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163화
같은 시각, 카이덴과 지혜의 고리는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아무리 봐도 말이 안 되는군.”
“그러니까 말이야.”
마탑은 각기 다른 지역들을 수시로 조사하고 유의미한 마력 파동을 감지했다. 얼마 전부터 시작된 거대 균열의 탄생은 그들이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게 했다.
“이상해, 점차 빨라지고 있어.”
“단순히 단발적인 문제가 아닌 것 같군. 뭔가 다른 근원적인 문제가 있어.”
오늘, 모든 마탑에서 전해 온 소식에 의하면 새로운 균열이 탄생할 조짐이 보인다고 했다. 지금도 인력이 부족해 모험가들 대부분이 균열을 봉인하기 위해 발로 뛰고 있는 와중이었다.
“아무래도 큰일이야. 우리만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야.”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소리야?”
“방법이 없잖나? 지금 이 상황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어.”
“하기야…… 하지만, 그렇더라도 우리의 말을 챙겨 들을 위인들이 아닐 텐데?”
스칸다의 수많은 집단.
이제는 태양성이라 불리게 된 원탁.
침묵을 깨고 조금씩 활동을 시작한 별자리 관.
더 끈끈해진 맹.
스칸다를 지탱하는 모험가 협회.
그리고 신앙의 심장 바스카리.
이외에도 규모가 제각각인 단체가 많았다.
남부 해적 연합을 비롯하여 난쟁이들의 아성인 영원의 용광로.
곡창지대 일부를 꾸려 나가는 자유민들.
크고 작은 집단을 전부 세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지혜의 고리가 아무리 위세가 높다 하지만 그것도 먹히는 곳이 있고 콧방귀도 안 뀌는 곳도 있지.”
“저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생각을 달리할 거야.”
“그래서 자네의 생각은 뭔가?”
“개인을, 집단을, 대륙과 이익을 초월한 균열 대응 공동체가 필요해.”
“정확히는 종말 대응 공동체겠지.”
“아무렴 어떤가? 지금 중요한 건 그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느냐 없느냐잖아.”
“그걸 이룰 방법을 지금부터 생각해 보자고?”
“그럼? 손 놓고 있게?”
“그런 건 아니지만…….”
이미 일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당장, 이유 없는 사막에서 태어난 균열도 아직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끄응…… 이럴 때 누군가 발 벗고 나서 주면 좋으련만.”
“누가 발 벗고 나서? 우리가 나서도 소용이 없는데.”
그때, 그들이 손댄 찻잔이 흔들렸다.
달그락.
“…….”
“뭐지? 자네도 느꼈나?”
“그래. 다들 표정을 보아하니 우리만 느낀 것은 아닌 것 같군.”
엄청난 마력 파동이 그들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카이덴은 서둘러 일어나 확인을 해 보려 했으나 중급 마법사의 발이 더 빨랐다.
쿠우웅.
문이 대차게 열리고 헐떡거리는 마법사가 뛰어들어 왔다. 카이덴이 서둘러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스, 스칸다 전역에서 균열이 발생할 조짐이 보입니다.”
“규모는?”
“……측정 불가능입니다.”
“그럼 원인은?”
“그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카이덴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리쳤다.
“올 것이 왔다! 모두 비상 체제로 돌입하고 대륙 곳곳에 전해라! 종말이 오고 있다고!”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이 말은 중급 마법사에게 들리지 않았다.
“힘을…… 모아야 한다고…….”
***
한바탕 소란이 일었던 장내가 정리되었다.
김상혁은 응급실에서 잠시 뒤에 정신을 차렸고 황급히 연락을 받은 왕이나가 대신 진행을 맡았다.
얼마 후, 복귀한 음탕을 비롯하여 다른 좋은 친구들이 자리했다. 조병창은 등불의 일이 바빠 참여하지 못했다.
왕이나가 음탕에게 물었다.
“음탕아, 잘 해결됐어?”
음탕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게 놀랐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요. 그래도, 심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다고 해서 쫓겨났어요. 아버님이 직접 오셔서 돌아가 보라고 하시는데 더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잘했어, 음탕이 네가 사람 살렸어.”
“그런가요, 언니?”
-음탕아, 놀랐을 텐데 침착하더라.
-김상혁 님 셔츠 단추 풀 때 후광이 ㅗㅜㅑ
-진심 프로답다고 느낌.
-내가 음탕이 진성 빠돌이는 아니지만, 이 부분은 인정할게. 멋졌다.
-진성 빠돌이 검거 완료.
음탕이 비릿하게 웃더니 농담을 던졌다.
“이런 게, 와타시의 갭모에인 것일까나?”
왕이나와 좋은 친구들이 농담을 받아 주지 않았다.
음탕은 채팅 창을 빠르게 훑었다.
-와타시의 갭모에 ㅋㅋ 지건 딱대
-음탕// 논란// 왜색이 짙어……
-저건 ㅆ덕들의 밈이라고 하는데 특유의 ~까나? 가 포인트라고 하네요. ㅎㅎ 전 일반인이라 잘 몰겠네요?
-드럽게 많이 아시는데요?
음탕은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도 왕이나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언니,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는 거예요?”
“응?”
“왜 가만히 있어요? 초모 님은 이 사태에 관해 할 말 없으시대요?”
음탕이 왕이나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 시청자들 지금 난리 났던 거 아니에요? 잃어버린 친구가 지금 저 안에 있잖아요!”
왕이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여러분, 탕이가 많이 놀랐나 봐요.”
“…….”
음탕은 어리둥절했다.
심대형과 이선익은 저렇게 돌로 굳어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한데 왜 다들 태평한 것인지.
왕이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시청자분 중에도 지금 들어오신 분이 있을 테니 제가 정리해서 말씀드릴게요. 우선 데자뷰의 공식적인 답변이 있었어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언니! 정말요?”
“그럼, 너 응급실에 가자마자 내가 바로 요약 정리해서 데자뷰에게 보냈거든. 답변이 왔어.”
“뭐라고요? 뭐라고 답변이 왔어요?”
“아니래.”
“네?”
“심대형 님과 이선익 님이 아니라고 했다고.”
“엥?”
왕이나가 하는 설명을 음탕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시청자들도 분명 자신과 같은 사람이 대다수일 거라 생각을 하고 채팅 창을 노려봤다.
하지만,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아무렴, 50년 동안 정신이 붙잡혀 있다고? 소설 너무 봤다 ㅋㅋ
-우리는 저 석상이 일어나서 발가벗고 춤춰도 안 놀램.
-팩트) 솔직히 놀랐다.
-솔직히 놀라긴 했는데,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잖아.
-글킨 해~
음탕은 왕이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왕이나가 답했다.
“저번에 말했던 멘탈 번인.”
“멘탈 번이요? 그건…….”
“아니, 멘탈 번인.”
“다른 거예요?”
“응, 다른 거야.”
“저, 번인은 아는데…….”
번인(Burn-in).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은 익숙한 현상이다.
디지털 화상처럼 프로그램을 종료해도 그 노란 흔적이 남아 있는 현상.
멘탈 번인은 여기서 나온 단어였다.
“그러니까, 부스러기라는 말이에요?”
“뭐, 조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네.”
-ㅇㅇ 벽지에 남은 자국처럼 남은 흔적임
-그니까 정신이 저기에 남았다는 거임?
-ㄴㄴ 정신은 따로 있고, 음…… 그니까 관성 때문에 남아 있는, 그냥 찌꺼기라고 찌꺼기!
-맞아, 커피 찌꺼기보고 커피라고 하진 않잖아.
“한마디로, 환영이야.”
“……아쉽네요. 그래도 저 사람들이 깨어나면 환영이 아닌 거 아니에요?”
“아니, 그래도 환영이야. 데자뷰가 그렇게 말했거든.”
“뭐라고 했는데요?”
“모든 유저가 성공적으로 서버에서 빠져나온 것을 확인했고, 저 조각들은 번인 현상이라고.”
“하지만…… 저들이 움직이면 상황이 달라지잖아요?”
“그게 또 그렇지가 않아. 실제로 접속을 종료해도 움직이는 번인이 여러 차례 보고됐거든. 흔한 사례래.”
-ㅇㅇ 분명 접속 종료했는데 남아서 활동하다 사라진 경우가 몇 번 있었음
-최장 시간이 하루였나?
-전투까지 했었나?
-그건 아님
-뭐가 뭔지;
-걍 딱 요약해 줌. 1, 저건 번인 현상이고 환영에 불과하다. 2, 움직여도 마찬가지다. 번인은 인격의 복제나 마찬가지다. 서버에 기록된 것을 토대로 인공지능으로 재구성되는 거지. 3, 정신 차려라, 겜덕들아. 사람이 그러면 저기에 50년 동안 갇혀 있었다는 얘긴데 말이 되냐?
-아 ㅇㅈ
음탕은 시무룩해져서 자리에서 쿵쿵 뛰었다.
왕이나가 그걸 보고 물었다.
“왜?”
“그냥요, 억울해서요.”
“뭐가?”
“상혁 씨는 친구들인 줄 알고 놀라서 쓰러졌는데, 그냥 흔적이라잖아요?”
“동화 같은 결말을 기대했구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나 백설 공주처럼 왕자님이 나타나면 해결될 줄 알았어요.”
-우리 탕이 마음 여린 거 봐 ㅠㅠ
-구독으로 혼내 줘야겠어!
좋은 친구들의 안색도 편안하지 않았다.
음탕도 눈치를 살피더니 물었다.
“괜찮으세요? 혜연 님, 재민 님?”
“아,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네, 괜찮습니다.”
“처음에는 상혁이가 쓰러졌다길래 놀라서…….”
그들은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힘들어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음탕이 왕이나에게 물었다.
“언니, 그러면 초모 님은 뭐래요?”
“그게…….”
***
송하린이 눈썹을 꿈틀했다.
채팅 창이 갱신되지 않고 있었다.
“형님, 이거.”
“네, 끊긴 것 같습니다.”
“조용해서 좋긴 한데, 공포 영화 같아서 무섭습니다.”
왕이나의 채널과 연결이 끊겼다.
커뮤니티도 통신 불량.
이런 경우가 흔하냐고 묻는다면 흔하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커뮤니티 통신 불량은 자주 있는 현상이었다.
특히나 깊은 유적지나 먼 거리에 있는 경우, 마치 전파를 이용하는 것처럼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는 상황이 허다했다.
하지만 채널과의 연결이 끊기는 것은 의외의 상황이었다. 송하린이 성진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습니다.”
“네?”
“스트리밍 도중에 끊긴 적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유적이나 미궁에서도요. 미로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데자뷰가 요즘 일을 허투루 하는 것 같습니다.”
“…….”
-야! 야, 야! 우리 말 안 들려?
-흡! 다시 연결될 때까지 숨 참겠습니다.
-깨꼬닥!
-와, 미로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
-하긴 지금 보고 있는 사람만 해도 어지간한 도시급 인파가 몰렸는데 ㅋㅋ
-고럼 ㅇㅈ 서버 증설 좀 해라! 감자 서버냐!
-한 번 끊긴 것 가지고 거 준내게 뭐라 하네 ㅉㅉ
채팅 창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말들이 주르륵 올라왔지만, 성진과 송하린은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졸지에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좋은 친구들도 크게 도움되지 않을 것이다. 일전에 그들이 한 번 도달했던 곳에 도착한 것 같았다.
성진은 앞에 있는 석상을 보고 생각에 빠졌다.
아마도 이들이 좋은 친구들의 일원인 것 같았다.
“어? 형님, 혹시 그거 아니겠습니까?”
“네?”
“인원 제한이 걸린 게 이것 때문 아니냐고요. 처음에는 6명이 입장했는데 우리는 4명밖에 못 들어왔잖습니까?”
성진은 석상이 된 2명을 인원으로 치부하는 건 너무하다 싶었다. 송하린도 조용히 불평했다.
“버그도 안 고치고 뭐 하는지…….”
물의 추기경이 석상을 만지며 말했다.
“혹, 빠져나오지 못한 좋은 친구들이 아닐까 싶네요.”
“생명력은 안 느껴지십니까?”
베어가 추기경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참으로 안타까워요.”
성진은 이선익의 모습을 살폈다.
두꺼운 중갑에 젖혀진 투구, 그리고 펄럭이던 망토.
머리에 가볍게 흐르는 피까지 굳어 있었다.
갑옷의 곳곳을 살피던 중,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이름?”
“네, 형님? 이름이라고요?”
“이름이라니?”
성진이 갑옷의 연결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일렬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송예지, 정재민, 최혜연, 심대형, 김상혁 증
친구들이 함께 구매한 갑옷 같았다.
성진은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짐작만 할 따름이었다.
같은 시각, 스튜디오에서는 최혜연이 그 갑옷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저, 저희가 돈을 모아 샀던 갑옷이에요. 최상등품이긴 했어도 이때는 더 좋은 걸 살 수 있었는데…….”
최혜연은 갑옷을 품에 안고 울던 이선익이 떠올랐다.
-오아우, 이애애(고마워, 힘낼게).
-이제 선익이 더 잘 맞겠다!
-진짜 가진 거 다 털어서 보태 준 거다! 도망가기만 해!
-친구에게 보증 같은 건 서는 게 아니라고 했거늘…….
투구를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이선익은 정수리를 긁적였다. 친구들은 쏘아붙이는 말과 달리 하나같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당시, 송예지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선익아, 우리 중에서 제일 비싼 걸 입었는데 소감 한마디!
-그래, 소감! 원래 좋은 옷을 입으면 좋은 사람이 된다잖아!
그러자 이선익은 이렇게 말했다.
-어우 오아우, 이어에 어우이우 아아이 애애.
-엥, 뭐라는 거지?
-상혁아! 너 선익 만점이잖아, 얘 뭐라는 거야?
김상혁은 조금 눈시울이 붉어져서 뒤돌아서 대꾸했다.
-너무 고마워, 이거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게.
-뭐?
-아, 몰라.
이선익은 그 갑옷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미숙하던 운영은 탄탄해지고 어설펐던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없어졌다.
그리고, 싸우고 싸워 별이 된 그는 결국 모두가 돈을 모아 샀던 갑옷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
언젠가, 최혜연이 물었다.
-선익아, 이제 갑옷 바꿀 때 됐잖아? 활금강이 어디 가서 그런 갑옷을 입고 다니면 욕먹어!
-냅 둬, 얘한테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는데도 들어먹질 않는다.
-왜 안 바꾸는 거야?
이선익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어어 우우에. 아 이어어 에.
조금 길어진 말에, 또 김상혁을 바라봐야 했다.
김상혁은 말했다.
-이거면 충분해, 난 이거면 돼. 붕신.
-븅신.
-븅신이네.
-선익아, 너 븅신이야. 알아?
-아아!
‘알아’.
스튜디오의 최혜연은 가슴을 부여잡고 울었다.
“허어…… 끄흐…… 허어…….”
“괘, 괜찮으세요?”
정재민도 참으려 했지만, 그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코를 삼킨 그가 말했다.
“븅신…….”
동상을 살피던 성진이 오른쪽의 마법사를 쳐다봤다.
재기 넘치는 웃음과 자신감 있는 자세.
“이들이 활금강이었나 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저 문 너머에 뭐가 있을 것 같습니까?”
“모래가 전부 빨려들어간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뭔가가 있겠군요.”
사실, 골치가 아픈 문제였다.
성진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문제가 가볍지 않았다. 시초의 유적은 결코 수준 낮은 곳이 아니었다. 또한, 6명이서 전력을 다해도 통과하지 못했던 곳을 고작 4명이서 통과해야 했다.
신관 둘, 검사 하나, 도적 하나.
불안한 구성과 더불어 휴식도 완벽하게 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이곳으로 이끌었고 그것을 해결해야 다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준비됐으면 가시죠.”
“준비야 항상 되어 있지.”
일행은 계속해서 걸어 닫힌 문 앞에 도달했다.
지금도 살아 있는 모래가 계속해서 문 너머로 들어가고 있었다.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물의 추기경이 문의 잠금을 해제했다.
철컥.
끼기기긱.
드드드드드.
문이 열리는 굉음과 함께 드러난 공간은 상당히 특이했다. 일자로 뻗은 짧은 다리, 그리고 그것을 지나치면 넓은 정방형의 공간이 나왔다. 안심할 수 없는 것은 다리와 정방형의 공간 모두 외곽에 시커먼 어둠이 있다는 점이었다. 떨어지면 죽는다는 얘기다.
서둘러 주변을 확인했다.
바위 거인, 그리고 병사와 마법사, 장군 등의 석상이 외벽에 빼곡이 차 있었다.
“이게 다 뭘까요, 형님?”
“저길 보세요.”
성진이 가리킨 방향에는 살아 있는 모래가 벽을 타고 방 안을 빙글 돌고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어? 저기, 무슨 석상이 있습니다.”
드드드.
“움직이는 것 같은데요?”
드드드드드.
-아 홈타락, 메 오이심!
콰지직!
귀청이 떨어질 만한 소리가 방을 뒤흔들었다.
알아 듣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 뜻은 신기하게도 뇌리에 남았다.
-누가 감히 비밀을 엿보려 하느냐.
홀로 외로이 서 있던 석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긍.
성진과 송하린, 그리고 베어가 무기를 빼 들었다.
스릉.
눈을 마주친 성진과 송하린은 재빠르게 앞으로 달렸고 베어는 위협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추기경의 곁에 남았다.
파지직!
“흐아압!”
송하린이 뻗은 검격이 검은 뇌전을 방출하며 주변을 휩쓸었다.
사아악.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살아 있는 모래 한 덩이가 그 공격을 막았다.
퍽!
“진흙을 때리는 것 같습니다! 혼자서는 힘들 듯!”
“갑니다!”
성진이 주변의 모래부터 불태우고자 볼을 부풀려 불을 뿜었다.
콰아아아아아아!
화르르륵.
그 공격에 모래 덩이들이 축 늘어져서 흩어졌다. 외벽을 타고 새로운 모래가 충원됐다.
아무래도 이 방의 주인인 듯한 석상의 피부가 깨져 나가며 돌에서 완전한 살점으로 변모했다.
그는 짧은 지팡이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모래 몇 덩이가 빠져나가 외벽을 타고 병사들의 몸으로 들어갔다.
키잉.
모래 병사의 눈에 흉광이 깃들었다.
그들은 몸을 날려 정방형의 공간에 내려앉았다.
쿵!
하지만, 눈치 빠른 베어가 몸을 날려 막 내려선 병사들에게 발 차기를 했다.
팟!
퍽!
퍽!
두 구의 모래 병사는 어두운 공간으로 떨어졌다.
남은 병사 1명은 재빨리 자세를 잡고 베어를 상대했다.
휙-!
휘익-!
베어는 재빠르게 몇 번의 공격을 회피한 후 단검으로 공격을 가했다.
캉!
“제길.”
그는 허리에서 새로운 무구를 꺼냈다.
탄탄한 철로 만들어진 둔기였다.
콰앙!
그의 둔기가 병사의 머리를 깼다.
“조심하십시오!”
뒤에서 물의 화살이 날아왔다.
퍽!
퍼억!
베어를 노리던 두 병사가 물 화살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베어가 잠시 주변을 훑어보았다. 사방에서 병사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나,
셋,
일곱.
“……안 좋군.”
베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서둘러 물의 곁으로 합류해 수비로 전환했다.
성진과 송하린이 이 문제를 일으킨 석상을 부숴 주길 바라며.
성진과 송하린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방해돼!”
서걱!
모래를 베어 보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모래는 흩어져서 다시 돌아왔다. 그사이 송하린과 성진은 다른 모래를 상대해야 했고.
“지팡이! 지팡이를 부숴야 합니다!”
“알고 있는데 어렵습니다!”
성진이 몸을 날려 다가서려 하자, 살아 있는 모래가 거칠게 일어나 반격했다.
파아앙!
성진이 바람을 불자 모래가 외벽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다른 곳이 문제였다.
후우웅!
콰지직!
성진은 재빨리 몸을 뺐다.
살아 있는 모래가 깃든 바위 거인이 손을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대응이 늦었다면 납작하게 찌그러졌을 수도 있었다.
“지팡이를…….”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게 되었다.
문제는 저 괴인이 휘두르는 지팡이였다.
지팡이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아마도 저 지팡이가 살아 있는 모래에게 계속해서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쿠우웅!
쿠우웅!
바위 거인 둘이 정방형의 공간에 내려왔다.
성진과 송하린의 안색이 계속해서 어두워졌다.
문제는 하나였다.
적의 방어력은 굳건한데, 성진과 송하린은 지금 공격과 방어를 둘 다 하고 있었다.
뒤쪽에서 힘든 싸움을 이어 가는 베어와 물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선택해야 했다.
저들이 위험에 처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나아가 지팡이를 부수든지, 혹은 저들과 뭉쳐 틈을 찾든지.
성진과 송하린은 이 시련이 끝이 아닐 것을 짐작했기에 후자를 선택했다.
그들은 주욱 물러나 베어, 그리고 물과 합류했다.
서걱!
서걱!
파아앙!
성진과 송하린이 후열에 합류하자 물과 베어가 한숨을 돌렸다. 물의 지원이 더해지자 성진과 송하린의 몸도 더욱 가벼워졌고.
문제는, 상대도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송하린이 소리쳤다.
“모래가! 모래가 합쳐집니다!”
“제길, 파고들어야 합니다.”
“당장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예요! 바위 거인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서로의 고성이 가득한 공간에 두 모래가 있었다.
성진이 잠시 그 모래들을 흘겨보았다.
계속해서 그들에게 따라붙던 두 모래.
그 모래들은 성진 일행을 잠시 보다가 들어온 입구를 통해 되돌아갔다.
기묘한 일이었고, 이를 눈치챈 사람은 성진밖에 없었다.
콰아앙!
“저, 저게 뭐야?”
베어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모래가 합쳐져 거대한 교룡(蛟龍)의 형태가 되었다.
그 교룡이 꼬리를 후려쳐 왔다.
후우웅!
성진과 송하린이 재빠르게 다가가 검으로 지탱했다.
콰직!
“크으윽…….”
“으으…….”
억눌린 신음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수가 부족했다.
공격을 막았으면 반격을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최별과 합류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모험가의 격언 중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모험가가 혼자라면 강할지라도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비록, 이런 상황을 빗댄 것은 아니겠지만 성진은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으아아아아!”
콰아아앙!
성진이 팔을 크게 떨치자 교룡의 꼬리가 날아가 모래 병사들을 휩쓸었다.
콰직!
콰지직!
상황이 좀 나아진 것 같자, 성진의 눈에서 서광이 흘러나왔다.
마찬가지로, 송하린도 자세를 가다듬고 눈에서 검붉은 기운을 뿜었다.
그으으으.
바위 거인이 천천히 팔을 뻗었지만 그 안에 담은 힘은 막강했다.
성진이 팔을 두 번 베고 송하린이 이어 목을 날린 후에 거인의 핵까지 부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다른 거인이 틈을 노리고 공격해 오자 연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베어는 물에게 접근하는 병사들을 견제했고 물은 상대의 수를 차근차근 줄이고 있었지만 오히려 상대의 머릿수는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패색이 짙었다.
성진은 뭔가 수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와중, 그들이 너무 구석진 곳에 몰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위험해!’
그의 감각이 경고했다.
재빨리 교룡으로 시선을 돌리자, 교룡의 입에 거대한 힘이 모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래의 숨결이었다.
-이옴, 파시타!
방의 주인이 뭐라고 외치자, 교룡의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이미 늦었다.
고속으로 사고하는 성진의 뇌리에 절망이 그려졌다.
자신과 송하린은 살 수 있다. 어쩌면 베어까지도.
하지만 물을 잃을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생각보다 먼저 몸이 나갔다.
송하린도 마찬가지.
몸이 먼저 튀어나와 숨결을 막으려 했다.
‘막을 수 있을까?’
막는다 치더라도 다른 공격에 휩쓸릴 우려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하는 행동이 최악의 수일지 몰랐다.
하지만, 맞서야 했다.
그때 고함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들이 지나온 입구에서부터 들려온 그 소리는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고 그 고함의 주인은 어찌나 빠른지 성진과 송하린을 지나쳐 어느새 교룡의 숨결 앞에 다다라 있었다.
‘누구……?’
처음에는 베어일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 사람은 망토를 휘날리며 큰 타워 실드로 숨결을 막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성진은 그 등이 어딘가 낯익다고 생각했다.
‘어디서 본…….’
아까 보았던 석상.
성진과 송하린은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쳐다봤다.
곧장, 입구에서 거대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후우웅.
파아아아아아앙!
회오리 모양의 폭격이 모래 병사의 진영에 가해졌다.
그것을 얻어맞은 병사들은 산산이 조각났고 바위 거인도 떠밀려서 밑으로 추락할 뻔했다.
교룡의 숨결이 멎었다.
동시에, 시청자들과 성진 일행의 사고도 잠시 멎었다.
심대형과 이선익이었다.
그들이 살아 움직이자 스튜디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번인 현상으로 움직이는 허상일 뿐, 진짜 자신들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라도.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재민이 소리쳤다.
“대형아! 선익아!”
“선, 선익아…… 흑…… 흑…….”
최혜연마저 바닥에 널브러져 화면을 쳐다봤다.
막강한 화력을 지닌 마법을 보여 준 심대형도 심대형이었지만 교룡의 숨결을 아무렇지 않게 막아 낸 이선익도 대단했다.
이선익이 방패를 훅 털고 미소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그의 모습은 영웅같았다.
그는 투구의 안면갑을 내렸다.
철컹.
투기, 패기, 신의라는 이름의 힘을 사용하는 기사.
그중 신의의 끝에 도달한 ‘선의 날개’가 말했다.
“애아 아.”
그의 갑옷이 황금빛이 되었다.
“이아 이.”
내가 앞, 네가 뒤.
오랜 잠을 자던 이들이 깨어났다.
이들이 정말 좋은 친구들인지, 아니면 단순한 번인의 흔적인지는 데자뷰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