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152화
“오른팔요?”
최별이 성진에게 의문을 표했다.
성진은 친절하게 설명했다.
“란슬롯의 오른팔이 부자연스럽습니다. 느끼셨나요?”
“전혀요.”
“우리 형님은 독수리와 같은 눈을 지녔지! 양정역 신조를 살해하며 얻은 능력으로…….”
“그건 지금 발동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발동하지 않지! 하지만, 시력이 좋소.”
송하린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아무렇게나 앉았다.
성진 일행은 모여서 다음 결투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란슬롯이 대전을 치렀으니 다음은 최별이다.
“누구와 붙는 겁니까?”
“디고어.”
란슬롯을 넘으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최별을 막으면 그녀의 소원을 저지할 수 있다.
“아마 저와 먼저 싸우는 사람들은 쾌재를 부르겠죠.”
“란슬롯과 싸우기 전에 적당하게 몸을 풀 기회니까요.”
최별을 제외한 열둘이라는 숫자.
그 숫자는 평안함을 가져올 것이다.
굳이 사력을 다해 그녀를 막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막아 줄 것이라는 평안함.
“일전에 제가 얘기했던 말 있지 않습니까?”
“어떤 거요? 아, 멀린이 제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거요?”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역순으로 가게 되면 최별 양은 최후에 란슬롯을 만나게 됩니다.”
“연전으로 치러지는 게 아닌 이상…….”
연전으로 증명이 진행되었다면 체력과 정신력의 고갈로 힘이 점차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증명은 차근차근 하루에 한 번 치러진다고 했다.
“이 증명에 가장 많은 경험을 가지고 란슬롯과 싸우게 됩니다. 물론, 중간에 패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그건 저도 이해했어요. 또, 증명의 대상자는 모두 란슬롯이라는 점도 큰 것 같아요.”
“맞습니다. 최별 씨의 증명은 오로지 최별 씨의 염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염원이 무엇이든 최별 양을 쓰러트린다고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거죠.”
“란슬롯에겐 필사적이겠지만, 저에겐 경험치 이상을 원하는 게 아니겠군요.”
“물론, 사력을 다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심리적 허점이 있다는 거죠.”
“이해했어요.”
송하린은 잠시 악전을 만나고 온다고 하고 밖으로 나갔다.
“최별 씨.”
“…….”
“최별 씨?”
“아, 예.”
최별은 혼이 잠시 빠져나간 듯 멍하니 있었다.
성진은 그녀가 손을 떨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불안하십니까?”
“아뇨? 왜요?”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래 보였나요?”
“……져도 됩니다.”
“제가 패배할 것 같으신가요?”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패배해도 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푸후우…….”
최별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붉은 빛이 도는 장발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양팔을 뒤로 해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있잖아요. 가끔, 가끔인데요.”
“네.”
“지고 싶어요.”
“…….”
“잠시만 프라이빗으로 돌려주실…… 아니다.”
-누나 왜, 우리 없어야 하는 내용이야?
-우리 뇌절 안 할게! 그냥 듣기만 할게.
-초모가 뭐라고! 초모보다 내가 더 귓구멍 커!
-현직 토킹 바 사장입니다. 찬호팍도 가게에 온 적 있습니다. 저에게 얘기해 보세요.
최별이 물끄러미 채팅 창을 보다 말했다.
“다 부담이에요.”
“부담? 어떤 부담?”
“모든 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실패를 별로 해 본 적이 없어요.”
“설마, 추락에 대한 부담인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에요. 주변에선 추켜세워 주지, 널 믿는다, 너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너라면 할 수 있다.”
“그게 반대로 부담이 되었군요.”
“맞아요. 스칸다도 마찬가지였어요.”
-최별, 믿는다.
-나 죽어도 돼. 넌 죽으면 안 된다.
-언니! 제가 대신 죽을게요!
최별은 쓸쓸해 보였다.
“우리의 성공은 나 하나로 이루어 낸 것도 아니었고 수많은 희생이 있었어요. 그 희생들은 그들 스스로 감추었지만.”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부담되긴 하겠네요.”
“초모 님은 어때요?”
“뭐가요?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럽지 않냐는 말입니까?”
“네, 종말 이후에서부터 늘 그랬잖아요.”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왜요? 충분히 도망치고 싶었을 텐데?”
“저는 무대 체질인가 봐요.”
“뭐야…….”
최별과 성진이 작게 웃었다.
사실 성진이 종말 이후에서 부담을 느끼기도 전에 상황이 너무 안 좋게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그런 부담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성진이 최별의 손을 쳐다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필요한 게 있나요?”
“아무것도.”
***
디고어와 최별의 증명의 날.
디고어는 대련용 갑주 중에서 가장 가벼운 갑옷을 입었다.
방어력은 보잘 것 없겠지만, 그녀의 빠른 움직임에 방해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안녕, 예쁜이 언니?”
“디고어, 잘 부탁드려요.”
“잘 부탁드리긴. 전부터 한번 언니랑은 붙어 보고 싶었어.”
“왜요?”
“그 예쁜 얼굴을 볼썽사납게 망가트리면 어떨까 싶었거든. 나는 열심히 할 테니 언니는 살살해?”
“나도 열심히 할 거예요.”
“풋.”
“당신 얼굴을 뭉개기 위해서.”
“…….”
“화장도 할 필요 없어요. 뼈가 드러난 얼굴엔 분칠도 소용없으니까.”
“와, 무섭네.”
-이것이 여자들의 말싸움?
-방금 혓바닥에서 핵폭탄 나가지 않았냐?
-일단 사생결단이라는 건 알겠네. ㅋㅋ
-꿀잼, 팝콘 장수 불러~ ㅋㅋ
멀린이 증명의 시작을 알렸다.
“최별, 디고어. 패배는 스스로 인정하거나 제가 판정할 때뿐입니다. 그럼, 시작하세요.”
팟.
팟.
최별은 디고어만큼 빠르진 않았다.
디고어는 다람쥐가 장애물을 넘어 다니는 것처럼 주변 기물을 이용했다.
쒜엑.
‘단검?’
최별이 자세를 낮춰 날아오는 단검을 피했다.
‘그런 건가?’
디고어도 란슬롯의 전투를 보며 나름의 해법을 찾은 듯했다.
단검이 갑작스럽게 방향을 바꾸었다.
바람의 오러다.
최별은 예상했다는 듯이 발을 차올려 단검의 방향을 뒤틀었다.
캉!
다시 두 자루의 단검이 날아왔다.
팟.
깡!
한 자루는 피하고 한 자루는 쳐 냈다.
다음은 피했던 단검의 방향이 바뀔 차례, 혹은 디고어의 공격이 있을 것이다.
디고어의 수는 후자였다.
휭.
디고어가 움직이자 바람이 일었다.
거친 강풍이 이어지며 최별의 주변으로 휘몰아쳤다.
디고어는 검을 쌍수에 나뉘어 쥐고 있었다.
흔히들 쌍검을 공격 일변도라고 착각하지만, 이는 오해다.
디고어는 오히려 철통같은 수비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녀의 검술 또한 방어적이었고.
예리한 검격이 최별에게 쇄도했다.
캉!
카캉!
최별은 상대의 공격을 몇 차례 흘리고 생각했다.
‘저쪽에서 흘리는 거야.’
무기가 충격받아 부서지지 않도록 디고어 쪽에서 힘을 교묘하게 조절하고 있었다.
최별은 어쩐지 투구 너머로 그녀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럼.’
화르륵!
“엇.”
최별의 몸이 붉게 타올랐다.
불꽃이 일자 디고어가 공격하지 않고 최별을 중심으로 천천히 돌았다.
“하하, 나는 통구이 손질은 싫어하는 편인데.”
“나도야.”
최별이 똑같이 받아치자 디고어의 억눌린 음성이 흘러 나왔다.
“……내가 너보다 빨라. 넌 날 잡을 수 없어.”
“…….”
팟.
파앗.
쒜에엑!
중간중간 날카로운 공격이 최별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최별의 떨림은 어느새 멎어 있었다.
‘잡을 수 없어.’
디고어의 공격이 최별의 사각을 뚫고 들어왔다.
사각을 내줬다는 말은 디고어를 완전히 놓쳤다는 얘기였다.
‘질 거야.’
이런 식으로 싸우면 그녀는 질 것이다.
그녀 자신이 그것을 잘 알았다.
최별은 무슨 결심을 한 듯, 뒤돌아 달렸다.
“파하하하! 도망치는 것 좀 봐! 아주, 걸작이야!”
그리고 비꼬는 디고어의 말을 흘리고 전투에 집중했다.
최별이 담벼락 지형으로 훌쩍 뛰어 넘어갔다.
디고어는 순간 고민했다.
‘왼쪽? 오른쪽?’
최별은 담벼락 너머에 있을 것이다.
디고어는 담벼락 너머에 최별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한쪽 방향으로 파고들 것이다.
소모되는 정신력은 오로지 한쪽 방향에 대한 대비뿐.
하지만 최별은 양쪽을 다 대비해야 했다.
그러니 디고어가 유리했다.
‘왜 저러는 거지?’
디고어는 왼쪽과 오른쪽을 고르지 않았다.
담벼락을 넘어 공중에서 최별을 크게 벨 것이다.
전장을 넓게 쓰는 건 그녀의 특기였고 바람을 다루는 그녀는 공중에서도 가진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팟.
디고어의 몸이 담벼락에 근접한 순간,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격이 가해졌다.
화르륵.
쾅!
콰아아아아앙!
담벼락이 무너지며 최별의 팔이 뻗어 나왔다.
“읏, 이게!”
디고어는 최별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에 완벽히 대응할 순 없었다.
“뜨거워! 이익!”
그녀는 최별에게 건틀렛과 검 한 자루를 내주며 빠져나왔다.
아니,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최별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성난 멧돼지처럼 돌진하는 최별에게 디고어가 검을 뿌렸다.
이번엔 전력을 다해.
‘어깨를 베려고 하면 멈출 수 있어. 그다음, 일단 거리를 벌려서…….’
생각은 거기까지.
공격이 우선이었다.
쒜에엑!
콰직!
“이런…….”
최별이 디고어의 검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가 크게 베였지만 최별은 멈추지 않았다.
투구 속 그녀의 표정은 일그러졌을지도 몰랐지만, 디고어는 그녀가 웃고 있다고 확신했다.
최별의 말에 웃음기가 서려 있었기 때문에.
“잡았다.”
콰아앙!
최별이 디고어를 쓰러트리고 주먹을 뒤로 젖혔다.
노린 곳은 디고어의 얼굴.
“으아! 멀린! 졌어, 졌다고!”
“최별 승리. 최별은…….”
콰아아아앙!
최별의 주먹이 디고어의 얼굴 옆 바닥을 강하게 때렸다.
거미줄처럼 금이 간 바닥.
디고어의 외침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녀의 얼굴이 대신 금이 갔을 것이다.
“하아…… 하아…….”
“내가 더 세.”
“미친 년…….”
“……최별은 계속해서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
***
-별 누나? 홍삼 드세요? 왤케 튼튼함?
-박력 미쵸따. ㅇㅅㅇ
-이건 최별의 승리에 건 나의 승리네♠
성진이 최별의 어깨를 쳐다봤다.
그녀는 며칠째 이런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갤러헤드, 브루노어.
이들은 나름 강자들이었지만, 최별과 적당히 어울리다 패배를 선언했다.
그때마다 그녀에게는 상처가 생겼다.
성진이 이런 상처쯤은 치료해 줄 수 있었지만, 문제는 정신력이었다.
“통각 수치를 낮춰야 하지 않을까요?”
“초모 님은 통각 수치가 어떻게 되세요.”
“…….”
“최대치죠?”
“네.”
“감각이 둔해지잖아요. 통각을 낮추면.”
통각수치가 내려가면 당연히 감각이 둔해진다.
물론 시중에 판매되는 캡슐이 극도의 고통을 유발할 순 없지만 반복적으로 고통에 노출되면 멘탈에도 문제가 생겼다.
실제로 그런 사례도 존재했었다.
성진이 그녀의 손을 쳐다보았다.
최별은 여전히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싸움에는 익숙해지셨습니까?”
“보셨나요? 저 엄청 잘 싸우죠?”
“네.”
“다 불철주야 고생해 주신 초모 님이랑 송하린 님 덕분이에요.”
“음하핫, 본녀가 박투술엔 일가견이 있지.”
디고어 이후로 무기를 사용하는 자는 드물었다.
사용하더라도 무기는 금방 부서져 쓸모를 다했다.
란슬롯은 착실하게 도전자들을 제압했다.
헥토르와 클라마데우는 란슬롯에게 트리스탄보다 형편없이 패배했다.
성진은 그 모습을 눈에 담고 확신했다.
“최별 씨, 란슬롯이 전대의 인물이라고 했죠?”
“네, 마왕과 싸운 사람 중 1명이에요.”
“혹시 그때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은 없었나요?”
“오른팔 때문에 그런가요?”
“네, 제가 느끼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음…….”
“그가 마왕과의 싸움에 왜 참전한지는 아시나요?”
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배라는 것 때문이었어요.”
“성배?”
“사실 란슬롯이 반인 반정령이라는 얘기는 종종 있긴 했어요. 그가 사실 엄청나게 나이가 많다는 소문도 있었고.”
“그런데요?”
“죽고 싶다나 봐요. 늙고 싶고, 병들어 가는 스칸다가 보기 싫다나?”
“그래서 성배를 찾은 겁니까?”
“성배는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거든요. 멀린도 소원을 들어주지만, 멀린은 대마법사이자 카멜롯 권력의 핵심이지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는 아니라…….”
-죽기 위해 사는 남자.
-칼 맞아도 안 죽는대?
-아무리 죽고 싶어도 개미한테 물려죽고 싶을까? 나이 들어 죽고 싶은 것 아닐까?
-아 몰랑~
“혹시…… 그 일전에서 부상을 입은 것 아닙니까?”
“그럴까요?”
“정말 부상을 입은 거라면 틈이 있을 겁니다.”
“그 부분을 파고들자고요?”
***
케이는 최별과의 증명에서 기권했다.
“하하, 최별 경. 당신이 카멜롯의 왕좌를 차지하면 내 복종하리다. 내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막을 사람은 넉넉하니 그들을 물리치고 일어선다면 나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지.”
“무슨 소리죠?”
“기권하겠습니다, 멀린. 그녀를 상처입히고 싶지 않아요.”
-우웨에에에엑.
-케이 : 이렇게 하면 쫄은 거 티 안 나겠지? ㅋㅋ- 아 멋진 역할 먼데. ㅡㅡ
어느새 4명째.
다섯 번째 상대는 가웨인이었다.
가웨인은 최별의 덩치보다 족히 몇 배는 되어 보였다.
최별은 그에게 한 번이라도 붙잡힌다면 패배를 각오해야 했다.
손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가웨인이 그녀의 손을 보고 말했다.
“떨리는 것인가?”
“……그런 것 같기도.”
“전투 전의 고조는 우리를 더 먼 곳으로 데려가 주곤 하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적당히 봐 줄 생각은 없다.”
“저도요.”
가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쁜 자식아! 별이 누나 때릴 데가 어딨다고…….
-이곳저곳, 구석구석.
-냉혹한 녀석들. ㄷㄷ
-가웨인 포스 개쩐다. ㄷㄷ
-등빨 바로 배달통 철가방으로 후려칠 것 같이 생겼다.
멀린의 음성으로 증명이 시작되었다.
늘 건조한 그 음성.
최별은 그가 참 따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전투에 임했다.
후우웅.
압도적인 리치 차이.
“흣…….”
가웨인의 내뻗은 주먹이 그녀의 곁을 스치고 담벼락을 때렸다.
콰아아아앙!
조각들이 비산하며 자욱한 연기를 만들었다.
그녀에겐 호조였다.
그녀는 자세를 잡기 전인 가웨인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녀가 다가가면, 상대의 틈이 사라졌다.
마치 허상인 것처럼.
최별은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몸을 뺐다.
콰아앙!
콰앙!
“도망만 칠 생각인가? 실망이군.”
바위의 기사 가웨인.
마치 산을 상대하는 것처럼 그를 공격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잡힐 거야.’
모든 움직임에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몸놀림은 바위를 뚫기에는 빠르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빠르고…… 강해?’
그녀는 가웨인이 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빠른 사람도 보았고, 그보다 무거운 사람도 보았으니까.
바로 얼마 전에도 보았다.
바람의 기사 디고어.
그녀는 가웨인보다 빨랐다.
그늘의 기사 갤러헤드.
그는 가웨인보다 무거웠다.
이들 중 가웨인이 가장 강할지도 몰랐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싸운 상대에게서 필요한 것만 배울 뿐이었다.
팟.
‘이렇게…… 였던가?’
최별의 움직임이 갑자기 변했다.
어설프지만, 빠르게.
“웃기는군.”
후웅!
그녀는 팔을 뻗어 가웨인의 팔을 툭 쳤다.
그리고 그 팔을 타고 오른발을 축으로 회전해 그의 관자놀이를 찼다.
콰앙!
푸스으.
가웨인의 땀과 최별의 화염이 연기를 만들었다.
그의 단단한 투구가 조금 찌그러졌다.
“……제대로 하지.”
가웨인이 바위의 오러를 둘렀다.
콰직.
콰지직.
단단한 바위가 그의 몸을 감쌌다.
이로써 그의 몸을 바위라는 갑옷이 한 겹 더 두른 셈이 되었다.
퉁.
쿠우웅.
콰직!
가웨인이 바위를 이곳저곳으로 발출했다.
그 경로에 최별이 있었지만, 그녀는 점차 빨라졌다.
‘이렇게, 이렇게…… 맞나? 맞아?’
딱히 묻는 대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를 믿던 과거의 동료들.
또 어쩌면 방금까지 굼벵이처럼 움직였던 자신에게 묻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빨라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 좋다!”
쿠구웅.
갑자기 몸을 지지하던 땅이 흔들렸다.
가웨인이 신이라도 된 듯 경기장에 지진을 일으켰다.
“끄아아아아!”
우직.
우지직.
최별의 속도가 더는 상승하지 않았다.
오히려 떨어지기 시작했다.
“큿…….”
사방에서 바위 파편이 날아왔다.
앞에는 요새같이 단단한 가웨인이 버티고 서 있었고, 주변은 그녀를 깔아뭉개기 위해 기를 쓰는 바위들이 있었다.
가야할 곳이 없으니,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앞을 향했다.
‘이렇게.’
아마도 갤러헤드는 자신을 상대할 때, 꼭 이렇게 움직였다.
콰아아앙!
날아오던 바위가 최별의 주먹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는 지금 극도로 집중한 상황이라 주변 상황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는 것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콰아앙!
콰아아아앙!
그녀는 그늘의 기사만큼 무겁게 전진했다.
콰아앙!
콰아아아앙!
바위를 부수고, 바위를 부쉈다.
빠르지 않다면, 무거워도 된다.
그녀는 점차 신이 났다.
또 다시 누군가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를 들뜨게 했다.
콰아앙!
콰아아아앙!
“맙소사…….”
쾅!
쾅!
쾅!
앞을 가로막은 바위가 부서지지 않았다.
그녀는 어쩐지 이상해서 조금 올려다보았다.
바위는 가웨인이었다.
“……내 패배다, 최별. 네 염원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지켜보겠다.”
푸스스.
경기장은 부서진 바위 조각들로 엉망이었고 가웨인의 바위 갑옷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가웨인의 투구 밑으로 피가 뚝뚝 떨어졌다.
***
성진은 최별의 힘이 단시간 내에 상승한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이거 무슨 최별이 적응 있는 줄 알겠다. ㅋㅋ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군요.
-님은 상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 글쿠나?
그것을 최별에게 이야기했다.
“제가 이상하다고요?”
“네, 혹시 최근에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초모 저 양심 없는. ㅋㅋ
-최별이 이상하면 자기는. ㅋㅋㅋㅋ
-내로남불 오져 버렸다. ㅎ
최별이 뭔가를 떠올린 듯 소리쳤다.
“아!”
“미, 미안하오. 본녀가 발을 밟았구려.”
“아뇨, 그게 아니라. 멀린을 만난 적이 있어요. 탄타르빌에서 돌아오고 난 직후에.”
“뭔가 일이 있었나요?”
“아뇨, 딱히…… 그냥 용의 피를 마신 것밖에는…….”
“용의 피요?”
“네, 기껏 구해 오라고 해 놓고 저보고 마시라고 했거든요.”
-츤데레야?
-오다 주웠다, 너 해라.
-ㅋㅋㅋ 경쌍도 츤데레 사나이 김멀린.
성진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지금은 알 수 없네요. 그래도 그게 원인일 확률은 가장 높아요.”
“제가 강한 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아뇨, 강한 것보다 강해지는 게 이상합니다.”
“그래요?”
“디고어와의 증명에서 충분히 강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웨인은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저도 조금 의아하긴 했어요.”
“물론 적당히 힘을 조절했겠지만, 가웨인이 그렇게 쓰러질 줄은 몰랐습니다.”
의문만 남을 뿐,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성진이 최별에게 물었다.
“다음은 누구죠?”
“일정이 조정돼서 저부터네요. 란슬롯은 퍼시벌이랑 치르기로 했고 저는…… 베디비어네요.”
***
퍼시벌의 사정상 일정이 뒤로 밀려 최별이 먼저 증명을 치르게 되었다.
충분히 불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최별은 감내했다.
“반갑습니다, 최별 경.”
“베디비어.”
“오웬 공이 당신을 무척 싫어하더군요.”
“…….”
“아, 제 말을 오해하실까 덧붙이는 건데 최별 경을 싫어하는 건 오웬 공뿐만이 아닙니다.”
“왜 베디비어 경은 귀족을 품으려 하죠?”
최별이 알기로 베디비어는 타락한 자가 아니었다.
그저, 조금 겸양을 떨고 조금 재수가 없으며 조금 원칙을 중시하는 자였다.
생각을 늘어놓고 보니 타락하지 않는 게 용하다 느껴졌다.
베디비어가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보세요, 최별. 티내지 말고.”
“어디를?”
“제 뒤편에 앉은 귀족들이 보이십니까?”
“보이네요. 어미 오리를 따라 다니는 새끼 오리들 같아요.”
“오리 새끼들 같다는 말이죠. 좋은 말입니다. 최별 경, 나는 평소에 그대를 좋게 보아 왔습니다.”
“왜죠?”
“올곧은 뜻, 드넓은 이상, 그것을 뒷받침할 강대한 힘까지. 당신은 원탁을 부수기 위해 멀린이 만든 전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칭찬인가요?”
“끝까지 들어 보세요. 아마 칭찬은 아닐 겁니다.”
베디비어는 헛기침을 하고 계속 이야기했다.
“모난 돌은 정을 맞고, 전선에서 돌출된 병사는 가장 먼저 화살을 맞습니다.”
“하, 나대지 말라?”
“그게 아닙니다. 귀족들을 이용하자는 얘기죠.”
“어떻게?”
“나도 저들의 타락이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더군다나 건방지게 원탁의 권위에 기생하면서도 가끔씩 기어오르려 하니까요.”
“…….”
“하지만 그들의 지배는 효과적입니다. 민중의 불만을 그들에게 돌리면 원탁은 무슨 짓을 하던 훌륭하다 추앙받지요. 전시에는 이만한 이점이 없습니다.”
“또.”
“주제를 아는 자들입니다. 선은 넘지 않습니다.”
“그 선은 이방인들에게는 지켜지지 않는 모양이군요?”
“이런, 같은 이방인이셨지. 그건…… 그들 사정이고요.”
“대화는 끝입니다, 베디비어.”
“아쉽군요. 큰 뜻을 보지 못하시니 제 뜨거운 마음도 도리어 차가워질 지경입니다.”
“뜨겁다고?”
최별이 투구를 뒤집어썼다.
그의 투구 틈새로 불길이 일었다.
화르륵.
“미적지근한 소리 집어 치우시고. 베디비어여, 증명의 끝에 그 생각은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어째서?”
철컥.
“당신은 내 밑에서 부려질 테니까.”
“……기고만장하군요.”
멀린의 신호가 이어졌다.
베디비어는 치밀한 자였다.
곧장 마력을 운용해 안개를 펼쳤다.
스으으.
최별이 그의 흔적을 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소용없습니다. 저는 이제 이 공간에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캉!
베디비어는 건틀렛에 날이 선 너클을 장착한 모양이었다.
그와 부딪힐 때 너클 특유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의 성향과 잘 맞는 무기 선택이었다.
치명상을 입히려 힘을 주면 곧 부서지겠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무기보다 조용하기도 했다.
베디비어는 비릿하게 웃으며 아직 찾아오지 않은 승리를 즐기는 듯했다.
“날 잡을 순 없습니다. 난 빠르지도, 무겁지도, 단단하지도 않지만 그 무엇보다 은밀하고 신비롭죠.”
최별이 우뚝 멈췄다.
“함정이라면 관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안개는 짙어질 겁니다.”
“후우…….”
베디비어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뜨거워…….’
온 천지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무슨…… 무슨 짓을…….”
화륵.
콰아아아앙!
불길의 폭풍이 사방으로 넘실거렸다.
안개가 전부 흩어지지는 않았지만, 베디비어는 조급해졌다.
그것이 그의 움직임을 둔탁하게 했다.
“……죽어어!”
최별의 마력은 분명 훌륭했다.
하지만 지형 전부를 달굴 정도로 광범위하지는 않았었다.
분명, 어제까지는.
“말도 안 돼…….”
베디비어는 휘적거려 너클을 뻗었지만 가까이 다가가기에 최별은 너무 뜨거웠다.
“으아아악!”
너클을 선택한 것이 패인이었다.
아니면, 결투장이 달궈지기까지 시간을 준 것이 패인이었다.
그것도 아니면, 패인은 이 모두이며 핑계일 뿐이었다.
최별이 작게 얘기했다.
“거기.”
“뭐…….”
베디비어의 투구에 최별의 주먹이 적중했다.
콰직!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앙!
콰아앙!
베디비어가 최별의 공격에 벽을 부수며 날아가 경기장 너머로 튕겨 나갔다.
그의 신형이 멈춘 곳은 오웬과 귀족들의 앞이었다.
베디비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성진이 손을 뻗자 그의 몸에 붙었던 불이 꺼졌다.
푸시이익.
오웬과 귀족들이 최별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용의 눈을 하고 말했다.
“뜨거운 건 이런 거야.”
최별이 여섯 번째 증명을 완료했다.
남은 건 앞으로 여섯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