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172화
***
손을 잡을 걸.
그 손을 잡았어야 했는데.
“끄아아아아악!”
이민상은 세종시에 진입하는 순간 몸이 떠올라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당시의 기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화장실의 배수구로 회오리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몸이 산 채로 조각조각 분해되었다가 다시 맞춰지는 느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으…… 으으…….”
이민상은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삑.
삐익.
슈트는 제 기능을 못 하게 됐는지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뭐야, 진짜…….”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이민상은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그가 지금 도착한 곳은 애초에 진입한 세종시와는 아예 다른 세계임이 분명했다.
크르르…….
그리고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은 이상한 숲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몬스터 무리를 마주한 상황이었다.
본체는 늑대의 모습을 한 반면 꼬리는 뱀의 머리가 달린 몬스터.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파지직!
이민상은 재빨리 플라즈마 펄스를 일으켰다.
이 힘마저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가 손을 흔들자 어느새 그의 양손에 단검이 쥐어졌다.
세부적인 기능은 작동하지 않더라도 손에 익은 병기라 지금 상황에서는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크와아아악!
파지직!
뇌전을 일으킨 그의 단검이 덤벼드는 몬스터의 배를 깔끔하게 갈랐다.
파슉!
케에엥!
단말마와 함께 내장을 쏟아 낸 늑대형 몬스터들은 이민상의 저항에 순간 움찔해서 곧바로 덤벼들지 못했다.
그는 자세를 낮추고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했다.
“착하지…… 그냥 가자, 제발.”
푸슉!
서걱!
크르르.
동료를 수차례 잃은 몬스터들은 이민상을 흘깃거리며 빙빙 돌다가 결국 도주했다.
“휴우…….”
이민상은 온몸이 뻐근했다.
전신의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
그는 꿈에도 몰랐다.
그가 지금 막 도착한 곳이 스칸다라고 불리는 대륙이라는 걸.
또한, 그는 몰랐다.
그가 함께 온 일행과는 다른 시간대에 떨어졌고 이 시대의 스칸다는 매우 혼란한 시기라는 것을.
이민상은 숲의 주변에서 사람이 사는 흔적을 발견하고 접근했다.
그는 잔뜩 경계하는 주민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네? 한국이 아니라고요?”
“한국? 우리는 모르는 곳이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어쩐지 주민들의 생김새도 특이했다.
처음에는 외국인인가 했지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여기는 어디야?’
“이곳을 따로 부르는 명칭이 있습니까?”
“스칸다.”
“네?”
“스칸다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세계죠.”
“아…… 스칸다. 근데 근방에 늑대를 닮은 몬스터가 있던데…….”
“설마 마주친 겁니까?”
“네, 다행히 감당할 만한 수여서 어느 정도는 처리했지만, 밤중에 습격해 오면 조금 골치가 아플 것 같네요.”
“스, 슬랩쳐 무리를요?”
“슬랩쳐라고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꼬리에 뱀이…….”
“네! 맞습니다, 슬랩쳐! 안 그래도 골치가 아파서 협회에 의뢰하긴 했는데, 혹시 파견된 모험가신가요?”
“모험가요? 아, 아뇨…… 저는…….”
“당장 버섯 농장도 점령을 당해 나가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이민상은 주민의 부탁에 잠시 얼이 빠졌지만, 계속해서 들었다.
“잠자리는…….”
“일을 처리하시는 동안 숙식은 저희가 제공하겠습니다!”
“혹시 여기는 경제활동은 어떻게…….”
“당연히 사례금도 지급해야죠! 아…… 그런데 많이는 못 드리는데…… 협회에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금액만으로도…….”
“저야 조금만 있으면 됩니다. 여기서 중심지까지 갈 만한 교통비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네.”
짚단을 묶어 만든 침대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벌레가 좀 많기는 했지만, 참을 만했다.
‘생각만 해서는 아무것도 안 돼.’
올빼미.
그에게서 배운 행동 강령이다.
우선, 행동해라.
그러면 뭔가가 바뀔 것이다.
물론, 그가 실제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제자는 개미를 보고도 제국을 떠올리는 법.
“일단 자자!”
이민상은 낙천적이었다.
다음 날, 이민상은 마을의 거주민 1명이 건넨 약도를 건네받고 버섯 농장으로 갔다.
역시나 거주민이 말한 것처럼 그곳엔 슬랩쳐가 바글바글했다.
그는 그가 가진 힘을 이용해서 가뿐하게 슬랩쳐 무리를 퇴치했다.
키에엥.
하지만, 무리가 이것으로 끝이 아닐 수도 있었기 때문에 당분간은 이곳에서 머물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며칠 뒤, 모험가 협회에서 파견 나온 모험가들이 버섯 농장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슬랩쳐가 말끔하게 정리된 후였다.
“뭐, 뭐야?”
커다란 활을 들쳐 멘 요정이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해 보였다.
반면, 덩치에 맞지 않는 큰 방패를 쓰는 사내는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이민상에게 함께 협회로 향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민상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서부 대륙의 남쪽에 자리한 도시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첫째, 스칸다라는 대륙은 지구와 독립된 세계라는 것.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은하수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와서 이곳에 떨어진 것 같았다.
둘째, 이곳은 종말 따위와는 전혀 무관한 세계라는 점.
이곳에도 몬스터가 존재하긴 했지만, 스칸다는 충분히 대응할 만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셋째, 스칸다는 넓고 일행과는 따로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는 점.
도시에 도착하는 것만 해도 며칠이 걸렸을 정도니 동료들을 쉽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동료들을 찾는 시간 동안 스칸다에 적응하면 될 문제였다.
이 세계에서 자신이 할 만한 일은 정해져 있었다.
“모험가로 활동하시려면 이명이 필요해요. 따로 생각해 두신 이명이 있나요?”
“이명요? 이명이면…… 뭐 그런 건가?”
“없으신 가요?”
“아, 잠시만요!”
이민상은 이명을 무엇으로 해야 좋을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난 진짜 천재야!’
“올빼미! 올빼미로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 두면 진짜 올빼미가 이민상을 찾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올빼미라는 이명을 사용하는 사람이 궁금해서라도 찾아보려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곧 만나겠지.’
그때 자신이 ‘짜잔, 민상입니다.’하고 등장했을 때 놀랄 올빼미의 표정이 기대되었다.
비록 계산이 어긋나 조금 문제가 생겼지만 금방 해결될 것이다.
***
“다들 물러나!”
“올빼미!”
“으아아아아!”
파지지지직!
이민상의 몸에서 막대한 양의 전격이 분출되었다.
키에에에엑!
콰직!
콰지직!
전격이 한바탕 동굴을 휩쓸자, 마치 폭풍이 축소되어 지나간 것처럼 아수라장이었다.
몬스터들은 새까맣게 그을려 딱딱하게 굳었다.
아마 만지기라도 하면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휴…… 진짜 무섭다니까.”
“올빼미 아니었으면 또 한참 걸렸겠네.”
“우리랑 고정으로 할 생각 없어? 비율은 협의해 보고 조금 더 챙겨 줄게.”
“아…… 저는.”
이민상은 답을 망설였다.
스칸다에 떨어진 지 1년 후, 그는 진주 등급 모험가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렸다.
“죄송해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렇다고 듣긴 했어. 1년 전부터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면서.”
“……네.”
“우리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지?”
“아, 절대. 절대, 저얼대 아니에요.”
“하하하! 그렇게 말해 주니까 마음은 편하네.”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이 등급 이상의 모험을 강행하다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민상에게 찾아온 감정은 하나가 아니었다.
안타깝다, 내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무섭다.
‘무서워.’
모험은 그의 심장을 자극했지만 동시에 목 뒤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칼날에 기대어 몸을 지탱한 기분.
그로부터 다시 1년 후.
“움직이지 마! 지금 이 안에 숨어 있어!”
“올빼미……. 무, 무서워.”
“내가 있잖아! 횃불이 꺼지는 순간 중앙으로 모이는 거야!”
“믿을게!”
“믿는다! 너밖에 없어!”
“제발, 부탁해. 올빼미.”
후우욱.
횃불이 신비로운 힘에 부딪혀 갑자기 꺼졌다.
그와 동시에 모험가들이 등을 맞대고 모였다.
“으아아아아!”
파지지지직!
어둠만이 가득했던 공간에 번개가 내리쳤다.
파지직!
파지직!
끼아아아아아!
끄아아아!
소름 끼치는 귀곡성이 공동을 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새로운 횃불을 들었을 때는 탈진한 듯 보이는 사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올빼미!”
“해냈어! 우리가 해냈어!”
“살았다고! 네가 우리를 살렸어!”
이민상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할 수 있는 반응은 그것이 전부였지만, 누군가를 구했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했다.
‘어?’
그는 동료들에게 부축받아 동굴을 나가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형…….’
타인을 구한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외롭고 힘든 싸움이고 무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처음 보았던 올빼미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모두를 구했다.
그 모습이 떠올랐다.
이민상은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렸다.
다시 2년 후.
“뭔가, 뭔가가 잘못됐어…….”
“올빼미?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 임무가 잘못됐다고?”
“하긴, 좀 수상하긴 해. 갑자기 불어난 몬스터 개체 수부터 이상한 힘을 가진 마석까지…….”
어느새 홍옥 등급까지 올라온 이민상은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그가 잘못됐다고 말한 것은 그의 동료들이 말한 부분이 아닌, 올빼미와 송하린 그리고 최별의 행방이었다.
‘어떻게 아직까지…….’
아직까지 그들에 대한 소식은 하나도 접할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강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면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심지어 스칸다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었고.
‘난…… 어떻게 된 거지?’
이제 그는 노련한 모험가였다.
오래 만난 동료를 쉽게 잃어 울기도 하고 한두 번 마주친 모험가들이 실종되더라도 콧방귀도 안 뀌는.
그는 어느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힘은 천장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가진 뇌전의 힘은 그를 더더욱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렸고, 굳이 모험가 등급과 비교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무력 수준만큼이나 모험가 등급도 올라갔다.
하지만, 외로웠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렀다.
몇 년이 흘렀을까.
이민상은 별이 되었다.
성채남보석이 되어 전설적인 모험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모험가 활동을 잠시 접고 방황했다.
그가 가진 힘은 계속 커졌다.
번개는 묘한 신성력을 품기도 했고 동부에서 얻은 신기한 힘은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 그의 존재를 신기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어느새 그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없었다.
스칸다에 마왕이 탄생했다.
그럼에도 이민상은 나서지 않았다.
그는 자취를 감추고 스칸다 전 대륙을 떠돌며 물었다.
“혹시 이런 사람을 아시나요?”
“모르는데? 처음 봐.”
“그, 그럼 이 사람은요?”
“그림은 그럴 듯한데 본 적이 없어서.”
그는 계속 떠돌았다.
계속 물었고 계속 찾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하나같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이리 방황하냐고, 왜 아직도 못 잊냐고.
왜 포기하지 못했냐고.
그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직 그 사람을 기다리니까.’
언젠가 자신이 살던 곳을 구원한 영웅을.
영웅은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 위기에 빠진 자신을 구할 것이다.
이민상은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렸다.
세계가 도탄에 빠지던, 사람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건 그는 계속해서 떠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스칸다에 빛이 흘러들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네? 그, 그야…….”
“야, 신기하다. 데자뷰 진짜 미쳤네.”
“그러니까…… 아씨 나 찐따인 거 여기서 다 티 나네. 사람하고 대화를 안 해 봐서.”
“내가 대신 말할게, 비켜 봐.”
‘데자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상대는 곧 뭔가를 중얼거렸다.
“어, 그러니까 분명히 설정집에서…… 음, 아저씨. 잘 들어요. 우리는 이방인이라는 존재인데요, 스칸다를 구원하기 위해서 찾아왔어요! 마왕 있잖아요, 마왕!”
“마……왕?”
“네! 아무튼, 퀘스트 없나요?”
“……퀘스트?”
어리둥절해 하는 이민상에게 실망한 이방인들은 둘이서 뭔가를 속삭이다가 자리를 떴다.
잠시 그곳에서 중얼거리던 이민상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가 이용했던 정보 길드를 오랜만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과연, 스칸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다른 세계에서 찾아 온 이방인이라는 존재들이 스칸다의 사람들과 협력하여 마왕을 몰아내려 한다는 소식.
‘찾았어!’
자그마치 10년이 넘었다.
그가 스칸다라는 세계에서 활동한 지가.
하지만, 괜찮았다.
그는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렸으니까.
“그러니까, 이 붉은 머리의 여인이랑 검은 머리의 여인의 이름이 뭐라고요?”
“네, 올빼미 님. 최별과 송하린이라고 합니다. 혹시 분부하실 내용이 더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둘은 대륙의 반대편에 살고 있습니다. 추가적인 정보를 드려야 하나요?”
“네, 최대한 많이 주세요. 아, 그리고 제가 찾았다는 건…….”
“물론이죠! 절대 비밀 엄수하겠습니다! 올빼미 님이 누구라고 저희가 함부로 하겠습니까?”
“부탁드릴게요.”
그는 짐을 꾸려 동부로 갔다.
마침내 검은 머리의 여성을 찾았고, 그녀가 송하린이라는 걸 순식간에 꿰뚫어 보았다.
조금 앳되어 보였지만 확실하게 그녀였다.
‘드디어…….’
드디어 오랜 기다림이 보답 받을 것이다.
그는 송하린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
“그쪽 문파 안 들어갈 것이오. 따라붙지 마시오.”
“네? 송하린 양?”
“흠흠…… 아직 명성을 떨치기도 전이거늘 벌써 이렇게 유명해졌나? 하하하!”
“저, 혹시 저를 모르시나요?”
“응? 문파 들어오라는 것 아니었소?”
“문파라뇨?”
“아니었나? 그럼 왜 나에게 말을 건 것이지?”
“저! 저 모르시냐고요!”
“그…… 누군가와 본녀를 착각한 것 아니오? 나는 아저씨와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나 보이는데. 물론 사랑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본녀는 숫자를 맹신하는 편이오. 그러니까 썩 물러가는 게 좋을 것이외다.”
“그런…….”
서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시죠? 저를 아시나요?”
최별도 이민상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게 어찌된 것일까.
그는 얼마간 총력을 기울여 우르드의 일족을 찾았다.
마침 일족과 떨어져 나온 마녀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을 찾아갔다.
“으흠흠…… 알 수 없는 노릇이군. 이방인인데 같은 세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주는 넓지. 세계도 그만큼 많을뿐더러 시공간은 꽤 재밌거든.”
“이건 우리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야. 위대한 존재들이라면 아실지도…….”
“위대한 존재? 운명의 샘을 말하는 겁니까?”
“그분들이라면 대가를 받고 당신의 운명을 봐 줄지 몰라.”
“그 대가라는 게 무엇입니까?”
“힘, 혹은 수명이나 다른 진귀한 것들이겠지.”
“물건은 잘 안 받아 주셔.”
“……알겠습니다.”
모험가들은 어느새 영웅이라고 불리었다.
이상한 점은 어디서도 올빼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혹시…… 형도 나처럼 어디에 따로 떨어진 것은 아닐까?’
마왕이 한창 스칸다를 부숴나갈 때, 이민상을 찾아 온 사람이 있었다.
“도움을…….”
“부디…….”
“제발 부탁…….”
마왕을 쓰러트리는 일에 함께 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이민상은 마왕 따위,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그들과 함께하겠다고 했다.
다시 얼마 뒤, 그는 마왕을 쓰러트렸다.
“너, 너는…… 대체 무엇이냐?”
“나?”
이민상이 뇌전으로 마왕을 부수고 그의 핵을 몸에 품었다.
검은 기운이 일렁이며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검은 번개를 휘두르는 이민상이 홀로 답했다.
“나도 몰라.”
많은 이들이 죽었고 이방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그것이 무슨 상관일까.
이민상은 우르드의 추방자들을 찾아갔다.
“마녀들이여, 샘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라.”
“과연…… 그만한 힘이라면 위대하신 존재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게요.”
우르드의 마녀와 함께 운명의 샘에 간 이민상은 위대한 존재를 목도했다.
“무엇을 찾는 것이냐.”
“사람, 그리고 사람, 또 사람.”
“대가는?”
이민상이 검은 기운을 응축해 내뿜었다.
그가 내뿜은 것은 마왕이 가졌던 힘의 대부분이었다.
소량은 남겨 두었지만 이것은 따로 쓸데가 있어서 그랬다.
“호오…… 그대였구나.”
“이거라면…… 무엇을 얼마나 알 수 있지?”
“그대가 찾는 사람들을? 아니면 그대를?”
이민상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껏 그들을 찾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자신을 찾을 때다.
“나를. 내 전부를.”
“좋다, 그대의 운명을 보겠다. 그리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
“힘으로 부족한 건가?”
“그대의 운명을 확인하는 것은 가능하지. 하지만 그것을 답해 주고 그대에게 말해 주는 것은 다르다.”
“대가가 무엇인데?”
“그대는 그대의 운명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내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럼 내 운명은 누가 바꾸는 것이지?”
“그것은 알 수 없지. 내가 그대의 운명을 보지 않는 이상은.”
“그것 또한 말해 줄 수 있는 건가?”
“그대가 개입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민상은 눈을 감고 고민했다.
모든 것을 아는 방관자가 될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표류하는 배의 키를 쥔 조타수가 될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싫었다.
“좋다.”
“알겠다. 그럼 그대의 운명을 확인하겠다.”
화아아아아!
하얀 광채가 위대한 존재에게서 뿜어졌다.
그들 중 누군가 말했다.
“가엾은지고…….”
으득.
이민상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동정해선 안 되었다.
“말해 줘.”
“이민상, 너의 이름은 이민상이구나.”
“그래.”
“그대에게 우선적으로 시공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겠군.”
“시공간?”
“그대는 시간을 흐른다고 생각하고 있지?”
“아니라고?”
“아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 모든 것은 운명이라는 굴레를 쓰지.”
“무슨 소리지? 알아듣게 말해.”
“그대가 송하린과 최별을 찾은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널 알아보지 못한 것도.”
“그래, 맞아.”
“그대는 그들의 과거와 마주한 것이다. 그대의 현재와 그들의 과거는 시간이 다르니 무슨 수를 써도 그들은 그대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하…….”
“이민상, 나의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말라 버린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말해…….”
“그대가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이다.”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
“때를…… 사람을 기다려야 한다.”
“뭐?”
“네가 기다리고자 했던 사람. 그자가 이곳에 당도한 순간부터 운명이 어지러워지고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네 운명의 끝은 분명 비극이다. 이 세계의 운명조차도. 하지만, 그가 이곳에 온다면…… 희망이 있다.”
“…….”
“단 하나의 주사위가 던져질 것이고 확률은 높지 않다. 그가 3개의 검과 스칸다의 힘을 모은다면…… 네 운명도 어쩌면 바뀔지 모른다.”
위대한 존재는 이민상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천천히 얘기했다.
이윽고 모든 것을 알게 된 이민상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무언가를 떠올리려 했다.
누구.
누구였을까.
자신이 이곳에서 지금까지 기다렸던 사람은.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누구를…… 내가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데?”
“네가 줄곧 기다리고 있던 사람.”
“얼마나…… 얼마나 더?”
후우웅.
그의 앞에 위대한 존재의 손이 다가왔다.
손바닥을 활짝 핀 상태로.
“5년?”
“아니.”
“장난하는 거지?”
“50년이다. 50년 동안 너는 그를 기다리며 흘러가는 운명을 지켜봐야 한다.”
“…….”
“충격이 크겠지. 인간에게 50년이란 긴 시간이니까.”
“……와?”
“뭐?”
“오긴…… 오냐고.”
“올 것이다.”
“확실하냐고! 확실히 오는 거 맞냐고!”
“그는 반드시 50년 후에 스칸다에 올 것이고 이 세계를 구원하고자 할 것이다.”
이민상은 생각했다.
50년 뒤에도, 그는 변하지 않았다고.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모습은 그대로라고.
“알겠어.”
“더 원하는 것이 있느냐?”
“잠시만, 잠시만 친구들에게 말을 남길 수 있을까?”
“……너무 많은 운명을 얘기해선 안 된다. 그 자체로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아마 좋지 않은 쪽이겠지.”
“알겠어, 고마워. 그리고…….”
“뭔가.”
‘그 사람이 이곳에 온다면 잘해 줘.’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그를 마주할 것이다.
이민상은 카이와 몇몇 지인들에게 말을 남겼다.
그리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
이민상은 지금 성진과 마주하고 있었다.
성진의 흔들림 없는 눈빛은 그를 더 외롭게, 외롭게 만들었다.
“많이 기다렸구나.”
“응, 정말 많이.”
성진은 말이 궁해져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무슨 위로를 건네야 할까.
성진의 잘못은 아니었다.
단지 민상의 운명이 그러했을 뿐.
이민상이 말했다.
“나는 무엇일까요?”
“민상아.”
“나는…… 형이 올라간 무대에는 올라갈 수 없어요.”
“…….”
“어두컴컴한 커튼에 가려서 분주하게 움직여도,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해요. 난…… 난…….”
이민상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밑으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주인공이 아니니까. 형처럼…… 세상을 구하고 희생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함께 가자, 민상아. 방법을…… 방법을 찾아보자.”
이민상이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형, 형을 따라 나선 것은 내 선택이었어요. 형을 원망하지 않아요. 난 형처럼 되고 싶었어요.”
“…….”
“하지만 이제 알아요. 난 형처럼 될 수 없단 걸. 어찌됐든 이건 내 선택이었으니까, 후회하진 않아요.”
그는 아련한 듯이 허공을 응시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모험을 처음 했을 때가 기억이 나요. 그땐 형과 모험하고 싶었는데…….”
“같이 가자.”
이민상이 슬프게 웃었다.
“그럴 수 없어요. 난 이미 너무 늙어 버린 걸.”
이민상은 수십 년간 한 사람을 기다렸다.
스릉.
파지지직!
“준비하세요. 마지막 안배예요. 나는 운명에 개입할 수 없어요.”
“민상아!”
이민상의 몸이 새파랗게 진동했다.
푸른 번개가 온몸을 감싸더니 곧 그의 몸이 뇌전이 되었다.
콰르릉!
“올빼미, 세계를 구하세요. 이번에도.”
“이민상!”
“시간이 없어! 나는…… 나는 더 버틸 수가 없다고…….”
세종의 종말은 무엇이었을까.
성진은 지금 이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산의 한파, 대구의 독기, 대전의 분열과 원시, 울산의 초열.
그중 대부분의 종말을 거쳐 온 성진에게는 눈앞에 있는 노인의 종말이 가장 무거웠다.
시공간의 종말.
그것을 가장 뼛속 깊이 새긴 사람은 이민상이었다.
이민상은 이제 더는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림이 익숙했지만, 그것이 잔인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이방인들의 이방인.
그것이 이민상이었으니까.
콰르르릉!
오랜 세월 벼려져, 초월자가 된 이민상이 검을 쥐었다.
그는 어느새 스스로 벼락이 되어 있었다.
그가 성진 일행에게 말했다.
“준비해, 아니면 죽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