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153화
최별을 보필하는 역할을 맡은 성명한은 오늘도 최별의 오피스텔에 방문했다.
미리 연락을 보냈는데도 답이 없다.
‘뻔하지.’
아마도 캡슐에 들어가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계속 봐 와서인지 이제는 익숙해져 트집도 잡기 힘들었다.
“점심은 드셨으려나.”
최별은 점심시간이 다 가도록 게임에 빠져 식사를 거를 때가 많았다.
프리미엄 캡슐이기에 자동으로 영양소가 공급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와 양질의 식사를 하는 게 좋다고 성명한은 생각했다.
“내가 구닥다린가?”
삑.
삐삐삐.
삐익.
성명한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우우웅.
반려동물 하나 기르지 않는 적막한 공간.
캡슐이 작동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부엌에는 무언가 차려 먹은 흔적이 없었다.
“역시.”
최재국에게 보고할지 아니면 적당히 꾸지람만 하고 넘길지를 고민했지만, 역시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다른 곳에 신경을 쏟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성명한은 최별이 어렸을 적부터 지켜보아 왔다.
그녀는 올곧게 자랐고, 크게 그늘진 부분 없이 자랐다.
그리고 착하고 어여쁜 여성이 되었다.
최별은 성명한의 딸과 비슷한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숙하며 점잖았다.
아마 좋은 집안과 결혼을 할 것이고, 그 댁의 아들은 최별을 많이 사랑하고 아껴 줄 것이 분명했다.
이토록 훌륭한 여성을 아껴 주지 않는 건 죄악이었으니까.
성명한이 캡슐로 다가갔다.
잘 정리된 방.
다만, 여성의 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삭막했다.
화장대에는 기초적인 제품만 있었고 방에는 그 흔한 인형 하나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가 죄송하다고 말한 대상은 둘이었다.
1명은 최재국이었고, 1명은 최별이었다.
아니, 셋이었다.
최별의 어머니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의 딸이 조금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이 더 힘을 냈어야 했다.
자신이 더 잘 보필했다면 더 밝게 자랐을 텐데.
그가 애지중지하는 아가씨는 연애 한 번, 진심을 나눌 친구 한 번 사귀지 못한 것 같았다.
캡슐 안으로 최별이 보였다.
최별은 자신의 자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에 선팅 기능을 자주 사용하곤 했지만, 성명한이 그렇게 해선 아가씨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어쩔 수 없이 유리를 투명한 상태 그대로 두었다.
이런 표현이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곤히 잠든 최별의 모습은 꼭 숲속의 공주 같았다.
캡슐 사용자의 몸 상태를 알려 주는 현황판은 정상 작동하고 있었다.
최별의 몸 상태는 완벽 그 자체.
통, 통.
성명한은 유리를 괜스레 두들겨 보고 방을 돌아 나왔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고 가져온 간식과 물품들을 쟁여 넣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식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플라스틱 통.
그도 이런 통 몇 개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약?’
평상시 고혈압 약을 가지고 다니는 성명한은 통을 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대부분은 어렵게 설명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어떤 약인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진통제…….”
성명한이 알기로 최별은 특별히 아플 일이 없었다.
‘아!’
잠시 착각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캡슐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최별이 좋아하던 게임을 할 때 곧잘 이런 약을 챙겨 먹었던 것 같았다.
성명한은 이 약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서 탁자에 앉아 최별을 기다렸다.
시간이 좀 지나, 최별이 캡슐 밖으로 빠져나왔다.
푸슈우.
“으…… 어? 와 있었어요?”
“아가씨.”
“지금이 몇 시지? 지금쯤이면 원래는 돌아갔을 시간 아니에요?”
“이 약은 뭡니까?”
“……아.”
최별이 민망하다는 듯이 탁자에 와 약병을 받았다.
그리고 얘기했다.
“최근에 조금…….”
성명한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스칸다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입니까?”
“뭐…… 종말 이후인지 스칸다인지 헷갈리긴 하는데 아마도 그것 때문이겠죠.”
“그 멍은 또 뭡니까?”
“멍?”
최별의 팔뚝에 푸르스름한 멍이 있었다.
“오며 가며 부딪혔나…….”
“흐음…….”
“미안해요, 조심할게요.”
성명한은 혹시 저 멍이 캡슐에서 생긴 멍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사례가 있기는 했다.
통각 수치를 최대로 높인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고통에 노출되면 신체가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여 몸에 상처를 만든다고.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벼락에 맞을 확률보다 희박했고 피해자가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의심만 있을 뿐.
“하아…….”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다른 것보다 끼니는 꼭 밖에서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아가씨.”
“예…… 노력해 볼게요.”
성명한이 한숨을 쉬고 품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게 뭐예요?”
“보시면 알 겁니다.”
스륵.
서류 봉투에 든 것은 사진.
사진은 동호회의 단체 사진과 같은 구도였다.
그들은 핸드폰의 LED로 글자를 만들거나 작은 미니 칠판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최고다 최별짱!
-5252! 우리 겸둥이~ 쥐앤장! 믿고 있었다고!
- 언니, 같이 쇼핑하자면서요!
-정보) 우리 중 아무도 최별의 연락처를 모른다.
-우리 친구 맞지? 아니라고? 사랑했다 XX련아!
-꼭 다시 모이자며. ㅠㅠ
-언니!! 우리도 자존심 있어! 연락해!
-장하다, 스칸다의 딸! 내가 다 키웠는데!
-초모랑 아무 사이 아니지? 누나? 아니지?
-배 아프다! 배 아파!
-010-202X-88XX 연락해! 진호 이번에 결혼한다더라!
이들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최별도 그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챘다.
“……길드원들.”
“어떻게 제가 다니는 회사랑 직함까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여, 연락처를 달라고 하기에.”
“까짓 거 연락처를 주면 그만이죠.”
“그때는 그런 거 싫어했잖아요.”
“저도 제 책상에 이런 사진 있는 거 싫어합니다.”
“……다음부터 안 그럴게요.”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는 주야로 찾아뵐 겁니다.”
“네? 왜요?”
“회장님이 그러라고 하셔서요.”
“아버지가…….”
“최별 님을 많이 아끼십니다. 자주 찾아뵙긴 어렵더라도 가끔 얼굴이라도…….”
“싫어요. 아직 부탁을 제대로 들어드리지…….”
“그런 건 전혀 상관하지 않으실 분이지 않습니까?”
“…….”
최별은 성명한이 좋았다.
그가 하자는 대로 하면 불행할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도 고집은 있었다.
“생각해 볼게요.”
“네.”
성명한이 말을 마치고 떠났다.
최별은 괜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면서 뜸을 들였다.
‘연락해 볼까?’
자신은 늘 이랬다.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을 못 했다.
상대의 반응이 두려웠던 건지, 진실한 친구가 여태 없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숫자로 최별의 손가락이 옮겨 가려는 순간, 그녀에게 격통이 찾아왔다.
“악…… 으으…… 으아아…….”
탁.
탁탁.
꿀꺽.
최별은 재빨리 약을 꺼내 입에 물고 물과 함께 삼켰다.
좀 있으면 고통이 잦아들 것이다.
카멜롯에 들어온 후 몸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멀린의 지시로 용의 피를 마신 이후부터였다.
“아파…….”
그녀가 방문한 병원에서는 별다른 이상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는 뻔한 대답만 들었을 뿐.
***
베디비어가 정신을 차렸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땐, 그를 위해 마련된 화려한 숙소의 침상이었다.
욱신거리긴 했지만, 화상을 입은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져 있었고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의문스러운 눈으로 가신에게 묻자, 가신이 답했다.
“초모 님께서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뭐? ……하하하하하하! 윽…….”
“왜 웃으시는 겁니까?”
“웃기지 않은가? 최별 경에게 당한 상처를 최별 경의 지우(知友)가 치료하다니.”
“……분하십니까?”
“아니, 전혀.”
베디비어는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가운을 걸치고 의자에 앉았다.
술이 마른 잔을 적셨다.
“술은…….”
“재밌군, 재밌어.”
“이제 란슬롯 경과의…….”
“아니, 그럴 마음은 솔직히 들지 않는군.”
“예?”
“증명을 포기할 걸세.”
“……어째서?”
베디비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빙글 돌릴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점잖지만, 다급한 소리였다.
쿵.
쿵, 쿵.
“누군가?”
“오웬 공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들라 하게.”
오웬이 가신이 열어 준 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는 숙소를 이곳저곳 훑어보더니 베디비어에게 다가갔다.
“운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실력도 모자랐지.”
“어차피 최별 경은 거기까지일 겁니다. 아니, 더 가더라도 란슬롯 경과 파시벌 경이 그녀를 막겠지요.”
“오웬, 하고 싶은 말을 하게.”
“아직 증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베디비어 경께서 란슬롯 경만 꺾는다면…….”
“그만.”
“충분히…….”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나?”
베디비어는 불쾌한 듯이 말을 이었다.
“증명은 이것으로 끝났네.”
“예? 그게 무슨…….”
“란슬롯 경과 최별 경이 붙는다면 자넨 누구에게 걸 생각인가?”
“그야 당연히 란슬롯 경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란슬롯이 더 강하니까. 근데, 난 최별 경에게 패배했네. 그것도 압도적으로.”
“……그건 아직 모르는 일 아닙니까.”
“오웬, 내가 자네를 곁에 둔 이유를 아는가?”
베디비어의 뜬금없는 말에 오웬이 눈을 부릅떴다.
입에 발린 말을 할지 속을 털어 놓을지 잠시 고민했지만, 거짓말도 상황에 알맞게 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진심을 털어 놓았다.
“서로에게 이용 가치가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맞아. 자네는 나를 이용해 귀족들의 위상을 확고히 하고, 원탁이라도 함부로 귀족들을 대우하지 못하게 만들고자 했지.”
“베디비어 님은 그것을 통해 권세를 얻으시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니야.”
“네? 무, 무슨…….”
“아니라고.”
“…….”
베디비어가 몸을 일으켰다.
“뒤가 구린 자들일수록 서로를 끌어당기게 마련이지. 그리고 구린 놈들 중 제일 구린 놈은 다가올 운명을 모르고 그들을 모두 품에 안으려 하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자네는 영특한 자이니 말하는 거야. 그간의 정이 있으니.”
오웬은 어쩐지 베디비어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낯설었다.
“지혜를 주십시오. 함께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것 아닙니까?”
“아직도 모르는구나, 오웬. 내가 너를 이용했음을.”
“뭐, 뭐?”
“이 싸움의 승자는 셋 중 하나일 것이다. 파시벌, 란슬롯, 최별. 뭐, 나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지.”
“무슨 소리냐 묻지 않습니까?”
“그들 중 1명이 카멜롯을 손에 넣었을 때, 자네들을 품으려 하는 자는 없을 걸세.”
“…….”
“자네들은 이제 사라져야 하는 운명인 게야. 이제 알겠는가?”
베디비어가 빙긋 웃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웬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이제, 그도 알았다.
베디비어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편이 아니었음을.
“우리를 속였구나.”
“말했지 않나. 구린 놈들은 구린 놈들끼리 모여들기 마련이야. 빈대들을 잡자고 성을 태울 순 없지 않나.”
베디비어가 술잔을 내밀었다.
술잔에 오웬의 당황한 얼굴이 비쳤다.
“빈대들만 태워야지.”
“처음부터…… 처음부터 귀족들을 품을 생각이 없었군.”
“나름 고역이었다고. 진정한 명예를 모르는 자들을 달래고 얼러 여기까지 오게 하기가. 내 명예도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더럽혀졌고.”
“후회할 것이오.”
“자네에게 선택지를 주지.”
“무엇이지?”
“카멜롯을 떠나. 그리고 조용히 살게.”
“어림도 없는 소리!”
“자네에게 다른 방안은 없어. 자네 성격에 얌전히 힘을 빼앗기면서 복종할 리도 없고 그렇다고 카멜롯에게 대들 생각인가?”
“못할 것 없지.”
“못할 것 있어. 자네는 멀린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가 보군. 그가 하는 일에 개입하면 가문 전체가 성문에 내걸릴 거야, 목만 남아서.”
멀린의 힘은 압도적이다.
오웬도 그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의 규칙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자 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승리는 없었다.
베디비어는 말했다.
태양이 지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거야.”
***
-최별 그녀는 신인가?
-핫한 건 오션랜드, 핫한 건 최별!
-장하다! 초모의 왼팔 손톱 때!
-디테일한 직책이네. ㅋㅋ
-베디비어 먼데? 왜 기권했지?
-란슬롯 프리패스 아니냐? ㅡㅡ
-일단 파시벌이랑 붙는 거나 보자고. ㅋㅋ
하지만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파시벌과 란슬롯의 대결은 무산되었다.
이번엔 일정이 뒤로 밀린 것이 아니었다.
파시벌이 기권했다.
“란슬롯과의 싸움에는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멀린이 파시벌에게 말했다.
“파시벌, 그대의 염원은 란슬롯을 넘어서야…….”
“그건 됐습니다. 어차피 별로 바라는 것도 아니었고 뒤에 돼지들이 지껄이는 걸 대충 말한 겁니다.”
“뭐, 뭐요!”
“이 무슨 모욕을…….”
“입 열지 마라, 돼지들. 모조리 목을 베어 버리기 전에.”
“이…… 이…….”
파시벌의 기세에 귀족들은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하고 분을 삭였다.
란슬롯이 파시벌의 반응을 재밌어 했다.
“이유는?”
“이쪽이 더 재미있어 보여서.”
“뭐?”
“멀린, 최별의 다음 상대는 제가 맞겠지요?”
“맞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음 증명을 치르는 것은 어떻습니까? 모두 두 번 걸음 하긴 싫으실 테니.”
“무슨…….”
-파시벌 급발진 머야?
-왜 저렇게 활기차 먼데?
-이렇게 준비도 없이?
-여보, 갑자기 회사 사람들이 집에 온다고요?
멀린이 최별을 쳐다봤다.
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하십시오.”
란슬롯이 결투장을 내려갔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며 최별과 눈이 마주쳤다.
별다른 반응 없이 그가 지나치자, 최별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대련용 갑주를 챙겨 입은 그녀는 파시벌에게 물었다.
“왜죠?”
“최별 경, 나는 별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다만 단 한 가지, 바라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요?”
“제 가문은 카멜롯에 뿌리가 깊은 가문입니다. 정당한 주인을 모시는 것을 기쁨으로 아는 곳이죠.”
“그래서요?”
“란슬롯은 완성된 자입니다. 누구도 그의 힘에 견줄 수 없고 그의 경지를 넘지는 못할 겁니다.”
“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 당신이 변해 가는 모습을 보고 다른 기대를 품었습니다.”
“다른 기대?”
“어쩌면, 제가 모실 주인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
“참된 기사네요.”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 두죠.”
“욕심이 없는 건가요?”
“욕심의 종류가 다른 겁니다.”
“다른 것도 많네요.”
-약간 충신 스타일이네.
-그 이방원 맞지? 그 사람 스타일이네. ㅋㅋ
-이방원이 무슨 충신이야. ㅋㅋ 정도전이겠지.
-이방원 맞거든? 무식하기는 ㅡㅡ
-지금 선죽교로 나올래? 철퇴로 좀 처맞아야겠다.
-ㅋㅋㅋ 단심가 부르면서 나가라 꼭. 후기 들려주고!
파시벌이 창을 휙 하고 집어 던졌다.
자신을 지원하는 귀족들이 있는 곳이었다.
콰직!
“힉! 무, 무슨 짓이오!”
“맡아 달라고.”
파시벌이 씨익 웃었다.
“다른 것을 같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오로지 증명하면 될 뿐이죠.”
“무엇을?”
“전부를.”
멀린의 시작 신호와 함께 파시벌이 움직였다.
그의 신형이 빛살로 변했다.
콰직!
“컥…….”
섬광의 기사, 파시벌.
그의 공격은 보이지도 않았다.
최별이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쿠웅!
다행히 파괴력은 최별이 우위였다.
문제는 상대의 공세를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깡!
까앙!
갑옷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최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최별의 주먹에서 불길이 피어올라 파시벌을 위협했다.
그러나 파시벌은 가볍게 피하고 최별을 때렸다.
쾅!
콰앙!
최별은 첫 격돌 이후로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맞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쾅!
쾅, 콰앙!
“으으…….”
얻어맞던 최별이 팔을 뻗었다.
그 속도가 전과는 좀 달랐다.
아주 빨랐다.
콰아앙!
“커헉…….”
“하하!”
최별의 공격이 처음으로 파시벌에게 적중했다.
파시벌은 최별이 웃자 같이 웃었다.
“재밌습니다.”
“나도!”
쾅!
콰앙!
콰앙!
서로 주먹을 교환하면서 이런 시시한 얘기를 했다.
둘은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난타전을 펼쳤다.
콰아아앙!
콰앙!
“으아아!”
“우으으아아아아!”
한쪽이 고함을 지르면, 다른 한쪽은 더 큰 고함을 질렀다.
그 모습이 광인들 같았다.
“푸하하하하!”
“으아아아아아!”
콰직!
콰지익!
싸움의 결과는 알 수 없었다.
최별의 기운과 파시벌의 기운이 부딪히자 경기장이 요동쳤다.
“누가, 누가 이기는 거요?”
“파시벌 님이시지? 그렇지?”
“저게 무슨 속도지?”
“파시벌 님은 그렇다고 쳐도…….”
성진과 송하린이 턱을 괴고 흔들리는 결투장을 보았다.
“이겼네요.”
“또 다쳤습니다.”
“이 정도면 다치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요, 형님?”
싸움의 승자는 최별이었다.
쿵.
파시벌의 신형이 뒤로 넘어갔다.
투구가 자연스럽게 벗겨져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후련한 듯 웃고 있었다.
“푸하, 푸하하하! 그래! 이래야지!”
“으으…… 뭐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최별 경,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란슬롯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싸움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아, 멀린. 대체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성진의 빛이 그를 감싸자 파시벌의 보기 흉했던 상처들이 아물었다.
너무 강하게 맞아 갑옷 파편이 피부에 박히기도 했는데 그 파편들도 자연스럽게 밀려 나왔다.
“좋은 동료를 두셨군요.”
“인복이 좀 있어서.”
“꼭…… 이기시길.”
***
파시벌과의 일전이 있고 난 후, 차례가 남은 기사 대부분이 증명을 거부했다.
사실상의 기권이었다.
최별이 여태 란슬롯과 싸워 왔던 상대를 거슬러 올라갔다.
클라마데우, 헥토르, 그리고 트리스탄.
이 중 둘은 기권했고 헥토르는 거검을 한 번 휘두르고 후련한 듯이 패배를 선언했다.
그들은 모두 최별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란슬롯을 이길 수 없습니다.
최별은 그 말이 부담으로 다가와 헛구역질을 했다.
고통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성진은 그녀가 걱정되어 물었다.
“괜찮습니까?”
-누나 갠찮아?
- 몸 안 좋으면 쉬었다 해; 몸 버리겠다;
-ㅠㅠ 통각 수치 낮추라니까!
“괜찮아요……. 그보다 뭐요?”
“케이와의 증명에서 확신했습니다. 란슬롯의 오른팔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에 혹시……”
최별은 정신이 몽롱했다.
심신이 피폐해지자 환청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씨.”
“…….”
“최별 씨!”
“아, 예에…….”
성진이 말했다.
“올라가세요.”
“네?”
“마지막이잖아요.”
“그게 무슨…….”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어느새 하루가 지나 결투장의 앞에 서 있었다.
그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그 상대가 란슬롯이라는 것.
성진이 최별의 손목을 잡았다.
“어디 안 좋죠?”
“아니, 아니에요.”
“무리할 필요 없어요.”
“괜찮다니까요!”
성진과 송하린이 그녀를 안타깝게 쳐다봤다.
“그럼……. 힘내세요.”
“힘내시오.”
“네…….”
-힘내요!
-우윳빛깔 최별!
-그 우유는 저지방이요?
-어…… 글쎄요?
란슬롯이 결투장으로 올라왔다.
“드디어군.”
“하아…… 하아…….”
“싸우기도 전부터 상태가 말이 아니군.”
“그러게요.”
“기권하겠나?”
“그럴 순 없죠.”
“알았다.”
멀린의 음성이 마치 최면술사의 동전처럼 그녀를 꿈으로 안내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최후의 증명,
종장이 막을 열었다.
쾅!
삐이-.
시작과 동시에 최별은 나동그라졌다.
숨이 안 쉬어졌다.
-아가씨! 아가씨! 왜, 왜 이러세요!
환청이 멈추지 않았다.
이명이 모든 소리를 잡아먹었다.
삐이이.
황급히 앞을 내다보자 란슬롯은 온데간데없고 커다란 호수가 보였다.
물길은 잔잔했고 생물은 어느 것 하나 살고 있지 않았다.
콰아앙!
삐이.
최별은 다시 한번 날아가 벽을 깨부쉈다.
그녀의 앞니가 투구 밑으로 떨어졌다.
지금 그녀는 정신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커헉…….”
“가련하군. 한계인가?”
“우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최별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란슬롯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허점이 너무 많았다.
쿵.
콰아아아아앙!
이번에야말로 모두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길게 이어져 온 최후의 증명은 이 한 방으로 결판이 날 것이다.
최별의 투구가 그녀의 옆으로 떨어졌다.
벽을 부순 그녀는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별아, 너무 애쓰는 거 아니야?
-너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마. 우리를 믿어 달라니까?
-누구나 실패를 해. 너 실패하는 거,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가 힘낼게. 짐을 좀 덜어 줘.
“안 돼……. 내가, 내가 해야 해…….”
-아가씨! 빌어먹을! 다, 당장 연락을……
삐이.
-회장님! 아, 아가씨께……
삐이.
-네! 알겠습니다!
최별이 바닥을 기었다.
“하아…… 허어…… 컥…….”
피가 울컥울컥 목을 타고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녀는 투구를 더듬거렸다.
“투구…… 내 투구…….”
그녀를 지켜보던 란슬롯이 뒤로 돌았다.
최별은 지금 성진과 송하린을 보고 있었다.
걱정이 담긴 그들의 눈빛.
“걱정…… 걱정하지 마…… 내가, 내가 알아서 할게……. 이제 일어…… 일어나서…….”
-별아.
-힘내!
-그만해! 무리하지 마!
최별은 투구를 쥐며 에그릴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투구를 떨어트렸다.
-최별 님, 오늘 증명에는 제가 행운의 부적을 준비했습니다.
-부적?
-보시면 압니다.
50년 전, 스칸다를 질타했던 길드원들의 낡은 갑옷이 좌석에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에그릴이 50년 동안 보관했던 건 최별의 무구만이 아니었다.
길드원들의 갑옷은 투구까지 자리하자, 정말로 길드원처럼 보였다.
마치 길드원들이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그녀에게 말을 하는 듯했다.
-믿을게.
-이번에도.
-너만 믿어.
최별은 깨달았다.
누군가의 믿음은 부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의 힘이기도 했다.
동료들의 믿음이 그리웠다.
그녀는 떨어진 투구를 쥐고 일어났다.
피범벅이 된 얼굴과 엉겨 붙은 장발.
“……별로야.”
서걱.
바위 파편을 쥐고 최별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뚝 잘랐다.
장발이었던 머리카락이 잘려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단발이 되었다.
그녀가 십자 흉터가 그려진 투구를 보고 히죽 웃었다.
부러진 앞니가 눈에 들어왔다.
“좋아, 이거야.”
란슬롯이 멀린에게 소리쳤다.
“멀린! 최후의 증명은 끝났다! 내 염원을…….”
“아직.”
“……뭐?”
“아직 아닙니다.”
란슬롯은 소름이 끼쳤다.
그는 멀린이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멀린은 미친 듯이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 드디어!”
란슬롯이 뒤로 돌자, 그곳엔 태양이 있었다.
최별의 불꽃이 완전히 다른 성질이 된 것처럼 새로운 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빛났지만, 눈부시지 않았다.
뜨거웠지만, 불태우진 않았다.
처음 보는 기운.
최별은 용의 눈동자를 하고 란슬롯을 보았다.
란슬롯은 그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소름 끼쳤다.
“해 볼게.”
그녀의 손은 이제 떨리지 않았다.
철컥!
투구의 안면갑이 내려가자, 투구의 뻥 뚫린 구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화르륵.
“늘 그랬듯이.”
그녀가 란슬롯에게 돌진했다.
이번엔 아까처럼 어설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