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는 종말에 적응했다-171화 (171/222)

# 171

171화

***

“자, 잠깐만요!”

“빨리 좀 합시다, 신아름 씨. 지금 일 밀린 거 안 보여요?”

“죄송합니다! 이것만 처리하고 바로 할게요!”

“젊은 사람이 이런 일 처리 하나 똑 부러지게 못 해서 어쩌자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빨리 처리할게요.”

신아름은 상사의 핀잔에도 웃음만은 잃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가끔은 너무 힘들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출근.

주 5일제니 뭐니 해도 작은 회사에서는 그마저도 이상한 핑계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는 월화수목금금금.

심지어 이번엔 새로 부임한 상사가 일요일에 반드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는데 잠깐 출근해 줄 수 없느냐고 했다.

낙하산 인사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분명 갑은 제안했을 뿐인데 을은 협박을 당했다.

신아름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몇 시까지 나가면 되냐고 물었다.

평소라면 주말에는 성진과 만나는 날이었다.

이렇게 늦은 오후까지 일하고 있을 게 아니라.

“후우…….”

“빨리합시다. 이래서야 퇴근도 못 하겠어요.”

‘저 관두겠습니다.’라는 말이 목청까지 올라왔다.

지구에는 중력이 있다.

그 중력이 올라온 말을 잡아끌어 다시 내려 보냈다.

“추가 근무는 정리해서 올리면 처리될 겁니다.”

“예.”

신아름은 당연한 말을 선심 쓰듯이 하는 저 말투가 얄미웠지만, 상사니 참아야 했다.

서른 후반의 상사는 일을 마무리하며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런…… 시간이 너무 늦었군요. 오늘 피곤한데 나와 준 거 고맙게 생각해요.”

“아니에요.”

“그런 의미에서 저녁이나 하죠. 마침 나도 약속이 없으니…….”

신아름의 마음이 구겨졌다.

보통 이런 제안은 거절하기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냈다.

“저녁에는 꼭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무슨…… 남자친구라도 있나? 난 들은 기억이 없는데?”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상사.

신아름은 얼마 전부터 상사가 그녀에 대한 소문이나 가십들을 궁금해한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동료들의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그녀도 일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할 말은 할 생각이었다.

“네, 있어요. 남자친구.”

“……그래?”

“네. 저한테 엄청 잘해 줘요! 아, 시간이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남자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해서요!”

“이봐요, 신아름 씨…….”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일 뵐게요!”

신아름은 엘리베이터도 잡지 않고 서둘러 계단을 통해 뛰어 내려갔다.

숨은 가쁘지 않았지만, 두려움이 호흡을 어렵게 했다.

혹시라도 상사가 자신을 쫓아와 추궁할까 봐.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굽이 조금 있는 구두를 신었는데 1층에 내려와 보니 뒤꿈치가 다 까졌다.

그녀는 서둘러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운동화와 양말을 꺼냈다.

띵.

상사가 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 주차장으로 갈 줄 알았는데, 왜 1층으로 온 것일까.

화들짝 놀란 그녀는 신발도 갈아 신지 못한 채로 길거리로 뛰어들었다.

쓰라린 뒤꿈치가 계속 아파 왔다.

그녀가 대로에서 손을 몇 번 휘적거리자, 택시가 잡혔다.

불운한 나날 중에 그래도 행운이 한 번쯤은 찾아온 것이다.

성진이 입원한 병원으로 가 달라고 한 후에, 뒷좌석에 앉았다.

안전벨트를 잡은 손이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흡…….”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상사가 대로까지 나와 그녀를 찾는 눈치였다.

조금 벗어나 상사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 다다라서야 그녀는 뒤꿈치에 밴드를 붙였다.

“아가씨, 벨트 매요.”

“아, 네.”

벨트를 매고 양말을 신으려 하는데,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어?”

뚝, 뚝.

어느새 줄기가 되어 흐르는 눈물이 야속했다.

오늘은 성진을 만나는 날이었다.

이러면 화장을 고쳐야 하는데.

눈도 부을 테고.

“힘들지, 아가씨?”

“네? ……네.”

어쩐지 너무 힘이 들었다.

“이게 다 이번 정부 때문이야. 전에는 안 이랬는데…….”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것인 줄 알았지만, 택시 기사님은 제 할 말이 하고 싶어서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녀는 귀를 닫고 잠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번뜩이는 네온사인과 많은 사람, 또 많은 차.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성진이 얼마나 슬퍼할지 모르겠다.

아마 당장 일을 관두라고 화를 낼지도.

물론, 아직 한 번도 자신에게 화를 낸 적은 없었다.

‘……보고 싶다.’

그녀는 성진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쉽게 떠올리진 못했다.

그를 왜 좋아하는 걸까?

어쩐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그의 담담하고 의연한 태도가 좋았고, 자신을 아껴 주는 것이 좋았다.

물론 그런 사람은 종종 있었지만, 성진은 특별했다.

뭐가 특별한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느끼니 그렇다고 할 수밖에.

“……가씨.”

“…….”

“아가씨!”

“아, 네…… 네? 어, 얼마죠? 제가 깜빡 졸았나 봐요. 죄송해요, 기사님.”

“피곤하면 졸 수도 있지.”

그으응.

그녀를 병원 앞에 내려 준 택시는 매연을 뿜으며 멀어졌다.

그녀는 병원으로 들어가 가장 먼저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을 확인하니, 거무튀튀한 자국이 번져 있었다.

“이것 봐, 번진다니까. 신아름, 정신 안 차릴래?”

울어도 된다.

하지만, 운 것을 들키면 안 됐다.

성진이 자신이 운 것을 안다면 얼마나 괴로워할지 아니까.

일을 관둬도 된다는 그의 말이 그녀는 고마웠다.

하지만, 그에게 의지할 순 없었다.

그녀에겐 그녀의 삶이 있었고, 성진에게 당당하고 싶었다.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의지할 정도로 자신은 나약하지 않았다.

신아름은 당당한 모습으로 그에게 사랑받을 생각이었다.

틴트로 입술을 적시고 몇 번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빠.

빠.

개구리 우는 듯한 소리가 입술의 마찰로 생겨났다.

그녀는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거울 속에는 피곤과 슬픔에 버무려진 신아름이 있었다.

애써 그것을 감추기 위해 웃었다.

히.

이를 드러내고 웃으니 조금 걷어진 것 같기도 하고.

당연히 이런다고 피곤이 날아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피곤이 날아간 것처럼 보이긴 했다.

지금은 그것이면 충분했다.

“웃자, 웃어!”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조금 걸었다.

성진이 있는 병실 앞에선 그녀는 이곳이 자신과 의료진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이라는 생각에 잠시 주춤했다.

후웁.

끼이익.

“짜잔, 지금 여기 신아름 등장! 응?”

성진은 캡슐 속에 있지 않았다.

허리를 고정해 주는 전동 휠체어에 앉아 커튼이 휘날리는 창가 앞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그 뒷모습이 너무 슬펐다.

“……오빠? 나 왔어.”

성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나긋한 목소리로 반겼다.

“어서 와.”

‘……아.’

신아름은 필사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았다.

지금 성진이 짓고 있는 저 표정.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았다.

방금 성진이 지은 표정은 이곳에 오기 전 화장실에서 지었던 자신의 표정과 같았다.

어떻게든 상대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려는 노력이 담긴 표정.

자신의 표정과 목소리도 꼭 저랬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우스웠다.

또 연인이기에 닮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녀는 천천히 성진에게 다가갔다.

의자를 끌고 와 앉으니 휠체어에 앉은 성진과 대화하기가 훨씬 편해졌다.

“간호사가 앉혀 준 거야?”

“응, 부탁했거든.”

“나 늦어서 내 욕하고 있었지?”

“거기까지 들렸어?”

“이 양반이? ……속상했지? 미안.”

“아니, 괜찮아. 계속 기다릴 수 있어.”

“그럼! 난 얼마나 기다렸었는데. 이 정도 기다린 것 가지고 속상해하면 안 돼!”

“응.”

“사실은 오늘 출근부터 시작해서…….”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그녀는 오늘 있었던 시련과 고난을 각색해서 성진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얘기를 묵묵히 듣다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힘들었겠네.”

그녀는 그 말에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지만, 다행히 울지는 않았다.

“응, 힘들었어.”

사실은, 몇 년 동안 병원에만 누워 지낸 성진이 더 힘들었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에게 자유란 지금은 가질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성진의 손에 이끌려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고 성진의 어깨에 기대어 조용히 계속 말을 했다.

그녀의 지저귐이 마치 음악이라도 되는 듯 성진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평온함.

그녀는 택시를 타고 오며 생각했던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에 대해 떠올리게 됐다.

‘맞아.’

그는 둥지였다.

그녀라는 새가 갇혀 지내는 새장이 아니라 잠시라도 머물며 쉴 수 있도록, 다시 날 수 있도록 해 주는 둥지.

신아름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좋아해.”

“……나도.”

“어, 방금 머뭇거렸지?”

“전혀.”

“아닌데? 나 다 눈치챘는데?”

웃음소리가 병실의 허전한 분위기를 대체했다.

작은 새는 지저귀며 생각했다.

행복하다고.

자신은 이 행복을 위해 오랜 시간 싸워 온 것이라고.

그가 걷지 못한들 어떠한가.

자신이 그의 날개가 되어 주면 충분한 것을.

***

바스카리에 모였던 지도자들은 성검회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 세세한 부분을 조율하고 하나둘 떠났다.

이방인들의 힘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성진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는 이방인들은 전부 바스카리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방인.

세종시의 얼마 남지 않은 시민들은 스칸다에서 하나로 똘똘 뭉쳐 힘을 모았다.

그들은 비록 종말이 닥쳐 온 세상이지만, 세종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한 이방인들은 스칸다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피하긴 했지만 이방인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 잡았기에 내부 인원을 통제하는 것도 한층 수월해졌다.

이제 성진이 스칸다를 벗어나는 것에 남겨진 과제는 몇 되지 않았다.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무엇과 싸워야 하고 종말 거부 장치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껏 시나리오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했지만, 어디까지 온 것인지 앞으로 얼마나 더 남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모험가 협회의 중진을 만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성검회가 발족되기 전, 성진이 교황이 되기 전에 갱과 마주했다.

“초모 님.”

“갱? 왜 존대를 하십니까?”

“하하, 이제 스칸다의 하늘에 오르실 텐데 제가 감히 말을 낮출 수가 있겠습니까?”

“알고 계셨군요.”

“이렇게 되리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죠. 물론, 당신께서 이곳에 왔을 당시에는 긴가민가했지만.”

“하실 말씀이 있어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초모 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얘기를 하시려고 하는 거죠?”

갱은 그와 함께 온 셰일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말했다.

“일전에 제가 얘기했던, 언젠가 초모 님이 훌륭한 모험가가 된다면 뭔가 알게 될 것이라 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합니다. 그때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죠.”

“이제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세계의 진실을.”

“세계의 진실?”

“초모 님, 정기신(精氣神)이란 말을 아십니까?”

분명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아마도 스칸다의 수련법과 더불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세 가지 힘의 종류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는요.”

“초모 님이야말로 정기신 중 신(神)에 통달하신 분이라고 할 만합니다.”

“제가요?”

“네, 그 막대한 신성력을 바탕으로 무엇이든 해내는 모습이 딱 그렇습니다.”

-(코쓱) 뭐 다 아는 얘기를 하고 그러세요. ^^

-갱이 간부인 이유가 있었군. 혓바닥이 아주 뱀이야. ㅋㅋ

-라인 타려는 심보를 모를까 봐. ㅋㅋ 일단 흥겨우니 연회를 계속하거라!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시는 거죠?”

“이 정기신은 오묘한 힘이죠. 한 가지 힘만으로도 그 끝에 달하면 세상을 굽어볼 만한 힘을 갖게 되니까.”

“네, 맞습니다.”

“스칸다의 힘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것입니다. 당연히 정기신을 수련한 사람도 그만큼 많을 것이고, 그 끝에 도달했던 사람도 많지 않겠습니까?”

“…….”

“……그들이 말년에 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얘기를…….”

“……정기신을 합일하는 자는 신과 필적하는 힘을 얻을 것이다. 그가 곧 자연이고 그가 곧 세계일 테니까.”

정기신의 합일.

성진은 처음 듣는 얘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는 그런 존재를 순수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여태 그런 존재는 없었지만요.”

-이노센스라는 거군.(유식한 척)

-스펠링 써 봐.

-청문회냐.

-써 보래도.

-쉿, 우리 모두 집중하자!

갱이 한숨을 크게 쉬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초모 님이 뵈어야 할 분이 있습니다.”

“제가요? 어째서죠?”

“이방인들과 함께 돌아가시려는 것 아닙니까? 또한, 스칸다의 종말을 막으려는 것 아니십니까? 그분께서는 그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네?”

“그분께서는…… 정기신을 합일하신 분이니까요.”

“…….”

“순수께서 초모 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아니, 송하린 님과 최별 님도요.”

스칸다에서 최초로 정기신을 합일한 순수가 있고 그 존재가 성진을 보고 싶어 했다.

성진은 되물었다.

“그분은 정말 이 종말을 막을 방법과 돌아가는 방법을 알고 계신 겁니까?”

“어찌 제가 허언을 하겠습니까?”

성검회가 설립된 배경에는 이런 뒷얘기가 있었다.

협회의 갱과 셰일은 회의에서 다른 수장들이 알아선 안 되는 내용을 걷어 내고 그들에게 종말을 극복할 방법이 있다고 설득했다.

결국, 성검회가 다가올 종말에 대비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진과 송하린, 그리고 최별은 갱을 따라 함께 어딘가로 향했다.

***

“순수라니, 정기신의 합일이라니. 농담이 좀 심한 것 같지 않습니까, 형님?”

“오랜 시간을 비울 수는 없으니까, 이번 만남으로 최소한의 답을 얻어야 해요. 안 그러면 이 모든 게 시간 낭비일 테니까.”

갱은 앞에서 묵묵히 산길을 안내하고 있었고 송하린과 최별이 담소를 나누며 그를 따랐다.

성진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특히나 최근에 벌어졌던 일들은 그를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송하린은 새긴 적 없던 문신이 그녀의 어깨에 나타났다고 했으며, 최별은 최후의 증명에서 겪은 일이 현실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게임이 현실과 이어진다.

성진의 혼란을 만들어 내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성진 그 자신이었다.

평생 병상에서 꿈쩍도 못 했을 그가 몸을 회복해 가고 있었으니까.

걷는 것을 제외하면 이제는 말도 곧잘 하고 양치질도 했다.

이것은 그만 아는 사실이었다.

정확히는 게임과 현실이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신아름은 그가 회복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종말 이후와 연결된 것은 몰랐고, 최별과 송하린은 성진이 몸이 불편한 것조차 몰랐으니까.

단순히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기묘했다.

“다 왔습니다.”

“네? 다 왔다고요?”

“이 산길을 따라 쭉 올라가시면 될 겁니다.”

“갱은요?”

“저는 이만 내려가서 협회 쪽에 합류하겠습니다. 할 일이 많아서요.”

-ㅋㅋㅋ 아 몰랑~ 여기서부턴 너희들이 알아서 해~

-이래 놓고 함정이면 레전든데.

-야, 근데 채팅 좀 딜레이 있다? 미로 또 왜 이래?

-아 ㅆㅂ 진짜 또 끊기면 더 이상 못 참는다.

-님이 못 참으면 어쩌게? 저번에 화면도 나가 버린 사람도 많더만. ㅋㅋ

성진 일행은 계속 걸었다.

산길은 험하긴 했지만, 이 중 누구도 앓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산의 정상에서 뿜어 나오는 이상한 기운을 그들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네요.”

성진도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세에 놀란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몸이 떨리고 있었다.

‘뭐지?’

안개가 자욱해 손을 앞으로 뻗으면 그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신비에 둘러싸인 인물답게 그가 사는 산도 평범하지 않았다.

“다 온 거 아닙니까? 어디 있는 거지?”

“……저기, 저기인 것 같아요.”

성진은 최별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손님들이 왔나 보군요.”

늙은 사람의 말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헷갈렸다.

엄청난 수행을 지닌 자라면 당연히 세월을 쏟았을 것이기에 노인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예상이 맞았다.

최별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협회의 갱에게 전해 들어 이곳까지 왔습니다.”

“어르신께서 저희를 보고자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목소리는 끊길 듯 끊기지 않고 작게 전해져 왔다.

그런데도 또박또박 들리는 것이 상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했다.

“그대들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십니까?”

“……네. 어르신께서 그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신 거로…….”

“맞습니다. 내가 그 방법을 알고 있지요.”

성진과 송하린, 그리고 최별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상대는 정말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또 끊길라 하네. ㅋㅋ 데자뷰 인터넷 뭐 쓰냐?

-해저망으로 존나 때리고 싶네.

-아니 무슨 산이랑 지하만 가면 끊길라고 하냐고. ㅋㅋㅋ 진짜 전파냐고!!

-현실의 병맛을 게임에도 구현하다니…… 이만한 기술력은 대체!

성진 일행이 기뻐하는 것도 잠시, 노인은 실망스러운 말을 했다.

“하지만…… 그대들은 아직 순수를 이루지 못했군요. 각자가 제각기 뛰어나지만 그렇기에 하나가 될 수 없었던 걸까요?”

“어르신,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이대로라면 그대들이 방법을 알더라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스칸다의 종말도 막기 어려울 것이고요.”

“저희가 부족하다는 겁니까?”

“……굳이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요.”

기분이 나빠진 최별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상대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느껴지는 압박감만으로도 상대의 강함이 절절히 전해져 왔다.

성진이 침착하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강해져야지요. 지금보다 훨씬.”

“너무 모호한 말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셋이 가진 기운을 하나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격에 대적할 수 있지요.”

“신격?”

신격이란 말은 우르드의 마녀가 사용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신격이 무엇이기에.

“그래도 검은 모두 모였군요. 다행입니다.”

성진은 잠시 멈칫했다.

뭔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것을 상대에게 바로 물었다.

“어르신, 혹시 저를 아십니까?”

“…….”

“혹시…….”

상대가 대답하지 않자, 성진은 확신했다.

앞에 있는 노인은 줄곧 그를 기다려 온 사람이라고.

“어르신께서 제게 예언을 남기신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50년이 지나 스칸다는 전례 없는 종말의 위기에 놓일 것이다. 세 자루의 검이 필요하다. 검이 모이고, 세계의 뜻이 모인다면 해낼 수 있다.

용인 카이가 전했던 누군가의 예언.

그 예언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뭐? 저 노인이 예언자라고?

-잘 안 들려! 뭐라는 거야?

-아, 끊기면 진짜 가만 안 둬.

-야, 화면 자꾸 꺼졌다 켜졌다 해. 짜증나게.

“저 또한 대가를 치르고 알게 된 것들이지요.”

“이마의 용 각인이 무엇인지도 아십니까?”

“그것은 낙인입니다. 용의 제물로 낙인찍혀 차원을 연결하는 매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지…… 그보다, 어째서 제 앞날에 대한 예언을 구한 것입니까?”

이토록 강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헤쳐 나가도 되었을 것을, 왜였을까.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어? 안개가…….”

노인이 먼 과거를 회상하듯 말했다.

“당신이 오는 것만이……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

“……뭐?”

“줄곧 나는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곳에서.”

안개가 걷혀 갈 무렵, 노인의 얼굴을 제외하고 몸이 드러났다.

앙상하게 마른 몸에 드러난 갈비뼈.

해진 옷과 넓은 소매가 그를 더 안쓰럽게 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일행의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맙소사…….”

“저, 저거!”

“……활금강.”

마지막 활금강.

노인의 옷에 붙은 그 버튼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으악 화면 까매 소리 안 들려! 이게 뭔 일이야!

-결국에 팅겼다. 아, 쓉 미로 진짜 MM

-미로 이 XX 터진 XX새끼들아!

-봇물 터진 삼시새끼들아.

-게시판 불탄다. ㅋㅋ 디토랑 미로 공홈 다 뒈졌다!!

-미친 이번엔 또 무슨 변명을 하려고. ㅋㅋ

-아, 진짜 이러면 민심 다 떠난다고!! 데자뷰 뭐 하냐고!!

노인의 얼굴에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둠과 침묵에 가리어, 오로지 성진 일행에게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나이 든 모습.

그러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줄곧, 기다렸어요.”

“……어떻게.”

“이, 이런 일이…….”

모험가 협회 공식 랭킹 1위.

활금강(活金剛) ‘올빼미’

“……형.”

“민상아.”

“너무…… 늦었잖아요…….”

이민상은 50년 전, 마왕을 쓰러트리고 성진이 오기를 계속해서 기다려 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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