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110화
지혜의 고리.
서 대륙과 중앙 대륙의 요지에 자리 잡은 다섯 개의 마탑. 지도에 그 위치를 점으로 찍어 보면 동그란 고리가 완성된다. 마탑은 그런 이유로 지혜의 고리라 불린다.
지금, 탑주들의 환영이 동그란 탁자에 앉아있었다. 지식을 나누는 ‘이치의 교류’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급한 문제가 터졌기 때문이다.
한쪽 눈이 애꾸인 노인이 말했다.
“걸작이군, 걸작이야. 스칸다가 망한다고?”
“헛소리들은. 나이를 처먹더니 노망이 들은 게로군.”
“바빠 죽겠는데 흰소리들은···.”
리베스 마탑의 마탑주 카이덴은 이 극성맞은 노인네들에게 모든 이야기를 잘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동부로 향하는 길목에서 시조가 깨어났다는 얘기는 들었지?”
“들었어. 50년만인가? 참으로 질긴 녀석들이야. 얼마나 인간들을 괴롭힐 셈인지.”
“그래도 대삼림에서 깨어난 것은 다행이군. 말이 자연의 보고지, 생활권과는 동떨어져 있으니까.”
“기껏해야 사슴이나 권속으로 만들고 한가로운 삶을 살고 있겠구먼그래.”
카이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그럴수록 함부로 이야기해선 안 되지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같이 늙어가는 동안 나이를 헛먹은 것은 아닌지, 곧 누군가 눈치챘다. 목소리가 쇠가 갈리는 듯한 할머니였다.
“···카이덴, 문제가 생겼구나?”
“그래. 시조가 나타난 곳에 마력 교란 기류가 펼쳐져 있었어.”
“남작 놈이 용 좀 뺐겠구먼, 껄껄···.”
“거기다 길치의 안개를 혼용했어.”
“그 정도쯤은··· 잠깐.”
노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습게 치부했던 문제가 상상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감각. 나이가 들면서 느는 건 감이라는 미신적인 능력이라니.
“대삼림 전체에 펼쳐져 있다고?”
“그래, 초입부터 중심부까지 싹 다.”
“그렇다면 못해도 자작은 되겠구먼.”
카이덴은 말을 잇지 않았다.
분명 자신도 저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모험가들이 잇따라 소식이 끊기고 평소 자신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안부를 묻던 시리카까지 사라져 버리고 나니 서늘한 감각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다른 이들도 그것을 눈치챘다.
“자넨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보군.”
“자작이 아니야. 수법이 대범해. 자작이었다면 대삼림에 수작을 부렸더라도 그것을 유지하면서 스칸다 전체와 싸울 이유가 없어.”
“하기야··· 그놈들 도망에는 도가 텄으니까. 그리고 금세 바퀴벌레처럼 권속을 만들어서 돌아오는 게 여태 해오던 수법인데···.”
“그것도 모르지. 알려진 건 남작까지의 습성뿐이니까.”
기록에 전해져 내려오는 패턴과 50년 전에 남작이 출몰했을 때의 패턴은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그 사실이 미칠 듯이 불안했다.
“자작이 남작보다 두 배 강했던가?”
“백작은 자작보다 네 배쯤 강하고.”
“머저리들아!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개체마다 다르고 능력이 천차만별인데 단순 비교가 되겠냐?”
카이덴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협회 쪽에서 먼저 행동할 거야.”
“그놈들이야 대충 적당한 모험가들 붙잡아서 대삼림으로 던지면 되겠지. 아마 이번에도 그럴 거고.”
“카이덴, 할 말이 있는 거지?”
“그래. 아무래도 불길해.”
“너 설마···.”
“마력 폭탄 사용을 허가해줬으면 해.”
“노망이 단단히 들었군. 그게 어떤 물건인데··· 대삼림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생각이야?”
“무턱대고 사용하겠다는 게 아니야. 다만, 가능성을 열어두려는 거지.”
“그 말이 그 말이잖아!”
“달라, 다르다고.”
끙끙대며 앓는 노인 중에서 아까 쇳소리를 내던 여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리카 그 아이는 나도 참 아꼈지. 싹싹한 아이였어.”
“아무렴. 마탑의 자질구레한 사건들을 도맡아서 맡겼으니까.”
“그래, 그 아이들. 진리의 수호자였던가? 카이덴 당신이 지어준 이름이잖아.”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정에 끌려서 판단을 그르치는 거 아닌가 해서.”
“헛소리하지 마. 그랬다면 대삼림을 날려버리겠어? 차라리 몸을 움직여서 구해오는 게 낫겠지.”
“그것도 그렇네. 의심해서 미안. 그래도 마력 폭탄은 너무 과격한 처사가 아닐까?”
카이덴이 이 논의가 지겨워졌는지 간단하게 말했다.
“남작이나 자작이라면 나도 지켜볼 생각이야. 협회가 경계령을 발동하고 중앙에서 모험가들을 끌어갔으니까. 일이 잘못되었을 땐 엘론드의 거주민들도 도시를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고. 하지만, 그 윗줄이라면···.”
“백작 이상을 말하는 거군. 뭐, 그때부터는 도시 하나가 먹히면 그대로 도시 하나 정도의 군대가 탄생하니 자네 걱정도 이해가 가는군.”
이후의 논의는 일의 가부(可否)를 논의하기보다는 마력 폭탄을 사용하게 됐을 상황을 상정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짜냈다.
“아무튼,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자고.”
****
지혜의 고리는 단순한 자들이다.
비밀을 파헤치고 세계의 진실을 엿보려는 그들의 욕망 이외의 것들에는 섬세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마력 폭탄 논의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반면, 지혜의 고리와 달리 모든 대륙과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또 그러면서도 의외로 중심을 잘 잡는 단체도 있다.
모험가 협회다.
“에··· 맹과 원탁에도 협조 공문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원탁은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해 초기 대응은 협회에 맡기겠다고 하고 맹은 현재 의견이 일치가 안 돼 나서기 어렵다고 합니다.”
“결국, 성국도 맹도 원탁도 모른 척하겠다는 거잖아?”
“뭐··· 거의 맞다고 보시면 됩니다.”
“갱, 어떻게 보느냐?”
“흐음···.”
모험가 협회 수뇌부 회의.
대삼림 사건의 여파로 소집된 이들이 담배 연기 자욱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파견된 중앙 쪽 애들이 깡그리 실종됐단 말이지. 심지어 진리의 수호자까지.”
“특이한 상황이긴 하지.”
“지금 중앙에서 더 끌어모으고 있는 거지?”
“동부는 아무래도 거리가 좀 있으니까. 협곡이나 고갯길을 빙 둘러서 오려면 이미 사태가 끝나있겠지. 모험가 자식들은 느긋해서 출발도 늦게 할 거고.”
“지금 또 몇 파티가 모였더라?”
“다섯 파티.”
“남옥 등급 이상?”
“그래. 취옥(翠玉)도 한 파티 대기 중이야.”
갱은 이 상황이 짜증이 났다.
상황을 명확하게 알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가 건조한 입술을 한 번 핥고 말을 쏟아냈다.
“마탑 생각대로 하자고. 공격대 구성하고 대삼림으로 진입 시켜. 그리고, 또다시 문제가 생기면···.”
“그래, 태워버려야지. 혹시라도 들어간 파티가 권속이라도 된다면 대응하기 껄끄러울 거야.”
“껄끄럽다 뿐이겠어? 계속해서 불어나는 군대를 상대해야 하는데.”
“성국은 시조가 나타날 때마다 침묵하는군.”
“그 치들도 여전히 정치적이야. 아니면 능력이 없던가.”
“둘 다일 수도 있어. 아무튼, 그렇게 진행하자고. 혹시 모르니 그분에게 연락은···.”
“아니, 그러지 마.”
****
신성력이 파견대의 생명을 잠시 무한하게 해주었지만, 고통은 그대로였다.
“끄아악!”
분명, 목숨이 질긴 정도로는 네시온의 털끝도 건드리기 어려웠어야 했다.
하지만, 성진의 계몽이 그들의 잠재력을 일깨워 말 그대로 네시온에 비해 미천한 수준이었던 파견대가 그를 위협할 수 있었다.
고오오···
잭과 알란의 몸을 휘감은 붉은 기운.
전위들이 각성하는 투기(鬪氣), 패기(覇氣), 신의(信義) 중 하나인 투기였다.
투기를 두른 전사들은 신체 능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한다. 물론, 일시적이고 부작용도 따랐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네시온이 먼저 쓰러지느냐, 금지된 마법이 먼저 끝나느냐의 싸움이었다.
“끔찍한 고통일 텐데도 덤벼드는구나. 참으로 징그러운 인간들!”
이미 고성의 절반이 무너졌다.
때문에, 이들이 격돌하는 장소는 대삼림의 중심부로 옮겨갔다.
푸스스스스···
잭의 숏소드가 부식되어 먼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투기를 두른 이상 온몸이 무기였고, 금지된 마법은 무구도 원래대로 돌려주었다.
“흐아압!”
파아악-!
공기를 찢는 소음과 함께 잭의 발차기가 네시온의 턱을 스쳤다. 붉은 피가 네시온의 턱에 잠시 맺혔지만, 잭도 무사하진 못했다.
팍-
“썩어라.”
“끄아아아악!”
스르르···
잭이 지독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피가 흘렀다. 그리고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한순간 생겨나는 공백.
“너만 죽으면 이 귀찮은 녀석들도 끝이 나겠지!”
성진을 노리고 뻗어오는 네시온의 손.
비취의 모험가들이 달려들어 그 팔에 스스로 꿰뚫렸다.
푸아아악-!
“꺽··· 꺼어억···.”
“끅··· 자, 잡았어. 내, 내가 잡았다고···.”
푸스스···
모험가들은 먼지가 되었다.
“흐아아아아!”
알란의 붉은 검이 모험가 세 명을 뚫고 지나갔던 네시온의 팔을 잘랐다.
서걱-!
하지만, 보람도 없이 그 팔은 너무도 생생하게 되돌아왔다.
“소용없다!”
푸각-!
알란의 머리에 네시온의 주먹이 명중했고 곧 그의 머리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하지만 네시온도 더는 앞으로 파고들 수 없었다.
“···놔라.”
“못 놔. 너··· 못 가.”
잭이 어느새 재생되어 네시온의 몸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 흩어졌던 모험가의 몸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사이, 도나타의 원소술이 완성되었다.
“가위, 바위, 보! 나 바위 낸다!”
쿠구궁···
쾅-!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주먹이 네시온의 몸을 때렸다.
“커헉-!”
이시스가 주문을 완성했다.
자신의 감각을 봉인하는 것을 대가로 상대의 감각도 봉인하는 부두술.
잠시 네시온의 시각과 청각이 작동을 멈췄다.
하지만 아주 찰나에 불과했기에, 도나타와 이시스는 차례로 네시온에게 목이 베였다.
서걱-!
푸스스···
네시온의 손이 뻗어지는 동시에 바닥에서 나무줄기가 일어나 네시온의 다리를 붙잡았다.
으직··· 으지직···
리나의 은화살과 아키라의 발톱이 그를 노렸다.
“도를 넘는구나. 먼지 같은 녀석들.”
푸스스···
화살과 아키라, 그리고 네시온의 몸을 옭아맸던 나무줄기는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재생된 알란이 네시온에게 정면으로 돌진했다.
“멍청한··· 컥···.”
“푸헉··· 어쩌라고···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는데.”
알란은 성진의 봉을 몸으로 가렸다. 그리고 네시온과 함께 꿰뚫렸다.
다시, 알란이 썩어서 먼지가 되었다. 그래도 이번엔 성과가 있었다. 네시온의 심장을 부쉈다.
“그런가··· 수도사 말고는 전부 눈속임이구나.”
“하하···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서 섭섭해?”
까드득···
네시온의 몸이 다시 재생되었다.
“전부 한 번에 없애주마···.”
성진은 동료들의 계속되는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선명한 악의를 품은 상대와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애석하게도 동료들의 희생이 없다면 네시온을 상대하기는 버거웠을 것이다.
‘끝없이 재생하는데··· 뭔가 방법이···.’
성진의 눈이 네시온을 더듬었다. 동료들이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상대 또한 계속 손해를 보았다.
‘무적이라고? 아니, 그럴 리가 없어.’
신이 아닌 이상 그럴 수는 없다. 성진은 전투의 시작 전과 후, 네시온의 달라진 점을 찾았다.
‘오히려 계속 젊어져서 강해지는··· 잠깐, 젊어져?’
네시온은 목숨을 잃을 때마다 젊어졌다.
그리고 강해졌다.
처음에 마주쳤을 때는 중년의 외모였는데 지금은 청년의 모습이다. 방금 심장을 재생하면서 더 앳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래··· 무한한 게 아니야.’
더 젊어질 수 없다면, 그것이 네시온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네시온이 멀찍이 물러나 눈을 검게 물들였다.
“비켜라.”
“조심해! 정신 공격이다!”
“보지 마!”
“아니! 봐! 공작은 초모를 노리는 거야! 지켜야 해!”
네시온은 초모의 육체를 취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되자 방향을 틀었다. 정신을 붕괴시키고 육체를 취하는 방향으로.
현실의 전투는 잠시 멈추었고, 시커먼 악령이 초모의 정신으로 스며들었다.
붉은 벼락과 불타는 대지가 네시온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미 피폐한 정신이군. 끝이다, 수도사.”
네시온이 함락하지 못할 정신은 없을 것이다. 그는 대공이라 불리는 자이니까.
정신의 한 가운데, 푸른 나무가 서 있었다.
네시온은 그곳으로 향했다.
“포기해라.”
가부좌를 틀고 먼 곳을 응시하는 초모의 영혼. 네시온은 어쩐지 무시당한 것 같아 열이 받았다.
검은 기운이 그의 형상을 검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으로 수도사를 찔러 정신을 무너트릴 것이다.
“죽어라.”
쒜에엑-!
검이 날아가 초모를 노렸다.
푸슉-!
“······.”
“우리가 마, 막았어···.”
“못한다··· 너는 우리를 넘지 못할 거야···.”
나무에서 기어오른 파견 대원들이 검에 대신 꿰뚫렸다. 네시온에게 의문이 생겨났다.
“어째서냐···.”
“몰라···.”
그때, 초모가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그 눈은 검을 한차례 쳐다보고는 다시 먼 곳을 향했다.
검이 새하얗게 타올랐다.
“끄아아아아악!”
네시온의 정신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성진은 그가 또 한 번 젊어졌다는 걸 눈치챘다.
‘젊어졌다. 아니, 이제는 어려졌어!’
기세가 아까보다 약해졌다.
“하아··· 이 쓰레기들이···.”
파견대가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성진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전부를 걸었다.
두근···
두근···
늘 혼자 싸워왔던 성진은 이런 감정을 처음 느꼈다.
모두의 심장이 동시에 뛰었다.
“도나타!”
“암석으로 막지!”
후두두둑···
크르르···
아키라가 암석의 뒤편에서 도약해 네시온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리고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먼지로 사라졌다.
그때, 네시온의 표정이 변했다.
뭔가를 각오한 눈치.
“영광으로 생각해라 인간들. 부패의 권능을 사용할 터이니.”
“위험해!”
푸화아악-!
네시온이 입술을 달싹여 뭔가를 중얼거리자 앞 열의 파견 대원들이 썩어서 흘러내렸다. 주문을 욀수록 네시온의 몸은 작아지고 어린아이처럼 변해갔다.
“끄아아악!”
파견 대원들은 썩기 전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빨리 부패했다.
이대로 가다간 파견 대원들이 무너지고 자신마저 무너질 것이다. 네시온의 승리가 점쳐졌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다급할수록 생각은 차분히, 호흡은 깊게.
성진이 방법을 짜냈다. 레이서의 조언이 떠올랐다.
- 호흡의 가능성은 무한해요
‘호흡··· 호흡···.’
성진은 여태 자신의 호흡을 조절해왔다.
그것으론 네시온을 상대하기 역부족이었다.
‘어쩌면···.’
상대의 호흡도 조절할 수 있다면?
생각을 침착하게 이어갈 여유가 없었다.
이미 자신의 앞을 막아선 파견 대원의 반이 녹아서 핏물이 되었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당장 시도해야 했다.
성진은 정신을 집중하고 네시온의 호흡을 조절하려 했다. 하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집중하자. 최성진!’
- 호흡··· 소리···
언젠가 잭이 했던 말.
‘소리?’
소리를 떠올리자, 네시온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무겁고 미약한 호흡이라 시체가 숨을 쉰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소리였다. 집중하지 않으면 다시 놓칠 것이다.
자신은 들이쉬고, 내쉰다.
상대도 들이쉬고, 내쉰다.
그것에 집중했다. 어느새 파견대는 대부분이 녹아 흐물거렸다.
일순간, 성진의 눈이 부릅떠졌다.
상대의 호흡이 멈췄다.
그리고.
네시온의 코와 입에서 흰색 불길이 치솟았다.
“컥··· 커억···.”
그와 동시에 권능의 발현도 멈추었다.
성진이 목을 감싸 쥐고 쩔쩔매는 네시온에게 봉을 내던졌다.
푸화악-!
네시온의 머리가 날아갔다.
“초, 초모···.”
“방금 무슨···.”
무지개 사원에 내려오는 호흡법 중 난도가 가장 높은 역천(逆天)의 호흡.
아수라(阿修羅).
성진의 코에서 흰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컥··· 커헉.”
“쿨럭···.”
네시온은 질겼다.
그는 아이의 모습으로 몸이 재생되었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하지만, 성진도 아수라의 여파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피를 한웅큼 토해냈다.
마녀 이시스가 조용히 말했다.
“마법이 끝났습니다. 이제··· 대가가 찾아올 거예요.”
되살아난 파견 대원들의 눈에서 정광이 사라졌다.
넘치던 기운은 온데간데없었고 모두 슬픈 표정으로 늙어갔다.
요정들은 조금 성숙해졌고 난쟁이의 수염은 풍성해지고 눈동자는 깊어졌다.
그리고 인간은 나이 들었다.
이시스와 호박 등급 모험가들은 중년의 모습이 되었지만, 실력이 떨어졌던 비취 등급 모험가들은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되었다.
성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시스가 그런 그를 달랬다.
“각오한 일이에요···. 모두가 동의한 일이고요.”
파견대는 탈진했는지 발라당 드러누웠다.
잭이 나이 든 음성으로 말했다.
“초모··· 부탁해. 우리의 모험을 끝내줘.”
“초모!”
봉을 다시 집어 든 성진에게 네시온이 웃었다.
“내가 이겼다.”
성진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누가 보아도 네시온에게 불리한 상황이었으니까.
네시온은 그런 성진의 반응을 즐겼다.
“뭔가 잊고 있지 않나?”
“무엇을···.”
“이 안개 말이야.”
“······.”
백작이 숲에 펼쳐놓은 안개.
바자르 백작은 이 안개 마법을 유지하느라 성진과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 작별이다.”
안개가 대공 네시온의 손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딜!”
텅-!
봉을 던져 보았지만, 안개가 봉을 튕겨냈다.
“소용없다.”
아예 끝장낼 심산인지 네시온은 아주 천천히 안개를 손으로 흡수했다. 이미 성진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파견 대원들에게도 신성력을 나누어주었기에 저 힘을 막을 수 없다.
“너희를 죽이고 세상으로 나가겠다. 만물을 썩게 해주마.”
네시온은 성진이 절망하는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째서 웃는 거지?”
그런데, 성진은 오히려 미소짓고 있었다. 그는 대삼림의 초입에서 받은 피리를 빼 들었다.
삐이이이익-!
“도토리이!”
“시끄럽다아! 깨우지 마라아!”
“누가 친구의 피리를 부는 거야아!”
나무 몇 그루가 깨어났다.
그 중, 성진을 알아보는 나무가 있었다.
대드루이드 ‘드루와드루와’의 종속령.
“도움이 필요해에?”
“응, 도와줄래?”
“이거 드루와의 부탁?”
“···아마도.”
나무가 인상을 찡그리고 고함쳤다.
“있는 거 다 안다아! 일어나아아 겁쟁이들아!”
잠잠하던 대삼림에 파도가 쳤다.
일대의 모든 나무가 깨어났다.
으직··· 으지지직···
“누가 겁쟁이냐아아! 너냐아아!”
“나? 나 겁쟁이 아니야아!”
“군주와의 약속을 지켜라아아!”
“드루와? 그 구린내 나는 인간?”
“드루와면 어쩔 수 없지이··· 시체는 싫은데에···.”
나무들이 네시온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시체 너 나가. 숲 너 싫어어.”
“안 나가면 파묻을 거야아.”
대군이 네시온을 압박했다.
네시온은 완벽하게 둘러싸이기 전에 어쩔 수 없이 손에 모은 마력을 터트렸다.
콰아아아아앙-!
드드드드······
일대의 대지와 공기가 진동했다.
나무들이 전멸할 정도의 충격이었는데 그 충격은 신기하게도 확산하지 않고 네시온의 근처에서만 머물렀다.
나무들이 신음했다.
“우우우··· 시체 도망갔다아···.”
“시체 힘세. 우리 못 도와줘어.”
“빨리 쫓아가아.”
삐이이이이익···
또 다른 피리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
대삼림에 진입한 모험가 협회의 후발대들은 안개 때문에 깊숙이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들을 신이 헤아렸는지 안개가 갑자기 걷히고 있었다.
“안개가! 안개가 걷히고 있어요!”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이제 좀 수월하겠군. 오늘은 더 진입하자고.”
“잠깐!”
“왜?”
“뭔가 오고 있어···.”
“뭐?”
쒜에엑···
나무가 흔들리는 기척이 아니었다.
“대비해라!”
“요정! 뭔가 보이나?”
“너, 너무 빨라서 안 보여요. 근데··· 작아요! ···아이?”
“이 마력··· 틀림없다. 남작이다!”
“시조라고?”
그 순간, 숲을 빠른 속도로 해치고 온 무언가가 광소(狂笑)를 터트렸다.
“하하하! 내가 이겼다, 수도사!”
“시, 시조!”
아이의 모습을 한 시조가 양 팔을 넓게 펼쳤다.
이곳에 모여있는 모험가들을 흡수한다면 승부는 원점이었다. 아니, 그의 승리다.
“이제 끄··· 끄아아악!”
화르륵···
갑자기 시조의 코와 입에서 하얀 불길이 치솟았다.
모험가 중 누군가 하늘을 가리켰다.
“저기 하늘에!”
“적인가!”
새하얀 그리핀이 하얀 벼락이 되어 내리꽂혔다.
콰아앙-!
“컥··· 커억···.”
구우우··· 구욱···
시조가 그리핀의 발에 깔린 채로 으스러졌다.
그리핀의 등에서 누군가 내렸다.
어리둥절한 상황에 모험가들은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무슨··· 이방인?”
“누구지?”
“사이먼! 어떻게 합니까?”
공격대를 이끄는 취옥의 모험가 사이먼은 식은땀을 흘렸다. 저런 그리핀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을뿐더러 눈에서 빛이 나는 사람이라니.
“대기! 대기해라! 상황을 지켜보겠다!”
“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조가 그리핀의 발에 깔린 채로 으르렁거렸다.
“또 날 봉인할 생각이냐?”
“아니, 귀찮게 그럴 필요 없지.”
성진은 시조의 머리를 봉으로 내리쳤다.
퍼억-!
“푸흐··· 푸흐흐··· 나는 불멸(不滅)이다. 네놈도 방법이 없을걸?”
“그건 네 생각이고.”
우드득···
성진의 봉에 나무줄기가 돋아나 창날을 만들었다.
그는 창날을 시조의 가슴팍에 꽂았다.
푸슉···
“끄아악!”
창날이 시조의 정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정기는 봉을 쥔 성진에게까지 이어졌다.
“말···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가라.”
시조가 썩은 고목처럼 말라갔다.
“안··· 돼···.”
스칸다 대륙의 재앙은 대삼림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대공(大公) 네시온의 피에 적응합니다.]
[부패와 성장의 순환을 깨닫습니다.]
[고결함이 40 상승합니다.]
[신성력이 대폭 강화됩니다.]
[치유가 대폭 강화됩니다.]
[축복이 대폭 강화됩니다.]
[정화가 대폭 강화됩니다.]
[방호가 대폭 강화됩니다.]
[징벌이 대폭 강화됩니다.]
[생장이 대폭 강화됩니다.]
[계몽이 대폭 강화됩니다.]
[chapter 6-7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chapter 6-7을 클리어합니다.]
[보상으로 이미지: 공백을 습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