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128화
“비급만 챙기고 떠나야 한다! 어서!”
“하지만…….”
“어서!”
푸슛!
“크악!”
아쉬움과 미련은 흔적이 된다.
붉은 무인들이 퇴로를 틀어막고 도주하는 일행을 맞이했다.
“급한 일이 있는가 보오?”
“처, 천벌을 받을 놈들!”
“풉…… 큭큭큭…… 워낙 자주 듣는 말이라 이젠 제 옷처럼 느껴지는구려.”
“혈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다. 돈과 헛된 영생에 눈이 먼 천금 놈도!”
“아무리 그래도 우리 장주님의 존함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군. 뭐, 우리가 섬기는 건 천금 님이 아니니 딱히 상관은 없다만.”
“반드시…… 반드시 동부가 보란 듯이 너희를 벌할 것이다. 내 죽어서도 지켜볼 것이야!”
붉은 무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하러 죽어서 지켜보시나?”
“뭐?”
“그대들을 위한 특별석이 마련되어 있으니 죽는 건 조금 미루는 게 어떻겠나?”
“그게 무슨…….”
푸욱!
“커, 커헉…….”
“꺄아아악!”
무인들의 손이 도주하던 일행의 몸으로 파고들었다.
몸을 부르르 떨던 도주자들은 잠시 후 고개를 바닥을 향해 푹 꺾었다.
붉은 무인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벌을 받는 건 우리가 아닌 너희들이다. 영원히, 영원히 신교를 섬기리라.”
방금까지 무인과 설전을 벌이던 노인이 답했다.
“……예.”
***
“군사!”
“실패입니다.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런 일이…….”
“참으로 무자비한 놈들입니다. 정(正)과 사(邪)를 막론하고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처단하고 있습니다.”
콰앙!
“제길! 방법은 없는 건가?”
“협회에 구원 요청을 보냈으나 그들이 나설지는 의문입니다. 최근, 안타깝게도 우리와 사이가 틀어진지라…….”
“마탑과…… 아니…… 아닐세.”
“……아무도 돕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동부는 멀다.
서부 대륙은 물론이거니와 오죽하면 중앙 대륙으로 향하는 길목도 협소해 대삼림을 뚫을 생각을 했을까.
또한, 그간 맹의 행보가 독자노선을 추구했기에 선뜻 그들을 위해 나서는 이들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적신호를 전달받고 모여든 맹원들.
그 규모가 구름 같았으며 여전히 위용 넘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혈마는 대체 무슨 존재가 된 건지.”
“그는…… 존재 자체가 재앙입니다.”
이미 한 차례 습격을 받아 은신처를 옮겼다.
도주 과정에서 혈마를 상대한 맹의 최고수 다섯은 혈마에게 형편없이 패배하고 이런 말을 남겼다.
“가…… 도망…… 가…….”
“가능한, 멀리…… 멀리…… 도망쳐라…….”
혈교가 동부를 손에 넣기 위해 몸을 떨쳐 일어난 것이 몇 주 되었다.
그사이 대부분의 문파는 그들의 손에 넘어가거나 문을 걸어 잠그고 어디론가 도주했다.
아직 남은 정보망에 의하면 혈교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고.
맹원들 모두가 생각했다.
혈교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기에.
그래도 되는 것이다.
느긋하게 행동해도 쫓아오는 이 없으며 그들이 점한 절대적인 강자의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도사 1명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대로 끝이 나는가.”
“혈교에게 굴복당할 거란 말이요?”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
“그들을 마주하면 죽음으로 도망칠 수조차 없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이(邪異)한 술법으로 망자조차 부리니까요.”
“주술사들은 뭐라고 합니까?”
혈교가 부리는 술법을 확인하기 위해 주술사들에게 의뢰했다.
처음에는 혈교를 거스르기 싫은 그들이 요청을 거절했지만, 거듭된 부탁으로 결국 일을 받아들였다.
군사가 말했다.
“놈들이 사용하는 혈정이라는 것 때문에 망자가 죽지 못하는 것이랍니다.”
“혈정?”
“주술사들의 말로는 아주 고대에 내려오던 술법이라고 하는데, 사실상 그 전승은 끊겼다고 합니다.”
“그 혈정이 뭐냔 말이오?”
“피의 정기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취하거나, 매개로 사용합니다. 다른 이의 혈정을 시체에 주입하면 살아 움직이는 강시가 되는 것이고 고유의 혈정을 조작하면 의식만 남은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허어…… 세상이 도탄에 빠지니 온갖 괴이한 수작이 난무하는구나. 실마리는 없는 것이요?”
“하나,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뭐? 그것이 무엇이오?”
제갈 군사라 불리는 이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 혈정이란 것은 본디 혈교가 사용하던 능력이 아니란 것이지요. 동부가 현월신교와의 싸움은 모두 기록으로 남긴 것을 아시지요?”
“아무렴, 생사대적이었으니 모두 기록했다고 했지. 그 때문에 우리가 우위를 점한 것이 아닌가?”
“현월신교와의 싸움에서 혈정을 사용한 전투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현월신교가 월교와 혈교로 분단된 이후에 개발된 능력인 듯한데…… 주술사들이 재밌는 말을 했습니다.”
거대한 도끼를 주력으로 하는 패력부(覇力斧) 종효가 군사에게 몸을 바짝 기울이며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지금은 어떤 단서조차 사사로이 여겨서는 안 되오.”
“혈정이란 문구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한 주술사가 있어서 고대 사료집을 뒤적였는데, 마침 거기에 혈정이란 단어가 언급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뭐라고 적혀 있었소?”
“그…… 시조의 권능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뭐라? 시조라면 그 흡혈귀 족속들 아니오? 동부에선, 아니 스칸다에선 그 씨가 말랐을 텐데?”
“사실 얼마 전에 대삼림에서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조가 깨어난 것인데, 무려 백작이었다고 합니다.”
“백작이라니? 남작만 출현해도 난리를 피우는 형국에…….”
제갈 군사의 눈썹이 꿈틀했다.
진짜 중요한 얘기는 이제부터다.
“아무튼, 얘기가 잠시 딴 곳으로 샜는데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요?”
“혈정이란 권능을 사용하는 흡혈귀는 시조 중에서도 최상위의 존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이 뭐요?”
“불길하다고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우라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때문에, 성국에도 연락을 취해 두었습니다. 혹시 혈교가 시조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라면 성국이 충분히 개입할 만한 명분이…….”
“이보게, 군사.”
“예?”
“성국은 개입하지 않을 거요. 군사도 알지 않는가?”
“…….”
제갈 군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도 안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것도 모르고 싶을 때가 있다.
특히, 이렇게 희망이 없을 때는.
제갈 군사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죄송합니다……. 누구보다 냉정해야 하는 제가 이런 때에…… 저는 군사 실격입니다.”
“그래도 군사 덕에 뱀을 찾았지 않는가.”
“……그 뱀을 잡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럴 때에 그들과 연락이 닿았다면…….”
“무지개 사원 말씀이시군요.”
“그들이라면 분명 혈교의 행동을 좌시하지 않을 것인데…….”
“신비로운 존재들은 그 행보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비를 증명합니다. 원하는 때에 연락할 수 있다면 그들의 명성도 하찮은 것에 불과했을 겁니다.”
하아…….
연초(煙草)연기가 자욱하게 끼었다.
그 몸을 불살라 번뇌라는 감정을 죽이는 연초는 어쩌면 무인의 삶과 닮아 있었다.
“악전 님의 연락은 아직인가?”
“집맹 이후에 사라지시고는 아무 연락이 없으십니다.”
“월인들을 찾아가셨다니…….”
“그들은 우리를 돕지 않을 겁니다. 그야…… 그런 세월이 있었으니까요.”
“추격조가 붙은 건 아니겠지?”
“알 수 없습니다.”
“빌어먹을…… 이래서야 질 싸움에 나서야 하겠군.”
“명예롭게 죽을 수 없다는 게 더 두렵습니다.”
“만약 그럴 거 같으면 내가 자네를 조각내 주지.”
“감사합니다.”
***
“초모여.”
“카이 님.”
성진은 면도를 하지 않았다.
영험한 산에서 지내면 사람도 도인처럼 변해 간다는 말이 있다.
성진의 얼굴에는 듬성듬성 수염이 자랐고 눈에는 총기가 있었다.
“쯧, 몸을 단정히 하거라. 너는 세속의 사람이다.”
“예.”
-자연이 좋다.(무지개 사원 편)
-사실 이런 내추럴함도 멋져…….
-가까이 가면 입 냄새 날 걸?
-잘생겼으니까 괜찮아.
-어차피 커스터마이징이잖아?
-넌 커스터마이징해도 오크 튀어 나오잖아.
-나도 잘생기게 설정할 수 있어.
-잘생긴 오크 튀어 나오잖아.
-억울하네;
-억울한 오크.
-야.
-오크.
카이는 성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은 근심과 번뇌를 찾기 힘든 눈이었다.
“이제 작별할 때가 다가오는구나.”
“그간 감사했습니다.”
“아직 작별까지는 좀 남았다.”
“…….”
“나무를 심기 전, 네 호흡을 확인하겠다.”
“알겠습니다.”
카이가 성진의 호흡을 기다렸다.
그의 호흡을 가까이서 느낀 지는 좀 되었다.
둘은 가부좌를 틀고 마주 보고 있었는데 카이가 아무리 기다려도 성진의 호흡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카이가 묻고자 입을 벌리려던 찰나, 그는 다시 입을 다물게 되었다.
성진이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흡의 소리가 사라진 것이었다.
“……훌륭하다.”
“감사합니다.”
“다음으로는 팔부의 호흡이다. 펼치고 싶은 순서대로 펼쳐 보아라.”
“알겠습니다.”
성진의 호흡이 변했다.
그와 동시에, 카이의 호흡도 변했다.
아수라다.
“훌륭한지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알아채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정돈 아닙니다.”
“겸손하기는…….”
후우우…….
아수라는 완벽했다.
카이는 성진의 다음 호흡을 기대했다.
찌릿.
카이는 피부가, 비늘이 따갑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도 느껴지는 맹렬한 기세.
귀신(鬼神)의 호흡, 야차(夜叉).
찌직, 찌지직.
땅거죽이 긁혔다.
카이는 손짓하여 다음 호흡으로 이끌라고 신호했다.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휘이이잉.
성진의 주변으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예사 바람이 아닌 듯, 도복이 펄럭였다.
그의 코에서 구름이 뭉게뭉게 흘러나왔다.
일순간, 성진의 모습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용(龍)의 호흡.
“아직 부족하구나.”
“더 갈고닦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잠시 착각을 했구나. 네가 이곳에 온 지 고작 2주밖에 되지 않았었군.”
“예.”
카이가 성진을 바라보았다.
성진이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눈을 떠 보아라.”
“예.”
성진의 눈은 용의 눈이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은 전능함의 상징이다.
“마지막이다.”
후우우웁…….
성진도 마지막 호흡만큼은 막대한 숨을 필요로 했다.
주변의 모든 공기를 빨아들이자 카이가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성진의 공간에 들어온 카이는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카이가 들어간 공간은 성진의 것, 그 안의 모든 것들은 성진과 함께 호흡한다.
그의 세상인 것이다.
“그만.”
후웅…….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모여들었던 호흡이 일순간 흩어지자, 폭풍처럼 주변이 흔들렸다.
하늘의 호흡, 천(天)
“좋구나. 믿기지 않을 정도야.”
“잘 모르겠습니다.”
“너는 꾸준히 정진하여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수라를 익힌 초모 : 이거 더 갖고 와, 음…… 아니야. 이거 다 갖고 와!
-드, 드리겠습니다.
-레이서는 어느새 잊혔다.
카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이제 때가 되었구나.”
“…….”
“나무를 심겠다.”
삐이이이.
카이가 손을 입으로 가져가 신기한 소리를 만들었다.
잠시 후, 거대한 독수리가 나타났다.
독수리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발로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빼낸 카이가 그곳에 매달린 열매를 따서 안의 씨앗을 꺼냈다.
“이것을 받아라.”
“무엇입니까?”
“나무를 심는다 하지 않았느냐.”
씨앗은 볼품없게 생겼다.
성진은 엄지손가락보다 조금 작은 그 씨앗을 들여다보았다.
카이가 말했다.
“그것을 먹으면 너의 나무가 태어날 것이다.”
“나무는 무엇입니까?”
“일전에 말했듯이, 네가 살아온 세계의 영감이다. 세계를 경험하고 느낀 네가 그려낸 새로운 세계라는 것이지.”
“굳이 심어야 하는 겁니까?”
성진이 떨떠름하게 묻자,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호흡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아니, 네 능력들 모두가 그러하지.”
“맞습니다.”
“호흡과 심상, 신성력을 어느 정도는 융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씨앗이 말입니까?”
“그래. 더불어 네 끔찍한 심상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침을 질질 흘리며)당장 먹겠습니다.
-더 없나요?
-이모, 반찬 좀 더 주세요.
-오늘이 식목일 맞죠? 다 뒤졌다. ㅋㅋ 왕창 심어!!
카이가 말했다.
“나무가 심어진 장소를 본 적이 있겠지.”
“예.”
“그곳으로 데려다 주겠다.”
성진이 카이의 안내를 받아 나무가 심어진 장소에 도착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참나무, 개다래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벚나무, 은행나무, 박달나무.
성진은 나무에게 다가갔다.
배나무가 보였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비단, 성진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아; 레이서 뭔데;
-기분 ㅈㄴ 이상하다, 간질간질해.
-레이서 해명해. ㅡㅡ
-나도 섭종하기 전에 나무나 심고 올걸.
-스피노자, 당신은 옳았어!
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이 눈을 감고 씨앗을 삼켰다.
퍽퍽할 것을 예상했지만 씨앗은 잘도 미끄러져 목을 넘어갔다.
그렇게, 성진의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카이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꿈을 꾸는 꿈을 꿀 것이다.”
***
음양쌍마는 뿌리만 남은 월교의 호법사자다.
좌호법과 우호법이라고 서로를 나누지 않아도 모두가 그러려니 했다.
월교는 문파적인 색채보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다.
진정한 마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마의 밑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이제 맹에 돌아갈 일은 없겠군.”
“진호 어른의 유지가 지켜졌으니, 그곳에 더는 볼일 없다.”
“형님,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 주리까?”
“재밌는 얘기?”
“저기, 저 쓰러져 있는 사람 보이시오?”
“아, 보이는군.”
둘은 서로를 쳐다봤다.
“월광지대를 떠도는 걸인이 있던가?”
“그런 자가 있다면, 독수리 밥이 되거나 굶어 죽겠지?”
“그럼 저기 뒤통수를 쪼이고 있는 남자는 걸인은 아니겠군.”
“곧 죽겠어.”
팡!
음마가 장풍을 쏘았다.
불시의 일격을 얻어맞은 독수리가 얼어붙었다.
쩌적.
“미안하구나.”
“그보다, 확인이나 하자.”
“시체면 어쩔 수 없고.”
“숨이 느껴진다. 살아 있어.”
음마가 남자의 몸을 뒤집었다.
피투성이의 남자.
“형님, 이자…….”
“…….”
“창황이잖아?”
음마가 그를 업었다.
“지존께 데려 가야 한다.”
음마의 뒤에 업힌 악전이 갈라지는 목소리를 냈다.
“물…… 무울…….”
“젖이라도 주랴? 닥치고 조용히 올…….”
“건네줘라.”
양마가 음마에게 물통을 건넸다.
“쳇.”
꿀꺽…… 꿀꺽…….
물을 급하게 바닥까지 들이켠 악전은 다시 쓰러졌다.
“가자.”
악전은 며칠을 기절해 있었는지 모른다.
그저 여러 명이 자신을 보살폈고 쓴 죽을 먹었으며, 그보다 더 쓴 탕약을 먹었다는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몸의 대부분이 붕대에 감겨 있었다.
“여, 여기는…….”
“일월망향산입니다.”
“……내가 맞게 왔구먼.”
악전에게 답한 여인은 월인이었다.
그녀는 돌아서며 말했다.
“곧 지존을 배알할 것이니, 몸가짐을 바로 하고 계십시오.”
“지존? 진호…….”
“아닙니다. 진호 어른께서는 이미 타계하셨습니다.”
“그럼 누가…….”
악전의 머리를 쥐어짜는 하나의 생각.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송하린…….”
“쉿, 지존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지 마십시오.”
“……알겠네.”
“기다리고 계십시오. 몸은 호전되었으니 예를 취할 순 있을 것입니다.”
“예라?”
잠시 후, 악전을 데리러 온 월인들이 그를 어디론가 부축해 데려갔다.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이라 악전은 당황했다.
“대전에 들 것이다.”
“무릎을 꿇어라.”
얼떨결에 끌려들어간 대전은 악전을 움츠러들게 했다.
정면에는 옥좌가, 좌우로는 그 옥좌에게 충성하는 수하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무릎을 꿇어라.”
“예를 갖추어라.”
악전은 이를 앙다물고 답했다.
“내 창은 무릎 꿇지 않는다.”
“…….”
대전에 정적이 흘렀다.
스릉.
누군가 병장기를 뽑으려 했다.
“그만! 신성한 대전에서 누가 쇳소리를 내느냐.”
탁!
“죄송합니다. 불경한 자에게 본보기를…….”
옥좌에 앉은 이가 손을 휘저었다.
“지존.”
“조용.”
악전은 눈을 비볐다.
자신이 아는 이가 그 옥좌에 앉아 있었다.
“소, 송하린…….”
“이자가 정녕!”
탁!
송하린이 옥좌를 한손으로 짧게 끊어 쳤다.
“조용하시오. 지금부터 본녀와 저 불청객 외에는 아무도 입을 열어서는 안 될 것이오.”
“…….”
송하린이 악전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악전, 오랜만이구나.”
“어, 얼마 전에 보지 않았느냐?”
“얼마 전?”
“흑백쌍괴 말이야.”
“……그런 게 있었나?”
악전은 송하린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무언가 사정이 있으리라 짐작하고 말을 돌렸다.
“부, 부탁이 있어 왔다.”
“부탁? 그대가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도와다오!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
“듣긴 했다. 스칸다가 무너지고 있다며.”
“아니, 그런 게 아니다. 혈마가 강림했다!”
송하린의 수하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동요는 금세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 혈마를 내버려 두면…….”
“이 상황,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나?”
“뭐?”
“내 사부님 말이야.”
“…….”
“그분도 절박했었지.”
“……미안하다.”
송하린은 표정 없는 얼굴로 답했다.
“착각하고 있군.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로 죽은 이의 염원과 같은 무게가 아니야.”
“염치가 없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본녀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또 한 번의 희생인가?”
악전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답했다.
“이번엔 함께다. 분명…… 함께야.”
“우리의 간극은 너무 깊구나, 누가 이자를 숙소로 안내해 주어라.”
“……몸을 회복하면 곧장 산을 내려가겠다. 그리고…… 미안하다.”
“…….”
악전이 비칠거리며 교전을 빠져 나갔다.
송하린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녀가 수하들에게 물었다.
“왜 아무 말들이 없으시오?”
“저희가 무슨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지존의 뜻대로 하옵소서.”
“쯧…….”
그녀는 대전을 나와 거닐었다.
수하들이 따라붙으려 했지만, 물리쳤다.
“어?”
“여어, 지존 아니신가?”
송하린은 어쩐지 똥자루란 말이 입에 맴돌았다.
“강오.”
“바쁜가?”
“아니, 한가해.”
강오는 재밌는 자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붉다.
그에게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수하들이 알게 되면 경을 칠 것이지만, 상관없었다.
“흐음…… 과거에 자신들을 외면했던 자들이 이번엔 도리어 손을 잡아 달라 요청한다 이거지?”
“그렇다.”
“어렵겠어. 고민이 많겠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너는 어떤데?”
“그걸 모르겠다고.”
“음…….”
강오가 말했다.
“이럴 때 백괴 형님이 있었으면 네 고민도 길지 않았을 텐데.”
“백괴 형님?”
“아직도 기억하지 못하는군. 아무튼.”
송하린이 물었다.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강오가 턱을 쓰다듬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뻔하지, 당장 달려갈 거야.”
“……바보네.”
“그게 백괴야.”
“나는 흑괴고?”
“그래.”
어떤 구절이 떠올랐다.
-세상을 사랑해라, 그리하면 세상도 너를 사랑할 것이다. 선대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아라.
송하린은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그녀는 변덕쟁이고, 기분파다.
“고마워, 강오.”
“너한테 별말을 다 듣겠군.”
송하린이 산자락에 위치한 광장에 올랐다.
이곳은 월인들의 거주 구역에서 소외되는 이 없이 전부 볼 수 있는 곳이다.
“허억…… 헉…….”
그녀는 숨 가쁘게 그곳을 올랐다.
마침내, 그곳에 선 그녀가 고함을 질렀다.
“이 자식들아!”
자식들아…… 들아…….
목소리가 메아리쳐 돌아왔다.
월인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도와달랜다! 너희를 핍박하고, 무시하고, 내몰던 그들이 이제는 너희에게 도와달라고 하더라!”
웅성거리는 소리.
월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해? 무시할까? 그냥 지금처럼 지내자고 해?”
“…….”
대답하지 않았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너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월인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답했다.
그저 올곧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알았다.
“빌어먹을…… 너희는 너무 착해 빠졌어.”
세상이 붉다.
월인들의 색은 온 산을 불태울 것처럼 붉게 타올랐다.
그것으로 그녀에게 답했다.
“그러니까, 너희한텐 나같이 나쁜 년이 필요해.”
그녀가 소리쳤다.
“밖으로 나가자!”
“와아아아아아아아!”
지독한 산불이 동부로 번질 것이다.
흑괴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 끼어들었고, 월인들은 동부를 불태우기 위해 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