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117화
송하린과 성진, 그리고 강오는 굳이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창황과 혈황의 금분세수 일정이 딱히 촉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정 내내 수련을 함께했다.
“똥자루, 어서 두 황제 놈의 신상을 줄줄이 읊어 보시오. 우리 백괴 형님이 잘 모르실 것 아니오?”
송하린이 강오의 어깨에 손을 살포시 올리고 말했다. 강오가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흑괴 자네가 그렇게 백괴를 아끼니 내 친절히 설명하지.”
“옳지! 내 백 형을 향한 애정이 이렇게 드러나다니 쑥스럽구먼.”
성진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강오가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시작했다.
“창황은 사람이 고지식하지. 항상 정도를 걷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오. 그리고 불의를 보아 넘기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그렇소. 창황 악전(岳戰)은 그런 인물이지. 뭐,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기는 하지만 악인을 보아 넘기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적도 많이 만들었소.”
“무력은 음…… 전성기의 흑괴보다는 하수였지만 나름 일가를 이룬 자요. 특히 창에 대한 조예는 따를 자가 없어 그에게 창을 쥐게 하면 천지를 뒤집어엎는다고 하지.”
송하린이 피식 웃었다.
“과장이오. 딱히 천지를 뒤집진 않더라고.”
“……악전과 문제가 있었소?”
“나는 없는데 그 친구는 있었소. 아, 이제 할아버지가 됐으니 뭐라고 불러야 하나.”
“……절대 송하린이라는 걸 들키지 마시오.”
“그래야겠지?”
강오가 헛기침을 하고 혈황에 관한 설명을 했다.
“혈황 조청(朝淸)은 특이한 자요. 실제로 피를 사용한 무공을 구사하는 건 아니고 단지 그가 무공을 사용할 때마다 핏빛 강기가 휘몰아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오. 주력은 장법(掌法). 초식을 사용하는 경지는 한참 지났고 변수에 능한 자요. 음…… 세간의 평가로는 창황보다 한 수 아래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 붙으면 누가 이길지는 알 수 없소.”
“둘이 비슷하다고 보면 되오. 그리고 실제로 붙지도 않을 거요. 그놈들은 싫어하는 척하면서 서로를 은근히 아끼는 놈들이라.”
“엥? 그건 어찌 아오? 설마 혈황이랑도…….”
송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할 게 있어서 붙어 본 적이 있었소.”
“확인? 혈황에게 확인할 게 무엇이 있다고?”
“혈교와 연관이 있는지 확인한 거였는데 아니었소. 무공도 그가 창안한 것이고.”
“혈교라…… 아직도 쫓는 거요?”
“내가 쫓았나? 영감이 쫓았었지.”
“그랬었지. 어르신께서 그랬었지…….”
그녀가 손가락으로 귀를 파고 후 불었다.
별로 상관없다는 태도다.
“아무튼, 밥이나 잘 먹고 들키지 않게 다녀가는 게 우리의 목적이요.”
성진이 물었다.
“아까는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것도.”
「얘기는 다 끝났느냐?」
-아 깜짝이야.
-늙으면 기척이 없어진다고 하더니…….
-권성이 알려 주는 주먹 권! 주먹 권! 무공 배워요. 시간!
송하린이 답했다.
“할배 왔소?”
「오냐, 하린이 너는 알고 있는 내용이니 들을 필요 없다. 초모하고만 얘기할 것이니.」
“알았소.”
「처자지 말고 수련을 해, 수련을.」
“휴식도 수련의 일부요. 하여튼 세대 차이 나서…….”
「세대 차이라니! 나도 어디 가서 젊은이들이랑 게임 얘기 많이 한다!」
“어차피 스칸다 얘기잖소, 할배. 종말은 하지도 않았으면서 ‘나때는 말이야…….’ 뻔하지.”
「……스칸다는 누구도 모욕할 수 없다. 스칸다 이후에 나오는 게임들은 게임도 아니야!」
“알겠소. 나는 그럼 이만 자러…… 수련하러 폭포에 다녀오겠소.”
강오도 끼닛거리를 만들겠다고 동분서주하는 사이, 권성이 성진에게 말을 걸었다.
「심상으로 들어오거라.」
성진이 전보다 수월하게 심상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심상의 내부는 딱히 변한 것이 없었다.
콰르르릉!
여전히 두려웠고, 힘겨워 보였다.
「얘기는 듣긴 했다만 꽤 심각한 상태군. 이 정도면 정신과라도 다녀보는 게 어떻겠느냐?」
“괜찮습니다.”
「뭐, 진짜 문제가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아무튼, 심상의 기본은 검성 놈이 알려 줬을 테니 나는 다른 부분을 알려 주마.」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은 너만의 세계다. 기억해라, 이곳에선 네가 신이다. 네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망상, 그리고 허황한 꿈들이 여기서는 이루어진다.」
“도화지 같은 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아니, 맞아. 하얀 여백에 새로운 풍경을 그리거나 이미 그린 풍경 위에 새로운 풍경을 덧씌우는 거지.」
“대충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심상이 무공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것을 물을 줄 알았다. 대답하자면, 그렇다. 이 세계는 너 자신만의 세계라고 하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만약 이 세계 자체가 무공이 된다면 그건 누구의 무공이겠느냐?」
“제 무공이겠죠.”
「그렇다. 각자의 심상은 열망과 바램, 꿈과 정열이 담겨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것들을 버무려 무공으로 만들어라. 다른 이방인들도 그러하였으니. 이방인들이 동부의 주민들에게 인정받은 이유는 이렇게 독특하게 자신만의 무공을 창안했다는 점과 그런 무공이 단기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저만의 무공…… 근데 무공은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
「네 세계를 가꿔라. 가령 검성은 별이 가득한 하늘이 보였으면 좋겠어, 그것들이 온전히 내 힘이 됐으면 좋겠어 등. 잡소리를 늘어놓다 보니 ‘유성검법(流星劍法)’을 쓰게 됐다. 대충 그런 느낌이다.」
-님들, 님들 할아버지가 말하는 거 쉬워요?
-ㅎㅎ 교과서대로 공부하면 서울대 감.
-대학 가면 여자 친구 사귐.
-어렵다는 얘기구나…….
-심상이 단기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다주긴 하지만 그것이 마공처럼 순식간에 강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음.
-왜여?
-님이 뭔가를 상상한다고 가정해 보셈. 예를 들어 말. 말은 당연히 다리, 몸통, 머리, 꼬리 등 여러 가지로 이루어져 있죠. 우리는 흔히 말이라고 하면 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무공으로 만들려면 저런 디테일한 부분을 전부 신경 써야 함.
-ㅇㅎ 구체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ㅇㅇ 그렇다고 심상에만 틀어박혀서 세월을 보내기엔 스칸다가 넓자너.
-스님들이 면벽 수련하는 그런 기분이겠구나.
「얼빠진 놈들이 하는 말 잘 들었지? 원래라면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겠지만, 이 권성님에게 방법이 있다.」
“……방법요?”
「현실과 심상을 분리하는 것이지. 이름 하여 분심공(分心功)이란 것이다. 마음을 둘로 쪼개어 하나는 심상에 두는 것. 물론, 어렵다. 난이도가 말도 못하게 어려우니 사람들은 대부분 포기하고 심상에서 꾸준히…….」
성진이 말을 듣다 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현실의 성진이 깨어났다.
심상의 성진은 그대로 둔 채로.
“이렇게 말씀입니까?”
「그, 그렇지. 물론, 마음을 2개로 나누는 것은 적당히 어려운 정도다. 하지만 그 마음들이 각자 할 일을 한다는 것은 양손이 각자 동그라미와 세모를 그리는 것보다…….」
심상에 자리 잡은 성진이 들판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금세 꽃이 자라났다.
“이런 식입니까?”
「……응, 그런 식이다.」
-속보) 레이서 이후 2차 피해자 발생!
-할아버지 위험해요!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혈압!
-적응은 무너졌냐, 이 할아버지야? ㅋㅋㅋ
-마음 더블로 가!
「권장지각(拳掌指脚)부터 시작해라. 기술 또한 결국 마음이다.」
-ㅖ 알았으니까 이제 가세여.
-2배럭 가동.
-대기업이 하청업체 기술력만 빼먹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 초모는 공정합니다.
-거래는요?
-알 게 뭐람?
***
일행은 찬봉에 도착하여 제일 싼 객잔에 묵었다.
그나마도 목욕비를 받는 터라 강오가 박박 우겨 숙박비를 깎았다.
“전낭 없이 여행 다니는 놈들은 우리밖에 없을 거요.”
“어허, 똥자루! 내가 저 아낙네의 전낭을 훔치면 우리의 처지는 뒤바뀔 것이다. 진정 그것을 원하는가?”
“……말을 말지.”
목욕을 깨끗이 하고 간만에 옷도 빨래하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알게 모르게 여행의 피로가 쌓였던 터라 일행은 금세 잠이 들었다.
하지만, 경계를 풀진 않았다.
‘지붕?’
성진은 수상한 기척에 잠자리에서 튀어나와 객잔 지붕으로 올라갔다.
동시에 맞은편에서 송하린도 뛰어 올라왔다.
“통했소, 형님. 찌찌뽕.”
“…….”
“뽕찌찌 안 하면…….”
“여기 누군가 있지 않았습니까?”
송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비었으니 잡지는 못한 듯했다.
“근데, 우리를 노리는 건 아니었던 것 같소.”
“스쳐 지나갔다는 말입니까? 어느 쪽으로?”
“북서쪽. 방향이 북서쪽이면…… 이런!”
“왜 그럽니까?”
“모르겠습니다. 하하…… 잠이나 잡시다.”
“……그러죠.”
자신들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니었기에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성진과 송하린은 다시 잠을 청했다.
***
다음 날이 되자, 강오와 함께 이황의 금분세수가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송하린도 마찬가지였는지 성진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 알았습니다.”
“저도요.”
“이황이 있는 저택이 우리 숙소에서 딱 북서쪽에 있었습니다. 이거야…….”
“그런데 그자가 악인인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송하린이 미소 지었다.
“그자, 푸르렀습니다.”
“이런…….”
“아직은 심증일 뿐입니다. 이황이 흑백쌍괴가 뭐 대수라고 우리 얘기를 들어줄 것 같지는 않고…… 밥이나 먹다 곤란해지면 나섭시다.”
“먼저 행동해 봐야 의미 없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오히려 제 정체가 밝혀지면 상황이 더 궁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일행은 저택의 정문에 줄을 섰다.
초대장을 받은 이들은 왼편에 서서 빠르게 줄이 줄어들었고, 초대장 없이 방문한 자들은 오른편에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성진과 일행은 초대장을 받지 못했으니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주변에서 행사에 대한 기대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늘 행사는 숙수만 100명 가까이 왔다던데.”
“조청 님이 확실히 통이 크긴 커!”
“아무렴, 동부의 큰 별이신데. 배포가 작을 리가 없지.”
“그래도 악전 님도 내긴 냈다던데.”
“악전 님은 이런 행사에 돈 쓰는 거 싫어하시니까.”
“꽉 막히시긴 했지…… 그래도 좋으신 분이야.”
“좋기야 좋지만…… 피곤하잖아?”
“쉿, 누가 들을라.”
송하린이 배시시 웃었다.
“형님. 제가 악전 놈한테 늙어서 욕먹을 거라고 악담한 기억이 있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군요. 속이 편안해집니다.”
“악전하고는 왜 다툰 겁니까?”
“개인적인 원한은 전낭을 훔친 것 말고는 없었고 아마 영감님이랑 사연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누가 봐도 전자가 문제 아니었을까요?”
“얼마 들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아닐 겁니다.”
강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송하린과 말을 섞기도 싫은 기색이었다.
다른 이야기도 들려왔다.
“악가(岳家)는 물론이고 꽤 많은 고수들이 왔다던데.”
“제자들이 워낙 많으니까. 그리고 아직도 맹에 입김이 닿는 분들이잖아.”
“행사 장소가 분리되어 있던데, 초대장 못 받았으면 악전님 얼굴도 보기 힘든 것 아니야?”
“악전님 성격에 그러시겠어? 조청님도 그러실 분이 아니라 아마 인사차 들리시겠지.”
“그럼 다행이고.”
얘기를 하던 이들이 점차 저택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 성진 일행의 차례가 왔다.
“우리 차례다. 연기 잘 해야 해.”
“문제없지.”
문지기가 가면을 쓴 성진과 송하린을 한 차례 보고는 말했다.
“초대장이 없으시면 신분을 증명해 주셔야 합니다.”
강오가 일행 중, 가장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강오라고 하는 사람인데…… 옛날에는 탐식호리라고도 불렸소.”
“탐식호리……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어…… 그러니까…… 이 2명은 내가 아는 고수들인데 들여보내도 문제없을 거요.”
“문제 있습니다. 신분이 불분명한 분들은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악인이든 호인이든 신분은 밝히고 들어와야 한다는 말씀도요.”
“이런…… 저기…… 그…….”
강오가 눈을 찡긋했다.
송하린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우리를 모르는 자들이 있었다니. 형님,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그러게, 아우.”
“우리는 흑백쌍괴. 도귀를 일도(一刀)에 처죽이고 아고삼견을 꿈나라로 출국시킨 협객 중의 대 협객이시다.”
강오가 다급하게 얘기했다.
“아고삼랑. 견이 아니고.”
“아, 실례. 아고삼랑이라고 하더군. 워낙 많은 악인을 처치했으니 기억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이봐, 수문장. 이해하시지?”
“물론입니다.”
“그럼 이만, 음식을 먹으러…….”
“안 됩니다. 그것만으론 증명이 안 됩니다. 여기서 가진 재주를 보이시거나 다른 지인이…….”
일행은 낭패를 볼 듯했다.
이대로 들어가지 못하면 아침 내내 굶은 송하린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그때, 한 번도 본적 없던 노인이 수문장에게 다가왔다.
“그만하시고 들여보내지. 내가 아는 이들이오.”
“소, 송백님! 아시는 분들입니까?”
“그럼, 객잔에서 본 적이 있다오. 대단한 협객들이지.”
성진과 송하린이 눈알을 굴렸다.
그들은 송백이라는 노인을 몰랐다.
-눈알 굴리는 거 봐. ㅋㅋㅋ
-누, 누구지?
-이건 양쪽 다 위기다. 송백도 송하린이 쪽팔릴 우려가 있어. ㅋㅋ
송하린은 상황을 파악하고 웃었다.
노련한 동부의 유저다웠다.
“푸하하하하! 이런,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그간 잘 지내셨소?”
“그대는 나를 모를 터인데…….”
“옷깃만 스쳐도 인연 아니오?”
“옷깃도 안 스쳤는데…….”
“제기랄, 당신 누구요? 불백이라고? 돼지?”
“저기 있는 난쟁이가 운영하는 객잔에서 그대들을 보았소. 약자를 감싸는 모습이 훌륭하더이다.”
“아, 그랬군. 어쩐지…….”
수문장이 실례했다고 말을 하고 성진과 송하린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처음부터 일이 매끄럽게 풀리지 않았다.
-ㅋㅋㅋㅋ 송하린 음식 못 먹었으면 여기 다 때려 부쉈다.
-수문장부터 머가리 날아갔을 듯.
-송백이 귀인이네.
송하린이 송백에게 포권했다.
어지간하면 허리를 굽히지 않는 여자인데, 음식을 먹게 해 준 것이 고마운 것 같았다.
“고맙소. 불백.”
“송백.”
“그래, 송백.”
“흑백쌍괴라…… 하나 묻겠소.”
“뭘 말이요?”
“저기 서 있는 백괴 말이오.”
“우리 형님?”
“얼마 전과는 분위기가 딴 판이오. 같은 사람 맞소?”
백괴의 눈동자가 송백에게 향했다.
성진의 심상은 회복하고 있었다.
불타 버린 대지를 식히고 재만 남은 들판에 씨앗을 뿌렸다.
권성은 ‘재능 있는 놈은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이 아니라 백 하겠다고 소리치는구나.’ 하며 사라졌다.
기초와 편법을 알려 줬을 뿐인데, 성진은 마른땅이 이슬을 빨아들이듯 성장했다.
기세가 변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형님이 한창 성장기라 좀 그런 편이오. 아무튼, 밥 먹어야 하는데 말 시키지 않았으면 하는데…….”
“하하하…… 재밌군. 본 회장으로 갈 생각이 있소?”
“본 회장 음식이 더 맛있소?”
“맛있긴 하지.”
“으…… 가고 싶지만, 불편한 자리라. 나는 방문객을 위한 자리로 가겠소. 그럼 이만!”
“저…… 저!”
성진과 일행이 자리를 벗어나자 송백에게 소녀가 다가왔다.
일전에 객잔에서 함께 식사하던 여인이었다.
“할아버지, 아는 분들이에요?”
“그전에 객잔에서 본 자들 아니더냐.”
소녀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뒷모습만 봤기에 성진 일행이 가면을 쓴 것을 보지 못해서 알아보지 못했다.
“와…… 분위기가 딴 판이에요.”
“네가 보기에도 그러느냐?”
“특히 저 백괴는 뭐랄까…… 음…… 좀 기세가 남다르네요.”
“고수다.”
“고수라고요?”
“이 할아비도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야. 기세만으로도 그것이 드러났다.”
“대, 대단하네요. 객잔에서는 힘을 숨긴 걸까요?”
“그럴지도.”
소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송백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근데 왜 들여보내신 거예요?”
“악인은 아니지 않으냐?”
“전낭을 훔치잖아요?”
“아, 맞다.”
***
“장내에 계신 분들에게 아룁니다! 전낭을 도난당할 우려가 있으니 모두 조심해 주셔야 합니다!”
“도난?”
“도둑이 기어들어 왔다고?”
“간 크기도 해라.”
“……별꼴이야.”
송하린은 가면 너머로도 볼이 보일 정도로 다람쥐처럼 음식을 흡입했다.
그녀가 물었다.
“도둑이라니, 누가 도둑질을 하지?”
강오가 답했다.
“흑괴.”
“그러니까 나 말고 말이오. 아무튼, 있는 놈들이 더해. 이렇게까지 하면 더 훔치고 싶어지잖아.”
“조용히 먹고 나가자고.”
“알겠소. 음…… 맛있어. 강오도 이 정도는 하지?”
“쉽다. 재료와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지.”
“역시! 호감도 10 상승!”
“무슨 말이냐?”
“그런 게 있소.”
송하린의 배가 남산만 하게 불러 갈 무렵, 성진도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때, 소란과 함께 누군가 가까이 오고 있었다.
송하린이 기겁하며 놀랐다.
“어떡해! 저놈들이 여긴 왜 왔어?”
“조청이랑 악전이군. 인사차 들렀나 본데?”
“아, 알아보면 어쩌지?”
“뭘 어째, 도망가야지.”
뒤에 호위를 대동하고 인사를 하던 창황 악전과 혈황 조청은 성진의 앞까지 도달했다.
창황이 묵직한 기운이라면 혈황은 따가운 기운이었다.
“와 주셔서 감사하오. 그런데…… 내가 그대를 알지 못하는데…….”
“그러게, 나는 악가 놈이 아는 분인 줄 알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송하린이 나섰다.
“하, 하하…… 우리는 위명이 쟁쟁한 흑백쌍괴라오. 선배님들의 행사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이오.”
노인에게 존대하지 않자 호위들이 소리쳤다.
“무례하다! 감히!”
“악전 님에게…….”
악전은 한 손을 올려 그들을 제지했다.
“그만, 기분 좋은 날에 소란 떨지 마라.”
“예!”
“죄송합니다!”
악전과 조청에게 수하들이 다가와 속삭였다.
얘기를 들은 그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송백이라…… 맹과 관련된 사람들인가 보군.”
“이거 실례를 한 건가? 아무튼, 잘 즐기다 가시구려.”
송하린이 답했다.
“알겠소이다! 그럼…….”
“잠깐, 이 목소리…… 어디서 들어 본 기억이 있는데?”
악전이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송하린이 화들짝 놀라 가성으로 말했다.
“그럴 리가요오?”
-그럴↗ 리가↗ 요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3옥 레로 말했네.
-송하린 당황하는 거 개웃기네. ㅋㅋ
악전은 턱을 쓰다듬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착각했나 보군. 누군지 기억도 잘 안 나는 것 보니.”
악전과 조청이 다른 곳으로 가자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송하린이 축 늘어졌다.
“노인네가 되어서도 코는 개 코군.”
***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저택의 담벼락에 모습을 드러낸 자들이 있었다.
“추귀(醜鬼), 조귀(爪鬼). 너희는 외부 행사장을 맡아라. 신호가 떨어지는 즉시 그곳에 모인 인원들을 도륙해라.”
“크흘흘…… 나 혼자서도 충분한 것을.”
“추귀, 방심하지 말아라. 방문한 인물들의 면면을 봤을 때 너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것은 알지만 만일을 대비해라.”
“예이…… 교의 명령이라면야.”
“속도가 중요하다. 혈황과 창황의 혈정을 얻는 즉시 이탈할 것이다.”
저택에 암운이 드리웠다.
모인 인원들은 제각기 수를 써 행사장 안으로 진입했다.
등이 굽은 꼽추 노인인 추귀와 긴 손톱 형태의 무기를 사용하는 조귀는 외부 행사장의 담벼락 근처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잠시 후, 신호가 들렸다.
신호는 누가 듣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내용이었다.
“습격이오! 조청 님과 악전 님이 당했소! 모두 피하시오!”
“무, 무슨!”
“거짓말! 이황(二皇)이 당했다고?”
“장난하는 거지?”
“독이요! 본 행사장에 누군가 독을 풀었소!”
“그분들이 알아차리시지 못했다고?”
“음식뿐만 아니라 공기도 오염시켰소! 아무튼…… 크아악!”
상황을 설명하던 사내가 횡으로 베여 네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 뒤로 조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1명.”
“크하하하하! 본좌가 이곳에 왔다. 울어도 된다, 어린 양들아.”
“추, 추귀!”
“저자는 조귀가 아니요?”
“도망쳐! 이귀가 나타났다!”
챙!
챙!
무인들은 병장기를 빼 들었지만, 순식간에 실력 차를 눈치채고는 제 한 몸 살겠다고 도망쳤다.
“……오랜만에 피 맛 좀 보겠군.”
상인과 지역 유지, 민간인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변변한 대항을 할 생각을 못 했다.
추귀와 조귀는 이 순간이 좋았다.
약자들을 도륙하는 이 순간이.
약자들의 비명은 음악이었고 흩어지는 육편은 절경이었다.
양들의 무리에 뛰어든 늑대, 조귀와 추귀.
그런 그들의 뒤로 2명이 걸어 들어왔다.
허리춤을 추켜올리는 행색을 보아하니, 제법 거리가 먼 뒷간에 다녀온 듯했다. 비명들이 난무하는 상황과는 달리 태평하게 보였다.
“동부는 화장실이 제일 불편하다니까. 빠질 뻔했네. 이제 시원하게 갈겼으니 다시 시작을…… 이 자식들은 또 뭐야? 형님, 아시오?”
“동생, 피 냄새다.”
“……푸른색이네. 어쩐지 조용히 넘어간다 했다.”
추귀와 조귀가 뒤를 돌아 그대로 달려들었다.
이미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을 확보했다.
거리낄 것이 없었다.
“죽어라!”
“네 조각으로…….”
송하린이 뒤로 슬쩍 물러나고 성진이 뒷발을 축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리고 양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각각 추귀와 조귀의 방향이었다.
봄바람 같이 살랑이는 기운이 성진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기운은 흉포한 조귀의 강기와 음습한 추귀의 강기에 부딪혔다.
빠지직!
쩌정-!
이상한 광경이었다.
금방이라도 봄바람을 찢어발길 것으로 보이던 강기는 유리가 깨진 것처럼 조각조각 으스러졌다.
그 여파로 추귀와 조귀의 혼백이 부서지며 튕겨 나오는 듯한 광경이 연출됐다.
살랑이던 바람에 적중당한 두 악인은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컥…….”
“푸헉…….”
바닥으로 처박힌 조귀와 추귀는 피를 토한 후, 몇 번 꿈틀거렸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지 않았다.
일순간 조용해진 사람들의 입에서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성진의 심상이 확장하며 파생된 첫 번째 능력.
탈혼장(脫魂掌).
정신에 직접 타격을 가해 육체적 파괴 없이도 적을 제압하는 장법이었다.
-원펀치보람상조 뭐야?
-얘네는 누구야?
이귀가 쓰러진 것을 확인한 강오가 탁자 밑에서 기어 나왔다.
“이귀! 조귀랑 추귀요!”
“얘네가? 뭐가 이렇게 약해?”
“본 행사장에도 문제가 생겼을 거요. 외부 행사장에 이 둘을 보낸 정도면…… 본 행사장엔…….”
누군가 아비규환이 된 행사장으로 헐떡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송백이었다.
그는 땀으로 장포를 적신 채였다.
“누, 누가 좀! 도와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