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116화
시대가 변했다.
게임은 장소, 시간에 큰 구애를 받지 않는 합리적인 취미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과거의 PC, 콘솔을 비롯하여 휴대용 게임기 등 여러 수단을 통해 게임을 해 온 사람들.
마우스와 스틱을 움직이던 아이들은 자라 학사모를 쓰고 넥타이를 매게 되고, 퇴근 후에 1~2시간씩 접속해서 게임을 즐기던 회사원들은 어느새 은퇴하여 집안일을 하거나 마누라의 잔소리를 배경음 삼아 세월을 흘려보냈다.
“찬아! 갑자기 웬일이냐?”
“아버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송열과 송찬.
이 부자는 평범하디 평범했다.
송열은 무뚝뚝한 아버지였고 송찬은 내성적인 아이였다.
같이 어울리기엔 최악의 상성을 가진 부자는 그 흔한 ‘부자 목욕탕 때밀이 품앗이’도 한 적 없었고, 송열이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반겨 주는 건 아내와 강아지였을 뿐, 송찬은 방 안에 틀어박혀 마우스만 움직였다.
매일 고된 일에 피로했던 송열은 그것을 흘려 넘겼다.
그렇게 시간이 갔다.
이제 송찬은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송열은 나이가 들어 은퇴할 시기가 다가왔다.
정년퇴임처럼 낭만적인 말들은 이 사회에서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송열도 정년은 아직 남았지만, 사회가 더는 자신의 자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느 날의 일이다.
“……나 왔어.”
아무 대답이 없다.
강아지도 얼마 전 무지개다리를 건넜고 아내는 얼마 전부터 밤에 일을 나갔으니까.
허망했다.
송찬은 독립한 지 오래다.
누구는 ‘아이를 다 키워서 좋으시겠어요.’라고 부러워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다.
송열은 외로웠다.
무뚝뚝한 가장은 아이에게 살갑게 대한 적 없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를 탓할 만한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조금 슬펐다.
탁.
송열이 가족사진이 들어 있는 손바닥만 한 액자를 들어 올렸다.
“……이땐 가까웠는데.”
돌이 지났을 때 송찬은 자신의 품에 안긴 채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대차게 울어 대던 아이를 달래느라 얼마나 진을 뺐는지…… 아직도 기억날 정도다.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할 것이고, 혹시 그리우냐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 할 것이다.
“흑…… 흑…….”
툭, 툭.
액자로 뿌연 물체가 방울져 떨어졌다.
액체는 조금 짰다.
액자의 유리로 자신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이제는 흰 머리가 빼곡해진 머리는 열정도, 야망도, 젊음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송열의 인생은 종장으로 넘어가 커튼콜의 시시한 소감만을 남겨 둔 것일까.
스마트폰을 두드려 낡은 번호를 찾아 헤맸다.
서울 가서 성공했다던 친구.
나중에는 평범한 자신과 거리가 느껴져 연락이 뜸해졌다.
연락은 거의 몇 년에 한 번 통화하는 수준.
그에게 전화했다.
딸칵.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 이름 대면 알 만한 중견 기업의 회장님이라고 들었는데…….
‘내 전화를 반기는 걸까?’
아니, 아마도 우연히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었을 것이다.
“크흠…… 큼…… 어이, 서울 쥐.”
잠긴 목소리를 티 내지 않으려 괜히 헛기침하고 패기롭게 상대를 불렀다.
한 기업을 이끄는 회장일지라도 자신에게는 서울 가서 성공한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상대가 답했다.
“시골 쥐 아니야? 너 근데…… 울었냐?”
어떻게 알았을까.
“아, 아니…… 저…… 그냥, 그냥 전화해 봤어.”
“싱겁긴. 요즘 뭐 하냐?”
“그냥…….”
“회사는?”
“이제 나와야지…….”
“하긴, 늙은이 다 됐으니 그럴 만하지.”
“그렇지?”
“그래,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니까. 젊은이들한테 자리를 내줘야지.”
이 친구와 왜 친했던 것일까.
아마도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닐까?
별것 아닌 말로도 자신을 위로했다.
그게 좋았다.
“하하…… 뭉개고 있어 봐야 추하기만 하잖아. 이제 뭐 하고 살지.”
“돈은?”
“충분해. 아내랑 지지고 볶고 살 만큼은 벌었어.”
“아들은…… 서울 갔다고 했나?”
“응…… 나름 잘 지내는 것 같더라고.”
“연락은 하고?”
“잘 안 해.”
“흐으음…….”
“뭐, 어쩌겠어. 걔랑 세대 차이도 날 테고, 또 어디 은퇴한 아버지가 창피…….”
“이놈아, 그건 네 핑계고. 아들 말도 들어 봐야지. 아들도 너 못지않게 소심한 녀석이었는데 그냥 아빠한테 말 걸기를 망설인 걸지도 모르잖아.”
수화기 너머 상대의 진심이 전해져 왔다.
괜스럽게 감동했다.
“그럴까? 여, 연락이나 해 볼까?”
“그래. 뭐, 어때. 아빠인데.”
“근데 네 딸은 지금 뭐 하냐?”
“게임. 놀고먹고 게임만 하겠다고 난리야.”
“게임?”
“그래, 요즘 캡슐기기로 게임 하는 게 유행이잖냐. 네 아들도 이거 하지 않으려나?”
“그러려나…….”
“야, 나도 요즘 딸이랑 게임 같이한다.”
우습다.
참으로 우습다.
딸이 나이 든 아버지랑 억지로 놀아 주는 광경이 선명히 그려졌다.
“민폐야, 민폐. 아이들 노는 곳에 어른이…….”
상대의 대답은 그것을 부정했다.
“아닌데? 여기 뭐 별것 없어. 나는 오히려 현실보다 여기가 잘 나간다. 회사에 나가면 다들 집에 계시지 왜 나왔냐고 쩔쩔매는 모습인데, 여기만 오면 다들 같이 가자고 손 내밀어.”
“뭐?”
이게 무슨 소릴까?
늙고 쇠한 몸이 우러름을 받는다고?
“너도 이참에 게임이나 해 보는 게 어떠냐? 돈도 넉넉하다며?”
“글쎄…… 과연 내가…….”
“찬이도 이거 할 거라니까? 전화해서 물어봐봐. 야! 끊는다. 이제 레이드 갈 시간이라…….”
“어, 어어…… 또 연락할게.”
“다음엔 캡슐 커뮤니티로 연락했으면 좋겠다. 요즘 캡슐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더 길거든.”
“그래…… 알았다…….”
뚝.
스마트폰이 다시 번호를 찾았다.
즐겨찾기로 등록해서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번호.
하지만 즐겨 찾지 못한 번호.
-아들♥
조금 더 표현하며 살 것을.
“아버지?”
이런,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는데…….
“여보세요? 아버지?”
“어, 어어. 찬아.”
“웬일이세요? 전화를 다 하시고.”
“하하…… 그러게.”
바보다.
똑바로 말 하나 못하고.
“요, 요즘 잘 지내니?”
“저야 뭐 늘 똑같죠.”
“서, 서울 생활은 어때?”
“나쁘지 않아요. 상사 스트레스가 있긴 한데 여자 친구가 잘 풀어 줘요.”
“그래…… 여자 친구…….”
들은 적 없다.
보고 싶다.
내 아들을 좋아하는 아이를.
“저어…… 취미는 있고?”
“취미요? 뭐…… 늘 똑같죠. 게임이에요.”
“그래…… 게임.”
“여자 친구도 바빠서 요즘엔 게임에서 자주 데이트해요.”
물어봐야지.
“그…… 나는 잘 모르는데 요즘엔 캡슐인가 뭔가가 유행한다더라?”
“어? 아세요?”
다행이다.
멋쩍은 대화 소재가 아니라서.
“아니, 뭐…… 주변에서 하도 얘기가 나오니까 모를 수가 있나.”
“저랑 제 여자 친구도 요즘에 그거 해요!”
관심사가 나오니 찬이가 흥분했다.
이런 모습은 오랜만이다.
“그…… 게임 이름이 뭐냐?”
“아, 이름은 모르셨구나. ‘이 세계 스칸다’예요.”
용기 내어 말을 꺼내 보았다.
“나, 나도 그거나 한번 해 볼까?”
“예에? 아버지가요?”
역시 주책일까.
그냥 기보나 보면서 혼자 바둑이나 두는 게 맞을까.
“좋죠! 요즘 연세 있으신 분들도 많이 해요. 음…… 저랑 제 여자 친구가 동부니까 아버지도 동부로 하실 거죠?”
“도, 동부? 그게 뭐냐?”
“그런 게 있어요! 서부에서 시작하면 제가 좀 실망할 것 같아요.”
“그럼 당연히 동부지!”
“주말에 여자 친구 보기로 했는데…… 음…… 아예 이번에 인사드리고 그날 본가에 캡슐 설치까지 하죠. 괜찮으세요?”
여자 친구를 데려온단다.
입이 헤벌쭉해져서 쿵쾅쿵쾅 바닥을 뛰며 대답했다.
“아, 물론이지!”
“그날 셋이서 캡슐 방도 같이 가요.”
“좋아! 응, 좋아!”
“……자주 못 봬서 죄송했는데, 이렇게라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네요.”
“그래, 참 다행이야…… 바, 바쁘지?”
“일이 아직 안 끝나서요. 너무 자리를 오래 비웠네요.”
“가, 가 봐. 주말에 보자.”
“네, 아버지.”
뚝.
고작 10분도 통화를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사이에 지옥에서 천국까지 기어 올라왔다.
쿵-! 쿵-!
스마트폰을 붙잡고 깡충깡충 뛰었다.
아래층에선 아이라도 키우는 줄 알 것이다.
송찬은 그 주 주말에 여자 친구를 부모님에게 인사시켰고 송열은 남몰래 울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와 함께 캡슐 방에 간 그는 동부에서 태어났다.
처음으로 검을 쥐어 봤고, 새로운 세계의 공기를 폐부 깊숙한 곳까지 빨아들였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손잡이의 감촉은 그를 어떤 세상으로 데려갔을까.
맹(盟)의 기둥 중 하나인 용혈문(龍穴門)의 시초.
신진세력 중 가장 빨리 성장했고 그 주인 되는 자는 동부의 우러름을 받았다.
별을 베는 검객.
검성(劍星) ‘아들 집에 좀 자주 와’.
송열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지금, 아들의 부탁으로 그가 성진의 새로운 스승이 되었다.
***
‘검성 어르신’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형님이 왜 거기서 나오십니까?]
-ㄹㅇ 종말 이후는 안 하신다고 하셔서 동부 유저들 눈물 쏟았는데 형님!
-따거! 그리웠습니다!
-검성 어르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시 뿌리 깊던 맹의 이방인 배척 기조를 밀어내고 당당히 기둥을 박은 용혈문의 웃어른이시다!
-젊은이들아! 양갱을 바쳐라!
‘검성도 검성이고’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권성 님은 또 뭔데 ㅋㅋㅋ 둘이 친구 사이긴 하다고 들었지만서도;]
-ㄹㅇ 흉적들 뚝배기 손 푸다닥 하면 퍼퍼펑 터지던 거 아직도 기억나네.
-내똥아코똥이 영상 편집 입문을 권성 매드무비 만드는 거로 했다던데.
-이 둘이면 송하린은 잠시 <자리 비움>해도 ㅇㅈ
-늙은 생강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여…….
기어오르다가 초상난 찐들이 한둘이어야지
성진과 송하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다이렉트 메시지 창을 주시했다.
송하린과 성진의 커뮤니티 단체 채팅방에 검성과 권성이 초대되었다.
「아들의 부탁으로 왔다. 찬아, 아빠 테레비 나왔다.」
「미친놈. 괜히 잘 자던 나까지 깨우고. 내일 등산가기로 했는데.」
「부탁허이 서울 쥐.」
「별명 부르지 마.」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정겨웠다.
커뮤니티를 통해 가르침을 받는 경우가 몇 번 있었던 성진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었다.
“어르신들, 심상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심상이라…… 하린이 저 꼴통이 제대로 설명했을 리 만무한 주제긴 하군.」
「뭐 설명하라고 하면 앞뒤 다 잘라먹고 하는 건 여전하겠지. 뻔하잖아.」
송하린이 표독스럽게 눈을 떴다.
“할배들…….”
「아직 할아버지까지는 아니다.」
「신세대야 신세대. 우리도 나름 인터넷 세대다.」
-내 동년배들도 권성이랑 검성 좋아했다!
-인터넷 세대. ㅋㅋㅋ
검성이 말했다.
「대강 설명은 들었다. 그 몸은 신(神)을 기반으로 하며 호흡을 익혔고 전투에는 도가 텄다, 맞는가?」
「대답해라, 요 녀석아!」
“네. 맞습니다.”
전투에 도가 텄다는 말이 낯부끄럽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신의 이야기는 들었겠지. 신을 둥지로 삼는 아이를 가르치는 건 처음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열아, 나 자러 간다.」
「벌써?」
「교대로 하자고. 내가 등산 다녀와서 가르칠게.」
-초모 2교대 교육직 모집합니다.
-점심 줘영?
-6,000원 드립니다.
-에게? 요즘 비빔밥도 7,000원인데!
권성이 퇴장하고 셋이 남았다.
「심법, 초식, 내공. 이런 것들은 과거의 잔재다. 이방인이 나타나기 전, 동부의 주민들은 저런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우선했다.」
“네.”
「동부에서 깨어난 이방인들도 처음에는 그것을 익히려 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야 효과를 보는 것들이라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한 자가 없었지. 그것을 가장 먼저 깨부순 사람이 아까 저놈이다.」
권성이 심상을 만들었다.
이 업적 하나만으로도 동부의 최강자 중 1명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 하고 발전시켰지. 처음에는 이방인의 문물이라 치부하던 맹과 전대 고수들도 나중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송하린이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처음에는 마공(魔功)이라고 우리를 탄압하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세력이 점점 거대해진 우리와 우리의 추종자들을 두려워했소이다.”
「아무튼, 심상이 무엇인지 설명하겠다. 심상은 흔히 말하는 멘탈(Mental)과 비슷하다. 사용자의 정신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트라우마나 공포증 혹은 마음의 상처들도 심상은 구현해 낸다.」
“그대로 드러낸다는 말입니까?”
「물론 어느 정도의 형(形)은 있고 선도 있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마음과 정신의 텃밭이다. 그곳에서 무엇이 자라날지는 본인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고.」
“그렇군요.”
「호흡이 기술이라면 심상은 마음가짐이지. 심상은 사용자가 원하는 것들을 구현할 수 있다. 벼락이 되고 싶어, 안개가 되고 싶어, 모든 걸 짓밟는 큰 소가 되고 싶어. 이런 것들 말이다.」
“절대적인 건가요?”
「그렇지도 않다. 당연히 실패할 수도 있고, 경지는 사용자의 마음의 강함에 따른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심상을 잘 알지 못하는 자이거나 수준이 떨어지는 자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전부를 다스린다, 기억해라.」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전부를 다스린다.”
「이제부터 실전으로 들어가 보겠다. 가부좌하고 숨을 골라라.」
“알겠습니다.”
성진은 가부좌를 한 채로 호흡을 자연스레 했다.
「심상은 너만의 세계다. 처음이라 어려울 수 있으니 편법을 쓰겠다. 눈을 감고 호흡을 사용해라.」
“어떤 호흡을 말입니까?”
「가벼움의 호흡. 너는 한 없이 가벼워져 네 정신으로 들어갈 것이다.」
성진이 그대로 따라 했다.
이번엔 집중하기 쉬운 환경이었기 때문에 중얼거리지 않아도 몸이 점차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렇게 그의 몸은 계속해서 가벼워졌다.
나중에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지 않을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숨이 느껴졌다.
외부에서 들어온 공기는 몸으로 들어와 똬리를 틀었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고 생각할 무렵, 성진은 심상에 들어왔다.
그가 눈을 떴다.
콰르르르르릉!
눈을 뜬 곳은 정신의 한복판.
붉은 벼락이 치고 들은 불탔다.
오직 푸르른 나무 하나만 외로이 서 있었다.
「끔찍하구나.」
“제 심상이 보이십니까?”
「나 말고도 다른 이들도 보이는 것 같구나. 아무튼, 내가 여태 보아왔던 심상 중에서 가장 상태가 심각하다.」
“…….”
「현실의 고통이 있느냐?」
“……네.”
「네 심상의 모든 세계가 불타고 있다. 지평선 끝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이런 마음이라니…… 슬픈 세계다.」
슬프다.
성진의 세계는 슬펐다.
모든 세상이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겨워했다.
이 세계는 최성진, 그를 닮았다.
그도 알았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나무가 보이느냐?」
“보입니다.”
「이 지독한 세계에서도 중심을 잡고 떡 버티고 선 나무다. 너는 이 나무를 사랑하며 그것이 너를 무너지지 않게 해 주는 단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저 나무가 무엇인지 알겠느냐?」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성진이 동요했다.
‘나무가 무엇이냐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심지어 네시온과 정신에서 사투를 벌일 때도.
그저 단 하나 남은 자신의 인격이 아닐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아…… 그렇구나.’
저 나무는 자신이 아니다.
그녀다.
신아름.
외로움과 부자유, 고통과 신음 속에서 힘겹게 버티게 해준 나무는 신아름의 존재다.
나무를 바라보는 성진의 모습이 슬퍼 보였다.
시청자들은 그의 모습에 침묵했다.
「너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너는 저 나무가 무엇인지 깨달았느냐?」
“……예. 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네 시작과 끝은 저 나무에서부터일 것이다. 나무로 다가가라.」
검성의 가르침대로 따랐다.
나무에 가까이 다가간 성진이 그 푸르른 껍질을 어루만졌다.
“수고했어, 고마워.”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이다.
그냥 말해 주고 싶었다.
그때,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사아악.
나무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기설기 떨어졌던 잎사귀가 다시 돋아났다.
그리고 나무의 주위로 초록 들판이 펼쳐졌다.
하지만 아직 미약하다.
「되었다!」
검성은 만족했다.
그의 오랜 경험에서도 시작부터 이 정도의 성과를 거둔 적이 없었으므로.
「하린아, 이제 너도 들어오너라.」
“나도? 나까지?”
「네 심상도 망가졌다고 들었다. 본디 심상을 수련하는 것과 회복하는 것 모두 타인과 교감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알지 않느냐?」
“알기야 알지만…… 부끄러운데.”
「들어오지 않으며 네 심상의 문제를 알기 어렵다.」
송하린이 가부좌를 하고 외부의 성진과 양손을 맞대었다.
벼락이 치고 불타는 세계는 또 다른 세계와 연결되었다.
성진은 나무에 올라 그 세계를 지켜보았다.
휘이잉.
빙산(氷山).
한없이 차가운 바람이 접근을 허용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듯.
성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빙산에 누군가 있었다.
송하린의 어릴 적 모습이었다.
‘얼어 있어.’
그녀는 단단한 얼음에 갇힌 채 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무슨 삶을 살았기에 이리 힘겨운 세계에 있는 것이냐.」
성진과 송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너희의 심상은 연결되었지만 이어지진 않았다. 이제부터 매일 수련해라. 초모는 그 나무를 시작으로 너의 세계를 수복해라.」
“예.”
「하린이 너는 그 얼음을 깨고 나와야 한다. 아마도 심상이 어그러진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
「둘은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해라. 그리하여 심상을 이어라. 그것이 각자가 가장 빠르게 심상을 회복하고 얻는 길이다.」
“알겠습니다.”
「초모, 심상의 기본을 일러 주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 너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했지?」
“네. 혹시 그게 문제가 됩니까?”
「아니다. 그것은 아니지만…… 이런!」
“왜 그러십니까?”
「약수터 갈 시간이다. 그럼 알아서들 하고 나머지는 친구 놈이 알려 줄 것이다.」
“어르신?”
뚝.
-엥?
-어, 어르신?
-약수터면 ㅇㅈ이지 말통 꼭 가져가세요~
-오바야 ㅡㅡ 진짜 갔어?
-갑자기 심상에 버려두고 간다고? ㅋㅋㅋ
송하린과 성진은 심상을 빠져나왔다.
“허억…… 허억…….”
“내가 이래서 저 영감탱이들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형님. 아우의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심상…… 이게 심상이구나.”
“별것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저 늙은이 둘이 감시할 테니 편히 쉬지도 못하겠네요.”
성진의 시스템 창이 기분 좋은 울림을 가져왔다.
-‘이미지 : 공백’이 ‘이미지: 심상’으로 변환됩니다.
-심상에 적응합니다.
-심상의 회복 속도가 증가합니다.
-심상으로의 진입이 수월해집니다.
-심상이 끌어내는 힘이 강해집니다.
***
밤이 늦도록 홀로 심상을 수련한 성진은 오히려 잠을 잔 날보다 개운함을 느꼈다.
“형님, 얼굴이 뽀얗습니다.”
“동생.”
그녀의 심상을 들여다본 성진은 그녀와 한결 가까워진 것 같았다.
“심상이 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비밀이 많은 여자입니다.”
-에엥~ 심상 파탄 난 여자 말은 안 들리는데?
-하린이의 속마음은 여렸구나. 우리는 다 이해해!
성진의 채팅창과 연동한 송하린은 시청자들의 채팅을 보고 있었다.
“나를 자극하지 마시오. 작은 시청자들아.”
-히끅…….
-무, 무서워.
-우리는 마음은 여리지만 입은 거친 네가 좋아!
-송하린 심상 회복 기원!
-고인물들은 심상도 평범하지가 않네.
-글게 나는 그냥 평범한 초원이었는데.
-나는 무슨 시장통이던데.
-나는 뭐 아무것도 없던데?
-그건 님 머리가 텅텅 비어서 그럼 ㅋㅋ 수능 망쳤지?
-이 새끼가? 어케 알았누?ㅋㅋ
난쟁이 강오가 기지개를 켜며 짐을 쌌다.
“잘들 자셨는가?”
“똥자루의 코 고는 소리에 달팽이관이 타격받은 것 빼고는 그럭저럭 잘 만했소.”
“앞으로도 자주 들을 텐데 눈치는 주지 말자고. 그래, 다음은 어디로 갈까.”
“생각한 적 없는데. 똥자루는 어디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오?”
“그럴 것 같더라니…… 음…… 다음 도시는 찬봉(燦峰)인데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하지.”
“돈 있소? 나는 없는데. 찬봉의 음식들은 드럽게 비싸잖아.”
“나도 없는데, 저 백괴는…….”
“우리 형님은 알거지요. 내가 먹여 살리고 있지.”
“도둑질로?”
“이 세상 모든 금화는 누구의 것도 아니요. 그저 흐를 뿐이지.”
“궤변이군. 음…… 그래도 찬봉에 왔는데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말을 늘이는 것을 보아하니 수가 있는 게로군. 냉큼 말해보게, 똥자루!”
강오가 손을 비볐다.
손을 비비는 건 그가 꾀가 있을 때 하는 행동이라고 송하린이 말했었다.
“찬봉에서 오황 중 둘의 금분세수(金盆洗手)가 있을 것이라고 들었었는데…… 아마 우리가 도착할 때쯤일 거야.”
“거기 가자는 얘기군.”
“오황이랑 조금 알아?”
“많이 알지. 그중에서 누구요?”
“창황(槍皇)이랑 혈황(血皇).”
“극과 극이네? 같은 결이 아닌데?”
“서로 쥐 잡듯이 싸웠다고 들었는데 뭐 좀 알아?”
“그냥 혈황이 비열한 놈이면 창황은 고지식한 놈이야. 그 둘이 벌써 은퇴할 때가 됐다고?”
“그럼. 갈 거야 말 거야?”
“금분세수 하면 진수성찬을 깔아 놨겠지? 두 놈이니까 2배로?”
“그렇겠지.”
“대충 친한 척하고 들어가면 모를 거고?”
“알아도 흑백쌍괴라고 둘러대면 그러려니 하고 들여보내지 않겠어?”
“난쟁이, 칭찬한다. 배를 까뒤집어, 긁어 줄게.”
“필요 없어.”
송하린이 씨익 웃으며 성진을 돌아보았다.
성진은 이제 저 미소가 두렵기까지 했다.
“형님, 여기만 들렀다가 월광지대로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남의 잔치에 가서 얻어먹자는 얘깁니까? 공짜로요?”
“검성 할아버지가 서로를 이해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침 저를 이해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음식 훔쳐 먹는 게요?”
“에이, 설마 음식만 훔쳐 먹으러 가겠습니까? 아니, 애초에 훔쳐 먹는 게 아닙니다. 다 남으면 버릴 음식입니다. 그리고, 주 목적은 그게 아니라 다 미심쩍은 게 있어서 가는 겁니다.”
-스포) 음식만 훔쳐 먹다 걸린 후에 백괴에게 떠넘기고 흑괴 줄행랑
-대사 : 형님! 부탁합니다!
-아 스포 밴 점 ㅡㅡ
-미래 다 봤다
-어케 이렇게 잘 알지? 님 혹시 잔칫상?
“알겠습니다. 대신 가는 동안 심상 수련은 하죠.”
“물론입니다, 형님. 오후에 그 꼬장꼬장한 권성인지 하는 할아버지가 오기로 했으니까. 어휴, 말투에서도 쉰내가 팍팍!”
「다 들린다.」
송하린이 권성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딸꾹질까지 하며 놀랐다.
“어이쿠, 노인네가 기척도 없이. 굴러서 내려 왔나? 하산도 빨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