멓게 죽었다.
그는 불꽃에 타오르며 중얼거렸다.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삶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가치였으나, 그것을 잃는 것은 누군가에겐 한순간이었다.
“빌어먹…… 커억!”
“디고어!”
“이…… 이…….”
콰직!
전투 중에 고립된 디고어가 마수의 이빨에 으깨졌다.
그의 찬란하던 갑옷은 한낱 마수의 먹잇감이 되었다.
디고어의 죽음만을 슬퍼할 순 없었다.
죽어 간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난쟁이 왕 소렌딜은 이미 한참 전에 마수의 뱃속으로 들어갔고 악전과 조청은 니드호그의 마법에 각자 머리와 가슴을 꿰뚫려 전사했다.
서로를 기억하는 이들이 하나둘 사라져갔다.
콰앙!
성진 일행이 다시 뒤로 튕겨져 나갔다.
여태 눈을 공격한 것 외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니드호그를 상대할 수는 있었지만, 그를 쓰러트릴 수는 없었다.
-열어 줘.
‘뭐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성진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지만 무시했다.
소리가 단발적으로 그쳤고 성진도 전투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절망은 언제나 예고치 않고 찾아오곤 했다.
꼭 지금처럼.
후우웅.
후우웅.
“안 돼…….”
“용이…… 떠오르잖아…….”
니드호그가 이들의 노력을 비웃는 듯이 날아올랐다.
전쟁 병기라도 있었다면 그를 저지할 수 있었겠지만, 전쟁 병기는 다른 차원에서 넘어 오지 못했고 있는 병기들도 속수무책으로 부서졌다.
조금 더 일찍 함께했다면.
조금만 더 일찍 모든 힘이 모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내가 더 강했다면…….’
절망은 사람을 책망하게 했다.
그것이 자신이든 누군가이든, 혹은 상황까지도.
대부분은 의미가 없는 책망으로 그치곤 했다.
‘끝이다.’
스칸다의 끝이 올 것이다.
우지직.
우직.
“커어억!”
“무슨…….”
“이게 무슨 힘이야!”
“크아아악!”
엄청난 마력이 전장에 뿜어졌다.
마력의 발원지는 니드호그.
하늘에서 지켜보던 그는 이번 수로 모든 것을 끝장낼 생각이었다.
그에게 지겹게 달라붙던 성진 일행도 바닥을 기었다.
그가 힘을 집중하자 모든 이가 바닥을 기었다.
균열은 어느새 전부 닫혀 있었고 마수들도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으니까.
한쪽 눈이 베여 제대로 힘을 집중할 수 없었고 시간도 오래 걸렸지만 그만큼 공을 들이면 될 일이었다.
그는 신이다.
반쪽짜리 인간들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고 지금껏 이들이 버틴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머리 위 허공에 검은 구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티끌만 한 크기였지만 점점 커져 머리만 해졌고 계속해서 커졌다.
니드호그의 눈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칸다의 전사들은 짓이겨져 그의 눈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
니드호그가 힘을 집중하며 검은 공의 크기를 키워 나갈 때, 지혜의 고리의 카이덴은 다른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고.
마력 폭탄을 터트릴 상황은 지금이라고.
저 힘이 통제를 잃는다면 니드호그도 무사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마력 폭탄은 지금도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지척에 있었지만, 그것을 점화할 방법이 없었다.
마력 폭탄은 마력으로 점화된다.
그것도 꽤 많은 마력을 필요로 했다.
분명, 점화 장치는 사출 장치와 함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카이덴과 지혜의 고리는 좌절했다.
마지막 희망의 불씨도 꺼지고 말았으니까
그런데, 돌연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카이덴의 눈에서 다시금 희망이 깃들었다.
그는 광소했다.
“흐하하하하하하! 흐하하하!”
“카……이덴…….”
“시리카! 시리카의 말이 그 뜻이었구나!”
“시리카? ……맙소사.”
“너는 이 할아비를 끝까지 믿고 있었구나! 장하다!”
다섯 노인은 카이덴이 요즘 시리카의 꿈을 꾼다며 늘어놓던 헛소리를 기억했다.
이미 죽어 하얀 백골이 된 그 아이는, 지하에서 썩어 가며 카이덴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괜찮다! 괜찮아!”
-그날이 오면……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친구들은 재가 되어요.
“그것도 괜찮지!”
“아무렴.”
“좋아.”
노인들은 바닥에 붙어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하늘을 보고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달싹였다.
단 한 줌도 움직이지 않던 마력이 카이덴을 시작으로 노인들의 몸을 회전했다.
속도는 순식간에 빨라졌고 마침내 통제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맙구나, 시리카. 지금 가마.”
스르륵.
그들이 구사한 최후의 마법.
지혜의 고리.
체내의 마력을 태워 순수한 마력으로 변환하는 것.
커다란 고리가 된 그들이 마력 폭탄을 감쌌다.
마력 폭탄의 표면에 기이한 문양이 떠올랐다.
기이이이이잉!
마력 폭탄 점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마력 폭탄을 점화하는 것은 지혜의 고리가 완수했다.
그들은 이 폭탄이 어떻게 니드호그에게 날아갈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움직여! 제발!”
“으아아아아! 움직여야 해!”
째깍째깍, 시간이 갔다.
이제 곧 검은 공이 그들에게 떨어질 것이다.
모두가 좌절한 그때, 성진이 움직였다.
그의 머리에 계속해서 들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열어! 열라고!
그가 손을 뻗었다.
지지지지직!
막대한 신성력을 빨아들인 차원 문.
하지만 불안정한 파장 때문인지 차원 문은 아주 작게 열렸다.
그곳에서 불쑥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용의 머리.
모두 저 머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세게이아의 머리다.
차원 문을 비집고 들어온 큰 도마뱀은 점화된 마력 폭탄을 덥석 물고 하늘로 날았다.
용의 권능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용뿐이었다.
큰 도마뱀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았다.
기체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게릭의 목소리였다.
-신이시여, 당신의 이유 있는 섭리는 우리의 이유 없는 삶을 막을 수 없습니다.
게릭이 했던 말이 성진의 머리에서 맴돌았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할 일을.
스칸다가 점지한 게릭의 미래는 이것이었다.
-스칸다여, 당신의 땅에서 난 종이 이렇게 하늘에서 잠듭니다. 이것이 내가 본 미래…….
“게릭!”
“제바알!”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게릭의 목이 압력에 찌부러졌다.
그와 동시에 게릭의 마지막 말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영원하라, 스칸다여!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귀가 찢어지는 듯한 소음이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침묵을 만들어 냈다.
휘오오오오오오오!
마력 폭탄과 니드호그의 검은 힘이 충돌한 곳에서 막대한 인력이 작용하여 니드호그를 빨아들였다.
그의 힘을 이어받은 마수들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사람들이 충격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니드호그가 사라진 균열로 몇몇이 뛰어들었다.
많은 이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 낸 마지막 기회, 성진 일행은 아직도 검을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