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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158화 (158/222)

# 158

158화

***

성진은 쪽지를 쥐고 그림자와 대화를 나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그게…….”

“말하기 곤란한 내용입니까?”

“아, 아뇨! 제가 숨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제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드러나는 걸 원치 않으시는군요.”

이제는 척하면 척이다.

스칸다에선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음을 되찾는다고?’

자신을 놀리려는 게 아니라면 분명 가능성이 있기에 한 말일 것이다.

마탑의 탑주씩이나 되어서 이런 장난을 칠 리도 없고.

하지만, 10명이 넘는 인원의 젊음을 되찾아 준다는 말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아마도 대가가 있을 것이다.

젊음을 빼앗기고 노인으로 살아가게 된 모험가들.

늘 감사한 마음뿐이었고 성진은 그들의 젊음을 되찾아 주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스칸다는 그 시기에, 모험가들이 그곳에 있었기에 지켜졌을지도 몰랐다.

당시의 성진은 시조를 막기는커녕 동료들을 방패 삼아 싸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시스가 분명…….’

이시스는 말했다.

금지된 마법을 사용한 반작용으로 늙은 것이라고.

가능성과 활력을 빼앗긴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성진도 알고 있었다.

잘 살고 있지 못했다.

나름 모험가로서 잘나가던 그들이 하루아침에 노인이 되었으니 잘 살고 있을 리 만무했다.

성진은 그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니 그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일단 실마리가 있다면 찾아볼 생각이었고.

“그…… 추, 추방당하신 분들이라 정체가 밝혀지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셔서요.”

“추방? 추방이라면…….”

성진은 상대가 어느 곳에서 추방당한 것인지 대강 눈치챘다.

“설마, 우르트의 일족?”

“……예.”

이시스가 우르트의 일족이었다.

운명의 샘에 도달할 수 있는 종족.

금지된 마법도 그곳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성진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제, 제가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빛이 한숨 쉬었다.

“우르트의 할망구들은 성국의 구석진 곳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어요. 여전히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어서 솔직히 저는 좀 꺼려지네요.”

“제게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럼…… 제가 안내하죠.”

“언니?”

“나는 할망구들이랑 사이가 안 좋잖아. 미움받더라도 내가 받는 게 나아.”

그림자가 감격한 듯이 빛을 껴안았다.

“언니! 고마워!”

“하, 하지 마! 징그러워!”

-이건 또…… 이거 나름대로 좋군…….

-훌륭해. 10점.

-실례지만 저와 결혼은 어느 분이 하시는 거죠?

-실례입니다. 그런 사람 여기 없습니다.

-아, 소까?

빛이 성진을 안내했다.

그림자의 권역은 음울하기보다는 조용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온통 흰색 건물인 와중, 건물의 높낮이와 햇빛의 방향 등이 절묘하게 작용하자 권역 곳곳에는 종일 어두운 곳이 만들어졌다.

빛이 말했다.

“저는 솔직히 이런 곳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밝은 것을 좋아하시는 겁니까?”

“예,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잖아요? 어두운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글쎄요.”

-(뜨끔!)

-(불 꺼놓고 애니 보는 거 좋아하는 1인)

-선생 : 너희가 어둠의 자식들이냐? 반장! 커튼 걷어!

-아 ㅋㅋ 쌤 매크로 2번 에반데.

빛은 성진에게 시시콜콜한 얘기도 가리지 않고 했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있겠죠. 제가 빛을 믿듯, 동생이 그림자를 믿는 것처럼요. 또 그런 동생에게도 사람들이 따르는 것을 보면.”

“잘 아시잖습니까?”

“사제회의 교단이 강성한 단일 교단이 아닌 이유도 이 때문일까요? 교단은 늘 서로를 견제하고 독주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거기에 나쁜 뜻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옳은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것.”

“맞아요! 추기경 중 누군가 독선적인 생각을 품는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은 다른 교단의 추기경들이에요.”

“지금은 그 기능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건가요?”

“그건……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괜찮습니다.”

빛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직 젊고 완벽하지 않았다.

정답은커녕 해답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아직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요.”

“네?”

“사람들은 실수할 수 있고 그것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감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 왔거든요.”

갑자기 대구의 김정우 박사가 떠올랐다.

또 누군가를 떠올리려 하는데, 빛이 말했다.

“불과 물, 바위를 보면 그 생각을 해요.”

“그들은 악인입니까?”

“제가 그들을 다 알 수는 없죠. 아마 악인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니라면 그냥 망연자실해서 주저앉은 사람일 수도 있죠.”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들의 근래에 사치와 향락에 젖어 든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거든요.”

“그럼, 어째서?”

“그게…… 아마도 신성력을 잃으면서였을까요?”

후우욱.

어두운 공간의 연초.

얼마 전, 그림자를 맞이했던 세 노파가 드러났다.

“흘흘, 선남선녀로구먼.”

“좋은 짝이야.”

빛이 화들짝 놀라 황급히 대꾸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래서 여기는 오기 싫었다니까!”

“나도 소리만 빽빽 질러 대는 네년보다 네 동생이 더 귀엽단다.”

“아무튼, 사람을 소개해 드리려고 왔어요.”

“일 없다. 넌 가 봐도 좋아.”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기분이 잔뜩 상한 빛은 걱정스럽게 성진을 쳐다보았다.

“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성진의 힘을 아는 빛은 그 말에 따랐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자리를 떠났다.

“참 맹랑한 계집이야, 호호.”

“안녕하십니까.”

“그래, 네가 올 줄 알았다.”

“네?”

“너무 놀라지 말거라. 그냥 해 본 말이니까.”

“…….”

깔깔대며 웃는 기괴한 생김새의 노파들.

우르트의 일족이 전부 마녀인지는 성진도 몰랐지만, 이들을 보고 있자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눈을 꿰맨 노파가 물었다.

“무엇이 궁금하지? 네 미래가 궁금한 것이냐? 그렇다면 답해 줄 수 없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래? 보통 우리를 찾으면 그것부터 물어보건만.”

“제가…… 빚진 자들이 있습니다.”

“흘흘흘…… 안다.”

“그렇습니까?”

“이번엔 놀라지 않는구나.”

“그냥 해 본 말이라고 하실 테니까요.”

“우히히히! 아니, 이건 직접 들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직접 들었다는 말이 무슨…….”

스르륵.

어둠 속에서 다른 노파가 등장했다.

그 모습은 꼭 낯이 익고 그리운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이시스.”

얼굴이 쭈글쭈글해지고 그 눈의 총기는 무거워진 눈꺼풀에 가린, 마녀 이시스였다.

그녀가 바스카리에 와 있었다.

“정말, 어느새 이곳까지 오셨군요.”

“이곳에서 지내는 겁니까?”

“딱히 갈 곳이 없어서요. 일족에게 돌아가기도 싫었고.”

“흘흘흘, 돌아가도 넌 받아 주지 않을 거다!”

“뭐, 할머님도 그렇다네요.”

성진은 이시스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한 터라, 흘려보내도 될 말을 내뱉었다.

“다들 어떻게 지내는 겁니까?”

“모든 모험가의 소식은 알지 못하지만…… 잘 지내요.”

성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거짓말이군요.”

“네, 거짓말이에요.”

당연한 말이었다.

모험가로 지내 오던 사람들이 업계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다 늙은 몸으로.

그들의 마음은 아직 세상을 품고 싶었으나, 그 육신은 그 모든 걸 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 괴리는 상상 이상으로 괴로울 게 분명했다.

성진은 이시스에게 말했다.

“당신과 모험가들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습니다.”

이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짓고 얘기했다.

“불가능할 거예요. 운명의 샘을 지키는 위대한 분들과 직접 거래한 것이니까.”

“그것을 무를 수는 없는 겁니까?”

“정당한 거래였으니까. 감히 무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죠.”

귀를 꿰맨 노파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떼엑! 떼를 쓰면 쓰나!”

“하지만…….”

“아이야, 보아라. 칼자루는 네가 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쥔 것이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에게 그들의 젊음을 되찾을 방법은 없고, 그 방법은 운명의 샘을 관장하는 그들만이 행사할 수 있다. 네가 그들의 말에 충실히 따라도 모자랄 판이다, 이해하니?”

“……예.”

“또한, 그들이 젊음을 돌려준다고 해도 다른 것을 받아 갈 것이다. 모든 것은 같은 값어치를 갖지. 즉, 10명이 넘는 모험가들의 젊음과 똑같은 가치의 무언가를 가져갈 것이라는 얘기다.”

“…….”

이시스가 성진의 소매를 잡았다.

“우리는 괜찮아요. 어쩌면 살아오면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함께했는걸요.”

“지랄, 시집가긴 다 틀렸다고 이 할미한테 질질 짜던 건 생각 안 하고 말을 막 뱉는구나.”

“할머니! 그건 비밀이잖아요!”

“비밀은 운명의 샘에 바치는 맹세를 말한다. 네 시집은 예외야!”

“이이…….”

“울상 지어도 이젠 예쁘지 않다. 너도 이 할미처럼 늙었거든.”

코를 꿰맨 노파가 실컷 웃다가 성진의 허리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이 있었다.

“아, 아이야. 혹시…… 그 검을 볼 수 있겠느냐?”

“검 말입니까?”

“그, 그래! 잠시만, 아주 잠시면 된다!”

성진이 검을 뽑았다.

스릉.

정유리가 하품했다.

“지금은 밤입니까? 이 할머니들은 동료입니까? 아니면, 베면 되는 겁니까?”

노파들의 표정은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말하는 검 첨 보나? ㅋㅋ

-우린 자주 봤어욥. 킄크루삥뽕

-정유리 비쥬얼이 좀 충격적이긴 하짘

성진은 검이 말하는 것 때문에 노파들이 놀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파들의 질문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 검은, 혹시 별의 용광로에서 태어난 검이더냐?”

“맞습니다.”

“그렇군…… 그랬어.”

“왜 그러십니까?”

눈을 꿰맨 노파가 이시스를 힐끗거리고 답했다.

“아이야, 어쩌면…… 칼자루는 이쪽에도 있을지 모른다.”

***

다음 날, 사제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날은 추기경뿐만 아니라 고위 사제부터 중급 사제까지 자리했다.

특이한 점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아무도 떠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입을 뗐다.

“환영합니다. 갱, 그리고 살라.”

“영광된 자리에 함께하게 된 모험가 협회 소속 갱입니다.”

“지혜의 고리를 대표해 온 살라예요.”

성진은 이번 회의가 어차피 어제와 같은 내용의 도돌이표일 것이라 예상했다.

살라와 갱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었고, 이미 자신에게 어떠한 시험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으니.

‘음?’

그런데, 어제와 다른 점이 있었다.

불과 물, 그리고 바위의 표정이 기묘했다.

그것을 바람도 느꼈는지 그들에게 물었다.

“심각한 일이라도 있나?”

“아니, 아닐세.”

“내버려 두게.”

“흠…… 흐흠…….”

성진은 갸웃하고 갱과 살라의 얘기를 마저 들었다.

역시나, 어제와 같은 내용이었다.

바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좋지 않은 상황이군. 잘못하다간 큰 참사가 벌어지겠어.”

살라가 답했다.

“특작대를 구성하는 것도 사실은 도박이에요.”

“확실히. 시초의 유적이라면 나도 들어 본 적이 있지.”

“발굴 조사단장을 비롯하여 모든 이가 죽은 유적이에요. 황급히 그 문을 닫은 후엔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지만 50년 전 좋은 친구들이 마지막으로 들어간 이후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죠.”

“그들은 왜 시초의 유적으로 향했지?”

살라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식으로 바람을 쳐다보았다.

“모험가에게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그곳에 모험이 있으니까.”

“협회는 무슨 근거로 그들에게 접근을 허용한 것이고.”

갱이 그 질문에 답했다.

“성채남보석부터는 협회도 어찌하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지시는커녕 제안이나 권유도 겨우 하는 수준이죠.”

“강한가?”

“보시면 아시잖습니까?”

송하린과 성진을 슬쩍 쳐다본 바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ㅇㅈ.

-역시 고슈진사마…….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누군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꼭 성국이 이 일을 지원해야 하는 건가?”

“그, 그렇지.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런 건 전문가가 따로 있는 법인데…….”

“성국도 외부에 함부로 인원을 돌릴 수는 없고…… 또…….”

불과 물, 바위였다.

그들은 초기 대응과는 달리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성진은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불이 쩔쩔매며 말했다.

“아, 아니 그렇잖아. 사실 이 시험이니 뭐니 하는 내용도…….”

갱이 그의 말을 끊었다.

“불이여, 지금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그리고 초모는 추기경이기 이전에 성채남보석 모험가입니다. 협회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라는 얘깁니다.”

“다른 모험가도 있잖아!”

“여유가 없는걸요. 또 초모보다 이 일에 적합한 사람을 찾기 힘들고요.”

“어째서지?”

“그가 균열을 닫을 수 있는 대신관임과 동시에 스칸다에서 무력으로는 손에 꼽히는 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모의 무력이 강하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는지 추기경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경직되었다.

“그, 그런가?”

“그가 이 일을 맡지 않는다면 사태는 어디까지 커질지 모릅니다. 새로운 모험가를 이곳까지 모셔 와야 하고 그가 적합하든 적합하지 않든 균열은 더 거대해질 것이니까요.”

“…….”

“오랜만에 성국과 협회가 의견을 합치시켰기에 저는 기뻤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도 삐걱거려야 하는 겁니까?”

불과 물, 그리고 바위가 난처하게 식은땀만 흘렸다.

어제와는 다른 모습에 성진은 그들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물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내, 내일.”

“예?”

“내일, 마저 얘기할 수 있을까?”

“그때에는 사제회에서 확실한 결정을 내리는 겁니까? 이 일은 더는 늦춰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 내일은 확실히 결정할 것이니 조금만 생각을 정리하게 해 줬으면 하네.”

“……알겠습니다.”

살라가 물을 째려보고 갱과 함께 자리를 떴다.

두 번째 회의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

바스카리에는 성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꺄하하하! 나무! 나무!”

우드득.

성진이 나뭇가지로 공작을 만들어 내자 아이가 환호했다.

“꽃이시여! 여기 좀 봐주세요!”

“여기도! 여기도!”

사람들은 다면의 진실로 성진이 걸어온 길을 보았다.

혹은 그것이 아니더라도 바스카리가 부유하는 것을 경험했으니 성진을 향한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를 보고 눈물짓거나 환호하는 광경이 이제는 익숙해질 정도였다.

“우리를 떠나지 마세요!”

“늘 우리 곁에 있어 주세요!”

성진이 묵는 곳은 꽃의 교단의 거주 구역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의 구역에 스칸다의 주민들이 섞여 들었다.

툭.

“어?”

이방인의 허벅지에 어깨를 부딪쳐 넘어진 바스카리의 아이.

“괜찮니?”

“어, 엄마가 이방인이랑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래?”

“응, 위험하대. 속을 알 수 없대!”

“그렇구나. 그럼 우리 악수할까?”

“악수?”

“악수를 하면 전해지는 게 있을 거잖니.”

아이는 이방인의 거친 손과 악수했다.

노예로 지내며 굳은살이 박인 손.

그 손은 따듯했다.

“따뜻해.”

“조심히 가렴.”

조심스러운 어우러짐.

아직은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섞여 갔다.

어느새 석양이 졌다.

성진은 조금 피로해져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높은 건물에 올랐다.

그의 눈에 스칸다 대륙이 펼쳐졌다.

“저…….”

성진은 등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얘기나 하러 왔네.”

“그러시죠.”

난간에 기댄 상대는 물의 추기경이었다.

“자네가 떠나면 이 바스카리도 잠시 가라앉겠군.”

“그렇게 될까요?”

아마 아닐지도 몰랐다.

성진은 신도들만으로도 이제 충분히 바스카리가 떠오를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내가 싫지?”

“네.”

“어디서부터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생각이 많으신가 보군요.”

“내가 신관이 되던 그때가 떠오르곤 하네. 세례를 내려준 물의 주교님. 세상을 물의 평온함으로 채울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

“오래전 일입니까?”

“아주 오래전이지……. 늘 자신감에 차 있었고 믿음으로 충만했었어. 힘을 잃기 전까지는.”

물은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폭포수처럼 힘찼던 물줄기는 어느새 계곡물처럼 잔잔해졌지. 그래도 좋았어. 그런데, 어느 날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

“…….”

“자고 일어났더니 내 신성력이 바닥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거야. 울었어, 엄청나게 울었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죠?”

“문득, 거울을 보니까 내 얼굴이 무척 처량해 보이더라고. 창밖을 내려다보면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데 말이야. 겁이 났어. 이들을 지킬 수 있을까? 이들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신성력을 잃은 충격은 그만큼 거대했다는 얘기다.

그가 이야기를 이었다.

“나쁜 짓도 많이 했지. 그게 옳다고 믿었냐면 아니었어.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 왜 그랬을까? 난 왜 그랬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실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지. 나는 아직 대가를 치르지 않았어.”

“무슨 소립니까?”

물이 후드를 벗고 얘기했다.

“자네, 절대로 죽지 말게.”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보다 왜죠?”

“……자네가 이곳에 오는 그날, 나는 아마도 알게 된 것 같아. 내가 걸어온 길이 잘못되었음을.”

“…….”

“시험을 마치고 돌아와 나를 벌하시게.”

“……그것을 바라십니까?”

물의 추기경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 나는 바스카리가 다시 한번 제 모습을 찾았으면 됐어. 그거면 돼. 그게 보고 싶었을 뿐이야…….”

성진은 그가 어떠한 짓을 저지른 것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아마도, 그는 너무 먼 길을 오랫동안 헤맨 것 같았다.

자신을 바로잡을 누군가가 필요해 보였다.

“나를, 나를…… 허헉…….”

성진을 바라보던 물의 추기경의 눈이 탁해졌다.

다면의 진실을 목격할 때의 반응이었다.

잠시 후, 몸을 부르르 떨던 물의 추기경은 바닥을 짚고 조용히 읊조렸다.

“어째서…… 어째서입니까? 당신은 어째서 이렇게 힘든 싸움을 하는 겁니까?”

“…….”

“나는…… 나는 왜, 왜!”

“후회하십니까?”

“나는 왜 이렇게 살아온 거야…… 왜 이렇게 나약하게 산 거야…….”

“…….”

“후회합니다…… 후회해요. 내 삶을…… 내 선택을…… 내가 저지른 잘못들을 후회합니다……. 제가 변할 수 있을까요?”

성진이 바스카리를 내려다보았다.

콰아아아!

도시의 분수들이 요동쳤다.

통제 불가능한 수량이 갑자기 치솟아 하수도로 빨려 들어갔다.

성진은 답했다.

“이미 변하고 계십니다.”

“후회합니다…….”

성진은 어쩌면 신앙이 아주 간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장 필요한 때에, 원하는 것을 내주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다.

자신의 부족함으로 바스카리는 서서히 추락했다.

그것을 목격한 물의 추기경은 절망으로 몸서리쳐 왔다.

마음이 마모되어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희미해질 때쯤.

성진이 왔다.

희망은 아무렇지 않게 추락했던 바스카리를 하늘에 올려놓았다.

물은 한동안 계속해서 후회한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

어제와 똑같은 규모의 회의가 열렸다.

갑작스럽게 폐회된 어제의 회의 때문인지, 추기경들의 얼굴은 약간 그늘져 있었다.

잠을 못 잤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아직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건지.

그중 물의 추기경은 초탈한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얼굴이 하루 만에 핼쑥해진 그를 바라보는 불과 바위의 표정도 볼만했다.

불과 바위도 착잡했다.

이들의 사이에 생긴 균열과 급변하는 바스카리의 상황이 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살라가 말했다.

“그럼, 슬슬 확실하게 정해 주셔야 합니다. 이 이상 지나면 상황이 힘들어질 겁니다.”

바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지. 꽃을 파견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가 있나?”

바람이 빙 둘러앉은 이들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대하는 이가 없다는 얘기.

“그렇군. 꽃은 확정. 그렇다면, 그와 함께 갈 이를 정해야 하는군.”

“제가 가겠어요.”

빛이 가장 먼저 말했다.

바람이 물었다.

“어째서?”

“저라면 그를 잘 보필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째서?”

“그, 그야…… 미궁은 어둡고…….”

“아니. 빛, 당신은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군.”

“왜, 왜요!”

“일단 경험이 부족해. 추기경의 위치에 오른 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또 시초의 유적과 관련된 정보가 있었는데 당신은 그 정보를 고려했을 때 적합하지 않아.”

“정보? 정보랄 게 있었나요?”

“모래야.”

“네?”

“시초의 유적을 발굴한 발굴 조사단원들을 집어삼킨 건 마수도 뭣도 아니야. 그냥 모래였어.”

“그게 무슨…….”

“그렇다는군, 똑같은 이유로 그림자도 무리겠군.”

바람이 단정 짓자 그림자가 반발했다.

“나는 할 수 있어요! 자신 있다고요!”

“그 말은 내가 가는 것보다 그림자, 당신이 가는 게 낫다는 말이겠지? 확신할 수 있나, 그것이 오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건…….”

바람의 추기경은 신성력을 온전하게 다뤘다.

또한 그 힘도 사막에 적합했고.

“더 할 말 없으면 내가 가는 것으로 하자고. 내가 없는 동안 바스카리를 잘 부탁하지.”

빛과 그림자가 성진을 바라보고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항변했다.

성진은 입 모양만 뻐끔뻐끔하며 항변하는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시험은 무를 수도 있었고, 상대는 여지만 주면 성진을 추기경으로 인정하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바꾸었는지는 확실하겐 모르지만.

그런데도 균열을 닫기 위해 나서는 것은 필요해서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맡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동료로는 누가 적합할 것인가.

바람도 좋다고 생각했다.

바스카리를 손에 넣는 것은 일단 큰 문제를 해결한 이후이니 굳이 빛과 그림자를 고집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럼…….”

“잠깐.”

“물?”

“……가지.”

“뭐?”

물의 추기경이 바람의 추기경을 쳐다보았다.

“내가 가겠다고.”

“그, 그게 무슨!”

“물! 제정신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물의 모습에 불과 바위가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그가 폭주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리려 했다.

“왜, 왜 그러는가?”

“이 사람아!”

빛과 그림자는 입을 떡 벌렸고, 갱과 살라는 연신 웃었다.

바람이 건조하게 물었다.

“능력은? 당신의 신성력은 온전치 않다고 알고 있다. 아닌가?”

물의 교단의 사제들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무슨 모함을! 함부로 얘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바스카리가 추락했던 것은 우리의 탓이 아닙니다!”

말을 하는 사제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항변했다.

그만큼 자신들의 추기경이 의심스러웠다는 것이고 그만큼 교단을 아끼는 것이었다.

물의 추기경이 손을 한쪽으로 뻗었다.

손바닥이 펴져 있으니 조용히 하라는 신호였을 것이다.

그의 입이 열렸다.

“바스카리가 추락했던 것은 어쩌면 내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자, 자네…….”

“그만 말씀하세요!”

물은 무언가를 초월한 표정을 짓고 바람을 바라보았다.

“이제, 뒤틀린 모든 것을 바로 잡겠다.”

조용하던 회의장이 떠들썩해졌다.

바람이 신성력을 응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키웠다.

그 소리는 굉음처럼 거대했다.

“다시 묻겠다! 그걸 이룰 능력은?”

물의 추기경이 양손을 하늘로 뻗었다.

파앗.

촤아아아아아아아!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 수 마리가 물의 추기경의 주변을 맴돌았다.

“…….”

“다시금, 물의 목소리가 들려…….”

“그렇군.”

“모래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성진이 웃으며 말했다.

“물과 함께 가겠습니다.”

성진의 선언에 빛과 그림자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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