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화
송하린의 강기가 술상을 반으로 가른 것도 모자라 장욱을 향해 뻗어 갔다.
스릉.
촤아악!
장욱도 만만한 자는 아니었다.
그가 도를 뽑자, 날뛰던 검은 강기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장욱은 악귀의 표정을 하고 물었다.
“누가 본좌를 함부로 부르느냐? 그리고 물건이라니 무슨…… 잠깐. 계집…… 너…….”
“이제야 알아보는구려. 역시 열등감에 찌든 노인네가 숨을 곳은 야로의 밤거리밖에 없지.”
“송하린…… 정말 기이한 일이군. 너는 어찌하여 돌아온 거지?”
“몰라, 물건이나 돌려줬으면 하는데. 그 무식하게 생긴 건 내가 쓰던 게 아닌 것 같고…….”
성진의 옆에서 얼빠진 얼굴로 있던 방일이 뻐끔거렸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방일.”
“망했어…… 망했다고. 어떡해야…….”
“방일!”
“어, 어어?”
성진이 방일과 눈을 마주하고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물러나세요.”
“방이 자네는?”
“저는 이곳을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위험해! 일단…….”
“돌아가십시오. 일금님에겐 제가 개인적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일을 마치면 즉시 야로를 벗어나. 집요한 자식들일 거야.”
방일은 소란스럽게 팔을 휘적거리며 도망쳤다.
이미 기생들이 한차례 시끄럽게 방을 빠져 나왔기에 장욱의 수하들도 그를 의심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쾅!
콰아앙!
장욱과 송하린이 충돌할 때의 충격이 기루의 최상층을 뒤흔들었다.
‘도왕이라…… 정보가 맞아.’
일금과 방일이 얘기로는 과거 동부의 귀인 중 도왕이 천금의 뒤를 봐주고 있다고 했다.
그의 늠름했던 별호는 흉하게 변했다고 했다.
‘금귀(金鬼) 장욱.’
팟!
팟!
몇 차례의 충돌 이후 장욱과 송하린이 물러났다.
송하린은 팔이 얼얼한지 손을 덜덜 떨었다.
“할아방구가 쓸데없이 정력이 좋구려. 확실히 바둑이나 두면서 늙어 갈 인물은 아닌 것 같소.”
“송하린, 나에게 무슨 원수를 졌다고 이러느냐?”
“물건만 받아 간다니까 그러네?”
“네년 물건이 어디 있는지 본좌가 어떻게 알겠느냐!”
“도왕 장설호. 일찍이 명성을 얻었지만 탐욕스럽고 여색을 밝히며 남의 것을 넘보는 네놈이 내 물건을 훔치려 했을 것은 그 누구라도 알 것이다!”
“추측으로 몰아가지 마라! 본좌가 어찌 그런…….”
“내 물건, 장보도 있지? 다 알고 왔어. 왜 이래, 선수끼리.”
장욱이 억울한 표정이 음흉하게 변했다.
아무래도 이쪽이 그의 본 모습인 것 같았다.
탐욕스러운 노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 알고 왔네? 미리 말을 하지.”
“네놈이 얼마나 뻔뻔한지 확인하려 했다. 본녀는 네놈이 죄송하다고 빌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그럴 필요가 없었네!”
“송하린…… 도를 잡은 손이 떨려오고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본좌도 나이가 들었지만 너는…… 약해졌구나.”
“역시 눈치 하나로 그 위치까지 간 놈답게 눈치가 빠르구나. 하지만 본녀가 약해졌다고 한들 귀인의 말석인 네놈 발밑일까? 장보도를 내놔라!”
“클클클…… 어차피 네년이 숨긴 장소인데 왜 장보도가 필요한 거지?”
“까먹었다! 까먹을까 봐 장보도에 그려둔 것이지 그럼 취미로 그렸겠느냐!”
“미친년…… 넌 여기 와서는 안 됐다. 야로의 밤거리가 내 것인 걸 모르느냐?”
“흥, 기껏해야 기생들 관리나 하는 포주 놈들이…….”
팍! 파팍!
성진 일행이 있는 방의 장지문이 터져 나가면서 사람들이 등장했다.
사슬에 묶인 철구를 든 사람과 날이 기묘하게 생긴 단검을 역수로 쥔 자였다.
“장욱님!”
“아, 왔군. 저년을 죽여라. 조심해라 만만치 않은 녀석이니.”
“예!”
“비겁하다! 삼 대 일은 선을 넘었다!”
“크큭…… 삼 대 일? 이봐, 송하린. 시대가 변했어. 내 수하들이 야로를 네 피로 물들이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 얌전히 죽어라.”
장욱의 수하는 철구가 매달린 사슬을 붕붕 돌렸다.
그러다 뭔가 불편하다는 것을 깨닫고 옆을 봤다.
“뭐, 뭐야! 이 자식은?”
“옆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장욱님?”
성진은 기세를 뿜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채팅 창을 보는 등, 여유롭게 행동했다.
일단 무슨 상황인지 확실하게 파악해야 난입하든 말든 할 테니까.
-이거 쌔한데…… 얽히면 엿되지 않을까?
-그럼 모른 척함? 그것도 에바지.
-동향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야지! 글고 아무래도 저쪽도 장욱이랑 대립하는 것 같고.
-원래는 정보만 캐내러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장욱의 눈이 샐쭉해졌다.
호탕한 척했지만 성진도 이자가 뱀 같은 자라는 것을 진작 눈치챘다.
“너…… 상인이 아니군.”
성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장욱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처리하라는 신호.
장욱은 신호를 보내고 곧장 송하린과 다시 충돌했다.
철구가 성진을 향해 던져졌다.
부우웅.
팍!
“어…… 뭐, 뭐야!”
“머저리야! 잘 좀 해!”
철구가 성진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장욱의 덩치 큰 수하는 사슬을 잡아끌며 성진과 힘싸움을 했는데 철구는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끄으으으윽!”
철구의 주인이 얼굴이 용광로처럼 붉게 변할 정도로 모든 힘을 다하고 있는 사이 단검을 쥔 자가 낮은 자세로 접근했다.
“같잖은 수를…….”
콰아앙!
“컥…….”
성진이 단검이 채 휘둘러지기도 전에 발을 움직였다.
쾅!
콰앙!
후두둑.
단검을 쥔 수하가 장지문 두어 개를 부수고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철구를 되찾으려 애쓰던 덩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 어?”
콰앙-!
“이거, 돌려주지.”
“자, 잠깐!”
성진이 철구를 기루의 외벽을 향해 던졌다.
훙!
콰아앙!
덩치가 미처 사슬을 감은 손을 풀지 못하고 팔이 부러진 채로 딸려 날아갔다.
“끄아악!”
팟!
팟!
송하린과의 격돌에서 물러난 장욱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아직도 못 끝…… 뭐야?”
장내를 확인한 장욱은 수하들이 모두 벽에 처박혀서 신음하고 있는 상황을 믿기 어려웠다.
송하린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형제! 이 늙은이의 원수로군!”
“아닙니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 침울해졌다.
“그럼 내 장보도를 노리고 온…….”
“그것도 아닙니다.”
장욱이 기수식을 취하고 말했다.
“상관없다. 여기서 너희 모두 죽을 것이다.”
취우도법(驟雨刀法).
소나기처럼 몰아친다는 도법으로 도왕의 성명절기다.
“토막 나 죽어라.”
곧, 장욱의 도기(刀氣)가 사방으로 날아들었다.
피아를 가리지 않고 나부끼는 도기는 계단을 올라오는 장욱의 수하들도 조각냈다.
“크아악!”
“피해!”
반면, 성진과 송하린은 도기의 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기운을 모두 쳐 냈다.
팅!
티잉!
“이익!”
장욱이 멈출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듯 더욱 가열차게 도를 휘둘렀다.
촤아악!
콰아앙!
장지문이 뜯기고 외벽이 군데군데 터져 나갔다.
장욱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반면, 성진의 얼굴은 무표정했고 송하린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도왕, 역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 별호는 놀음으로 딴 게 분명해.”
“다, 닥쳐라!”
숨을 헐떡이며 몸을 추스르는 장욱에게 송하린이 말했다.
“소나기의 칼이라…… 한 번 호되게 당해 놓고 수련을 게을리했구나. 진기를 마구잡이로 뿜어낸다고 상대가 목을 내줄 것 같소?”
“하아…… 하아…….”
“소나기는 언젠가 그치기 마련이지. 아직도 진기를 낭비하는 버릇은 못 고쳤군. 50년이나 시간을 주었는데도 수련을 게을리한 결과야. 그럼, 잘 가시게.”
송하린이 도를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기수식도 없이 떨어진 도는 너무도 당연하게 장욱의 생명을 취했다.
만천진뢰(震天萬雷).
장욱의 도는 소나기를 흉내 냈지만 송하린의 도는 그야말로 벼락이었다.
콰르릉!
“컥…… 커억…….”
“50년 전에는 네놈이 잘도 도망쳤지만 이번엔 어림도 없다. 네 지독한 악행을 여기서 끝내겠다.”
“푸흐…… 네…… 네년도 마두잖아…….”
“그건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고. 가라, 늙은이.”
쿠웅!
푸화악!
장욱의 옷에 벼락이 친 흉터가 남고 그곳에서 피가 솟구쳤다.
송하린은 피바다가 된 방을 파리해진 안색으로 쳐다보다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눈이 커졌다.
“아! 망할! 내 장보도! 이 자식이 말 걸어서 깜빡했다!”
-미친ㅋㅋㅋㅋㅋ 까먹으면 어쩌누. ㅋㅋㅋ
-송하린답넼ㅋㅋ
-우리 누나 욕하지 마! 누나 바보지만 바보 아니야!
송하린이 계단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오자 성진에게 다급히 외쳤다.
“거, 거기! 그…… 아무튼 공자님! 내가 이놈 몸을 뒤적거릴 동안 수하들이 못 올라오게 부탁 좀 드리오!”
“…….”
“돕고 삽시다! 어차피 그쪽도 휘말린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탁탁탁.
“장욱 님! 장욱…… 넌 뭐야!”
콰앙!
계단을 올라오던 맨 앞의 사내가 성진의 발길질에 날아가며 뒤이어 올라오던 사람들까지 휩쓸었다.
“크아악!”
“계단을 틀어막았다! 장욱님은 무사하신 거야?”
“죽여어!”
챙!
채챙!
수하들은 연이어 계단에서 패퇴하자 방법을 바꿔 별로 위협도 되지 않는 암기만 던질 뿐이었다.
계단에 자리 잡은 게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넓은 장소에서 그들을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아직입니까?”
“조금만…… 빤쓰만 남았…… 찾았다!”
이어 송하린의 당혹성이 터져 나왔다.
“뭐야! 왜 한 장이야!”
“슬슬 갑시다. 점점 모여들고 있습니다.”
“이런…… 일단 빠져나가고 생각합시다, 형제님.”
송하린이 기루의 창문을 박차고 뛰어내렸다.
콰직!
-뭐야, 왜 초모는 두고 가. ㅋㅋㅋ
-마이웨이 개 오진다 진짜. ㅋㅋ
성진도 한숨을 내쉬고 송하린이 빠져나간 창으로 뛰어내렸다.
그 순간, 송하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공자님! 여기로 오면 안 돼!”
하지만 이미 성진이 뛰어내리는 와중에 외쳐 온 터라 소용없는 외침이었다.
성진이 다른 기와 건물의 지붕에 내려섰다.
주위를 둘러보자 송하린이 왜 이곳으로 오면 안 된다고 했는지 바로 납득이 갔다.
‘사방에 깔렸네.’
야로의 전체가 둘을 노리고 나선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많은 인파가 속속들이 이곳저곳의 지붕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장욱님을 어떻게 한 것이냐!”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
팅!
티잉!
송하린과 성진이 등을 맞대고 철련자(鐵蓮子)와 우모침(牛毛針)을 튕겨 냈다.
그녀가 잠시 고민을 거듭하다 말했다.
“하하…… 좀 많네, 공자님, 달리기 좀 하시나?”
“……못 하지는 않습니다.”
“저기 보이는 누각(樓閣)을 지나쳐서 직선으로 주파하면 큰 호수가 나오지. 호수까지만 가면 방법이 있을 거요.”
“알겠습니다.”
“그럼, 뒤처지면 두고 갈 테니 원망하진 마시오.”
“…….”
추격전의 시작을 알린 건 송하린이었다.
그녀가 기와지붕에 칼을 휘둘러 휩쓸자 와류(渦流)의 형태로 기와들이 모였다.
“흐아압!”
퉁! 투투퉁!
그녀가 그 기와를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장욱의 수하들에게 날려 보냈다.
퍽!
“컥…….”
퍼억!
“끄아악!”
머리통이 깨져 지붕 아래로 추락하는 인원들을 확인한 송하린이 외쳤다.
“달려어!”
지붕 하나를 건너뛰면 10명에 가까운 장정이 달려들었다.
“어딜!”
후웅!
성진이 봉을 휘둘러 다섯을 제압했고 송하린도 일도(一刀)에 적들을 지붕 아래로 추락시켰다.
콰직!
“하아…… 하아…….”
송하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성진은 도왕과 부딪힐 때부터 그녀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몸이 무거운 것처럼 보입니다.”
“……저, 정답! 공자님께 10점!”
“다쳤습니까?”
“아니올시다. 예전이었으면 돌아서서 모조리 베었을 테지만 지금 내 몸이 정상이 아니라…….”
푹!
“크윽!”
기어코 송하린의 허벅지에 짧은 비도(飛刀)가 박혔다.
“어떤 새끼야!”
그녀가 씩씩거렸지만, 그것이 허세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안 돼…… 어떻게 온 스칸다인데…… 영감도 만나야 하고…… 싫어! 로그아웃되기 싫다고!”
“움직임이 둔해졌습니다.”
“독이…… 독이 발려 있었나 본데…… 아까 장설호 놈한테 펼친 도법이 문제였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공자님. 공자님은 내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아, 나도 공자님이 누군지 모르지. 나는 두고…….”
후우웅.
성진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오며 송하린의 몸을 감쌌다.
비도에 뻥 뚫렸던 상처가 아물었고, 그녀의 혈색도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 엥?”
“달릴 수 있습니까?”
“시, 신관…… 아니, 수도사인가?”
“달릴 수 있냐고요.”
“물론이지! 덕분에 살았소이다!”
하지만, 송하린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팅!
티팅!
그녀는 얼마 안 가서 다시 속도가 줄어들었다.
마침내 그녀가 이실직고했다.
“개뻥이었소이다! 사실 무리…… 진기가 진탕된 몸이라 휴식이라도 조금 취하면 모르겠지만.”
“그럼.”
성진은 재빠르게 송하린을 업었다.
그녀는 눈이 동그래져 의문을 품었다.
“오히려 느려질 텐데! 나, 비수기라 많이 먹어서 무겁소!”
성진이 그녀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붕을 건너다녔다.
그가 점차 빨라졌다.
“빠른 건 강물, 빠른 건 수리, 빠른 건…… 나.”
콰아앙!
그가 지붕을 박차고 내달리자 기와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다.
“뭐, 뭐야!”
“쫓아라! 계집이 다쳤다!”
이미 송하린의 상처는 치유된 상황이지만, 적들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업힌 채로 얘기했다.
“으아악…… 숨! 숨이 안 쉬어져!”
“고개 숙이세요.”
“그럼 앞이 안 보여!”
“안 봐도 되잖습니까?”
“안 돼! 경치가 너무 좋아!”
“…….”
“지금 이 경치를 봐, 얼마나 멋진데!”
-미친. ㅋㅋㅋ
-머리 다 날리는 것 봐. ㅋㅋ
성진도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쫓아오던 적들이 점점 멀어졌다.
그제야 야로의 밤 풍경이 보였다.
그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악인들에게 쫓기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었지만, 지금 성진이 바라보는 야로의 밤거리와 불빛은 아름다웠다.
“좋지, 공자님?”
“좋네요.”
“그럼 좀 더 빨리 달려 주겠소? 저 뒤에 다시 따라붙을 것 같은데. 방금 건 호흡 맞지?”
“맞습니다.”
“수도사가 맞았네, 나는 참 재수도 좋지. 공자님 아니었으면 위험했을 뻔했군.”
성진은 그녀가 참 특이하다고 느껴졌다.
성격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가 달랐다.
“공자님, 어쩐지 일전에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우리 혹시 50년 전에 만난 적 있소?”
“그런 적 없습니다.”
“흐음…… 이상한데. 내 감은 틀리지 않는데. 이상하게 낯익단 말이지. 얼굴은 또 처음 보는 데 말이야.”
-여, 여자의 감은 무섭다. ㅋㅋ
-부럽다. ㅠㅠ 나도 초모랑 같이 다니고 시펑.
“호수에 도착합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내려 주시오. 배를 훔쳐야 하니.”
성진이 바닥으로 내려선 다음 그녀를 내려 주었다.
그녀가 자신의 입가에 검지를 가져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하고 쪽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으로 성진을 이끌었다.
“쉬잇…… 동부에선 물건을 돈 내고 사면 바보라는 얘기가 있지. 그만큼 절도를 장려하는 곳이오.”
“처음 듣는데…….”
“내가 한 얘기요. 내 동료였던 사람들은 모두 내 가르침을 따랐지. 우등생 중엔 무영신투도 있었소. 들어는 봤나?”
“……예,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옳거니. 얘기가 통하는군. 자, 이 배를 뽀립시다.”
잠시 후, 배가 스스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자 나루의 관리인이 졸음에서 깨어나 소리쳤다.
“내 배! 뭐 하는 짓이냐! 누구야!”
“숙, 숙이시오. 들켰다. 오랜만이라 잘 안 되는군. 역시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없는 것인가. 빤쓰 아저씨…… 대체 당신은 어떤 싸움을 해 온 것입니까…….”
어차피 호수라 배를 가지고 도망칠 수 없다.
잠시 비를 피하는 것처럼 장욱의 수하들에게서 벗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성진이 노를 젓자 배가 호수의 가운데로 나아갔다. 등(燈)을 매단 유람선 형태의 나무배들도 호수에 떠 있었다.
그 배들이 발하는 빛에 호수의 풍경이 보였다.
호수에 달이 떠올랐다.
송하린은 달을 손으로 휘저었다.
그녀가 말했다.
“여전히 잡히지 않는군. 그때나 지금이나.”
“무슨 말입니까?”
“그냥. 나는 이 스칸다가 너무 좋소. 호수에 뜬 달도, 기생들과 떠들어 대는 저 파락호들도. 어떻게 이런 세계가 있을까.”
“…….”
“이곳에선 흰 천과 바람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지.”
-꽃남 대사 도용하는 거 에반데. ㅋㅋ 저 자랑스러운 표정 좀 봐! 역겨워!
-송하린 : 나뭇 배(훔친 거)와 노(훔친 거)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어!
-시켜줘! 금잔디 명예 소방관!
그녀는 호수를 보며 말했다.
“공자님,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있다고 하면 믿겠소?”
송하린은 성진을 스칸다에 사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방이라는 수도사는 초모라는 모험가였고, 초모라는 모험가는 올빼미라는 스트리머였으며, 올빼미는 성진의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다.
“믿습니다.”
“헤헤…… 개방적인 공자님이네, 그런데 아까 호흡을 보니 평범한 분은 아닌 것 같던데…….”
“동부에 사정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 사정이라…… 이보시게, 공자. 내가 제안을 하나 해 보려 하는데…….”
“어떤?”
“내 일을 좀 도와주시오. 그럼 내가 당신 일을 도와주지.”
-저, 저! 저거 초모인 거 아는 거 아니야?
-영악한 녀석!
-고향 사람 좋다는 게 뭡니까. ㅋㅋ
“어떤 일입니까?”
“아까 장보도 얻은 거 기억하시오? 그게 사실 두 장짜리인데 겹쳐서 달빛에 비추면 장소가 나타나지. 내 물건을 거기에 두었어.”
“혼자 해도 될 일 아닙니까?”
“지금 몸 상태가 영 별로라 그러지. 부담스럽소?”
“생각해 보겠습니다.”
“얼마든지. 밤은 기니까.”
송하린이 장욱의 속옷에서 꺼낸 장보도를 품에서 꺼냈다.
“우욱…… 구린내. 아으…… 나머지 하나를 어디서 찾는다?”
성진의 눈이 송하린이 꺼낸 장보도에 고정되었다.
‘저 장보도…….’
익숙했다.
-세상에 장보도라니! 아! 내가 만든 거구나. 뭘 숨겨 놨었지? 기억 안 나니 나중에 시간 나실 때나 들러 보세요.
‘은신왕클로킹’.
아니, ‘니꺼내꺼내꺼내꺼’의 타입캡슐에서 얻은 장보도와 크기도, 쓰인 색채도 흡사했다.
성진이 품에서 그 장보도를 꺼냈다.
“혹시…… 이거 아닙니까?”
“공자님. 장난도 때가 있는 법이오. 아무렴. 내 장보도를 도왕의 가랑이에서 찾았다고 너무 하찮게 보는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남은 하나가 공자님이 마침 가지고 있던 장보도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장보도 두 장을 겹쳐서 달빛에 비추자, 온전한 지도가 탄생했다.
“일어났네? 이런 일이 있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습니다.
-눈물이 덜덜! 손발이 주르륵!
송하린이 눈을 크게 뜨고 지도를 바라보는데,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주위를 떠도는 배들이 점차 많아졌다.
“이 장보도 어디서 난…… 이런.”
“……아무래도 들킨 것 같습니다.”
“내 ‘등잔 밑이 다크하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구려. 공자님, 미안하오.”
“괜찮습니다.”
배들이 점점 가까이 왔다.
번뜩이는 칼날들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싫어도 예측하게 했다.
“이제 몸이 좀 괜찮아진 것 같군. 공자, 답례로 재밌는 걸 보여 주겠소이다. 마침 오랜만에 호흡을 쓰는 사람을 봤으니, 나도 재주 좀 보여야 하지 않겠소?”
“재주?”
“심상(心想)이지.”
뱃전에서 욕설과 조롱이 들려왔다.
“감히 장욱님을 참살한 죄! 네년과 네놈의 머리를 나흘 굶은 개에게 던져 주는 정도로 용서해 주겠다!”
“살벌해라.”
“감히 야로를 건드려 그분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백번 죽어 마땅하다!”
“그분이 누군데? 그 화법 좀 그만 써주지 않겠소?”
“닥쳐라! 곧 죽을 년이! 저 녀석들을 에워싸라! 어차피 물 위에서라면 도망도 못 칠 것이다. 멍청한 것…… 자충수를 두었구나.”
“하, 자충수? 뭘 잘 모르는군. 우린, 호수로 도망친 것이 아니다. 끌어들인 것이지.”
“뭐? 끌어들여?”
“본녀가 바보인가? 사방이 틀어 막힌 호수로 도망치게?”
-아니었다고?
-아니었어?
-바보 맞잖아, 누나?
-표정 씰룩거리는 게 구라치고 있는 거 같은데?
송하린이 파문이 이는 호수의 물 위로 발을 디뎠다.
그녀가 잠깐 성진을 바라보고 말했다.
“자, 보시오. 등평도수(登萍渡水) 아니, 무력답수(無力踏水).”
등평도수는 물 위를 달리는 경지고 무력답수는 아무 힘도 안 들이고 물 위에 떠 있는 경지다.
그녀는 지금 그 경지를 눈앞에서 보이려 했다.
그런데 되지 않았다.
그녀가 가라앉았다.
풍덩!
“억…… 푸헙! 공자! 사, 살려 줘! 수영…… 모, 못해!”
성진이 재빨리 그녀를 끄집어냈다.
그녀가 켈룩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을 한 사발 토해 내고는 다시 일어섰다.
“역시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아. 기초부터 시작해야겠구려.”
“…….”
“웃지 마시오.”
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ㅋㅋㅋㅋ 가혹해! 어떻게 안 웃어!
-하린아…… 이걸 어떻게 참아…….
-누나 바보 맞잖아…….
그녀가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배는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단조로운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썩은 버들잎.”
둥.
그녀가 물에 떴다.
“나는 물방개.”
그녀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물살을 갈랐다.
“이건 불편하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했다.
“나는 수달.”
그녀가 순식간에 잠영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외곽의 배 중 1척이 부서지며 비명이 들려왔다.
“크아악!”
“배! 배를 노린다! 우리도 배를 노려라!”
콰직!
성진이 탄 배를 노리고 공격이 들어왔지만, 어차피 호흡을 사용하는 성진에게 배는 무의미했다.
“가벼운 건 구름, 가벼운 건 나.”
성진이 물에 뜨자 적들이 기겁했다.
“뭐, 뭐야!”
한편, 송하린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청둥오리.”
물장구를 치는 그녀의 얼굴은 개구쟁이 같았다.
“나는 호수.”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적들의 선단의 한 가운데서 나타났다.
“나는 폭풍.”
파직, 파지직.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끄아아아악!”
“벗어나라! 호수를 벗어나!”
“괴, 괴물…….”
배를 잃은 자들이 헤엄쳐서 뭍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우스꽝스럽게 빨빨거리며 헤엄쳐 성진에게 다가왔다.
“구경은 되었는지?”
“그게 심상입니까? 호흡이랑 다른 겁니까?”
“뭐, 다르지 않겠소? 아무튼 이 틈에 우리도 빠져나갑시다. 갈 길이 바쁘오.”
흑색의 무복을 입은 송하린, 백색의 무복을 입은 성진이 물을 걸었다.
호수에 담긴 달과 함께하니 몽환적인 그림이었기에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흑괴(黑怪)와 백괴(白怪).
이날 이후로 흑백쌍괴(黑白雙怪)의 이야기가 매화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