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114화
“다시 말해 보아라. 지금, 장욱이 죽었다고 했느냐?”
“예, 도왕 어른께서…….”
“어른이라?”
“죄, 죄송합니다. 도왕이 흑색의 무복을 입은 여인과 백색의 무복을 입은 남자에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호사가들이 떠들기 좋아하겠군. 게으른 늙은이. 돈을 쥐면 꼬리나 흔들 줄 알지, 재주가 시원치 않긴 했다만…….”
“천금 님, 어떻게 할까요? 그 둘의 실력이 막강한지라 쫓는 것도 실패했다고 합니다.”
“쯧쯧…… 기대도 안 했다. 장욱 밑의 놈들이야 그놈이 불러 모은 것들이니 딱 그 정도 수준일 거다. 흐음…… 어쩐다…….”
천금이 어둑한 곳에서 수염을 매만졌다.
그도 세월을 피해 갈 수 없었는지 흰 머리와 수염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주름이 없었다.
탱탱한 피부는 검버섯은 물론이고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나이를 거스른 것처럼 기괴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금이 휘장으로 몸 전체를 가린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의 형상이 휘장에 비쳤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나에게 묻는 것이냐?”
“천금이 지혜를 구합니다.”
“상인은 지혜로운 자들이 아니더냐?”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상인은 지혜로운 자들을 속이는 비열한 족속들입니다.”
“자조가 꽤 신랄하구나.”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동부의 금을 휘두르는 거상(巨商) 천금.
그런 천금이 누군가를 섬기는 모습은 낯설었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은 그 모습을 당연시 여겼다.
휘장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이는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으니까.
잠시 후, 말소리가 휘장 밖으로 흘러나왔다.
“장욱은 중요한 패가 아니다. 그는 단지 쓰다 버릴 말에 불과했다.”
“맞습니다.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이미 동부는 나의 손 위에 올라왔다. 단지 그것을 쥐느냐, 아니면 흘려보내느냐의 문제일 뿐.”
천금이 눈을 치켜떴다.
“그렇다면,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쥘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되어야겠지. 순리대로.”
“모든 것은 순리대로.”
“장욱을 건드린 자들은 무시하라. 우연이겠지. 하지만, 다음에도 우리의 행보를 방해한다면…….”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들었습니다.”
***
“아무래도 따돌린 것 같소만…….”
“그런 것 같습니다.”
-싸늘하다. 이 조합…….
-파스타에 청국장을 처넣은 기분이야. ㅋㅋ
-누가 청국장인데?
-당연히 송하린이짘ㅋ
송하린과 성진은 호수를 벗어나자마자 야로를 떠났다.
신기하게도 그들의 행적은 드러나지 않았다.
밤길을 걸어 야산을 탔고 다음 마을을 건너뛰었다.
둘은 자지도, 먹지도 않고 걸어서 이름 모를 산의 동굴에 자리했다.
“하아…… 이제 잡것들은 따라붙지 않을 것 같소.”
“꽤 걸었습니다. 좀 쉬죠.”
“내가 하려던 말이오.”
타닥, 탁.
동굴 안에서 불을 피웠는데도 연기가 잘 빠져나갔다.
불을 피우는 것 자체가 도주 중에는 위험한 행위였지만, 그녀는 이쯤 벗어났으면 그냥 사냥꾼이 묵어가는 줄 알 것이라고 자신만만했다.
성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송하린이 손사래 쳤다.
“나는 이 산에 많이 와 봤소이다. 어디 이 산뿐인가? 동부에서 내 발이 닿지 않은 산은 찾기 힘들 거요.”
“여행을 자주 했습니까?”
“여행…… 여행이라…… 그렇지.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풀벌레 소리와 동굴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운율을 만들었다.
그녀는 그 운율을 바탕삼아 말을 풀어냈다.
“이 이마. 보이오?”
“보입니다.”
“나는 이방인이었소. 아, 물론 지금도 이방인이지만.”
“용 각인…….”
“별로 안 놀라는군.”
“…….”
“하긴, 수도사들은 산에서 수련하느라 내가 이방인이든 외계인이든 신경 쓰지 않을 테지.”
-그게 아니라 저도 이방인이라…….
-이건 니가 이방인이 아니니까 하는 얘긴데. ㅋㅋ
-초모 님! 그냥 얘기나 들어 보죠! 듣고 짜잔! PPAP추면서 나갑시다. ㅋㅋ
그녀의 얼굴은 아련한 무언가를 떠올린 눈치였다.
향수를 느끼는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
시청자들은 사뭇 진지한 그녀의 표정에 조용해졌다.
“나는 말이야 50년 전에도 이곳 스칸다에 왔었소. 믿어지시오?”
“그렇습니까?”
“그때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지. 모든 세상, 모든 소리, 모든 순간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어.”
“왜 그랬던 거죠?”
송하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녀가 무겁게 말했다.
“스칸다에는 수많은 이능이 있지. 정령술, 악마술, 마법, 원소술, 신성력, 진기…… 그런데 말이야, 내가 사는 곳에도 이능이란 것이 있었어.”
“…….”
성진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는 현실의 이능력자들을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다시피 했다.
그를 병상에 5년이나 누워 있게 한 장본인이 이능력자였으니까.
“이능력자들은 우리 세계에서 돌연변이외다. 도움이 되는 능력을 지닌 이는 모두의 우러름을 받지만, 안타깝게도 내 능력은 그런 것들과는 달랐지.”
“어떤 능력입니까?”
그녀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내겐 사람의 색이 보이오.”
“그게 전부입니까?”
“어린 나이라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은 그 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색이 의미를 갖는다고요?”
“그럼. 아, 물론 내 생각일 뿐이오. 그냥 헛소리로 치부해도 좋소. 그만 듣겠소?”
“아뇨, 더 듣고 싶습니다.”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성진도 마주 웃었다.
인피면구에 어색한 미소가 맴돌았다.
“웃는 게 어설프구려. 내가 아는 누군가와 비슷해. 그래서 낯이 익었나? 아무튼, 공자에게는 묘하게 끌리는군. 원래 이런 얘기는 낯간지러워서 절대 안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있죠. 처음 봐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바로 그거야! 내 기분이 그거란 말이요. 이상하게 보지 말아 주시오.”
“물론입니다.”
채팅 창은 얘기가 전혀 예상 밖으로 흘러가자 당황했다.
오히려 이런 얘기가 방송으로 노출되어도 괜찮냐는 말까지 나왔다.
성진의 감은 날카로웠다.
특히 이런 순간에는 더더욱.
강한 이끌림과 함께 지금 그녀의 말을 막으면 어쩌면 이 얘기는 오랫동안 듣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얘기를 반드시 들어야 한다는 느낌도.
“나는 선과 악을 볼 수 있소.”
“선과 악?”
“내 추정이긴 한데, 푸른빛이 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오. 붉은빛이 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지. 미친 소리 같소?”
“놀라긴 했습니다.”
송하린의 눈은 슬퍼 보였다.
사람의 선과 악이 보인다.
그것이 좋을 리가 없다.
“이걸 언제부터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아마 어렸을 적이었던 것 같소. 어른들을 보며 그런 불편함을 느꼈던가?”
“…….”
“남들이 선한 사람이라며 칭송하던 이는 위선자였고 사람들과 겉돌던 이가 진정으로 선한 이였지.”
“사람들의 인식과 현실과의 괴리가 있었겠네요.”
“맞아! 아, 이해 못 하려나? 내 얘기가 무거운가?”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송하린이 양팔로 무릎을 모으고 얘기했다.
날씨가 춥지는 않았다.
마음이 추운 것이다.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선한 사람이라고 대우받지 않고 악한 사람이라고 꾸짖지 못하오. 법이라던가 윤리라던가 아무튼 복잡한 게 많소.”
“그렇군요.”
“하지만…… 스칸다는 달랐지. 내 감정이 어땠을 것 같소?”
“짐작이 잘 안 갑니다.”
송하린이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천국에 온 줄 알았지. 악인을 퇴치하면 보상받고 선인을 구하면 추앙받았어. 그런 세계가 있을 줄이야……. 뭐, 나도 제멋대로 행동했었소.”
그저 즐거운 추억뿐이었다면 그녀가 이렇게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과거를 떠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성진은 어떤 일이 있었을지 짐작했다.
“괴리가 계속된 거군요.”
“맞아. 오히려 이런 세상이어서 더 그랬는지 몰라.”
그녀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고, 단죄할 힘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녀와 같은 시야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노사님! 어떻게 노사님을…… 이 마두야!
-너는…… 너는…… 악마야…….
-어떻게 그분의 팔을 가져갈 수가 있어? 대체 너는…… 왜…….
“왜 선한 이를 괴롭히냐는 거지. 처음에는 나도 항변했소. 당신들이 알고 있는 이 녀석은 사실은 나쁜 녀석이다. 나도 나름의 조사를 하고 손을 쓴 것인데도 믿지 않았지.”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응? 뭘 어떻게 합니까? 더 설명해서 뭣 하나. 그냥 내 맘대로 했지. 선한 이를 구하고, 악한 이를 구제(驅除)했소. 그러다…… 영감을 만났소.”
“영감?”
송하린은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했다.
반듯이 선 노인.
그녀가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노인은 색이 언뜻 보면 푸르렀고 다시 보면 붉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였다.
-아이야, 뭘 그리 보느냐?
-영감탱이. 색이 안 보이네?
-색?
당시 그녀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노인에게 구구절절 설명했다.
자신이 사람의 색을 볼 수 있는데 노인네의 색을 특정하기 어렵다고. 노인은 웃었다.
-푸하하하하! 걸작이구나! 세상에 그런 행복한 능력이 있다니…….
행복하다니?
그녀는 이 능력을 지닌 게 불행하다고 항변했다.
노인은 또 웃었다.
-좀 맹한 구석이 있구나. 보아라, 너는 붉은 사람을 만나면 그를 좋아하면 될 것이고 푸른 사람을 만나면 그를 미워하면 될 것 아니냐? 단순한 문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구나.
하지만, 그래서는 악한 이들이 득세하고 선한 이들이 짓밟힌다고 얘기했다.
-너는 세상을 얕보는구나. 아니, 사람을 얕보는 건가? 네가 없었을 때도 잘만 굴러가던 세상이다. 너 하나가 뭐가 대단하다고 세상을 좌지우지하려 하느냐? 너는 생각해 본 적 있느냐?
무엇을.
-지금, 네 색은 무엇일 것 같으냐?
송하린은 그 물음에 도를 내렸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클클클…… 거 봐라. 아이야, 이방인이지만 나는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함께 가지 않으련?
노인의 앞에선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게 좋았다.
어른다운 어른.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을 그에게서 들었으니까. 그녀는 그를 따라 세상을 떠돌았다.
채팅 창이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송하린 마두라고 하던 놈들 다 나와!
-마두긴 마두잖아? 이능이든 뭐든 본인만 아는 거고
-다들 이능력 감수성이 모자라시네요
-이능력자들 근데 겜도 하냐? 국가에서 관리 안 하나?
-등급 낮은 능력들은 등록만 해 두고 안 건들지 않나? 법도 뭐 특이한 게 많아서 모르겠다.
-송하린에게 그랬던 사연이 있구나~
문득, 성진은 궁금해졌다.
자신은 무슨 색인지.
“저는 무슨 색입니까?”
송하린이 피식하고 웃었다.
“내 언제 묻나 궁금했소. 두렵지 않소? 혹시라도 푸른 빛이라면 말을 한 내가 미울 텐데?”
“괜찮습니다.”
“붉은빛.”
“…….”
“아주 붉은빛. 너무 붉어서 눈이 뜨거울 정도요. 이런 빛을 내는 이는 내가 알기로 1명뿐이오.”
-설마!
-눈치챈 건가?
-역시! 아무리 나사 빠진 하린 누나라도 초모인 건 알아야지!
그녀가 잠시 눈을 위로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사람은 이방인이지. 그래, 다른 사람이야.”
-아니, 씨!!
-이걸 어케 모르누?
-누나? 일부러 그러는 거지?
-최근에 방송을 안 봤나?
송하린은 최근 방송을 챙겨 보지 못했다.
초모라는 모험가로 활동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동부에 들어와 있을 줄은,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을 줄은 몰랐다.
송하린이 누우며 말했다.
“푹 쉬고 늦은 오후에 출발합시다. 본녀는 잠이 많은 편이오. 아! 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동생처럼 여기시오. 척 봐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동생.”
성진은 자기 전, 인피면구를 벗었다.
조금 따가웠지만, 피부에 달라붙었던 다른 이의 이목구비는 손쉽게 떨어져 나왔다.
인피면구를 벗을 때 찢어지는 소리가 났는데, 이 소리에 누웠던 송하린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무슨 소리…… 엥?”
그녀가 벌떡 선 모습 그대로 굳었다.
그리고 그녀를 마주 보는 성진에게 침묵을 깨고 물었다.
“혹시 올…… 아니 초, 초모?”
성진도 채팅 창에서 매번 언급되니 그녀를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여태 그녀의 얼굴은 몰랐지만, 이번에 알게 되었으니 함께하는 내내 모른 척할 수만은 없었다.
“반…….”
“하하, 그런가. 요즘 방송을 너무 안 봐서 헛것이 보이는 모양이군. 이거 완전 맛이 가 버렸어.”
“반갑습니다, 송하린 씨.”
“이젠 환청까지…… 제발 인생을 살자, 하린아.”
-뭐라는 거야. ㅋㅋㅋ
-확실하다. 얘는 ‘진짜’야.
-누나, 그동안 컨셉으로 의심해서 미안해…….
그녀가 횡설수설하며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성진도 인사는 내일 아침에 나눠야겠다고 생각하고 누웠는데 그녀가 다시 벌떡 일어나 성진에게 가까이 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자세히, 아주 꼼꼼히 살폈다.
“……죽자.”
“…….”
“죽어 버리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송하린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돌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탁, 탁.
“죽어…… 죽어…….”
“동생?”
“나는 쓰레기다. 당장 종량제 봉투에 담아서…… 아니, 그럼 봉투님에게 죄송하잖아. 혼자서 가자.”
그녀는 밤이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
아침이 되고 성진이 잠에서 깼다.
밤새 부스럭거리던 송하린은 잠을 설쳤는지 눈이 퀭하고,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가 성진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진은 그녀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먼저 말을 걸었다.
“동생, 어디로 가야 합니까?”
“도, 동생 말입니까요?”
“동생이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 하, 하. 그랬었지. 저, 실례지만 나이가…….”
성진은 갑자기 나이를 묻는 송하린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손사래 치면서 답했다.
“어이구…… 아우가 마, 말실수를…… 부디 목을 베어 주십시오.”
“동생…….”
송하린이 굽신거리다가 성진의 말에 귀를 쫑긋했다.
그리고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정말입니까? 정말 제가 초모 님 아우 해도 되는 겁니까?”
“그러자고 하셨잖습니까?”
“흐…… 흠흐흐…… 우애의 증표로 전, 전화번호 교환은 안 되겠지요?”
“장보도 일부터 해결하자고 했죠?”
-ㅋㅋ 으딜!
-시무룩한 거 보소. ㅋㅋ 삐빅! 비즈니스입니다.
송하린의 악동 같은 표정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형님. 그런데, 가기 전에 도움을 구할 사람이 있습니다.”
“도움? 우리끼리만 가는 것 아니었습니까?”
“저도 그러면 좋겠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송하린 공손해진 거 보소. ㅋㅋ
-분노 조절 잘해였누.
성진은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스칸다를 종횡무진 누비던 그녀였기에 분명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고 움직이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합시다.”
“좋군요!”
그 길로 방향을 꺾어 민가로 내려갔다.
그녀는 아고(阿高)라는 도시가 근방에 있으며 찾으려는 이 또한 그곳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원래는 떠돌이였는데, 근황을 알아보니 그곳에 자리 잡았다고 들었소이다.”
“찾으려는 자가 어떤 자입니까?”
“시대가 변했으면 그 시대의 사람을 구해야지요. 관광지에도 가이드가 있는데 스칸다에 없겠습니까?”
“굉장히 박식하신 분인가 보네요.”
“박식이라…… 아마 결이 다를 겁니다. 일단 직접 보고 판단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럼, 가죠.”
아고는 멀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 휴식을 줄여 가며 도시 아고에 도착했다.
완벽하게 동부 문화를 보여 주는 도시였다.
송하린이 동전 몇 개로 이야기꾼을 구슬려 상황을 들었다.
잠시 후, 그녀가 성진에게 돌아와 이렇게 얘기했다.
“형님, 듣자 하니 우리 정체는 안 들킨 것 같고…… 무슨 흑백쌍괴인지 뭐인지가 야로를 뒤집어 놨다고만 하더이다.”
“흑백쌍괴? 우리를 말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않습니까? 이거…… 잘만 하면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용?”
송하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했다.
“본녀가 스칸다에 미움을 사고 있는 건 과거의 일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지요. 그 때문에 정체를 드러내 놓고 다닐 만한 처지가 아닙니다.”
“저도 휘말릴 수 있다는 얘기군요.”
“정확하십니다! 역시 우리 형님은…… 아무튼, 인피면구를 쓰고 다니느니 아예 흑백쌍괴로 활동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예 가상의 인물이 되자?”
“네! 혹여 장욱의 수하들이 따라붙더라도 형님과 저라면 몸을 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지요. 사실 제가 송하린이요 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그게 낫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송하린이 품에서 가면을 2개 꺼냈다.
아까 이야기꾼에게 다녀오면서 산 것 같았다.
“짜잔! 못난이 가면입니다!”
가면은 이목구비가 이상하게 생긴 중년의 얼굴이었다.
입 부분은 개방되어 쓴 채로 식사까지 가능한 나름 실용적인 가면이었다.
이 가면을 쓰고 흑백쌍괴인 척하자는 얘기.
성진과 송하린은 그 가면을 쓰고 목적지로 향했다.
***
후르릅.
“저 사람이라고요?”
후르릅.
“그렇습니다. 과연 난쟁이, 50년이 지나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이는군요.”
“저 사람이 왜 필요한 겁니까?”
후르릅.
“저 녀석은 탐식호리(貪食狐狸)라는 놈인데, 식탐이 많은 데 반해 동부의 일을 손바닥처럼 알고 있는 영특한 놈입니다. 저놈을 생포하죠.”
“생포요?”
“여태 뭘 들으셨습니까? 포켓몬 도감으로 사용하면 딱 맞는 놈이라니까요?”
성진은 그녀의 수많은 소문 중 일부를 확인했다.
그녀가 제멋대로라는 소문은 정확했다.
“한데…… 형님. 전낭(錢囊)은 어디에다 두시고…… 우리가 어디 가서 국수만 먹을 그릇은 아니지 않습니까?”
“야로에서 싸우는 도중 흘린 모양입니다.”
“저런, 저런…… 저는 식탁이 부실하면 기운이 안 나는데…….”
“오늘만 참읍시다. 어차피 식사보다는 사람을 찾으러 온 것이니.”
성진과 송하린은 지금 아고의 객잔에 와 있었다.
그녀가 자신이 찾는 난쟁이가 이곳에서 숙수를 한다고 말했다.
“많이 처먹는데 처먹는 만큼 요리도 잘합니다. 일단…….”
송하린이 계획을 설명하려는 찰나, 객잔이 소란스러워졌다.
“난쟁이 어디 있어!”
“강오! 강오 나오라고! 오호라, 거기 있구나!”
척 봐도 파락호처럼 보이는 사내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강오라는 자를 찾았다.
인상이 험악하기 때문인 건지 이곳에서 유명한 자들인 건지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저 또 지랄이군.”
“이번에도 말려들지 않으려면 나가자고.”
“아고삼랑(阿高三狼)은 무슨. 아고삼견(阿高三犬)이다!”
“쉿, 듣겠어.”
“어이쿠…… 그러면 큰일 나지.”
대충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대 객잔에 자주 찾아오는 파락호들인 것 같았다.
‘저 난쟁이가 강오라는 자군?’
소란에 난쟁이 숙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나왔다. 또 왜.”
“왜? 장난해? 분명히 말미를 줬잖아.”
“애초부터 갚지도 못할 빚인데 이자는 산더미고…… 그래, 배 째라.”
“하…… 겁도 없이. 진호 형님! 이 새끼를…….”
“잠깐!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형님? 중요한 문제라니…….”
“지금 내 전낭에 손대고 있는 이 녀석은 뭐냐?”
흑색 무복을 입고 못난이 가면을 쓴 여인이 아고삼랑의 맏형인 진호의 전낭을 훔치려다 들켰다.
여인이 진호의 전낭을 쥔 채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형님! 형님이 지시하신 ‘남의 전낭으로 행복 식탁’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후르릅.
성진이 쏟아지는 아고삼랑의 시선에 당황하여 국수를 입에 물고 송하린을 쳐다봤다.
-이, 이 새끼가?
-ㅋㅋㅋㅋㅋㅋㅋ 못난 동생을 둔 형의 잘못이다.
-이것이 종말의 복선이었다니…….
“아우, 내가 언제…….”
“백 형님! 도와주십시오! 이 자식들이 형님을 찢어 죽이겠다고 합니다! 뭐? 어떻게 그렇게 험악한 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