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150화
귀족들은 멀린의 말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방금 그가 내뱉은 말이 잘못된 것이라고 부정하진 않았다.
적의 상처가 안타깝다고 동정하는 것은 귀족이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상처에 소금을 뿌렸으면 모를까.
“흠, 흐음…….”
“이게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지?”
“멀린은 란슬롯과 접점이 있는 건가?”
의문은 있었지만, 그것을 풀기는 쉽지 않았다.
최별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가 다시 똑바로 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순서는?”
“란슬롯 경의 마지막 상대는 최별 경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둘은 서로를 최후에 마주할 것이고 서로가 마주하기도 전에 패한다면 품었던 바람은 어차피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최별도 란슬롯이 마지막 상대일 것이다.
그러니 란슬롯을 만나기 전, 11명의 기사와의 싸움을 치러야 했다.
그녀가 시선을 멀리하자, 오웬이 숨죽여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꼭 쥐처럼 보였다.
-아ㅋㅋ 킹받네.
-별아 힘내! 할 수 있어! 쓰러지면 안 돼!
-아직 안 싸우는데?
-ㅔ? 아직이에영?
멀린이 허공에 손가락을 휘적거리자, 십수 장의 마법 편지가 만들어졌다.
그것들은 각 기사들에게 날아갔다.
“각기 다른 날짜가 적혀 있을 겁니다. 증명에는 개인 무구를 사용할 수 없으며, 모두 동일한 대련용 장비를 사용할 것입니다.”
“말도 안 됩니다!”
귀족 중 누군가 불만으로 가득 찬 말을 내뱉었다.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멀린이 턱짓했다.
베디비어의 후견인 중 하나였다.
“개, 개인 장비를 사용할 수 없다니요? 좋은 장비를 가진 것 또한 기사의 자질입니다. 관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대련용 장비를 사용하다니, 이건 모욕이나 다름없습니다! 부디 철회를…… 헙!”
멀린의 마법이 날아 귀족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입을 감싸고 억지로 숨을 짜내는 귀족을 뒤로하고 말을 꺼냈다.
“재력과 세력, 그 모든 것은 최후의 증명에서 아무 의미 없을 겁니다. 이 증명은 단순히 최강자를 가려내기 위한 게 아닙니다.”
“멀린, 그럼 무엇을 가려내고자 하는 겁니까?”
“찾는 겁니다, 최후의 전사를. 시련 앞에 무릎 꿇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을.”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습니다. 모두가 용감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때가 되면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이해하실 날이 올 겁니다.”
“나 원…….”
***
-자, 이제 토론을 해 보자!
-내 아이큐 100과 네 아이큐 90을 합치니 190이다. 우린 천재야. 답은 나오게 되어 있어!
-좋아 친구! 똑똑한 너만 믿는다구!
-기적의 계산법. ㅋㅋㅋ
-90인 놈은 수치도 없는 건가? ㅋㅋ
최별은 마드리오 가문의 여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이 케이크 처음 먹어 봐요!”
“당근 케이크예요.”
“우웩.”
최별이 싱긋 미소 짓고 농담이라고 말하며 마드리오 셸린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온 거예요?”
“아버님께 최후의 증명에 관한 얘기를 들었어요. 듣는 순간 직감했죠. 아! 최별 님께서 말씀하신 게 이것이구나!”
“그래서 가주님을 졸라 이곳에 온 겁니까?”
“어쩔 수 없는걸요. 혼자서는 나설 수 없는걸…….”
“다른 귀족들이 셸린을 싫어할 거예요.”
“싫어하라죠. 저도 그 사람들 싫어해요! 물론, 조금 무섭긴 하지만…….”
셸린은 홍차를 들이켠 후 최별에게 말했다.
“최별 님, 세상은 끝나 가고 있는 거죠?”
“그렇다네요. 저도 잘은 모르지만.”
“세상의 끝이 예정되어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을 응원하고 싶어요, 최별. 이 일로 가문이 핍박받을 수 있고 어쩌면 귀족이라는 이 허울도 빼앗길 수 있겠지만…… 아버지도 제 뜻과 같아요!”
“…….”
셸린이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이것들은 서명이에요. 저와 비슷한 입장인 가문들은 최별 님을 지지해요. 귀족들의 간악한 행동은 도를 넘었고 카멜롯은 썩었어요. 그것에 질린 귀족들이 최별 님을 응원하기로 했어요.”
“그들은 어째서 나타나지 않은 거죠?”
“그건…….”
“농담이에요. 알아요.”
“죄송해요…….”
그들이 대회의장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뻔했다.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다.
최별을 지지하면 혹시라도 그녀가 카멜롯을 차지했을 때 그 양분을 나누어 받을 것이다.
반면, 대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지지 사실을 잡아뗄 수 있을 것이고.
알지만, 그래도 힘이 되었다.
물론, 그들에게 승리의 과실이 돌아갈지는 알 수 없지만.
“귀족의 삶이 끝날 수 있어요, 셸린.”
셸린은 웃었다.
“그거야말로 늘 이 소녀가 바라던 것이에요. 당신을 진심으로 지지해요, 최별 경.”
“……그 뜻, 감사히 받겠습니다.”
-잘 자라 주었구나, 셸린. ㅠㅠ
-최고다 셸린짱!!! 엉엉!
-어디에 이런 씬스틸러가 있었누, 당장 캐스팅해!
마드리오 가문이 돌아가고 최별 일행만 남게 되었다.
최별은 성진과 송하린에게 물었다.
“멀린의 결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최별과 란슬롯만이 모든 상대와 겨뤄야 했다.
아마도 서로 역순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진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긴 하네요.”
“어떤?”
“첫째, 란슬롯의 경지가 다른 이들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다.”
“기세에서도 느껴지더군요. 아마 제가 그와 비슷하기라도 했다면 멀린은 다른 결정을 내렸겠죠.”
“둘째, 최별 양의 바람이 다른 이들보다 큰 것은 맞습니다.”
최별은 성진의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
“란슬롯의 바람도 그만큼 커다랗다는 거네요?”
“네, 멀린을 얻는다는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형님, 역시! 지성으로는 형님을 따를 자가 없을 겁니다.”
송하린이 끼어들자 최별이 반응했다.
“하린 양도 몇 마디 거드는 게 어때요?”
“크흠, 본녀는 형님이 말씀하시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오. 자고로 형제는 지성 담당과 무력 담당이 따로 있는 법!”
“무력 담당이세요?”
“현재는 태업 중이오.”
가벼운 웃음들이 오고 가고 성진이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멀린의 예상이 맞다면, 아마 기사들은 란슬롯을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여러모로 수수께끼만 남네요.”
“아, 그리고 야화랑 홍련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아뇨, 뭐…… 저한테만 적용되는 규칙도 아니고 모두에게 적용되는 규칙이니 따라야죠.”
“그럼,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확인이요?”
성진은 최별의 안내를 받아 대련장으로 향했다.
대련장에는 이번 증명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련용 무구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날이 제대로 서 있지 않아 무엇 하나 베기 어려운 검.
가벼운 둔기와 휘어지지 않는 창.
“이거…… 생각을 달리해야겠네요.”
“예?”
“오히려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게 나을 거란 얘깁니다.”
“그런…….”
성진이 대련용 갑주의 이곳저곳을 만졌다.
그 후, 결론을 내렸다.
“검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차라리 근접전을 하는 게 더 낫겠어요.”
“박투술?”
“오러를 사용한다고 치더라도 무구들이 나뭇가지만 못해요. 그럴 바에 신체를 쓰는 게 나아 보이네요.”
최별은 검에 특별히 의지하진 않았지만, 육탄전을 펼쳐야 하는 것이 꺼림칙했다.
“리치의 이점을 버리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대련용 무구들의 강도가 형편없이 낮습니다. 아마 원탁의 수준에 맞춰 제작한 것이 아닐 겁니다.”
“그건 맞아요.”
“최초의 격돌 후에 병장기는 곧장 부서질 겁니다. 힘을 충분히 싣는다면요.”
“…….”
-뭐냐 이거, 갑자기 킥복싱해야 하는 거야?
-오또케 오또케!
-별 누나 이런 거 잘했던가?
성진은 곰곰이 생각했다.
굳이 이번 증명에서 사용하는 장비가 대련용 무구라고 못 박은 멀린의 의도를 꿰뚫어 보기 위해서.
“역순…… 역순이라…….”
“왜 그러세요?”
“알 것 같네요. 최별 씨.”
“네?”
“멀린은 아무래도 최별 씨가 이 증명에서 이겼으면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보시면 압니다. 첫 번째로 겨루는 사람이 누구라고 했죠?”
최별은 편지의 내용을 떠올린 후 답했다.
“란슬롯과 트리스탄이에요.”
***
최후의 증명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었다.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도 최별이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송하린과 성진이 따로 상대를 해 주었다.
후웅!
송하린의 깔끔한 하단 공격.
최별이 몸을 띄워 그 공격을 피하고 주먹을 뻗었다.
“컷! 아니라니까요!”
송하린이 눈으로 좇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일어나 팔꿈치로 최별의 공격을 흘렸다.
그리고 손날로 최별의 목 부분을 때렸다.
꽝!
“아, 내 손! 더럽게 단단하네.”
“미안해요.”
“하단을 노려올 때는 두 가지만 생각하라니까? 진심인지, 허수인지.”
“진심이었죠?”
“당연히 진심이었지!”
-당연히 진심이었지. ㅋㅋㅋ
-뒈져어어엇! ㅋㅋ
-이런 대련 같은 건 동부 애들 못 따라오지. 밥 먹고 하는 게 저건데.
-ㅈㄹ ㄴ. 서부는 밥 먹고 똥만 쌈? 지역 갈등 조장 오져~
-다른 거 떠나서 송하린이 이런 건 도가 텄징.
-엉 그건 ㅇㅈ.
성진이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을 얹었다.
“하단을 피한 후의 행동 수칙은 두 가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다리로 온전히 중심을 잡는 데 쓰거나, 전력으로 대응하거나.”
“방금 어설프게 대응했죠?”
“……습관이 무섭네요.”
“차차 고치면 될 겁니다. 첫 증명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요.”
외팔이 에그릴이 대련장에 들어섰다.
손님도 함께였다.
갱과 셰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몇 명의 인물들.
“갱.”
“하하하, 다들 여기 있었군.”
“갱, 누나들한테도 인사해야지.”
“안녕합니까, 누님들.”
“오냐.”
“어서 와요. 셰일도.”
“반갑습니다, 누님.”
에그릴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갱이 사람들을 소개했다.
“협회 쪽 간부들. 씽, 두리아, 간초야.”
“소문이 자자한 별들을 뵙고자 먼 걸음을 했습니다.”
“씽은 입에 발린 말이 특기야.”
갱과 씽이 아옹다옹할 때, 두리아와 간초가 성진 일행에게 다가왔다.
“과연…… 별들이라 불릴 만하군요.”
“특히 초모? 이분은 그간 업적으로만 확인해 왔는데, 실물로 보니 세간의 소문이 이해가 갑니다.”
“점잖은 분들이네. 협회장은 없나?”
“아직 공석입니다. 후계를 정하지 않고 떠나셨거든요.”
“저런…… 얼마나 됐는데?”
“꽤 오래된 일입니다. 몇십 년도 더 된 일이죠.”
갱보다 젊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간초가 이야기했다.
“승급식은 우리가 진행하게 될 겁니다.”
“이번 승급식은 떠들썩하게 진행되니 손님들이 꽤 찾을 모양입니다.”
“응? 따로 손님을 부른 적이 없는데?”
“…….”
“너희가 불렀구나.”
“규모가 큰 행사는 찾는 분도 많아야 위엄이 서는 법이죠.”
“누가 온다는데? 들어나 보자.”
“그래요, 궁금하네요.”
“별자리 관에서는 축하 사절로 대정령사 제닌 님이 오시기로 했습니다.”
“그치랑은 안면을 트긴 했지. 또?”
“맹에서는 창황 악전 님과 혈황 조청 님이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걔들은 이제 지긋지긋하니 그만 보고 싶은데.”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한 구성입니다. 애초에 모든 세력에 우호적인 인물이 있기는 힘드니까요.”
“또 누가 옵니까?”
“저…… 그것이…….”
망설이는 간초 대신 두리아가 말을 받았다.
“서, 성국에도 초청을 보내긴 했는데 진짜 올 줄은 몰랐습니다.”
“바스카리? 온다고? 누가?”
“그, 그림자의 추기경과 빛의 추기경이 직접…….”
꽃의 사제들이 알면 안색을 굳힐 만한 일이다.
바스카리 세력의 한 축이 방문할 예정이니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 관망해야 했다.
“형님 때문이네.”
“초모 님 때문이네요.”
두리아와 간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갱이 다가와 맞장구쳤다.
“말했잖아, 초모에게 관심이 있을 거라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을 줄은 몰랐네요. 그것도 추기경이.”
“아무튼, 그것 때문에 난리야. 소문이 퍼졌는지 대외활동이 뜸한 성국의 방문, 그것도 추기경급 인물의 방문에 다른 곳에서도 관심을 가졌거든.”
“좋은 겁니까?”
“우리에게만.”
-아, 나도 승급식 참석하고 싶다.
-나 실제로 성채남보석 승급식 가 본 적 있음.
-어떰?
-개지림 걍; 승급하는 사람이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ㅋㅋ
갱이 성진을 붙들고 이야기했다.
“일전에 부탁했던 이방인의 인도 말이야.”
“예, 어떻게 됐습니까.”
“거의 도착했어. 근데 곧바로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무슨 소립니까?”
“자네 행사와 방문 시기가 겹칠 것 같아.”
“저는 행사 중일 거란 얘기군요.”
“아마도.”
“행사가 언제였죠?”
“자네 행사 날짜도 모르고 있으면 어떡하나 그래.”
“요즘 정신이 없어서요.”
“내일.”
“……네?”
“내일이라고.”
***
카멜롯으로 향하는 이방인들의 행렬 분위기는 긍정과 거리가 멀었다.
어두컴컴하고 슬픈 분위기의 행렬.
“이번엔 어느 놈 노예로 팔려 갈지…….”
“귀족 놈들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런 말씀 마세요. 귀족이 오히려 더 심각하다는 소문이 있어요.”
“하긴, 그놈들이 무슨 좋은 마음으로 우리를 사들였겠어?”
“이 사람아, 우리 권리를 사들인 것도 사들인 건데 억울하게 붙잡혀 있던 사람들도 구한 것 같더라고.”
“누가?”
“저기, 저 검은 옷 입은 사람들 말이야.”
“난 저 사람들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어.”
“그래도 우리를 구해 준 사람들인데…….”
“그게 뭐? 어차피 더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하는 것 아니겠어? 협회 놈들도 한통속인 것 아닐까?”
“아무튼, 동부에서 넘어온 사람도 꽤 있던데 이렇게 많은 노예가 왜 필요한 거지?”
중년 사내는 주변을 경계하며 대답했다.
“그거야 뻔하지. 전쟁 아니겠어?”
“전쟁? 전쟁이라고?”
“이 망할 놈의 세상. 삼시 세끼 밥 챙겨 주며 몸 건강히 카멜롯인지 카멜레온인지 하는 곳으로 우릴 보내려는 이유가 뭐겠어? 딱 봐도 칼받이로 사용할 생각이겠지.”
“카멜롯이 누구와 싸우는데?”
“그건 내가 알 바 없고. 빌어먹을, 결국 칼받이로 죽는구나.”
“여자와 어린아이도 있는데?”
“언 놈의 자식인가 보지. 인질로 잡고 싸움터에 내보내려는 것 아니겠어?”
“가만 듣자 하니, 자네 상상력이 제일 무섭구먼.”
“두고 보라고, 내 말이 맞지.”
중년의 사내들은 이 얘기를 작게 말한다고 했지만, 가까이에 있던 어린아이가 들었다.
그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게 주위의 검은 옷을 입은 호위를 붙잡고 물었다.
“있잖아요…… 우리 싸워야 하는 거예요?”
“…….”
“예쁜 누나, 알려 줘요. 우리 싸우는 거예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응, 싸워야 해.”
“싫어요, 무서워요.”
“너는 아직 어리니까 괜찮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싸워야 해.”
“왜요? 왜 싸워야 하는 거예요?”
“싸워야 돌아갈 수 있으니까.”
여인의 말에 행렬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여인을 재촉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돌아갈 수 있다니?”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요?”
여인이 난처한 듯이 대답을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쉬고 짤막하게 설명했다.
“여러분들을 구한 사람은 귀족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요?”
“여러분과 같은 이방인이에요.”
“이, 이방인? 누가…… 설마!”
“그, 그 사람 아니야?”
“초모?”
여인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사람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차올랐다.
“그럼! 고향 사람을 외면하진 못하겠지!”
“그보다 초모가 그렇게 돈이 많았던가?”
“아무렴, 이 사람아! 초모는 능력자잖아!”
“이래서 사람으로 받은 상처, 사람으로 치유한다고 하는 건가? 아니, 잠깐.”
“왜?”
“싸워야 한다고 했잖아? 왜 싸워야 하는 거야?”
여인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챘다.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더 많은 말로 잠재워야 했다.
“초모는…… 여러분들과 함께 싸우려고 해요.”
“미친 소리…… 싸우려면 혼자 싸울 것이지!”
“우리는 안 싸울 거요!”
“그것이 집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어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집에……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사람들의 추궁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모는 그렇게 믿어요.”
“무능력자들을 데리고 뭘 하겠다고! 보나마나…….”
“그건…… 음…… 이건 여기서 말씀드릴 수 없겠네요. 하나 당부드리는 건 초모는 말 몇 마디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번엔 직접 그 얼굴을 보겠군.”
“마침, 오늘 초모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자리가 있어요.”
“오! 좋네, 좋아.”
남자는 오늘 초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현재 카멜롯에 도착했으니까.
정문의 경비가 행렬을 멈췄다.
“멈추시오!”
“이미 최별 님에게 허락을 구한 일입니다.”
“새로이 전달받은 내용으로는…….”
“잠깐, 제가 처리할게요.”
협회 쪽 행렬 관리자가 나와 경비병에게 물었다.
“정확히 어떤 내용입니까?”
“소속이 불분명한 이방인들을 도시로 진입시킬 경우, 통제가 어려워…….”
“누가 한 얘기죠?”
“…….”
“누가 한 얘기냐고요.”
“오웬 님입니다.”
“빌어먹을, 또 귀족인가?”
그때, 성문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파이프를 입에 문 그는 옆에 서 있는 여인에게 말했다.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이럴 거라고.”
“덕분이에요, 갱.”
“천만의 말씀을, 누님.”
최별이 일행을 통과하도록 도왔다.
경비병도 최별이 직접 나선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오웬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겠지만, 최별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다.
“최, 최별이다!”
“최별 님이야!”
최별은 그들을 향해 싱긋 웃어 주고 말했다.
“행사가 있어서 이만, 또 뵐게요.”
“최별 님!”
“이런…….”
행렬에서 볼멘소리가 나왔다.
“동물원의 원숭이라도 된 기분이군.”
“쳐다보는 것 좀 봐. 다들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엄마…… 무서워…….”
행렬의 책임자가 말했다.
“행로가 고됐었죠? 이제 숙소로 들어가 쉴 예정입니다.”
“숙소? 닭장이 아니라?”
또 닭장 같은 숙소에 집어넣는 게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그 질문을 짐작이라도 한 듯이 책임자는 살갑게 대처했다.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된 가건물들이 있습니다. 카멜롯에 머무는 동안엔 그곳에서 머물 겁니다.”
잠시 후, 가건물에 도착하자 이방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맙소사, 이게 우리가 머물 곳이라고?”
“장난하는 거지?”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겁니다.”
“말도 안 돼…….”
가건물은 주변의 다른 건물들보다 월등히 좋아 보였다.
위치도 중심부와 가까웠고 목재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크기도 큰 것이 여럿이 지내기에 무리가 없어 보였다.
“누가…… 누가 준비한 겁니까?”
“초모 님입니다.”
“그분이 이걸 다…… 돈이 많으신 겁니까?”
“돈요? 음…… 많다고 볼 수 있겠죠.”
떠난 유저들의 묻힌 돈으로 생색을 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책임자가 대충 대답하고 방을 안내했다.
“우와아…….”
“여기서 살래!”
“무슨 일을 시키는 거지?”
“잠만이라도 여기서 자는 게 어디야…….”
책임자가 창밖을 가리켰다.
“광장이 보이시나요?”
“네, 보여요.”
“사람들이 정말 많네요. 저기서 뭔가 있나요?”
“초모 님과 최별 님, 그리고 송하린 님의 스타사파이어 승급식입니다. 구경하시겠습니까?”
“아뇨, 여기서 볼래요. 내려가 봐야 눈총만 받을 텐데요, 뭐.”
“편하신 대로. 그럼.”
“저, 얼마나 대기해야 하죠?”
“그분께서 조만간 찾으실 겁니다. 그전까진 푹 쉬는 데 전념해 주세요.”
“네…….”
광장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찼다.
단지 그곳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몸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분들이…….”
단상으로 올라온 이방인 셋은 다섯의 중년에게 무언가를 받았다.
저것이 모험가들이 달고 다니는 버튼이라는 것을 눈치챈 이방인 여인은 그 버튼이라는 것이 참으로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광장과 거리가 있는 가건물의 창에서도 그 빛이 보일 정도였으니.
행사를 주관하는 중년들에게서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지난 50년간 한 번도 탄생한 적 없는 스타사파이어가 셋이나 탄생했다. 송하린과 최별, 그녀들은 과거의 실력을 여지없이 드러내 스스로가 완전함을 증명했다. 또한 초모, 그는 바닥부터 시작해 이 자리에 섰다.”
“와아아아아아아!”
이방인을 보고 환호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초모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방인들은 잠시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저 셋의 용각인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왜지?’
“왜…….”
콧수염을 기른 중년이 소리쳤다.
“이들은 과거의 암운에서 우리를 구원했고, 물러서지 않았다. 명예를 좇지 않고 나아갔기에 비로소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 이들은 앉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별이다.”
“우와…….”
“별이 있을 곳은 이런 자리 따위가 아니다. 이들은 각자 빛나며 세상을 비출 것이다.”
사람들과 이종족들은 이방인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들은 이 세계의 가장 신비스러운 비밀을 바로 앞에서 볼 자들이다. 초모, 송하린, 그리고 최별. 그대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스타사파이어가 되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달리,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이방인 여인은 신발도 없이 달려 내려갔다.
그녀는 귓가로 들려오는 송하린과 최별의 연설을 듣고 눈물지었다.
자신도 꼭 저렇게 되고 싶었다고.
“헉…… 허억…….”
머리를 산발하고 달려온 광장엔 사람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구름 같은 인파 너머로 초모의 모습을 보려 했지만, 키가 작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따악.
후우웅.
단정하게 입은 요정이 손가락을 튕기자 여인이 공중으로 살포시 떴다.
그것만으로도 인파들 너머의 초모가 보였다.
요정은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처음 마주하는 요정의 선의에 놀라 대응하지 못했다.
요정이 단상으로 턱짓했다.
초모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은 가건물로 향했다가 다시 옮겨가 광장까지 뛰어온 여인에게 닿았다.
초모가 나직이 얘기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작은 음성은 파도가 되어 사람들을 휩쓸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대!”
가건물의 이방인들이 뭐에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새로운…… 시대.”
초모, 송하린, 최별.
성채남보석(星彩藍寶石) 승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