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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140화 (140/222)

# 140

140화

성진 일행과 헤어진 용인들은 일을 마무리하고 거처로 돌아갔다.

그들은 번영했던 용인들의 모습을 기억했다.

고대 난쟁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들과 우정을 나눴던 시기, 난쟁이들과 용인들은 서로에게 경쟁심을 느끼기보단 깊은 이해를 느낄 수 있던 시기였다.

‘어쩌다가…….’

용의 탓이다.

아니, 용의 탓이라고 하고 싶었다.

모두 원시의 세게이아가 그 거대한 날개를 펼쳐 탄타르빌을 불사를 때 어그러졌다.

용인과 난쟁이들의 우정은 물론이고 친구의 삶, 용인의 긍지까지도.

‘전능?’

용은 전능하다.

이것을 부정할 이는 드물 것이다.

용인들은 전능한 용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마치, 자신들도 전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명이나 다름없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전능은 무슨. 용인은 하등하다.’

종족에 대한 고찰은 삶의 의욕을 앗아 갔고 자존감을 바닥까지 떨어트렸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극도로 절제된 삶을 살아가는 구도자처럼 죽은 병기들로 용의 고원을 가득 채우는 일을 하며 살아갈 뿐이었다.

원시의 세게이아는 그렇게 고대 난쟁이들의 생명을 빼앗고 용인의 긍지를 거둬 갔다.

용인은 거처로 돌아와 입구의 경계병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없다.

북적거림이 없었다.

마을은 아이들이 뛰놀고 웃음이 있어야 하는 장소다.

그것들이 있어야 희망을 품고 꿈도 꾼다.

이곳은 그것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왜일까.’

귀환한 용인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긴 싫었다.

“대주술사님을 뵈어야 합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동굴의 문지기가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도 표정이 건조해 어떤 표정인지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늦은 시간 대주술사와 독대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하는 듯했다.

“부탁드립니다.”

“들어가시게.”

어둑한 동굴을 걸었다.

툭, 툭.

성진 일행의 머리를 적셨던 물방울이 천장에서 떨어졌다.

이곳을 통과하는 용인은 머리에 습기가 들이쳐도 이제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세월에 무감해지고 자극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은 부끄러웠다.

-용을 죽일 거다. 너희 겁쟁이 용인들은 이번에도 멀리서 지켜보기나 하라고. 너희의 신이 추락하는 모습을…….

추방자 게릭.

새로 탄생한 이를 제외하면, 용인이 그를 모르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고대 난쟁이의 역사요, 증명이었다.

그는 탄타르빌이 멸망한 이후로 줄곧 그것을 마음에 담아 온 것이다.

그러니 기회가 찾아오자 거침없이 일을 추진할 수 있던 것이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지금 그 해답을 들으러 왔다.

“……대주술사님.”

“헥토, 메타이사르. 수고를 다 하셨습니까.”

“일은 끝마쳤습니다.”

“무언가 고민이 있는 눈치입니다. 이 늙은이에게 말해 줄 수 있나요?”

“……제가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모른 척해야 할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아직 저는 어린 게 분명합니다.”

“헥토, 그대는 유수의 세월을 살아온 존재입니다. 그대의 번뇌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는 그 누구라도 가볍게 여기지 못할 거예요.”

늙고 쇠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대주술사는 헥토를 다독였다.

헥토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 용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탄타르빌에 가까이 간 것이로군요.”

“세게이아의 자손이 살아남아 탄타르빌을 차지한 것 같았습니다.”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단순한 질문인데도 어쩐지 수치스러웠다.

자신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를 알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공포였습니다.”

“용은 두려운 존재입니다. 용인들에겐 그 전통과 기원이 더해져 더욱 지독하게 다가오죠.”

“용을…… 멸망의 그날에 난쟁이들을 외면할 만큼 두려웠던 그 존재가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는…… 저는…….”

끼이이…….

용인의 구슬픈 울음.

주술사는 무릎 꿇고 다가와 눈물로 고백하는 헥토에게 말했다.

“헥토, 작은 용이여. 두려움을 고백하는 건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고개를 드세요. 긍지 높은 용이여.”

“대주술사님…… 우리는 왜 친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못한 겁니까?”

대주술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었어요.”

“…….”

“모두 내 결정이었어요. 과거의 난쟁이들을 구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

“나 또한 두려웠으니까요. 당시 부족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용을 보았습니다.”

거대한 몸, 하늘을 뒤덮은 날개.

그리고 그 포악한 눈.

원시의 세게이아는 그녀에게 폭력이었고 공포였다.

“일족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내가 그 일족의 최후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 될 수 있다……. 그런 두려움……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용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 그 모든 게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했죠.”

“……그것은 대주술사님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혼자 짊어지려 하시면 안 됩니다!”

대주술사는 헥토의 말에 빙긋 미소 지었다.

“헥토, 그대는 솔직한 자입니다. 내 말에 있는 그대로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슨 질문이든지 진실하게 답하겠습니다.”

“그날을…… 후회하나요?”

“후회합니다.”

“그렇군요…….”

헥토는 대주술사에게 이방인 무리와 게릭이 탄타르빌로 향했다고 말했다.

대주술사는 눈을 크게 뜨고 얘기를 듣다가 신음을 흘렸다.

“시간이 너무 오래 흘렀군요…….”

“이, 이틀 뒤에 출발한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시간이 있…….”

“이곳에서 탄타르빌까지는 이틀입니다. 그들이 말한 대로 이틀 뒤에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촉박할 겁니다.”

“압니다…….”

알고 있다.

뜻을 모으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마음만 앞서 급히 나선다한들 준비된 것 없이 용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런데, 대주술사는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헥토, 내 몸이 왜 이렇게 되어 가는지 압니까?”

“분명 주술의 반동으로…….”

고개를 젓는 대주술사.

그녀는 말했다.

“용인의 몸은 강건합니다. 그런 정도로 몸이 썩지는 않아요.”

“그럼…….”

“마음의 병입니다. 헥토가 그런 것처럼 나 또한 과거를 후회하고 있습니다.”

“대주술사님…….”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헥토와 함께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왔다.

“도이트락센…….”

대주술사가 주술어를 웅얼거리자 그녀의 목소리가 마을 전체로 울려 퍼졌다.

가뜩이나 조용했던 마을인지라, 그녀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들리시나요, 용의 자식들이여.”

“대, 대주술사님?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대주술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야기했다.

“탄타르빌이 다시 한번 위험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탄타르빌은 멸망하지 않았습니까?”

“고대 난쟁이들도 전부 죽었는데…….”

“추방자 게릭이 그의 도시를 되찾으려 합니다.”

“그런…… 무슨…….”

추방자 게릭의 이름을 들은 용인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몸을 떨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더욱 침묵하거나.

대주술사, 그녀가 선언했다.

“나는 그를 도울 생각입니다.”

“대주술사님!”

“우, 우리는 어떻게…….”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처음부터 내 뜻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뜻을 모으기엔 시간이 부족합니다. 헥토! 내 창을!”

헥토가 헐레벌떡 뛰어 대주술사의 창을 가져왔다.

그사이에 대주술사의 주위로 많은 용인이 모였다.

“계획은 있습니까?”

“시간은 얼마나 남은 겁니까?”

“승산은요? 용을 쓰러트릴 병기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이러면 대주술사님이 보신 미래는 대체 무엇이었던 것…….”

키아아아아아악!

두두두.

눈이 먼 용인이 다가왔다.

그의 뒤로 수각류(獸脚類)의 일종인 약트가 무리 짓고 있었다.

약트는 벨로시랩터를 닮은 생김새였다.

“대, 대주술사님…… 이것을…….”

“고호탄, 메헤르스. 눈이 먼 용이여, 이것은…….”

“약트는 빠릅니다. 우리는 날개 없는 용. 이들이 당신들의 날개가 되어 줄 겁니다.”

대주술사와 헥토는 기억을 떠올렸다.

고호탄은 멸망의 그날에도 약트들의 고삐를 쥔 채로 서성거렸다.

그는 누군가 싸우기를 각오했다면 흔쾌히 그것을 내줄 것처럼 그렇게.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눈이 멀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보고 있던 것이다.

이런 미래를.

“고마워요, 고호탄.”

헥토가 대주술사를 부축해 가장 건강한 약트의 등에 태웠다.

그리고 헥토가 다른 약트에 등에 올라탈 무렵, 주위를 둘러보았다.

웅성거림.

“너는 남아 있어라!”

“아버지, 저도 싸울 수 있습니다.”

“네가 죽는다면…….”

“승리하지 못하면 가치 없는 목숨입니다. 긍지는 땅에 떨어졌고 친구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합니다.”

“…….”

헥토의 주변은 온통 소음으로 가득했다.

모두가 전투에 앞서 물자들을 동여매고 어떤 경로를 선택할지를 토의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죽은 듯이 조용했던 마을에 생기가 돌았다.

헥토가 그에 벅차오를 때, 대주술사가 이야기했다.

“친구의 용서는 의무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속죄는 우리의 의무입니다.”

“속죄를! 친구에게 속죄를!”

“죽으러 가는 싸움입니다. 괜찮나요?”

“괜찮습니다!”

“좋습니다!”

대주술사가 전열이 정비되자 소리 높여 외쳤다.

“전진! 우리는 용인, 결코 용의 아래가 아닙니다.”

“와아아아아아아!”

키아아아아악!

약트가 재빨리 발을 구르며 튀어 나갔다.

헥토는 생각했다.

어쩌면 뜻을 모을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고.

이미 오래전 그날부터 모두 같은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용과 싸우는 용인.

용인은 용처럼 거대한 몸도, 흉악한 날개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용과 싸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유대라는 숭고한 가치 덕분이었다.

그것은 용기라는 갑옷을 입게 해 두려움을 지워 내고 신의라는 창을 들게 해 용의 불을 가르게 했다.

***

탄타르빌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웅장한 소리는 그들의 군가였다.

도시 곳곳에 설치된 음향 기기가 새로운 힘을 만들어 냈다.

크와아아아아아아!

세게이아의 자손이 성진 일행의 접근을 눈치챘다.

성진 일행이 도시로 진입한 위치는 측문.

길이 구부정하고 상대적으로 멀쩡한 시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뛰어어어어어!”

게릭의 고함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행은 총 셋으로 나뉘었다.

좁고 어두운 골목을 통과해야 하는 성진과 게릭, 그리고 난쟁이들.

지붕을 주파하며 용의 시선을 끌어야 하는 송하린.

그리고 그녀를 보조해야 하는 최별.

이 셋은 미리 말을 맞춘 대로 흩어졌다.

크와아아아!

콰아아아아아앙!

거칠게 날아오른 세게이아의 자손.

아직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그 공포가 날아간 곳은 송하린이 아닌 최별이 있는 곳이었다.

“왜 나야! 제대로 안 해요?”

“멀어! 멀다!”

우우웅.

철컥.

펑!

-탄타르빌 검은 연막 생성.

최별이 있던 지붕이 자욱한 연기에 휩싸였다.

“흐아아아아압!”

블레이즈 오러(Blaze Aura).

정기신(精氣神) 중, 정에 해당하는 힘.

성진은 마력이 없기에 다루지 못하는 힘이었다.

최별의 야화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이 날아오던 용에게 치달았다.

화르륵.

키아아아아!

후우웅!

날갯짓 두어 번에 불과 함께 연막 자체를 날려 버린 세게이아의 자손.

하지만, 최별은 이미 지붕에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건물 밑으로 숨어 때를 기다렸다.

기대하던 소리가 들려왔다.

-탄타르빌 철구 사출.

콰아아앙!

키에에에에엑!

날개 한쪽에 커다란 철구가 적중하자 용이 잠시 휘청거리며 지붕에 내려앉았다.

용의 맞은편에서 송하린이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이거 재밌네.”

-ㅋㅋㅋㅋㅋㅋ 송하린 신났다.

-티키타카 오져야 할 텐데. ㄷㄷ

-10분을 어케 버티누;

용의 코에서 불길이 일렁였다.

“어?”

송하린은 재빨리 위험 대응 장치를 작동시켰다.

-탄타르빌 비상 격벽 가동.

철컥.

콰아앙!

콰아아아앙!

이중으로 된 특수한 소재의 격벽이 솟아올라 송하린이 있는 곳을 보호했다.

그 직후, 용의 입에서 거센 화염이 토해졌다.

후우웁…….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으…….”

심상과 진기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송하린은 뜨거운 열기에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신기한 것은 격벽이 없었다면 이조차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용의 화염을 막는 방벽이라니.

-탄타르빌을 의심하지 마라. 아예 작동조차 안 하면 몰라도 일단 작동이 되면 기능이 정상에 가깝다는 거니까.

“제법인데. 근데…….”

용의 화염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격벽이 강해도 당장 열기에 오랜 시간 노출되니 질식할 것 같았다.

‘빨리!’

곧, 누군가에 의해 용은 불을 뿜는 것을 멈춰야 했다.

철컹!

철컹!

-탄타르빌 연발 쇠뇌 작동. 결손율 30% 기능 장애 장치 제외.

투두두두두!

투두두두!

용의 등과 날개를 노리고 날아온 화살은 비록 용의 비늘을 파고들지는 못했지만, 그 거체를 두드리고 고통스럽게 했다.

키아아아아아아!

텅!

터더더덩!

격벽에 화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송하린은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이번엔 그녀의 차례였다.

최별은 곧 위험해질 것이다.

역시나.

콰아앙!

콰아아아앙!

최별이 있던 장소를 노리고 용이 난동을 부렸다.

그때마다 건물은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송하린은 다급하게 외쳤다.

“요인 긴급 구원!”

-탄타르빌 요인 긴급 구원 작동.

기이이잉.

철컥.

철컥.

여기저기서 포대가 올라왔다.

그리고, 용을 향해 가진 힘을 쏘아 냈다.

콰아아아아!

용이 그 힘에 몸이 밀려 더는 최별을 추격하지 못했다.

세게이아의 자손은 분한 듯 몸을 날려 포대들을 직접 부쉈다.

콰아앙!

콰아아앙!

“큰일 났다! 자리를 옮깁시다!”

“벌써 쓰면 어떡해요!”

“이 여자가 살려 줬더니!”

크와아아아아아!

세게이아의 자손이 최별을 향해 다시금 날아왔다.

그녀는 지붕 밑으로 떨어지면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뭐, 뭐야! 왜 또 나야! 살려 줘요!”

“벌써 쓰면 안 된다고 방금 당신이 말했소.”

“얼른 써요!”

-탄타르빌 구속 사슬 작동.

펑!

촤르르르르르륵.

철컥!

쇠고랑이 날아가 용의 목에 걸렸다.

덜컥!

날아가던 속도 그대로 충격을 받은 세게이아의 자손은 울부짖으며 목을 휙 젖혔다.

“어어?”

콰아아앙!

그대로 고랑을 사출한 포대를 뽑은 용은 앞발로 쇠고랑을 부숴 버렸다.

으지직.

“무지막지하네.”

내심 천마도의 힘이라면 용을 벨 수 있지 않을까 하던 그녀의 생각은 지금 단 몇 분의 전투로 사라졌다.

“최별 양!”

“왜요!”

“실수하면 그대로 아웃이야, 난 아웃될 생각 없소.”

“누구는 있나요?”

“옛날 생각나네. 그때는 수십 명이 함께였는데.”

“……저기 저 지금 쫓기고 있거든요. 추억은 다음에 으아아아아아! 불! 불 뿜잖아요!”

“그때만 떠올리면…….”

“지금 떠올리지 마, 미친 여자야! 불! 불 온다아아!”

송하린이 호흡을 가다듬고 도갑에 손을 올렸다.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철컥.

“이쪽 봐라, 참격!”

콰아아앙!

키아아아아아!

천마도의 날은 용의 몸을 상하게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충격은 받은 듯, 용이 송하린을 돌아봤다.

“어딜…… 근데 진짜네.”

송하린의 시선이 별의 용광로를 향해 죽어라 달리는 난쟁이들과 성진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용을 본 그녀는 지붕 밑으로 떨어지며 용의 발톱을 피했다.

머리칼이 조금 잘려 나갔다.

“하하…… 죽을 뻔했네.”

“도와줄게요!”

-탄타르빌 파쇄 탄 사출.

콰아앙!

키아아아아아!

“도움!”

“조금만 쉬고!”

“평생 쉴래요?”

“간다아아아!”

지치지 않는 용과 지쳐가는 두 여인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

“여기야! 여기! 빨리 들어가라 후손들아!”

“헉…… 허억…….”

“다, 다 와간…… 허억…….”

“살 좀 빼라! 아무튼, 어서 들어와!”

콰아아아아!

바위가 날아와 타간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두 여인과 용의 싸움이 만들어 낸 파편 같았다.

기겁한 타놀드가 소리쳤다.

“큰형!”

“위험해!”

타간이 바위에 깔려 끔찍한 몰골이 될 뻔한 순간, 성진이 거친 호흡을 내뿜으며 봉으로 바위를 받았다.

토오옹.

거대한 바위가 성진의 봉 위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성진의 눈이 충혈되고 힘줄이 불거졌다.

“초모!”

그는 타간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위를 내려놓았다.

타놀드 형제는 심장을 쓸어내리고 초모에게 감사를 표했다.

“초모…… 더, 덕분에.”

“들어가죠.”

“아, 응! 그러자고!”

오래된 건물.

아니, 그 터만 남아 벽과 천장이 없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엔 우물처럼 속이 빈 물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후손들아, 이곳이 별의 용광로다.”

“예? 그, 그게 무슨…….”

“의문은 나중! 닥치고 내가 가르쳐 준 대로만 해라. 시간이 없다!”

“알겠습니다!”

다섯 난쟁이가 우물 모양의 용광로를 둘러싸며 자리를 잡는 동안, 게릭이 탄타르빌을 조작했다.

“별의 용광로 가동.”

-동력 부족이 우려됩니다.

“어떻게든 해.”

-별의 용광로 가동.

후우우우우웅.

용광로가 빛났다.

다섯 난쟁이는 게릭이 일러 주었던 주문을 외며 손아귀를 단검으로 긁어 피를 용광로로 떨구었다.

툭.

투둑.

“별의 어머니여, 찬란한 주인이여. 흙과 자갈, 모래로 이루어진 그대의 시종이 이곳에 모였습니다.”

“부디 영광된 대답으로 우리를 복되게 하시고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 운명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흐르는 별의 세계, 별의 어머니 스칸다시여.”

그때, 용광로에서 엄청난 에너지의 폭풍이 일었다.

성진과 게릭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힘을 주고 있는데, 의식을 진행하는 난쟁이들은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건물이 허물어졌어도, 사방이 뚫려 있어도 성진은 이곳이 별의 용광로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별들이 용광로에서 흘러나와 사방에 가득 찼다.

난쟁이들의 눈에선 빛이 흘러나왔고 누군가에게 지배당하는 듯 보였다.

타간의 입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파…… 아파…….”

게릭이 황급히 용광로에 다가가 그 안에 엘리움을 쏟아부었다.

용광로의 안에 든 것은 액체가 아닌지 엘리움을 와르르 쏟아 넣어도 안에 든 은하수는 조금도 흘러넘치지 않았다.

“별의 주인이여! 전례 없는 대위기가 도래했습니다. 그대는 죽어 가고 있습니다. 부디 답을 내려 주십시오!”

“아파…… 아프다고……. 이건…… 뭐…….”

스칸다로 추정되는 여인은 계속해서 난쟁이의 입을 빌려 신음했다.

게릭이 탄식했다.

“빌어먹을! 소용없어! 이러면 방법이…….”

성진이 용광로로 다가갔다.

그는 별의 용광로에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그때, 스칸다가 소리쳤다.

“……아! 아! 희망이다! 그대는 희망이구나!”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랬구나…… 그런가. 나는 죽는구나. 이제야 명확해지는구나.”

“무슨…….”

“키 작은 땅의 아이야, 너에게도 쓰임이 있으리라.”

용광로에서 거센 기운이 뿜어져 나와 게릭을 덮쳤다.

후아아아아아아아!

“컥…… 커억…….”

“기억해라, 네가 할 일을…….”

“명, 명심하겠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게릭은 빛이 흘러나오는 눈을 하고 스칸다에게 대답했다.

스칸다는 엘리움을 삼키고 아직 성진에게 아무것도 내주지 않았다.

“힘이…… 힘이 부족하다…….”

“검을 만드시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아! 찾았다! 가까이에 있어! 많은 힘!”

“가까이?”

“그들을 이곳으로? 아니, 불가능해. 아직은 아니야.”

용광로의 은하수는 꿀렁이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타놀드의 입에서 그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쿠웅.

작은 울림이 대지를 흔들었다.

사방이 뚫린 공간이기에 성진은 이 흔들림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고원의 곳곳에서 하늘로 빛을 뿜어내는 물체들.

선처럼 이어져 모두 하늘로 다양한 색의 빛을 모았다.

이것은 용의 고원에 박힌 병기들의 힘이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이다.

하늘에 그 기억들이 펼쳐졌다.

-앞을 막아!

-지켜! 밀리면 끝이야!

-으아아아! 제발! 제발! 제발 해내야 해!

-파티 차원에서 십시일반 모아서 투자한 거야, 너무 기뻐하진 마.

-고마워. 소중하게 쓸게.

-처음으로 내 걸 가져 본다. 좋네, 좋아!

그들의 기억이 순식간에 성진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끄아아악…….”

이 힘의 파동을 느낀 것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탄타르빌에서 전투를 이어 가고 있는 최별과, 송하린 그리고…… 세게이아의 자손도 이 흔들림을 느꼈고 별의 용광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세게이아의 자손은 그곳을 향해 불을 뿜으려 했다.

최별과 송하린이 소리쳤다.

“안 돼! 못 막아요! 피해!”

“너무 멀어! 멀어! 으아아아아아! 멀다고!”

불길은 거침없이 별의 용광로와 성진 일행을 집어삼키기 위해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에 모두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불길에 맞서는 또 하나의 불길이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여러 갈래의 불길이 하나로 합쳐져 세게이아의 자손의 불길을 막았다.

송하린과 최별이 얼떨떨하게 혼잣말했다.

“저게 뭐야?”

“누가 온 거야?”

세게이아의 자손을 막은 건 용인들이었다.

대주술사가 소리쳤다.

“뿔피리를 불어라! 우리가 왔다!”

뿌우우우우우!

웅장한 소리가 탄타르빌에 울려 퍼졌다.

난쟁이의 군가와 뿔피리 소리가 어우러져 탄타르빌을 가득 메웠다.

약트를 탄 용인들이 탄타르빌의 출입문을 통과할 때마다 소리가 들렸다.

-탄타르빌 출입 확인. 신분 확인합니다.

-확인되었습니다. 난쟁이의 친구입니다.

대주술사가 용인들을 이끌며 말했다.

“친구에게 시간을 벌어 줘야 해요! 우리는 모든 걸 바로잡아야 해요!”

약트를 타고 지붕을 내달리던 헥토가 용을 쳐다봤다.

여전히 두려웠다.

하지만, 움츠러들지 않았다.

마음은 육체를 지배했다.

“흐아아아압!”

집어 던진 창이 세게이아의 자손을 때렸다.

텅!

창은 볼품없이 튕겨 나왔지만, 이로써 되었다.

헥토는 창을 던질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내 후회를 가져가고 용기와 긍지를 돌려줘!”

“으아아아아, 도마뱀 주제에!”

“늦어서 미안하다!”

멸망한 도시 탄타르빌의 전투 상황은 용인들의 난입으로 혼전으로 치달았다.

대주술사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내가 본 미래…….”

-가시 돋친 고원에 별이 쏟아질 것이다. 주인 잃은 병기들이 새 주인을 찾을 것이다.

용의 고원에 모였던 죽은 병기들은 그 힘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별의 용광로로 막대한 힘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송하린과 최별은 용인들이 세게이아의 자손의 시선을 끄는 사이, 별의 용광로로 향했다.

“무슨…… 이게 뭐…….”

용광로에는 백색 검이 검집에 든 채로 떠올라 있었다.

성진이 그 검을 쥐자 찬란한 백광이 뿜어 나왔다.

눈에서도 빛을 뿜어내는 그에게 난쟁이의 입을 빌린 스칸다가 물었다.

“모든 것은 네게 달렸다. 희망이여, 묻노니 그대의 검은 어떻게 불릴 것인가?”

별의 주인이 묻는 것은 검의 이름.

성진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스칸다.”

“이 싸움의 끝에 우리는 진정 행복해지기를.”

멸망한 도시, 탄타르빌.

별의 용광로 최후의 검, 스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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