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화
송하린의 입에서 방금 데자뷰란 말이 튀어 나왔다.
아무리 성진이 담대한 사람이라도 이번만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데자뷰…….’
여태 성진은 사람들이 데자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들을 듣곤 했다. 솔직히 영양가 있는 정보는 없었다.
그들은 어쩌면 자신보다 데자뷰라는 존재에 무지했다.
‘평범한 게임사가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해도 자신의 증상을 치유하는 저 캡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송하린이 항간에 우스갯소리로 떠드는 화제를 가져왔다.
“사실 이런 가상현실은 오버테크놀로지나 마찬가지죠, 안 그렇습니까, 형님?”
“……데자뷰와 무슨 얘기를 한 겁니까?”
그녀는 살피는 눈으로 성진을 노려봤다.
성진과 송하린, 둘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송하린이다.
“푸하하! 괜히 뭐 좀 있는 척해 봤는데 역시나 어색합니다! 음…… 데자뷰는 저를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송하린 씨, 안녕하십니까?
어쩐지 염소가 사람이 된 것 같은 인상을 받았었다. 그녀를 찾아온 남자는 호리호리한 덩치에 중절모를 푹 눌러 쓴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데자뷰입니다.
-오오! 전설의 포켓몬! 본녀의 문의는 죄다 씹었으면서…… 왜 갑자기…… 본녀는 혹시 제재당하는 것이오?
-그런 건 아닙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집에 녹차든 우롱차든 대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추리닝과 슬리퍼 차림으로 동네 카페에 갔다.
신기하게 그날따라 손님이 없었다.
평소라면 그 시간대에 사람이 가득 차 있었는데.
후릅.
괜히 불안했던 송하린이 사내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기억에 남지 않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분명 사람인 이상 특징이 있을 텐데, 사내를 누군가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첫 문장부터 막혔다.
보고 있어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람, 데자뷰의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다.
-올빼미를 쫓아 세종으로 가세요.
그게 무슨 비 오는 날에 체조하는 소리냐며, 요즘은 게임사에서 유저에게 플레이를 강제하기도 하냐며 괜히 세게 나갔다.
상대는 웃었다.
-송하린 씨, 무대에 오를 시간입니다. 길고 긴 여정에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부디…… 해내시길.
그녀는 사내가 횡설수설한다고 여기고 충고하려고 했다.
일이 과한 것 같으니 쉬면서 하라고.
그런데, 남자는 사라졌다.
송하린이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에 자기 할 말만 하고 떠난 것이다.
아니, 확실하지 않다.
남자가 사라진 것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은 방금까지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겁니까?”
“바짓가랑이라도 잡았어야 했는데…… 어떻게든 주머니에 넣어 돌아왔어야 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성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그녀를 내게 오게 했을까?’
송하린이 물었다.
“형님, 혹시 데자뷰와 연관이 있는 분입니까?”
“없다고는 못하지만, 딱히 얘기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듣고 싶은데 그렇게까지 얘기하시는 걸 보면 아마 저는 듣지 못하겠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 얘기도 다소 허술했으니 크게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그 얘기를 듣고 세종까지 따라붙은 겁니까?”
“뭐, 원래도 등불 내부에서 인원을 추려 선발대 개념으로 따라붙기로 했었습니다. 굳이 그럴 거라면 그 인원은 제가 되는 게 옳았습니다.”
맞는 말이다.
데자뷰가 직접 찾아와 지정까지 해 줬는데, 다른 인원이 갈 이유가 없다.
그녀는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왜 이 아우여야만 했을까요? 참으로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
“알았다! 갑자기 알아 버렸다!”
“네?”
송하린이 배시시 웃었다.
감기 기운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녀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원하는 지는 간단합니다. 구태여 형님에게 합류하라는 얘기는 형님의 일을 도우란 얘기 아니겠습니까?”
“제 일 말입니까? 제 일이 뭐…….”
“별거 있겠습니까? 스칸다를 구원하는 일이지요. 그리고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형님을 돕는 사람이 저여야만 했던 건 분명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이곳 스칸다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오오! 송하린은 사실 천재?”
그녀의 말은 반쯤은 추측이었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겉옷을 챙겨 입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앞으로는 이 아우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프라이빗 모드를 해제하셔도 됩니다.”
성진이 프라이빗 모드를 해제하자 다시 방송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던 시청자들이 화를 냈다.
-우주가 잠시 꺼졌다.
-둘이서 뭐 했냐고!
-그래서, 둘이 정동진에 왜 갔냐고!
-의처증이 이런 것인가…….
-우리 처가 아닌데 왜 의처증이야.
-질투하는 내 모습, 훗…… 이런 적은 처음인걸.
-우결 아니라 진결이었냐? 이거 실망인데!
***
다음 날, 강오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채팅창을 슬쩍 확인했다.
등불의 울산 공략이 차도를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그 외에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송하린도 어제 이후로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강오가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그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하지 마시오. 아갈통 맞기 싫으면.”
“…….”
어쩐지 신경질적이 된 그녀에게 강오는 더 이상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대화가 끊긴 지 오래되었다.
-부, 불편해…….
-도서관 ON!
-국내 최초, 정숙 모드를 보기 위해 모인 바보들이 있다?
-그 바보가 우리들이다?
-월광지대 개 오반데. 왤케 넓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야?
월광지대는 진작 진입했고 강오는 지금 일행이 월광지대의 한복판에 서 있다고 말했다.
초저녁부터 뜬 큰 달이 인상적이었다.
성진이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저건 마을 터 아닙니까?”
“월광지대는 월인들이 살았던 땅이니 그렇지. 이족 사냥꾼과 세상의 풍파에 등 떠밀려 숨어들면서 생활 구역은 유적지처럼 변했지만.”
강오의 말대로 집은 허물어져 흔적만 남았고 물건들은 모래가 삼켰다.
썩 유쾌한 공간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쫓겨난 월인들의 마음도 씁쓸했을 것 같아 그 감정은 더 커졌다.
송하린이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형님, 제 물건만 찾으면 이제 우리는 갈라지는 거겠지요?”
“……아마도 그렇겠죠.”
“섭섭하긴 한데, 저도 할 일이 있어서 형님을 붙잡진 않겠습니다. 무지개 사원으로 향하시는 겁니까?”
“그럴 것 같습니다.”
“무지개 사원이라…… 저는 가는 길을 모르니 도움이 되기는 어렵겠군요. 송하린 찬스는 다음에 쓰시겠습니까?”
“네, 당장은 필요가 없네요.”
송하린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말에 뼈가 있는 느낌입니다, 형님.”
“기분 탓입니다.”
“아닌데?”
“맞는데?”
그녀가 성진의 맞장구에 깔깔대며 웃었다.
시청자들도 간만에 정감 넘치는 대화에 같이 웃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고 송하린 형님 3년이면 진짜 백괴가 된다.
-둘 다 캐릭터 확실해서 같이 있으면 확실히 1명은 영향받을 듯. ㅋㅋ
-송하린이 과묵해진 거나 초모가 티키타카 하는 거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넼
송하린이 성진에게 말했다.
“물건을 찾는 대로 헤어집시다. 이제야 형님과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된 것 같은데 이 아우는 참으로 아쉽습니다.”
“또 만나겠죠.”
“아마 제가 찾아갈 테니 그건 확실합니다.”
강오가 둘의 대화를 일축했다.
“다 왔어. 송하린.”
“똥자루, 눈치도 없이…….”
“대체 난 왜 데려온 거냐?”
“어? 그러게? 왜 데려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소.”
“망할…….”
“어쨌든, 형님. 이곳이 장보도가 가리키는 곳입니다.”
월광지대의 한적한 골짜기에 자리한 동굴.
송하린은 동굴 인근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리고 누군가 불을 피운 흔적을 찾아냈다.
그녀가 입맛을 다셨다.
“형님, 어쩐지 오는 내내 편하게 왔다 싶었습니다.”
“사람이 있군요. 월인들이 온 거 아닙니까?”
“이곳은 과거, 월인들의 보고(寶庫)였습니다. 물론 나중에 나를 때는 안에 있는 것들을 죄다 들고 도망쳤지만, 아직도 그들에게 이곳은 신성한 장소로 여겨집니다. 50년이 지났어도 그건 변하지 않았을 겁니다.”
송하린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 찾아온 자들은 월인이 아닌 다른 존재들이었다.
송하린이 이를 악물었다.
“불길한 게 아무래도 혈교 놈들인 것 같은데…… 여길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근처에서 불을 피울 만한 놈들은 그놈들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방해하러 온 겁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이곳에 오려는 건 어찌 알고…… 참으로 성가신 자들 아닙니까?”
강오도 말을 더했다.
“송하린, 저쪽에서는 네 존재를 눈치챈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오. 아마 준비를 단단히 했을 텐데…….”
“인근의 혈교 세력이 몽땅 몰려들었을 텐데 이걸 어쩐다.”
“돌파해야지, 별수 있나?”
“그래야겠지. 그냥 해 본 말이야.”
“형님, 장룡 이길 수 있죠?”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근차근 심상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었다.
호흡과 함께 응용한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짝!
송하린이 손뼉을 치고 손가락을 동굴 안으로 가리켰다.
“그럼, 소개하겠습니다! 사랑스러운 아우가 섭종 전에 템 뿌린 장소인 미궁 삭월(朔月)입니다. 함정이나 기관진식(機關陣式)은 진작에 대부분 해제되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들도 있을 겁니다.”
“길 안내는 누가 하나?”
“당연히 똥자루 당신이오.”
“내가 왜? 네가 아는 미궁 아니었나?”
“하하하…… ‘알았던’ 미궁이지. 본녀의 기억력을 무시하지 마시오. 붕어보다 빨리 잊어 먹소.”
“하여튼…….”
-헤엄치던 붕어, 의문의 1승. ㅋㅋ
-붕어 : 이제 그만. 대충 알았다…… 송하린의 기억력.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다.
-삭월이면 송하린만 아는 미궁이었나 보네. 검색해도 안 나오네.
흑괴와 백괴는 가면을 고쳐 쓰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흑백쌍괴와 난쟁이는 미궁으로 진입했다.
***
천금은 최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퀭한 눈으로 자신의 주인에게 뜻을 구했다.
“월광지대에 투입한 전력은 다소 과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인의 작은 생각일 뿐입니까?”
“그렇다, 작은 생각이다.”
“어째서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휘장 너머의 사내는 천금에게 말했다.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요령을 아느냐?”
“잘 싸우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잘 싸우는 요령을 아느냐?”
“그것은…….”
천금의 말문이 턱 막혔다.
상인의 입을 다물게 한 질문은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었다.
주인이 말했다.
“병사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
“단순히 장기판의 말보다 더 하찮은 존재로 보아야 한다. 자신 외의 모든 것들을 그리 여겨야 한다.”
“이해했습니다.”
“너 또한 영생토록 천하를 경영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는 깨달음일지니 마음에 새기도록 하여라.”
“알겠습니다. 큰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천금은 공손한 어조와는 달리 주인의 말을 속으로 비웃었다.
주인은 마음이라는 말을 내뱉기에는 지나치게 악독하고 건조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의문은 풀어야겠기에 질문을 이었다.
“무리해서 사람을 투입했습니다. 굳이 거북한 문제까지 가지 않아도 일이 실패했을 경우 낭패를 보지 않을까요?”
“그들이 모두 소교주에게 패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겠느냐? 말해 보거라.”
“……없습니다.”
주인되는 자가 말했다.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한 자루의 칼이다.”
“그것이 영광된 주인님을 완성으로 이끌겠지요.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이번 일은 신중을…….”
“들어라, 결국 칼은 내게 오게 되어 있다. 그 방향이 손잡이인지 칼날인지는 중요치 않을 것이다. 칼날이 오더라도 내 몸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엔 손잡이를 들이밀게 될 것이니.”
“소신, 하해와 같은 뜻을 이제야 이해했습니다. 아둔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너의 아둔함 또한 너의 쓰임이라, 의심하는 것은 태초의 본성이다. 아직 네게 인간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니 본좌는 이해하겠다.”
천금은 다른 화제를 꺼냈다.
“맹의 일은 거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결행만 남은 것이군. 때가 되었다.”
“저와 주인님의 고리…… 아니, 최근 발생하는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파고드는 모양입니다.”
“이제와 그들이 알아도 문제될 것은 없다. 어차피 모든 일은 순리대로 풀릴 것이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천금은 물러나면서도 의심했다.
월광지대의 일은 불길했다.
특히나 흑괴 행세를 하고 다니는 송하린이.
***
“돌! 돌이다! 달려어어어어!”
“으아아아아악! 똥자루! 뭘 건드린 것이오!”
“닥쳐라! 네가 분명 해제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콰과아아아아아앙!
일행이 통로를 굴러오는 집채만 한 바위에 혼비백산하여 내달렸다.
“형님! 왜 그렇게 빠르십니까!”
“저만 살겠다고 달리는 것 봐!”
성진이 맨 앞에서 내빼고 있자 강오와 송하린이 소리쳤다.
송하린은 계속해서 외쳤다.
“앗! 빠름의 호흡! 형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 좀 데려가!”
“붙지 마라, 똥자루! 네 실수는 너의 죽음으로 허억…… 속죄해라!”
“미친 여자야!”
콰아아앙!
돌이 미궁의 벽에 부딪혀 박살 났다.
다행히 일행은 코너를 돌아 바위에 짓이겨지는 것은 면했다.
한차례 위험을 회피하자 송하린과 강오의 눈초리가 성진을 향했다.
“크, 크흠…… 백괴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치졸하구만. 가련한 난쟁이를 업고 달릴 생각은 하지 않고…….”
“맞습니다, 형님. 물론 저 똥자루가 뒤룩뒤룩 살이 쪄서 가련함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건 이해하지만, 또 그렇기에 그를 버린 것도 이해하지만 저까지 버리실 줄은…….”
“통로가 좁아 그런 것뿐입니다. 강오를 업으려다 사고가 일어날 수 있어 그랬습니다.”
-백괴 : 라며 대충 둘러대면 믿겠지? ㅋㅋㅋ
-함정 해제를 시전합니다.
-실패했습니다!
-바위에 짓이겨져 착해집니다!
미궁에 들어온 지도 하루가 됐다.
송하린의 말과는 달리 기관진식들은 곳곳에서 말썽을 일으켰고 그것이 일행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헤헤…… 헤헤…… 형님, 핫바디 남정네들이 저를 유혹합니다!”
“정신차려라, 송하린! 진법(陳法)이야!”
“헤헤…… 망측해라…….”
콰직!
성진이 진의 축이 되는 보석을 부수자 송하린이 매혹에서 깨어났다.
“어? 어어? 어디 갔어?”
“아쉽냐?”
“으악! 똥자루! 나한테 얼굴 보이지 마시오! 남정네들을 보다 당신을 보니 주먹부터 나갈 뻔했소!”
“…….”
다음으로 문제가 된 건 독무(毒霧)가 짙게 깔린 통로를 통과하는 일이었다.
“아, 이건 좀 힘들겠는데…….”
“갈 만한 통로가 여기뿐이야. 네가 헛짓을 하는 바람에 다른 통로가 무너졌잖아!”
“닥치시오, 똥자루! 당신도 잘못이 있지 않소!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말을 깨우치고 싶지 않다면 조용하시오!”
“……아무튼, 어떻게 통과해야…….”
성진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뿜었다.
콰아아아아!
폭풍이 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독무가 천장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가죠, 짧은 시간 동안은 유지될 겁니다.”
“……그나마 백괴는 정상이군.”
“형님…….”
다시 하루가 지났다.
아직 사람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 점이 일행을 더욱 불안하게 했다.
“이거…… 아무래도 비고 앞에서 기다리는 것 같은데…….”
“하하하! 송하린, 그 말은 우리 다 큰일 났다는 거 아닌가?”
“맞소, 똥자루!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ㅋㅋㅋㅋㅋㅋ
-기껏 시간 내서 미궁 뚫었는데 골인 지점에서 다들 기다리는 중. ㅋㅋ
-기관진식도 걔네가 건드렸나 보네.
강오가 장보도를 가리켰다.
“여기, 여긴데…….”
“뭐가 말이오?”
“여기쯤 오면 비고의 문이 보여야 한다고…….”
“아무것도 안 보이잖소?”
“잠깐…… 저 기둥, 아까도 본 거 아닌가?”
강오가 한 말을 들은 모두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성진과 송하린은 무기를 빼들었다.
강오는 은신술을 펼쳐 모습을 감췄다.
건너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늦었군. 기다리는 것도 지칠 지경이었어.”
“이곳이 제 놈들 무덤인 줄도 모르고 기어들어 왔구나. 참으로 특이해.”
강오가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장내의 인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흑백쌍괴의 입장에서는 강오가 끼어들어도 전력에 도움이 안 됐고, 상대의 입장에서도 강오는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하…… 형님, 좀 큰일 난 것 같습니다.”
“……둘이네요.”
“권흉과 창흉입니다. 피라미들답게 그럴듯한 대사와 함께 등장하네요. 그보다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느꼈습니다.”
권흉과 창흉은 일전에 마주쳤던 독흉과 검흉의 기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만 주의하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뒤에서 성진 일행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기척은 총 셋이었다.
“저 중 1명은 장룡일 것이고, 다른 1명은 그에게 밀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권룡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1명은?”
“……익숙한 기세입니다.”
주름이 없는 노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눈썹과 머리칼이 하얗게 변했는데도 눈빛과 피부는 젊은 사람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부자연스럽다 못해 기괴했다.
송하린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곤황(棍皇)…….”
노인이 웃었다.
“송하린,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구나. 어찌 너를 이곳에서 마주할 수 있을까.”
“아…… 그래, 영감탱이. 그 용인지 미꾸라진지 하는 녀석들은 당신 제자였군?”
“그렇다. 본좌가 키운 아이들이지. 마음에 드느냐?”
“얼굴은 별론데, 내 취향은 아니야.”
“크크큭…… 건방 떨기는.”
송하린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성진에게 속삭였다.
“형님, 삼황 중 1명이었던 곤황입니다. 그때에도 이미 노인이었는데…… 50년이 지났는데 더 젊어졌습니다.”
“강합니까?”
“용들만 보셔도 아시잖습니까?”
“이길 수 있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지금 가진 힘을 다 끌어내면 저 쌍흉은 제가 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고의 앞을 막고 서 있는 적의 수장은 총 다섯.
수하들은 모두 같은 붉은 무복을 입고 정렬해 있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게 송하린이 미리 경고한 혈교의 강시 같았다.
그 수가 못해도 수십이다.
“용 2마리랑 자칭 황제인 늙은이를 맡아 주셔야겠는데…… 가능하십니까?”
“…….”
“시간만 끌어 주시면 됩니다. 아우에게 수가 있습니다. 형님…….”
송하린이 가면을 벗어 던졌다.
“저를 믿으십니까?”
물기 어린 눈망울은 답을 구했다.
성진도 가면을 벗어 던졌다.
휙, 휘익!
부웅, 부우웅!
봉이 휘돌아 성진의 겨드랑이에 끼워졌다.
성진의 몸에서 새하얀 광채가 뿜어 나왔다.
그의 눈은 동부에서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정광을 흘리고 있었다.
푸스스.
먼지와 돌 부스러기들이 성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입이 열렸다.
“당신을 믿습니다.”
성진이 답하자 송하린이 등을 맞대었다.
어느새 수십의 적에게 둘러싸였다.
송하린은 적들을 마주했을 때 당혹감과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손의 떨림과 목덜미의 식은땀이 그것을 드러냈다.
하지만 성진의 등에 기대는 순간, 거짓말처럼 떨림이 멎고 평온이 찾아왔다.
그녀가 웃었다.
“저도 형님 믿습니다.”
과거, 곤황이라고 불리었던 노인이 손짓하자 적색 옷을 입은 자들이 달려들었다.
적, 흑, 백이 한데 어우러졌다.
“키야아아아!”
콰직!
적색 무인의 머리가 성진의 봉에 으깨졌다.
동시에, 송하린이 소리쳤다.
“흑백쌍괴는 무적이다, 물론 백괴만 있어도 무적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