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142화
용이 쓰러졌다.
이 한 문장에 담긴 의미와 염원들은 수많은 바람의 완성이었다.
누군가에겐 복수였고 누군가에겐 속죄였으며 또 누군가에겐 삶이었다.
퍽.
되는대로 떨어진 용의 머리가 어딘가에 처박혔다.
잠시 후, 용인들이 우르르 몰려가 그 머리를 가져왔다.
용의 눈은 죽는 순간까지도 이 상황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대주술사가 성진 옆으로 걸어 나왔다.
“많은 이들이 죽었군요.”
“…….”
용인들의 절반이 죽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곳에 있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모두의 선택이었다.
대주술사도 누군가를 탓하기 위해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었을 뿐.
그녀가 용의 불꽃에 타서 새까맣게 된 용인의 뺨을 쓸었다.
그러자 시체는 힘없이 부서졌다.
울상이 된 그녀는 말했다.
“멜칸토…… 바람이 그대의 날개가 될 것입니다. 그대에게 창공이 자리를 내주기를.”
누가 뭐라 해도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 그들이었다.
조금 더 기뻐해도 좋을 것 같지만, 맺힌 게 많은 이들이라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게릭이 앞으로 나왔다.
그의 머리는 산발이 되어 흘러내렸고 의안을 뺀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한 번에 늙은 것처럼 느껴졌다.
“푸히…… 푸히히히! 형…… 이것 좀 봐! 난쟁이를 무시한 놈의 꼴을 좀 보라고! 형…… 형…… 보고 있어? 나 잘한 거지? 그렇지? 응?”
용의 머리를 붙잡고 흔들던 게릭이 계속 울었다.
대주술사와 헥토가 그를 달랬다.
“게릭…….”
“이제……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나…….”
게릭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물러나자, 대주술사가 말했다.
“이방인이여, 용의 피를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주술사가 주문을 외웠다.
스으으.
피들이 끈덕지게 뭉쳐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잠시 후, 고름 범벅에 썩어서 떨어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던 대주술사의 몸이 깨끗하게 재생되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우리가 가질 것은 없습니다.”
“용의 피를 원한 게 아니었습니까?”
성진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 대주술사.
“이제 스칸다에 용은 없습니다. 과거의 유산을 섬기느라 현재를 바라보지 못하는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합니다.”
성진이 그녀에게 합장하자, 용인들도 성진에게 합장했다.
그 모습이 꽤 장관이었다.
최별이 다가와 작은 병에 용의 피를 담았다.
그녀는 이 붉은 피에 이끌렸다.
“기분이 이상해요.”
“기분?”
“이 피…….”
송하린이 천마도를 뽑았다.
스릉.
“이럴 줄 알았소! 요망한 시조! 최별 양의 몸을 뒤집어썼구나! 단칼에 머리를 날려 그녀의 원한을 풀어 줘야겠다!”
“……장난이죠?”
“큼…… 크흠…….”
“그런데 정말 갈증 나기는 하네요.”
“오래 싸웠으니까. 불벼락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계속 뛰기까지 했으니 몸이 이제야 비명을 지르는 게지.”
“송하린 양은 통각 수치 설정 어떻게 했어요?”
“최대로.”
“어, 저돈데?”
“푸흐흐흐…… 역시 고수들은 통하는군.”
“그러게요. 이런 부분에서는 잘 맞네요.”
-쟤네 뭐 하냐?
-아무도 칭찬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창조적으로 칭찬하네.
-칭찬 품앗이 ㅋㅋ 한국인은 정의 민족~!
성진은 대주술사에게 말했다.
“게릭에게 용의 심장과 날개를 넘기기로 했습니다. 도와줄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지요. 같이 하면 금방 끝날 일입니다.”
게릭은 그것들을 연구실로 옮겨 달라고 부탁했고 용인들은 연구실로 그것들을 옮겨 주었다.
연구실은 군데군데 파손된 부분이 있었지만 조금만 손보면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일이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자 게릭이 성진에게 말했다.
“초모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스칸다…… 그녀는 자네를 선택했어.”
“…….”
“내 말 잘 듣게. 새로운 시대가 올 거야. 난 그것을 준비해야 해.”
“무슨 말씀입니까?”
“그녀가 내게 보여 준 것이야. 나는 이제 약속된 날까지 이곳에 있을 거야.”
“약속된 날?”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내 원수를 갚아 줘서 정말 고마워. 이 고마움은 자네의 검을 벼려 낸 것으로 퉁 치지.”
게릭이 씨익 웃자, 성진도 함께 미소 지었다.
정신없던 하루가 지났다.
***
최별의 오피스텔에 누군가 방문했다.
“아가씨, 접니다.”
철컥.
최별이 찾아온 사람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도어락 번호도 알면서 왜 안 들어오고 있어요.”
“문을 넘는 건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귀찮아서 그렇잖아요.”
“아가씨는 세상을 삐딱하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니에요?”
“맞습니다. 저도 세상을 삐딱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뭐래…… 큭…….”
최별의 집을 방문한 이는 최별의 가문에서 오랫동안 그녀를 보살핀 존재였다.
최재국은 그가 믿을 수 있는 자들에게 자녀들의 보살핌을 맡겼다.
자녀들의 내외적인 상황을 보고하고 최재국의 지시를 따르는 게 그들의 역할이다.
최별의 앞에 있는 자는 그런 관리인 중 1명인 성명한이라는 남자였다.
“아버지는요?”
“언제나 최별 님 염려뿐이시죠. 가장 힘든 일을 맡고 있지 않으십니까?”
“내가 얼마 전, 말씀드린 일에는 뭐라고 하셨어요?”
“그 일 말이군요.”
데자뷰와 접촉한 건.
그들이 최별에게 남긴 말들과 수수께끼 같은 상황.
성명한은 그것을 최재국에게 전달했었다.
“접촉했다는 사실 자체에는 크게 기뻐하셨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다는 것과 수수께끼만 남은 상황에는 침묵하셨습니다.”
“아버지다우시네요.”
“그리고 최별 님을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아버지다우시네요.”
성명한은 최별보다 나이가 월등히 많았다.
그녀의 나이가 20대 중반인 반면, 그녀의 상황을 관리하는 성명한은 40대였으니까.
“아가씨.”
“잔소리?”
“아닙니다.”
“그럼 해도 돼요.”
“쓴 소리인데 괜찮을까요?”
“그게 그거잖아요.”
성명한이 조카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최근 접속 시간을 체크해 본 결과, 들쭉날쭉하시더군요.”
“제가 그랬나요?”
“전에는 시간을 잘 통제하셨었는데…… 혹시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닌가 해서 여쭤보고 있는 겁니다.”
“문제…… 문제라…….”
최별은 잠옷 바람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최근 접속이 잦기는 했다.
주말을 반납했고, 약속은 모두 취소했으며 솔직히 말하면 일주일 중에 종일 캡슐에 있다가 풀다이브하는 날이 많아졌다.
“문제가 많네.”
“염려되는군요.”
최별이 소파에 앉았다.
푹신한 감촉이 둔부를 반겼다.
머리를 뒤로 젖혀 건어물처럼 늘어진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나 말이야, 잘못된 걸까?”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아니, 아니야.”
최별에게는 남들에게는 말 못 할 고민이 있었다.
늘 최고였던 그녀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그녀는 환영받았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고 그것은 평가로 되돌아왔다.
세상은 무미건조하고 노력만 한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별아, 부탁이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아버지가 한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것이고.
또, 그렇기에 진전이 없는 이 상황에 대한 답답함은 커져만 갔다.
이 세계 스칸다, 그리고 종말 이후.
이 두 게임은 그녀의 전부를 뒤바꿔 놓았다.
게임도 공부와 일처럼 노력했던 그녀에게 누군가 말했다.
-최별 씨는 게임을 즐기지 않는 것 같아요. 왜죠?
오히려 최별이 되묻고 싶었다.
게임을 왜 즐겨야 하는지를.
분명한 사명이 있어 게임에 들어왔고, 그녀는 그 사명을 무조건 완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즐겨?’
그녀에게 게임은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것을 즐기는 일 따위는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이 게임이 평범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스스로 변명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중요한 게 아닐까?’
도구가 아닌, 그 자체로 이유가 되지는 않을까.
동료를 잃어 그들이 떠나고, 추진했던 임무가 박살이 나서 물거품이 되고, 함께 울고 함께 웃고 이 모든 게 단지 사명을 위한 것이었을까?
예전이라면 분명 그렇다고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부정할 것이다.
거창한 사명도, 어쩌면 이건 게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스칸다와 종말의 세계를 걷다 보면 스르륵 사라졌다.
그녀는 스칸다와 종말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최근, 그것이 의문이 되었다.
즐기는 것이 맞는지.
그래도 되는지.
“아가씨?”
“아, 몰라요.”
“투정을 부리시는 건가요?”
“아니, 그냥. 모르겠어요.”
성명한이 그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았다.
“걱정됩니다. 아가씨.”
“자주 와요. 어차피 커뮤니티 친구라 게임 안에 있어도 연락할 수 있으면서.”
“그러도록 하죠.”
“내가 믿는 거 알죠?”
“애초에 저만한 사람이 없을 겁니다. 매일 와서 잘 계신지 확인하겠습니다.”
“고독사는 하지 않겠네요.”
***
성진이 용을 쓰러트리고 얻은 능력은 단출했다.
-원시의 피에 적응합니다.
-이미지 : 공백이 이미지 : 용의 숨결로 변환됩니다.
-신체 재생력과 신성력의 회복이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반면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능력이 개화했다.
-신검(神劍) 스칸다가 용의 피를 마십니다.
-스칸다의 고결함이 300 상승합니다.
-후광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검과 근접한 아군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높은 수치의 고결함이 검의 혼을 깨웁니다.
-엥? 검까지 성장해 버렸다고요?
-저기요? 오레타치와 ‘드래곤 슬레이어’입니다만?
-밸붕 우려해서 템 드롭율 조정했네, 아. ㅋㅋ
-공백은 대체 언제쯤 스킬로 바뀔 것인가.(삭제)
-진짜 ‘용의 호흡’이 된 건가? 큭큭큭…….
-이제 콧구멍 소독차 행세는 안 해도 되겠군 그래.
성진은 용에게서 무엇을 얻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것저것 얻고 나니 전부 괜찮은 능력 같았다.
-검의 이름, 스칸다. 크, 오지고 지리고.
-노렸네. ㅋㅋ 수상 소감 준비하듯이 뭐로 지을지 생각해 둔 거 아닐까?
-누가 그런 걸 준비해, 상식적으로 자기 검에 이름 붙이는 찐따들이 어딨어?
-나.
-여깄어.
-보통 다 짓지 않나?
-너희들…… 갱장해…… 그 찐따들 소굴이 여기였구나.
-다키마쿠라에 이름 붙이는 것보단 낫잖아. 솔직히 ㅇㅈ? 어 ㅇㅈ.
이제는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다.
다시 아침이 왔고, 용은 죽었다.
예언은 이뤄졌으며 갈 길도 바빴다.
게릭은 이미 연구실에 틀어박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작별 인사라도 하려고 문을 두드렸다.
쿵, 쿵.
“게릭,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
“게릭?”
게릭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웅얼거렸다.
그러다가 문 너머로 몇 마디 말을 남기고 더는 말이 없었다.
“초모.”
“예.”
“널 믿는다. 난 스칸다가 내게 부탁한 것을 해내야 해.”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겁니까?”
“그럼 뒤틀릴 거야. 그럴 순 없어.”
“알겠습니다.”
“……고마워, 잘 가. 배웅 못 해서 미안해. 고대 난쟁이는 모두 널 좋아해. 이제 남은 건 나뿐이거든.”
“저도 게릭을 좋아했습니다.”
“푸히히히, 가!”
남은 건 용인들뿐.
연구실에서 발걸음을 돌려 대주술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남은 용의 부산물들을 정리하여 분배했다.
“피 말고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신다니, 곤란합니다.”
“애초에 우리의 목적은 그것이었으니까요. 나머지는 처치하기 곤란한 것들뿐입니다.”
“초모, 예언의 사내여.”
“누가 되었든 예언은 이루어졌을 겁니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아뇨. 저는 느낄 수 있어요. 당신은 강대한 선. 너무도 희고 투명한 사람입니다.”
“…….”
“용인들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게 됐습니다. 이것은 모두 당신의 덕입니다.”
“모두가 내디딘 덕분이죠.”
대주술사가 뿔피리를 건넸다.
뿔피리는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였다.
“‘도르토!’라고 하면 크기가 커질 겁니다.”
“이건 왜…….”
“우리 용인들은 세상으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당신도 분명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그 뿔피리는 일족 전체에 들리도록 설계된 겁니다. 어디에서도, 그리고 얼마나 멀리 있더라도.”
“뿔피리를 불면 당신들이 찾아온다는 겁니까?”
대주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돕겠습니다.”
“제가 예언의 주인이라서요?”
“……우리의 친구여서입니다.”
성진이 뿔피리를 목에 걸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간직하겠습니다.”
“초모, 당신에게는 앞으로 많은 고난이 따를 겁니다. 적은 계속해서 늘어날 거고요.”
“늘 그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있음을 잊지 마세요. 당신을 미워하는 적보다 가까이에 있는 것은 당신을 좋아하는 친구들입니다.”
대주술사와 성진은 서로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일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이것을 용에게 맹세합니다.”
“이제 스칸다에 용은 없지 않습니까?”
“아, 그랬었죠. 그럼…….”
대주술사는 미소 지었다.
“우리 스스로에게 맹세합니다.”
***
성진 일행이 용의 피를 유리병에 나누어 담고 밑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난쟁이 형제들은 연신 성진의 검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오…… 이 굴곡 좀 봐라, 막내야! 세상에 이렇게 잘 빠진 선은 없을 거야!”
“큰 형! 그 커다란 머리통 좀 치우고 얘기하시오! 나한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세상에…… 혈로가 기가 막히는군. 이걸 순식간에 찍어 냈다고?”
“형!”
“스칸다라고 했지? 가르침을 구할 만하군.”
“스칸다는 대지의 여신이라니까, 형.”
“뭐, 신? 그래…… 과연 신의 솜씨야.”
-흔한 밀덕의 망상. ㅋㅋㅋ
-근데 난쟁이들 진짜 스칸다랑 친하구나.
-난 요정이 젤 친한 종족인 줄 알았는데 난쟁이가 은근 실세였네;
-용의 피 시조에게 넘기기 vs 통수 방지, 넘기지 않기.
-닥전.
-닥후.
-닥터후.
-아 근데 왜 용 숨 안 보여 주냐?
-용 숨이 뭐야?
-초모 얻은 능력. ㅋㅋ 딱 봐도 브레스 아니겠냐?
-시발 무슨 ㅋㅋㅋ 수도사가 브레스가 말이 되냐?
-말이 외않되?
-어우 맞춤법; 세종대왕님이 너부터 용 숨으로 녹이겠다.
‘클립보고 울었습니다.’ 님이 10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내 의지를 이어받은 초모여. 부디 스칸다를 구원하라!]
-이어받은 의지(0.0001%)
-님 칼은 저어기 강물에 떠내려갔을 듯. ㅋㅋ
-용의 고원에 박혔던 검들 대박 행운이네.
-왱?
-초모한테 강제로 스폰했잖아. ㅋㅋㅋ
-고노방구미와 고란노 스폰사노 데쿄데 오쿠리마시타.
-근데 용 생각보다는 약했네?
-원시 용이었잖아. 글고 탄타르빌만 아니었으면 곤란했을걸. 하늘 날아 댕기고 칼도 안 들었자너.
-고것은 장미 식칼 스칸다가 처리했구욘.
어쨌든 게릭의 말이 맞긴 맞았네. ㅋㅋ 불 뿜고 덩치 크고. ㅋㅋ
주술이 걸린 부적을 지니고 산을 넘자, 신기하게도 추위가 조금 덜했다.
물론 오들오들 떨 정도가 아니라는 거지 산에서 밤을 새워도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일전에 봐두었던 동굴에서 자리를 편 일행은 모닥불에 둘러앉아 이야기했다.
송하린이 먼저 운을 뗐다.
“진실 게임이라도…….”
“영양가 없어요.”
“흥…….”
성진이 타놀드에게 말했다.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뭘, 과거에 진 빚을 갚았을 뿐이야.”
“왜 네놈이 생색을 내느냐. 우리도 기껏 같이 와 주었거늘.”
“어차피 선조님께서 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야 거든 것뿐이고.”
“그나저나…… 선조님은 어떤 미래를 보았기에, 연구실에 틀어박혀 우리를 배웅하시지도 않은 건지.”
“안타까운 분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고향으로 모셔도 좋았을 텐데.”
“이미 여쭤보았다. 당연히 거절하셨고.”
“에잉…….”
드드드…….
“무슨 진동이…….”
“……니다.”
“응? 막내야, 방금 뭐라고 했느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요?”
“그럴 리가…… 당신들이요?”
송하린과 최별, 그리고 성진은 따듯한 불을 쬐며 결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허…… 잘못 들었나?”
“시끄럽습니다.”
“이것 봐, 나만 들은 거야?”
“……아니.”
“나도 들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음성.
동굴에 일행 말고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송하린이 앞구르기를 하며 천마도를 뽑았다.
“누구냐! 어디야! 감히 기척을 숨기다니! 제법이구나!”
“하린 양, 이리 와요.”
“오호라! 이번엔 최별 씨의 얼굴을 뒤집어쓴 게로군!”
“호들갑 떨지 말고요. 지금 검이 말하고 있잖아요.”
“엥? 무슨 소리야?”
-이게 무슨 소리야?
-검이 말한다는데?
-그건 나도 알아 왜 검이 말하냐는 거지. ㄷㄷ
검이 말을 하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일행은 멍하니 입을 벌렸고 난쟁이들은 기겁하며 절까지 했다.
“검의 신이 강림하셨다!”
“우리를 꾸짖고자 함이야!”
“어서 용서를 빌어라!”
이 난리 통에 유일하게 의심의 눈초리를 한 건 성진뿐이었다.
그는 이 목소리가 어딘가 낯익었고, 여성의 목소리라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유리? 정유리?”
“뭐, 뭐요?”
“그 휴머노이드를 말하는 거요, 형님?”
검이 말했다.
“올빼미, 나는 혼란스럽습니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채팅 창이 정유리의 대답에 뒤집혔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로 한동안 채팅 창이 활자 덩어리로 보일 만큼 빠르게 채팅이 올라갔다.
성진은 난쟁이들을 피해 검으로 변한 정유리와 얘기를 나누었다.
성진이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전부를 얘기할 순 없었으니 적당한 허구를 섞어서 얘기했다.
정유리는 말했다.
“우리는 그럼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겁니까?”
“그렇지.”
“두근두근합니다.”
“……뭐?”
“너무 신기합니다. 이것이 자연 동굴입니까?”
정유리가 활발하게 금세 적응하자 최별과 송하린이 놀라운 눈초리로 검을 살폈다.
-유리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유리 어디 갔었나 했더니; 왜 여기로 왔지?
-맙소사 정유리까지 합류. ㄷㄷ
-종말 이후, 어셈블!
-ㅋㅋㅋㅋㅋㅋ 우리는 종말에서 기어 올라온 괴물들이다!
최별이 물었다.
“정유리 양, 반가워요. 등불의 일원……이었던 최별이라고 해요.”
“나는 등불이 무엇인지 들었습니다. 최별이라는 이름은 처음이지만 앞으로 익숙해져 보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그리고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나는 성심성의껏 답변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거기에 들어가신 거예요?”
시청자와 성진 모두가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최별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정유리가 답했다.
“나는 방금 깨어났습니다.”
“방금 깨어나다니요? 초모…… 아니 올빼미 님이랑 함께 넘어온 것 아니었어요?”
“나는 올빼미와 함께 넘어왔습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깨어났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송하린은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최별은 스칸다에 떨어진 후 사람들의 소식을 모았다.
스칸다에 진입한 게 확실한 인원은 송하린, 정유리, 올빼미, 이민상, 그리고 자신이었다.
그런데, 정유리와 이민상의 소식만큼은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었다.
실제로 성진과 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 둘 다 가진 정보가 없으니 큰 소득이 없었다.
정유리는 해맑게 말했다.
“나는 이 몸이 꽤 만족스럽습니다.”
“유리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나의 메모리는 이곳에 오기 전 총기에 갇혀 있었습니다. 크게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저 난쟁이들이 놀라는 것으로 보아 나는 굉장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굉장한 존재긴 했다.
별의 용광로에서 태어난, 말하는 검.
난쟁이라면 게거품을 물며 떠받들 것이니까.
“올빼미,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실마리를 찾는 중이야.”
“내가 왔으니 걱정 마십시오.”
“왜?”
“미소녀와 검이 결합하면 대부분은 낙승입니다. 축적된 데이터들이 결과를 증명합니다.”
“…….”
-그건 ㅇㅈ이지!
-ㅋㅋㅋㅋ 미소녀 + 검 = 승리
-아, 유리좌. ㅋㅋㅋ 그리웠써요오오.
-이 파티가 점점 진화한다. ㅋㅋㅋ
-아, 스칸다 구원 파티 모집한다제. ㅋㅋ (4/5)
최별이 갑자기 소리쳤다.
“설마!”
“왜 그러시오?”
“송하린 양, 스칸다에 진입할 때 어떤 메시지를 보지 않았었나요?”
“메시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그 있잖아요! 표, 표식! 그래 표식요!”
“……표식? 표식이라…… 아! 표식이랑 무슨 시간이 고정된다는 메시지를 본 것 같긴 했소!”
“그래요, 그거!”
최별은 정유리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검을 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물었다.
“유리 양, 기억해야 해요. 혹시 표식을 추적한다거나 시간이 고정됐다는 얘기는 못 봤나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잠든 것처럼 눈을 감았다가 방금 일어났습니다.”
“둘은 표식을 못 찾았어…….”
성진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청설모가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경계하라, 모든 게 무너질 것이다. 시간은 연속되지 않고 세계는 마주하리라.
청설모가 경고한 것은 지금 이 사태가 아니었을까.
-야;; 이거 재앙이 한두 개가 아닌데?
-지금 각자 다른 시점에 떨어진 거임? 와 스케일 봐라. ㄷ
-ㄷ 근데 이런 것까지 구현 가능해?
-셋은 유저고 둘은 아니니까 그런 것 아닐까?
-생각해 보니 그러네. 킹능성 있는 듯.
최별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민상 씨는 지금…… 아직도 그 소용돌이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거네요?”
“이런…….”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면 그것을 비웃듯이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종말을 해결한다고 민상 씨를 구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