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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174화 (174/222)

# 174

174화

***

디스토피아는 한 차례 몸살을 앓았다.

디스토피아를 비롯한 웹사이트뿐만 아니라 데자뷰와 관련된 미로 채널, 혹은 미로의 공식 홈페이지와 데자뷰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그 전염병은 계속 퍼져 나갔다.

[제목 : 돈 좀 벌었다 이거지?]

돈 좀 벌었으니까 우리 무시하는 거잖아? 맞지? 너희끼리만 지금 보는 거 아니야! 너희끼리만 초모 방송 보고 시시덕거리는 거잖아. ㅠㅠ

왜 나 몰래 단톡 방 파는 거야.

-아아…… 그에게 이것은 기억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살인’이나 다름없지. 그에게 있어서는 말이야.

-초중고 줄곧 찐따였던 그는 근거리에서 귓속말을 하는 친구가 있으면 불안해진다.

[제목 : 이거 그거 아니냐, 설마?]

커스터마이징을 했겠지만, 적당히 생긴 남자.

그리고 커스터마이징 안 해도 우러러볼 여자 둘.

선남선녀.

게임 끝났지.

마치 장미의 전쟁 같은 산장 고백 신이 이어지며 그들은 맹렬한 포옹을 했다.

-3명이서?

-선생님께서는 사상이 매우 불순하시군요.

-일단 더러우니 서에 가서 마저 얘기하시죠.

[제목 : 초모가 여자들한테 인기 많다고 착각하는 애들은 진짜 뭘 모르는 거다.]

저딴 목석이 인기 많기는 개뿔.

자고로 여자한테 인기 많기 위해서는 나 같이 핸섬하고 스윗해야 한다.

맞아, 나처럼.

-이건 또 뭔 컨셉이야. 디토가 불안하니 별 그지 같은 ㅋㅋㅋ

-선생님께서는 여심 사냥꾼이셨군요.

-이런 헌터였잖아?

-러브 헌터라니; SSS급이셨겠죠?

-말투로 짐작을 해 보면 정말 사냥꾼이신 것 같습니다. 혹시 엽총을 사용하신 겁니까?

[제목 : 답답하기는 이 사태에 대해서 오피셜 알려 준다. 출처도 댓글에 쓰겠음.]

원래 초모가 데자뷰 스폰 받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맞는 말이지. 실제로 초모는 데자뷰에 대한 안 좋은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예? 예까지 들어야 한다면 왕이나 음탕 시초의 유적 방송 때다. 그때 미로가 끊겨서 방송에 지장을 줬음에도 하하호호 웃으며 마무리가 되었다.

활불이 아닌 이상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당연히 ‘아, 일 뭣같이 하네.’ 한마디 정도는 해 줘야 국룰이잖아? 근데 안 했으니 스폰 빼박이지.

그럼 이 사태에 대해서는…… 부장님 지나간다. 노인네 힘도 좋아. 잠시만…… 다음 편에서 얘기해 줌.

-올, 설득력이…… 있어!

-어이, 잡았다고! 도둑놈 새끼 ㅋㅋㅋ 월급을 훔치는 정의로운 도둑이여.

-아 현기증 나니까 빨리 다음 편 달라고요. ㅡㅡ

[제목 : 나, 복귀. 오피셜 2편 쓸게.]

부장 시발 점심 또 순댓국 가자네.

맨날 순댓국이야, 그러니 살이 찌지.

아, 미니 편육 시켜 줄라나? 그럼 ㅇㅈ인데.

아무튼. 초모의 스폰서인 데자뷰가 요즘 초모 길들이기에 나섰다는 소식이 있다.

왜? 간단하거든. 게임이 인기 많은 거는 알겠는데 그 인기를 웬 부하 직원 1명이 누리고 앉아 있는 거야.

얼탱이 없잖아?

연예인이 활동하는데 매니저가 뜨고 지랄이라는 거지?

가수가 노래를 불렀는데 코러스가 떴다는 말이야.

배알이 꼴려~ 안 꼴려?

당연히 머기업 꼰대 마인드로는 영~ 아니 꼽다 이 말이지. 일단 윗선까지 갈 필요 없이 컨텐츠 생산 부서쯤 되는 곳에서 팀장급이 얘기했겠지.

‘얘 계속 써야 하나?’

‘아, 그럼 어떻게…….’

‘몇 번 흔들고 비율 후려쳐. 싫다고 하면 끊어 버리고.’

자, 이제 알겠지?

넌 뒤에 가려진 거대한 음모를 알게 되었다.

-출처 밝힌다매; 뭔 오피셜이야?

-출처(내 머릿속)

-이 새끼 미친놈이네.

-드라마 존나 봤어 이 새끼. ㅋㅋㅋㅋ

-아 전신 거울 보면서 저거 대사 미리 뱉어 봤을 거 상상하니까 윽웩. ㅋㅋㅋ

[제목 : 님들 종린이이자 스린이인데 궁금한 게 있ㅅ어여.]

님들이 막 빠는 게 초모랑 올빼미잖아요?

그럼 둘이 싸우면 누가 이겨요?

-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구만.

-참신한 생각이야.

-글쎄 막상막하라…….

-초모가 이기거나 올빼미가 이기지 않을까?

[제목 : 야, 그래서 그 노인이 누군데?]

거기서 영상 끊기고 방송 안 나온 지 지금 시간이;;

진짜 납치당해서 멘탈 번 당한 거 아니야?

아니, 하루 이틀이어야 그냥 그런갑다 하지 무슨 몇 주 째야;;

등불들은 휴머노이드랑 광주 올라가고 있던데;

-그 노인 정체 추측 글 계속 올라오던데 영양가 없자너.

-예언자 미래에서 온 초모 아니었음? ㅋㅋㅋ

-영화들 좀 그만 보라고. ㅡㅡ

[제목 : 봐라 이 새끼들아. 그 노인은 바로.]

초모의 고모부 되시는 분이다.

출처 밝힌다.

출처(내 머릿속)

-초모 : 아; 고모부;; 방송 중인데 말도 없이 나오시면 어떡해요?

-고모부 : 이거 봐라, 초모야. 뭔데 막 다들 글을 쓰고 그런 거냐? 요즘 세상은 뭐가 뭔지…….

-아, 좀 가.ㅋㅋㅋ

-내 머릿속의 출처 빌런 또 왔네. ㅋㅋㅋ

[제목 : 아니 시발ㄴ련들아 내 말이 맞다니까]

종말 이후고 이 세계 스칸다고 전부 데자뷰의 농간이라니까? 그냥 현실 세계야! 리얼이라고!

답답해 진짜!

-아무래도 가망이 없습니다. 이자는 돼지 사료로 써야겠군요.

-종말 아트 온라인 ㅋㅋㅋㅋ 저 새끼집에 백퍼 아스나 피규어 있다.

-아스나가 뭐임? 일반인들은 그런 거 모르는데 윗댓 같은 종자인 듯. ㅋㅋ

-테메에에엣! 어찌 알았냐?

-망상도 병이야, 병 어휴 ㅋ 밖에 나가서 대화를 좀 해라. 골목길이라도 걸어야 식빵 물고 뛰어오는 여고생이랑 부딪히지.

-라는 내용의 미연시를 찾습니다.

사람들의 문의 세례에도 데자뷰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시청자들은 그런 그들의 태도에 처음에는 격분했으나 점차 식어 갔다.

멀어지면 잊히는 법이니까.

정말 골수팬들은 아직도 데자뷰와 초모의 해명을 기다렸다.

몇 주째 방송이 중단된 사태에 대해서.

그런데, 어느 주말의 이른 새벽.

누군가 글을 올렸다.

[제목 : 님두라, 초모 방송 켰어옄ㅋㅋㅋ]

이게 을마만이냐? 나님 행복해서 죽어!!!

-이 새끼 말 믿지 마셈. ㅋㅋ 내 머릿속 출처 빌런임.

-진짜라고 ㅡㅡ 아 늑대가 낙타낳다 당했네.

-어? 진짜다? 진짜 켰다!!!

-헐 ㄹㅇ이네 바로 간다. ㅋㅋ

***

성진이 바스카리에서부터 쭉 펼쳐진 임야를 바라봤다.

스칸다의 모든 이가 모인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운 인원을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초모 ㅠㅠ 왜 이제야 왔서. ㅠㅠ

-아니 그래서 할아버지 누구였는데.

-로또 번호 불러주는 조상님이었답니다.

-구라치지 말고, 아.

-님들 해명방송 했나요?

-네, 평상시와 다름없이 켜서 그냥 채팅창 신경 안 쓰던데요?

-ㄹㅇ 초모 당했네.

-개돼지들아, 이대로 물러나면 우리는 진정 개돼지가 된다! 어서 진상을 촉구해야지!

-응, 우리 개돼지 맞아.

-앗, 소까? 와타시 깜빡했네. 엣큥!

-오자마자 바로 전쟁이라고?

난쟁이 중, 장인 조합의 대표라 알린 이가 차례차례 전쟁 병기를 설명했다.

“장시간 구동하기에는 무리지만, 잠깐 동안은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화력입니다. 이번 싸움에서 져서는 안 되니까요.”

“…….”

성진 일행은 늘어선 전쟁 병기에 시선을 주다가 고개를 돌려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회의장에는 전보다 많은 인원이 자리했는데 그사이 성검회의 규모가 훨씬 커진 것 같았다.

성진 일행이 자리에 앉자 회의가 시작됐다.

성진이 먼저 누군가를 맞이했다.

“유리온 님.”

“초모, 오랜만이군.”

“자리를 비우셔도 괜찮습니까?”

“요정이 있는 곳이 내가 있을 곳이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숲에 있는 것을 고수하면 모두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일세.”

이전 회의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아예 참여하지 않았던 종족들이 이번 회의에 대거 참여했다.

대표적인 것이 용인들이었다.

“초모여, 일족을 대표하여 당신의 용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제각기 종말에 맞서 쓰러졌겠지요.”

“용의 고원에도 종말의 여파가 미쳤습니까?”

“대륙의 말단은 상황이 심각합니다. 이미 균열은 손쓸 수 없이 생성되었고 피해는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렇군요.”

“근원을 제거하는 데에 우리가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큰 힘이 될 겁니다.”

“아…… 그리고 저희만 온 것이 아닙니다.”

“또 누가 왔나요?”

용인 주술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게릭이…… 왔습니다.”

“같이 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먼저 와 계시더군요. 근데 이상한 발명품과 함께 오셨습니다.”

“그런가요?”

“자신은 마지막 고대 난쟁이로서 모두의 영웅이 될 것이니 그렇게 알라고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또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혜의 고리 소속 카이덴이 성진에게 보고했다.

“이번에, 창고에서 아껴 둔 물건을 꺼내왔는데…… 부탁이 있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물건이라뇨?”

“마력 폭탄이야. 제각기 품은 힘이 막강하지만, 이번 교전을 위해 변형을 가했어.”

“변형요?”

“우리가 보유했던 마력 폭탄은 총 3개. 단순하게 화력 확산형 폭탄이었지. 파괴력은 엄청나지만, 그 파괴력이 한정적이었어.”

“무슨 소리죠? 파괴력이 한정적이었다니.”

“고위 종에게는 딱히 신통하지 않다는 거지. 그들은 이런 단순 화력에는 내성이 있으니까.”

“이번 전투에서는 나눠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야. 분명 살상 반경도 훌륭하고 마수의 수를 줄이기에도 탁월한 선택이니까.”

“그런데…… 왜…….”

카이덴이 시선을 이리저리 다른 곳에 두었다가 다시 성진을 보았다.

“이 싸움은 마수들을 궤멸시킬 수도 없고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야.”

“…….”

“다 들었네. 진짜 용과 싸우는 거잖나?”

“네, 맞습니다.”

“순수에 오른 분이 한 말이니 거짓은 없겠지. 용과 싸우는 것이 고작 이방인 셋이라니…… 이기기 힘들 거야. 폭탄에 변형을 가한 것은 그 때문이야.”

“폭탄이 정확히 어떻게 바뀐 겁니까?”

“간단해, 전에는 마력을 화력으로 전환했다면, 이번엔 그냥 마력이야.”

“마력만을 방출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때문에, 살상력은 대폭 줄어들었지. 마력 감응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폭탄이 터지더라도 별다른 피해가 없을 거야.”

-왜 폭탄 화력을 줄이는데?

-화력은 다다익선 아니었어?

-화력 -> 마력으로 바꿨다는 게 중요한 것 같은데; 뭔가 목적이 있지 않을까?

카이덴이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그가 세세하게 설명을 해야 회의장에 모인 이들이 알아들을 것 같았다.

“이걸 용에게 사용할 생각이야.”

“용에게?”

“진짜 용은 마력의 정점이라고 하지 않나. 뭔가 흉측한 짓을 하려고 하면 우리는 막을 방법이 없어. 하지만, 이 폭탄이라면 다르지.”

“마력 작용을 방해하는군요.”

“바로 그거야! 또한, 마력 감응력이 뛰어난 니드호그라면, 어느 정도 피해가 있지 않을까 싶네.”

“……확실히. 그런데 부탁은 무엇이죠?”

“이것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으로 남겨 주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정확하게 언제 터트려야 할지는 우리가 정하게 해 달라는 말이야. 아무리 아군에게 피해를 줄 확률이 낮다지만 정확한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건 우리뿐이니까.”

성진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의 병기이니 그들에게 맡겨도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고맙네.”

이후에, 다른 수장들과 함께 병력 편성을 마쳤다.

교단에 합류한 지 오래되지 않은 이방인들은 스칸다인과 섞이기 싫어했고 그 때문에 그들은 다른 종족들의 배려를 받아 편성되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감정이란 것이 하루아침에 휙휙 바뀌기도 하지만, 몇십 년이 지나도 단단히 굳어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었으니까.

성진이 늘어진 회의의 분위기를 환기하며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게 남았습니다.”

“뭔가?”

“뭐죠?”

“전투원들이 질투의 샘에 당도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이곳에 남겨집니다.”

“그렇지. 모든 이들을 데리고 가면 오히려 효율이 떨어지니까.”

“그렇다면 사실상 바스카리와 이 주변 마을까지 사람들로 빽빽해질 텐데 우리가 없는 사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곳에도 균열이 발생하거나 한다는 건가?”

“균열보다 더 큰 위협일 수도 있죠.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남은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거군. 하지만 홀로 남는다고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어. 결국, 필연적으로 부대의 일부를 남겨야 한다는 걸세. 또, 그렇게 된다면 전력이 약화될 것은 자명하고.”

그때, 줄곧 조용히 있던 유리온이 담담히 말을 꺼냈다.

“내가 남겠네.”

“유리온?”

“나 혼자 이곳에서 사람들을 지키겠네.”

“……그게 가능한 겁니까?”

“내가 가진 힘은 주위의 생명력을 끌어다 사용하지. 아직, 바스카리에는 생명력이 충만하니 나 혼자서도 많은 이들을 지킬 수 있을 거야.”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유리온이 남아 준다면 걱정할 것 없겠지!”

이렇게 싸울 이들과 남을 이들이 정해졌다.

남을 이들은 유리온과 그리고 싸우지 못하는 이들.

싸울 이들은 나머지 전부.

이들은 자잘한 일정을 조정하고 합동 군사 훈련을 마친 다음 출발할 것이다.

***

“게릭.”

“푸히히히히! 오랜만이야, 초모!”

“오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나한테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바쁠 텐데 말이야.”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났잖습니까. 이게 그 발명품입니까?”

“응? 아, 응. 태워 줄까?”

“괜찮습니다.”

“보기엔 이래도 썩 괜찮아!”

그의 발명품은 세게이아를 흉내 낸 몸체와 조잡한 외관을 한 비행체였다.

“어떻게 움직이는 겁니까, 마석입니까?”

“마석 같은 걸 뭐 하러 쓰나. 세게이아의 심장이 있는데.”

“원시용의 심장과 날개를 이용했으니 하기야 필요 없긴 하겠네요.”

“위대한 발명이지! 예언을 실행할…….”

“예언?”

-키 작은 땅의 아이야, 너에게도 쓰임이 있으리라.

분명 별의 용광로에서 스칸다가 얘기했던 내용이었다.

게릭은 그 예언을 실행하기 위해 이 발명품을 만들었다고 했고.

“게릭, 혹시 예언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없어. 앞날이 바뀌거든.”

“……그렇군요.”

“초모, 모든 걸 알고 싶어?”

“모든 걸 알 수 있습니까?”

“아니! 신도 아닌데 어떻게 그러겠나. 중요한 건 모든 걸 알 필요가 없다는 거야.”

“왜죠?”

게릭의 이상한 화법에는 성진도 말려들기 일쑤였다.

이번에도 그랬다.

“각자가 자신의 할 일만 해내면 돼. 우리는 그렇게 종말을 극복할 수 있을 거야.”

“그 할 일이란 게 무척 힘이 들지도 모르잖습니까?”

“푸히히히! 알 게 뭐야! 제 놈 복이지! 아무튼, 내 할 일까지 초모가 알 필요는 없다는 거야! 이미 가뜩이나 많은 일을 하고 있잖아?”

“……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할 일을!”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할 일을…….”

“그래, 그거면 돼.”

한쪽 눈이 텅 빈 게릭은 그렇게 웃으며 물러갔다.

성진도 게릭의 발명품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떴다.

발명품의 이름은 ‘큰 도마뱀’.

탄타르빌과 얽힌 원한이 그런 추레한 이름을 갖게 했다.

***

-시간이 흘렀다리또.

-어제 퇴사했다. 나는, 초월체가 되었다.

-어이! 스칸다 종말 대전 보려고 초월체가 되어 버린 거냐고. ㅋㅋㅋ

-이것이 4or2의 삶이다!

-4or2가 뭔데?

-사나이.

-ㅋㅋㅋㅋㅋ

종말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 오늘 시작될 것이다.

짧은 시간, 모든 전력을 동원해 상대를 쓰러트린다면 승리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패배할 것이다.

물론 패배의 대가는 종말이었다.

“유리온, 부탁합니다.”

“언제까지고, 그대들의 승리를 기다리겠네.”

유리온이 바스카리에서 자라고 있는 별나무에 스며들었다.

곧 그의 의식이 사람들이 머무는 땅과 동화되었다.

당분간은 어떤 위험이 오더라도 그의 힘이 그들을 지킬 것이다.

갱이 성검회 수뇌부에 가까이 다가왔다.

“모셔왔습니다.”

“…….”

갱과 함께 온 것은 이민상이었다.

이민상은 며칠 전 보았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앞으로 한 달만 더 지났으면 좌표가 소멸할 뻔했어요.”

“그래? 다행이다.”

-엥? 누구랑 닮았는데.

-누구지? 그…… 걔 누구냐 부산에서 걔.

-갈매기?

-돼지국밥?

-해운대?

-아니, 새끼들아.

-이민상.

-맞아, 이민상 닮은 듯?

-헐;; 진짜로 이민상 같은데?

-닮은 거지 뭔 ㅋㅋ 이민상이 초모보다 어린 데 뭔 헛소리야.

-한약을 잘못 처먹었나 보지.

이민상이 성진 일행에게 당부했다.

“저도 이 끝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는 알지 못해요. 막연히 그곳에 니드호그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

“잊지 마세요. 정기신이 균형을 이루면 무한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상대는 그런 존재예요. 셋이 잠시라도 니드호그를 막지 못하면 같이 간 사람들은 모두 죽을 거예요.”

“……알았어.”

“이곳에서…… 기다릴게요.”

“응, 금방 올게.”

이민상은 성진의 대답에 피식 웃고 손을 뻗었다.

성진은 그의 손바닥과 자신의 손바닥을 마주했다.

성진이 정신을 집중하자, 온 천지가 진동했다.

그그그그긍.

콰르릉.

콰르르릉.

밝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벼락을 쏟아 냈다.

이민상의 몸이 서서히 변해 갔다.

콰르릉!

“마, 맙소사…….”

“무슨 힘이…….”

이민상의 힘을 처음 목격한 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가 곧,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콰르르릉!

그들의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쳤다.

성진도 고통에 겨운지 식은땀을 흘리다가 결국, 비명을 토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콰직!

콰지지직!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소리만 들릴 뿐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끄아아아아아아아!”

꽈지지지지지직!

콰지지직!

콰르릉!

마침내, 소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쿠와아아아아아아!

거대한 균열이 열렸다.

난생처음 보는 크기의 균열에 모두 입을 벌렸다.

성진과 이민상은 땅에 널브러져 숨을 헉헉거렸다.

“하아…… 하아…….”

“크으윽…….”

이민상은 재빨리 다른 사람들이 데리고 자리를 떴고 성진은 조금 지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을 가다듬은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출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그들을 통제하는 수뇌부는 일제히 명령을 내렸다.

“성검회! 출진하라!”

“출진! 출진이다!”

“열을 지켜라! 전부가 걸린 싸움이다!”

잠시 후, 그들을 전부 삼킨 균열은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연출 지려서 내 팬티에도 지렸다.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ㅋㅋ- 님들 과몰입 금지염. ㅎㅎ

-않이 스트리머가 몰입하는데 어찌 시청자가 몰입하지 않나요. ㅡㅡ

-조용해라. 방장! 팔로워 24개월 채팅으로 돌려!!!

-초모가 24개월 방송을 안 했는데 어떻게 24개월을 해.

***

철퍽.

성진이 정신을 차린 장소는 습기가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이 온통 늪지였으니까.

주변에서 올라오는 독기에 자연적으로 신성력이 반응한 것 같았다.

신성력이 깨어나니 성진도 깨어난 것.

“으웩…… 양말 젖는 거 제일 싫은데.”

“조용히 좀 해요!”

송하린과 최별의 목소리였다.

그들도 같은 장소에 떨어진 것 같았다.

“어?”

“형님!”

“다들 여기 계셨군요. 다행입니다.”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요?”

“전부 따로 떨어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곳에 떨어진 건 우리뿐인 것 같습니다.”

“불행일까요, 다행일까요.”

“그 중간쯤 어디로 합시다.”

성진이 주변을 하나하나 살피며 조심히 이동했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늪도 성진 일행을 어쩌지 못했다.

그들은 물 위에서 걷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고 자꾸만 발이 빠지는 늪일지라도 평지처럼 걸을 수 있었다.

철퍽.

철퍽.

불쾌한 소리만 가득한 가운데, 그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움직였다.

최별이 움찔했다.

“느껴져요?”

“……네.”

“느껴지는구려…….”

쿠르르.

쿠르르르.

꾸드덕.

꾸드덕.

이상한 소리가 계속해서 났다.

부그르.

늪에서는 애매한 온도의 기포가 터졌고 거무튀튀한 색이었다.

그 수면을 내려다보는데, 너무도 깊어 아득하게 느껴졌다.

“어?”

“쉿…….”

“뿌리네요.”

어떤 나무의 뿌리.

죽음의 늪에서 처음 보는 생명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뿌리는 검게 변해 있는데, 아마 속을 까뒤집어 봐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도 약동하는 생명이 느껴지는 것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설마, 세계수?”

“그런 것…… 같네요.”

쿠르르릉.

“뭐, 뭔 소리죠?”

“뭔가가…… 수면 밑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성진이 조용히 말했다.

“대비하세요…….”

촤르르륵.

맞은편의 거대한 진흙더미가 꿈틀거리더니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진흙더미보다 몇 배는 거대한 존재였는데,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확인이 안 되었다.

하지만, 곧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존재는 눈꺼풀과 머리의 일체였다.

눈꺼풀이 열리자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동자는 잠시 무언가를 찾았다.

뒤루룩.

그들은 눈동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동자는 이제 정확히 성진 일행을 보고 있었다.

성진이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스릉.

스릉.

스릉.

3개의 검이 연달아 뽑히자 용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그리고 늪의 주인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칠흑 같은 색의 거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올라가는 눈높이에 일행이 당혹스러워 탄성을 터트리기도 전에 용이 콧김을 내뿜었다.

콰아아아아아!

엄청난 풍압에 복장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아무도 눈을 감지 않았다.

성진이 나직이 읊조렸다.

“……너구나.”

죽음의 늪의 주인.

뿌리를 갉아 먹는 용.

악룡(惡龍) 니드호그도 성진과 같은 말을 눈빛으로 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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