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147화
성진과 송하린, 그리고 최별은 원래 외부 숙소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돈이야 연달아 임무를 완수했으니 부족할 리가 없었고 카멜롯을 구경하기 위해선 그편이 좋았으니까.
“후…… 밖에 디스패치라도 온 게 아닐까 매일 무섭습니다.”
“사람들이 열성적이긴 한 것 같습니다.”
“카멜롯은 겉으로 보기엔 점잖아 보여도 무를 숭상하는 건 다른 곳 못지않아서 그래요. 우리가 이해해야죠.”
이들은 지금 원탁의 기사에게 배정된 숙소를 이용하고 있었다.
사실, 이편이 더 안락하게 지낼 수 있었으니 나쁜 상황은 아니었지만, 카멜롯을 마음 편히 구경할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일행은 상당히 아쉬워했다.
흑백쌍존이 카멜롯에 왔다.
그리고 그 흑백쌍존의 스타 사파이어 승급이 이곳에서 이뤄질 계획이다.
이것이 지금 카멜롯을 들뜨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한 가지였다.
때문에 인기인이 된 둘과 원래부터 인기가 많았던 최별은 숙소에 틀어박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하린이 침상에서 뒹굴뒹굴하며 입을 뗐다.
“하앗! 맹렬 데굴거리기!”
“뭐 하세요?”
“심심해서 그렇소. 접속해서 빈둥거리니 딱히 할 게 없소.”
“그럼 접속을 끊으면 되잖아요?”
“그건 싫어서…….”
성진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승급식이 언제로 결정이 날까요?”
“하다못해 최후의 증명 이전에는 치러졌으면 좋겠네요. 그럴 확률도 높고요.”
-암. 검둥이 달고 치르는 것보다 별둥이 달고 치르는 게 인지상정이제.
-원래 계급장이 깡패야. 계급장 달고 들어가면 묘한 용기가 생긴다고. ㅋ
송하린이 우쭐대며 성진에게 말했다.
“형님, 성채남보석 같은 경우 협회의 핵심 전력입니다. 황옥이든 홍옥이든 청옥이든 옥자 들어가는 놈들이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요?”
“아마 행사도 꽤 크게 해 주지 않을까요? 저나 최별 양 같은 경우는 이미 승급한 전적이 있어서 승급식을 성대하게 치르기는 좀 민망하지만, 형님은 특이한 경우니까 아예 싸잡아서 해 버리는 거죠.”
성채남보석 삼인방의 탄생.
이것은 대외적으로 협회의 건재함을 알릴 것이고 세를 과시할 수단이 될 것이다.
물론 송하린과 최별은 각자 소속된 단체가 있었고 스칸다의 주민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오롯이 협회의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성진은 달랐다.
뒤에선 성진이 무지개 사원의 사람이라는 것이 알음알음 소문이 났지만, 성진과 무지개 사원 측은 굳이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협회 측에서도 이보다 반가운 인재가 없었다.
성진은 무지개 사원이라는 강대한 세력과의 교량 역할로도 훌륭했고 또 능력 자체만 보아도 희귀한 데다 무력은 더 특별했다.
지금껏 완수한 임무들의 정확한 실체를 아는 사람이 업적을 확인한다면 혀를 내두를 것이다.
괜히 지부장 미켈이 성진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진 하나로 모험가 협회는 스칸다에 밀어닥친 종말에 발 벗고 나서는 단체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도 모든 상황에 개입하려 힘썼으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된 것이겠지만.
“과시용 인형이 될 수도 있겠군요.”
“아니요. 그렇게만 볼 수도 없을걸요? 성채남보석쯤 되면 입장이 역전되죠. 사실상 협회의 최고수인데 어느 누가 함부로 하겠어요. 간부들도 이래라저래라 하지는 못할 거예요.”
이제 갑을관계가 역전되는 것이다.
성진이 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할 때, 송하린이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도저히 안 되겠소! 나는 나가서 구경이나 하고 오리다. 자체 일일 퀘스트!”
“일퀘라고요? 자체? 자체 휴강 같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 그럼!”
“나가자마자 둘러싸일 거예요. 기다려 봐요, 굳이 나갈 거라면 방법을 마련해 볼게요.”
“정말? 정말이오?”
“네, 그러니까 야단법석 떨지 말고 얌전히 앉아 계세요.”
최별이 외팔이 측근에게 이야기하러 떠난 사이, 성진과 송하린은 테라스를 내다보았다.
푸른 하늘에 구름이 저마다 군집을 이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서부도 나쁘지 않습니다, 형님.”
“그렇네요, 정말.”
성진은 갑자기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데, 탄타르빌 일정까지 돕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험…… 허험…… 한국 사람이 그리 정 없이 굴어서 되겠습니까? 천마이자 월교의 교주, 그리고 맹의 실세 중의 실세는 스칸다에 찾아온 위협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세계 경찰 흉내 내는 것 봐. ㅋㅋ
-송하린 특) 아, 몰랑.ㅋ 그냥 놀러 다니고 싶당. ㅋㅋ
-나 때도 근데 성채남보석 보면 좀 지리긴 했는데.
-근데 인성들이 개차반이 많았어서 ㅋㅋ 쵸코좌 말고 또 누가 있었지? 기억이 잘 안 나네.
-졸라 많았지. ‘넌이미틀렸어나부터가’랑 또 누구더라? ‘결혼하지마제발’ 얘는 법사였고 또…… 모르겠다.
-암튼 성채남보석은 꽤 많았다 이거야~ 아, 근데 나도 저렇게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지.
-너의 순수는 누가 죽였지? 프루나? 당나귀?
-뭐야 그건?
-2000년 초반 유먼데…….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한 칸 떨어져 앉아 주실래요? 저한테 할아버지의 ‘세월’이 묻을 것 같아요.
-시인이네. ㅋㅋㅋㅋ
최별이 다가와 옷을 건넸다.
“카멜롯에서 자주 입는 복장이에요.”
“엥? 완전 서부스럽잖아.”
“그럼 동부스럽게요? 잔말 말고 입어요. 밖에 외출하려면 이렇게 입는 수밖에 없어요.”
“형님, 나가 주시겠습니까?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요.”
“…….”
-마! 형제끼리 뭘 부끄러워하는 기가!
-안 돼! 나가지 마, 초모! 야! 안 돼!
-나갈 땐 나가더라도 눈은 두고 가!
-제길! 내 젠하이저 헤드셋 어디 갔어! 이렇게 된 이상 사운드로 간다!
***
송하린과 최별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사이, 성진도 옷을 갈아입었다.
몸에 딱 들어맞는 로브와 가면.
품이 여유가 부족해 몸매가 살짝 드러났다.
얼핏 봐서는 전사가 마법사의 옷을 훔쳐 입은 것 같았다.
끼익.
“가죠.”
-헐. ㅋㅋ
-아, 아름다운 여자!
-송하린이랑 최별 옷거리는 죽이긴 하네.
-뽀다구가 난다!
-우리 말 씁시다.
-간지가 난다 이 말이야!
-ㅇㅋㅇㅋ
-간지도 일본 말이잖아. ㅋㅋ
최별과 송하린은 각각 검은색, 그리고 파란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게 포인트인 복장은 옆이 살짝 트여 걸을 때 다리가 보였다.
성진이 물었다.
“과한 거 아닙니까?”
“보수적이시네요. 카멜롯에서 요즘 유행하는 옷이라네요. 구닥다리를 입고 돌아다니면 그게 더 눈에 띄겠죠.”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라! 모르십니까, 형님.”
-카멜롯이 초모보다 트렌디하네. ㅋㅋ
-초모 카고 바지에 체인 달린 거 입는 거 아니냐?
-티셔츠는 배트맨 티셔츠. ㅋㅋ
-밀수들 망상은~ 억까하기 바쁘네.
-정보) 초모가 테이퍼드 진에 보안관 신발만 신어도 님들 뚝배기 다 깡통 딸 수 있음. ㅎㅎ
송하린과 최별은 비슷한 모자를 썼는데, 성진은 이 모자의 정확한 명칭을 몰랐다.
‘귀부인 모자…….’
외국의 귀부인들이나 쓰고 다닐 법한 모자에 면사가 달려 얼굴을 가리기에 훌륭한 수단이 되어 주었다.
성진과 일행이 카멜롯의 시내로 나섰다.
“오오, 형님 못 알아봅니다.”
“송하린 양, 굳이 큰 소리로 떠들지 마세요. 송하린 양은 입만 안 열면 아무도 못 알아봐요.”
“떠들지 않을 거면 방에 있었겠지. 오오! 형님! 저거 보세요! 동물들입니다! 저기로 가죠!”
시내의 한 편에는 희귀한 동물을 파는 남쪽 상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꾸아악.
신기하게 우는 도마뱀.
끼익, 끼이익.
꼬리가 긴 원숭이 등.
어느새 최별도 정신이 팔려 동물들을 손에 올려놓고 만졌다.
-초모(30분 후) : 자기야, 가자…… 제발 가자…….
-지옥은 모두 일곱 가지. 그중 가장 무서운 건 어떤 지옥이든 백화점이 들어선 곳이다.
-진짜 쇼핑 체력은 다른 개념이야. ㅋㅋ
송하린과 최별은 그 후로도 이것저것 구경하기 바빴다.
기다란 막대 끄트머리에 불을 붙여 그것을 입안에 넣는 재주꾼이라든지.
“와아아아아!”
“최고예요!”
“2개! 2개 더 해 봐!”
물개 박수를 치는 두 여인.
성진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숨을 쉬었다.
-초모 : 니들은 결혼하지 마라.
-근데 칼 두고 나와서 어쩌냐?
-엄중 경비하고 있는데 머. 글고 칼 들고나오면 바로 들키잖어. ㅋㅋ 워낙 눈에 띄니까.
-유리좌도 보고 싶을 텐데. ㅠㅠ
-킹쩔 수 없다고~
이것저것 액세서리를 보고 있는 두 여인과 조금 떨어진 순간, 누군가 성진의 옷깃을 잡았다.
기척이 정직한 것이 악의는 없어 보였다.
“날세.”
“……갱?”
“나도 왔어.”
“사무관님?”
갱과 사무관 셰일이 성진을 찾았다.
“그렇게 꾸미고 다니면 못 찾을 줄 알았나?”
“언제 오신 겁니까?”
“오전 중에. 그보다,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성진이 최별과 송하린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그들은 이미 성진을 두고 어딘가로 간 듯했다.
“일단 가시죠.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아마 모험가들이 들러붙을 테니까.”
“알고 계셨습니까?”
“뻔하지. 그보다…… 송하린이랑 최별은…….”
“시내 구경 중입니다. 전할 말이 있습니까?”
“아니! 없어! 자네에게만 전하면 되는 말이야. 가세! 괜히 걱정했군!”
-아 ㅋㅋ 갱 송하린이랑 최별한테 당했었지.
-동네 애가 고학년 누나 무서워하는 거랑 똑같네. ㅋㅋ
성진은 갱과 사무관 셰일을 데리고 작은 찻집으로 향했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이라 썩 좋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사람이 없어 조용한 얘기를 나누기에는 제격이었다.
성진이 가면을 벗고 물었다.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자네는 원래부터 가면을 썼지 않나? 이런 눈썰미도 없으면 어떻게 협회를 운영하겠나.”
“그렇군요.”
“그때는 병아리였는데 지금은 불사조가 되어 있으니 놀랍긴 하네만.”
성진에 관한 얘기였다.
갱이 몇 가지 화제를 던졌다.
“일단 할 얘기가 많으니 바로 시작하겠네. 괜찮지?”
“예.”
“자네들의 승급식은 카멜롯의 흑조 광장에서 치를 거야.”
“실례지만, 흑조 광장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카멜롯에는 몇 개의 광장이 있는데 백조와 흑조가 가장 유명하지. 백조는 원탁 전용이라 사용할 수 없고 개방된 장소 중에선 흑조가 가장 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볼 거고 그걸 의도할 거란 얘기다.
“왜 굳이…….”
“50년 동안 성채남보석으로 승급한 이가 없다. 대답은 이것으로 될까?”
이방인 셋이 돌아왔고, 그들은 모두 성채남보석이 되었다.
불안한 스칸다의 삶에서 이처럼 희망차게 들리는 말이 있을까.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곧 최후의 증명이 있을 거라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이런! 마, 맙소사! ……당연히 내 귀에도 들어왔지.”
“승급식은 최후의 증명 이후입니까? 이전입니까?”
“아마 증명을 시작하고 난 이후일 거야. 하지만 정확히는 그 직후이기 때문에 별로 차이는 없을 거야.”
이후든 이전이든 큰 상관이 없다는 얘기.
셰일이 다음 화제를 꺼냈다.
“다음, 자네의 대삼림 임무에 관한 이야기야.”
“그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혜의 고리가 입장을 번복했어. 자네들의 전투 현장에서 단서를 찾은 모양이야. 대공이 그곳에 존재했단 것을 확인했으니 사실을 바로잡은 거야.”
“잘된 일이네요. 잭이랑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명예는 길이 기록될 거야. 또한, 합당한 보상도 해 줄 것이고. 하지만 그런다고 그들의 젊음이 돌아오진 못하겠지.”
“…….”
“아무튼, 지혜의 고리도 자네의 행동을 칭찬했어. 금지된 마법이 어쩌고저쩌고 따지기엔 상황이 심각했으니까. 그래서 리베스 마탑의 탑주 카이덴 어른이 다시 자네를 찾을 거야.”
“저를 말입니까?”
“그래, 일전의 일을 사과하려는 거겠지. 지혜의 고리도 이렇게 보면 꽉 막힌 집단 같지는 않단 말이야. 아마, 아끼던 아이가 목숨을 잃어서 그랬겠지.”
“이해합니다.”
짝!
갱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오늘은 손님이 둘 있을 거야.”
“손님? 두 분 말고 더 있습니까?”
“그래, 애초에 이곳도 우리가 고른 장소니까.”
주위를 살피니 손님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가게의 주인이 다가와 성진의 탁자에 합석했다.
쭈우욱.
인피 면구를 벗자, 모르는 여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야화 님. 소녀입니다.”
“야화? 아!”
야화.
밤의 꽃이라는 정보 길드의 수장.
자신은 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네가 왜…….”
-설마, 얀데레 엔딩!
-흐흐흐…… 죽어도 같이 죽어!
-이거지! 역시 데자뷰는 최고야 엉엉. ㅠㅠ
“전할 정보가 있어 찾았습니다. 그간 많이도 돌아다니시느라 찾아뵙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아니, 전할 정보가 뭐지? 그보다 갱 님도 그…….”
여자 이름을 모르겠다.
그때, 다이렉트 메시지가 도착했다.
삐이.
「청이. 근데 청이는 늙었을 텐데? 딸인가?」
“청이를 아십니까?”
“……저는 향이에요. 청이는 제 어머님이고요.”
“그래? 아무튼.”
갱이 답했다.
“향이 먼저 내게 접촉했지.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일 처리가 워낙 깔끔해서 이제는 좋은 친구라는 걸 느끼고 있네.”
“그렇군요. 근데 전할 정보는?”
향이 답했다.
“성국에서 그간 야화 님에게 보낸 암살자들과 첩보원들이 열을 넘습니다. 저희가 그동안은 어떻게 막아 왔지만, 아마 그들도 이제 눈치를 챘을 겁니다.”
“성국이 나를? 대체 왜?”
“말했잖은가, 그들은 자네의 신성력을 탐할 것이고 여의치 않으면 부술 것이라고.”
“흐음…….”
껄끄러운 존재들이다.
가만히 있는 자신에게 왜 그리 집착하는지.
향이 부연 설명을 했다.
“야화 님, 성국은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사제회를 의심하고 우려를 표명하고 있어요. 물론 아직 큰 물결은 아니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저희는 이미 꽃의 사제들과 접촉했습니다.”
대단한 일처리다.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이제 와 발뺌해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지?”
“저희는 꽃의 교단의 움직임도 포착했습니다. 이미 직접 접촉하신 적도 있지요?”
“대단하군. 그래서?”
“바스카리를 손에 넣을 계획 아니십니까? 야화 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지금이 바로 적기임을 말씀드리려 찾은 것입니다.”
“지금이 적기라고? 어떤 이유에서?”
“성국은 특이한 집단입니다. 사제회라는 집단에게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뭉친 신도들이죠. 분명 사제회는 과거부터 이적을 행했었고, 그것이 바스카리를 똘똘 뭉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작은 파문만 일어나도 둑이 무너질 지경이죠.”
“……나구나.”
“네, 그 둑에 던져질 돌은 야화 님입니다. 스칸다의 기적이여.”
“스칸다의 기적?”
별자리 관에서 들었던 적이 있는 말이다.
스칸다의 기적.
엘론드의 성자에 이어 생긴 다른 별명이었다.
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행한 일과 걸어온 고난이 야화 님을 신화적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동부에서는 흑백쌍존으로 유명하셨지만, 지금은 스칸다의 기적이라는 이명이 더 퍼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입니다.”
“무엇이 지금이라는 거야?”
“꽃의 사제들과 함께 바스카리에 입성하십시오. 비록 당장 인정받을 순 없겠지만, 야화 님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바스카리는 격변을 맞이할 것입니다.”
“잠깐, 잠깐…… 정작 그렇게 하려면 바스카리에서 내 기반이 되어 줄 꽃의 사제들이 도착해야 하잖아.”
“예. 이미 와 있습니다.”
“그게 무슨…….”
갱이 껄껄 웃었다.
“푸하하하하! 손님이 좀 많다고 했잖나. 들어들 오십시오.”
실내에 은은한 꽃향기가 퍼지며 사제들이 등장했다.
저벅, 저벅.
모두 과하게 꾸미기보단 수수한 복장이었고, 이목구비도 인자한 인상이었다.
그들은 일렬로 성진의 탁자 곁으로 늘어섰다.
“반갑습니다. 초모 님.”
“어, 그때 그…….”
“이제야 제 이름을 말씀드리는군요. 저는 작약이라고 합니다.”
“작약?”
“‘병창이는 못말려’ 님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지요. 우리 모두 꽃으로 불립니다.”
“해바라깁니다.”
“민들레입니다.”
“나팔꽃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이것인가, 꽃보다 중년!
-아, 근데 좀. ㅋㅋㅋ
-노인들을 꽃으로 불러야 하는 상황 뭔데. ㅋㅋ
성진이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
테이블을 주르륵 붙여 앉자 조그만 가게가 가득 찼다.
“오랜만입니다.”
“초모 님의 명성은 하루씩 걸러 제 귀에 들리더군요. 제 선택이 참으로 옳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낍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보다 다들 모이신 겁니까?”
“예. 아직 덜 모인 것 같지 않습니까?”
“어…… 많지는 않네요.”
“신도가 부족하니 그렇습니다. 물론 사제들은 이 정도고 신도들은 그래도 조금 있습니다. 바스카리에서도 살고 있으니까요.”
작약은 바스카리가 구획 별로 나뉘어 각 교단에게 영토를 준다고 했다.
하지만 꽃의 교단은 그 세가 미약하여 거주 구역이 거의 텅텅 빈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방인들이 조금 있지만, 실상은 저희가 지원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없어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음…….”
“초모 님, 우리는 바스카리에 곧 입성할 생각입니다. 바스카리의 병든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또 새살을 돋게 할 계획이지요.”
“…….”
“초모, 당신은……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마음은 여전한 겁니까?”
“제 마음요?”
“제가 만났던 당신은 이방인 모두를 구원할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
“마음이 무뎌지지 않았나요? 의심하지 않나요? 그도 아니면 포기하고 싶어지진 않았나요?”
처음과 같은 마음.
세종의 시민들을 데리고 돌아가겠다는 생각.
앞선 시련에 그 마음이 흔들렸을까 봐 물어보는 것 같았다.
“여전히 같은 생각입니다.”
작약은 웃었다.
“그렇다면 계획이 있습니다.”
“계획?”
“일단 이것을 보시죠.”
성진이 이대로 바스카리로 향하게 됐을 시 겪게 될 문제점과 대응 방안 등이 적힌 문서였다.
모두 수기로 작성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작약의 솜씨인 것 같았다.
성진은 문서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작약에게 물었다.
“영이 잔뜩 붙은 이건 뭡니까?”
“이방인들의 권리를 전부 사들였을 때에 필요한 금액입니다.”
“……이 밑은요?”
“이방인들이 모든 단체에서 권리를 보호받고 우리에게 인도되었을 때의 금액입니다. 최소치죠.”
성진은 웃음이 나왔다.
일단 문서에 쓰인 금액은 터무니없었다.
이 세상 금을 다 모아도 절대 저 액수보다 크진 않을 것 같았다.
“동부 상인회가 지원을 한다고 해도…….”
“동부 상인회의 규모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대략 이 정도.”
반.
최소치의 반 정도 될 것이다.
“동부 상인회가 아예 망하기로 작정하고 지원한다면 반이 아니라 전부를 지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선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뿐이죠.”
“반…….”
“교세도 문제입니다. 신도들이 적으면 믿음을 설파하기도 불리하고 바스카리를 휘어잡는 힘도 부족할 것입니다.”
갱이 얘기에 끼어들었다.
“협회에서 보호하는 이방인과 맹에서 확보한 이방인들은 수가 좀 되네. 물론 카멜롯에 비하면 세 발의 피겠지만, 카멜롯이 이방인들에게 협조적일 리가 없으니 지금으로선 아쉬운 대로 그들을 신도로 만들 수밖에 없어.”
“그들이 신도가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곤궁한 처지에 있으니 번영을 약속한다면 따르겠죠.”
“그건 내키지가 않네요. 식량과 삶을 빌미로 믿음을 준다는 게.”
“믿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최대 생산지는 곧 희망의 불모지나 다름없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꼭 누군가를 의지해야만 하나요? 무능력자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고민해 볼 문제지요. 문제는 바스카리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게 허상이라는 겁니다.”
“추진력이 굉장하시네요.”
“현실적인 종교인이라고 해 주십시오.”
“뭐든 좋습니다.”
돈, 그리고 사람.
무엇 하나 쉽게 풀 수 없는 문제였다.
아마도 최별의 최후의 증명이 끝나고서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쩌냐?
-뭘 으째?
-현질이라도 되면 현질할 텐데.
-이방인들 다 살릴 돈이 현질이 되겠냐. ㅋㅋ
-초모 맘들 대가리 깨지겠다. 이게 액수를 슬쩍 봤는데 말이 안 돼;
-슬쩍 봤어? 난 과감하게 봤는데.
-어땠어?
-ㅅㄱ링 그 돈이면 내 생각엔 바스카리를 사지 않을까?
-엌ㅋㅋㅋㅋㅋ 행복 나라냐? 중고는 안 산다고~
삐익.
또 다이렉트 메시지가 도착했다.
「어디? 어디지? 어딜까? 어디세요? 어디십니까, 형님. 왜 따라 오다가…… 앗, 찾았다!」
똑, 똑.
갱이 물었다.
“영업 안 한다고 뭐 세워 두지 않았나?”
“그랬던 것 같은데.”
쾅!
콰앙!
“손님이…… 아닌 것 같은데.”
“적인가? 준비해.”
드르륵.
모두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콰직.
콰아아앙!
문이 거친 소음과 함께 부서졌고, 문을 부순 주범들이 등장했다.
“귀부인?”
갱이 중얼거리자, 두 여인은 귀부인 모자를 집어 던지고 소리쳤다.
“너흰 누구냐! 누구기에 형님을 납치한 게지!”
“조심하세요.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에요.”
“근데 우리 형님이 납치당할 사람은 아닌데?”
“어라, 그러네요? 납치가 아니겠네요.”
“……문은 내가 안 부셨어.”
“제가 봤어요. 송하린 양 오른발이 부수던데요.”
갱이 부들부들 떨며 구석으로 향했다.
“어, 저…… 나는 이만…….”
“갱? 갱이구나?”
“갱이네요?”
“저…….”
송하린이 갱에게 달려가 인사했다.
“갱! 안녕!”
“아, 안녕합니다.”
“그게 뭔 소리야?”
“커흠…… 반갑네. 오랜만이군.”
“누나한테 반말 할래?”
“그…… 내 나이가…….”
“뭐? 서울 구경 또 할래?”
“대체 그 서울이 어딘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궁금하지도 않은 곳을 왜 맨날 가야 했는지…….”
갱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최별이 물었다.
“셰일?”
“하, 하하하! 누님! 반갑습니다!”
“그대로 늙었네. 보기가 좋아. 응, 아주.”
“이,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갱과 셰일이 공포에 떨며 중얼거렸다.
성진은 분명 ‘미친 년들’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 같았다.
앞서 나눴던 이야기들을 설명하자 송하린과 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신도 수가 모자랄 것 같고 또 이방인들이 단순히 의지만 해야 하는 상황도 별로고 돈도 모자라고. 최악이라는 말 아닙니까, 형님?”
“그러게요.”
최별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말을 꺼냈다.
“신도 수…… 머릿수라는 거죠? 이방인들이면 좋고?”
“네.”
“어쩌면…… 그건 가능할지도 몰라요. 일단 그건 넘겨봐요.”
송하린이 성진에게 말했다.
“형님, 다 떠나서 돈이 제일 문제라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돈? 돈이야 넘치지 않습니까?”
“임무에서 받은 보수로는 절대…….”
“아뇨.”
“동부 상인회가 지원할 수 있는 금액은 딱 절반입니다.”
“아뇨, 아뇨. 제 말을 뭔가 잘못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송하린은 성진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송하린이 성진에게 턱짓해 자리를 바꾼 후, 단 둘이서 얘기를 나눴다.
“돈은 충분합니다.”
“어떻게요.”
“이 친구들 뒀다 국 끓여 먹을 겁니까?”
“친구들?”
“시청자들 말입니다.”
-엥?
-우리?
-야, 우리 돈 있냐?
-없지, 지금은.
-나 근데 내 재산 묻어 두긴 했었음.
-나는 전장에 맡겼는데. ㅋㅋ 그 전장 저번에 보니까 아직 있더만.
-어라, 있네?
성진이 송하린과 눈을 맞췄다.
송하린이 채팅 창을 보고 으르렁거렸다.
“돈 내놔.”
-드, 드리겠습니다.
-며칠만 말미를 좀…….
-바, 반드시 마련하겠습니다.
-이걸 우리 돈을 뜯는다고?
-어림도 없지. ㅋㅋ 응~ 바로 줄 거야~
-여러분의 묵은 통장, 지금 바로 꺼내세요!
이 날 오후, 팬 사이트에 게시판 하나가 생성됐다.
그 이름, 바스카리 크라우드 펀딩.
시청자들의 돈을 갈취하여 자금을 마련한다는 송하린의 발상에서 시작된 악명 높은 게시판.
소개 글은 이러했다.
-이 아이가 배부르다는 느낌을 알까요? 지금 바로 후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