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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109화 (109/222)

# 109

109화

“여긴 뭐지?”

‘윽배가배가레이서’는 전설의 수도사다.

일단 스칸다의 호사가들에게 그렇게 여겨지고 있으니 자칭이라고 폄하될 정도는 아니다.

현재형으로 전설을 써나가는 수도사.

그는 무지개 사원의 활동 전반을 책임진다. 그의 업적이나 사소한 행동들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스칸다를 사랑할 뿐이다.

단지 그것뿐. 모험도, 여행도.

그가 쓰고 있는 역사이자 전설은 배나무 수도사가 스칸다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아한 것이다.

세계를 수호하고 시련을 극복하는 것, 그것이 그의 일이다.

특히나 무지개 사원의 중립적이고 탈속한 태도는 그의 가치관과 잘 맞아떨어졌다.

그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육척(六尺) 장봉(長棒)을 사용하고 솔로로 활동한다는 점. 그리고 위험한 임무를 즐긴다는 점이다.

“···이건 위험한데.”

부패한 사원에서 얼마 전부터 사악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는 제보. 모험가들을 파견했지만, 꾸준하게 실종되고 있다는 불길한 이야기.

‘커뮤니티에도 별다른 정보가 없는데···.’

오지 중의 오지인 서 대륙의 남부 변방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떤 위험이 닥쳐오든 담대하게 처리하던 그에게도 지금 느끼고 있는 사악한 기운은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구원을? 아니, 기세가 점점 커지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을지도 몰라.’

폐허를 돌파하는 와중에도 기운은 커져만 갔다. 이런 기운을 흩뿌리고 있는 존재가 풀려난다면 재앙이 될 것이 분명하다.

“너구나.”

까득··· 까드득···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폐허에 누군가 있었다. 레이서는 기분 나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그 존재의 눈과 마주했다.

‘오늘의 운세는 보나 마나 대흉이었겠네.’

스마트폰의 운세를 좀 더 눈여겨볼 걸 그랬었다. 그랬다면 이곳에 오는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올 것이었다면 구원을 부르고 왔을 것이다.

뼈와 부패한 살점을 씹던 존재가 피 묻은 입을 닦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니, 웅얼거렸다.

“···으어?”

레이서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존재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것이고 본능으로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그의 심장을 당장에라도 멈출 것 같은 기운을 뿜어내는 저 존재를 여기서 막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있었네.”

후웅··· 훙···

그의 봉이 몇 차례 회전하고 어깨와 허리 사이에 멈추었다.

후우웁···

“난 배나무 수도사 레이서다. 꿈 깨라, 네가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거다.”

반나절의 싸움 끝에 레이서의 심장은 꿰뚫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레이서는 항마(降魔)석을 불길한 존재의 가슴팍에 꽂아 넣는 것에 성공했다.

“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상대는 미라처럼 변해갔다.

레이서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그게 배나무 수도사의 마지막 접속이었다.

디스토피아 커뮤니티에도 스칸다의 어떤 매화자나 음유시인들도 노래하지 못했던 비사(祕史) 중의 비사다.

이 이야기가 퍼져나가지 않은 이유는, 그가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다음 날 입대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바싹 밀어 민머리가 된 그에게 스칸다의 이야기는 단지 번뇌였을 뿐이다.

이것 또한 비사다.

****

콰앙-!

“무거운 건 나.”

성진의 호흡이 무거워졌다.

성난 소가 뿜어내는 콧김처럼 그의 입에서 하얀 증기가 나왔다.

손을 먼저 쓴 것은 바자르였다.

휘오오···

사아악-!

단지 허공을 베었음에도 삭풍이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무아지경으로 성진을 공격했다.

텅-!

터터터텅-!

모두 거짓말 같은 상황에 고통조차 잊고 입을 벌렸다.

초모가 바자르의 검을 봉 하나로 튕겨내고 있었다.

한 번의 무거운 휘두름은 바자르의 수 번의 노력을 무위로 돌렸다.

“큭···.”

오히려 신음을 흘린 건 바자르였다.

텅-!

터엉-!

바자르는 조급함을 느꼈는지 공격이 점차 난폭해졌다. 하지만, 성진은 폭풍에도 꿈쩍 않는 산이었다.

봉을 위로 쳐올리는 동작에 바자르의 손아귀가 벌벌 떨렸다. 성진의 주먹이 앞으로 내질러진 건 바로 그때였다.

쿵-!

주먹이 바자르의 복부에 충돌하는 순간부터 무지막지한 굉음이 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후폭풍은 더 심각했다.

“크아아악!”

콰아아아아아아앙-!

바자르가 날아가 내전의 귀퉁이에 처박혔다.

파견대는 눈을 의심했다.

초모가 백작을 압도하고 있었다.

파견대는 지금 인간이 시조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광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사람이···.”

투둑··· 툭···

무너진 내전의 벽 조각을 털어내며 바자르가 일어섰다. 놀랍게도 그의 복부는 뻥- 뚫려있었다.

“커헉··· 컥···.”

바자르가 검은 피를 토해냈다.

성진은 성수의 물결 위에서 정광이 깃든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넌··· 넌 뭐냐?”

“······.”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말이 많군.”

바자르가 인상을 한 번 쓰자, 그의 허전했던 복부에 다시금 살점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도 힘을 소모한 것인지 안색이 좋지 못했다.

“그런 거군··· 수도사라··· 무지개 사원에서 눈치챈 건···.”

바자르가 대화를 이어가며 회복하려는 것이라 여긴 초모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다이렉트 메시지로 레이서의 마지막 조언이 전해졌다.

「호흡의 가능성은 무한해요. 어떠한 틀에 가두려 하지 말아요. 씨앗에서 어떤 꽃이 자라날지는 온전히 초모님에게 달렸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무한한 가능성.

한계가 없다는 말은 성진을 드넓은 들판에 풀어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진이 기괴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움직임은 빠르게, 공격은 무겁게.

섞이지 않을 것 같던 호흡들이 조화를 이루었다.

쾅-!

콰아앙!

콰아아앙-!

바자르가 간신히 봉의 움직임을 따라가 막아서 봤지만, 막는다고 막힐 충격이 아니었다.

그의 몸이 조각나서 흩어질 정도의 충격. 바자르는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푸드드득···

바자르가 박쥐 무리로 변해 성진과의 거리를 벌렸다.

후우웁···

하지만 무리를 하는 건 성진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호흡을 섞어 쓰는 건 역시 힘든 건가···.’

상승의 묘리를 선보였지만, 그것이 몸에 적잖은 부담을 주었다. 성진이 숨을 고르는 사이 바자르가 진리의 수호자에게 접근했다.

후아아앙-!

성진의 봉이 날아가 그를 노렸지만, 그는 연기가 되어 시리카의 콧속으로 들어갔다. 곧 시리카의 모습을 한 바자르가 일어났다.

“자··· 다시···.”

파아앙-!

“크악!”

빙의를 시도한 것은 바자르가 나름 ‘동료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의 거부감’을 상정하고 한 일이었다. 하지만 성진의 신성력은 신기하게도 시리카의 몸을 차지한 바자르를 직접 타격하는 게 가능했다. 그렇기에 망설이지 않고 공격해왔고.

파앙-!

“컥···.”

결국, 자신의 몸이 아니라 움직이기도 불편했던 바자르가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아··· 하아···.”

바자르는 시리카의 몸으로 들어가기 전보다 더 힘겨워 보였다. 반면, 한 차례 숨을 고른 성진은 아까보다 훨씬 평온했다.

바자르는 당장 이 싸움에서 이기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원래라면 성진이 이렇게 백작위의 시조를 몰아붙이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상황의 특수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백작의 장기는 마법이었고 지금 숲 전체에 마력 교란과 길치의 안개를 펼쳤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이것들을 포기한다면 바자르의 계획은 흔들릴 것이다. 그랬다간 기껏 쌓은 성을 무너트리고 다시 벽돌부터 하나하나 올려야 했다.

그 결과, 바자르가 일개 모험가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바자르는 인상을 찡그리고 신음했다.

‘큰일이야···.’

몸이 덜덜 떨리는 게 상대의 신성력에 당한 여파인 것 같았다. 무지개 사원이 어떻게 자신의 계획을 눈치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만 뇌리를 스치는 사이, 모두가 관심을 거두었던 석관이 삐걱했다.

달그락···

그것은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고 처음에는 가까이 있는 파견대원들도 눈치채지 못했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달그락··· 달그락···

싸움을 이어가려던 성진과 바자르가 멈칫했다.

갑자기 바자르가 환희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고함을 질렀다.

“때가··· 때가 왔다! 그분께서 깨어나실 때가!”

“뭐?”

“수도사. 너의 노력은 가상했지만, 애석하게 됐구나. 너무 늦었으니까.”

“늦었다니···.”

성진의 호흡이 조금 흐트러졌다.

‘늦었다?’

호흡이 흐트러진 건 바자르의 말 때문은 아니었다. 헛소리로 치부해버려도 그만인 말에 휘둘릴 성진이었으면 이렇게까지 바자르를 압박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저건 대체 뭐야···.’

바자르와 전투를 하는 사이, 어느새 석관의 뚜껑이 비스듬히 열려있었다. 성진의 눈은 석관의 밖으로 튀어나온 팔을 보고 있었다.

휘적··· 휘적···

석관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자르··· 가까이··· 가까이 오라···.”

“네시온님!”

“가까이···.”

“예! 알겠습니다!”

바자르는 이제까지 중 가장 빠른 몸놀림으로 석관에 달라붙어 귀를 가져다 대었다. 성진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어떤··· 어? 자, 잠···.”

콰직···

“꺄아아아악!”

“미, 미친···.”

바자르가 네시온이라 부른 상대의 손이 바자르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섬뜩한 파육음이 들려왔다.

꾸득··· 꾸드득···

백작의 몸이 석관 안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비명이 난무하는 와중, 성진이 봉을 석관을 향해 집어 던졌다. 상대의 끔찍한 행동을 멈출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텅···

하지만 네시온의 반대쪽 손이 튀어나와 봉을 쳐냈다.

발 언저리로 되돌아온 봉을 손에 쥔 성진이 다시 석관을 쳐다봤을 때, 이미 백작의 몸은 전부 사라졌다.

석관은 기이했다. 내부가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서 팔만 빠져나와 있었다.

‘팔이···.’

말라비틀어져 미라 같던 팔이 어느새 생기 넘치는 팔로 변모해 있었다.

꾸욱···

봉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꺼어억···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트림 소리와 함께 바람이 일었다. 아니, 바람이 일었다고 여겼다.

석관 안에 잠들어 있던 존재는 방금 자신을 지나쳐 진리의 수호자 앞까지 한걸음에 도달했다. 그렇게 느낄 정도로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쯧··· 맛이 없겠는데.”

“사부님! 안돼에!”

후우웅···

진리의 수호자가 전부 상대에게 빨려들어 갔다.

“음··· 역시 질이 좋지 않아. 식사는 여기까지.”

상대는 왕관을 쓰고 거적을 입은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우습다고 여기는 자는 없었다.

‘이게 무슨··· 무슨 힘이···.’

네시온의 얼굴이 악귀같이 일그러졌다.

“또··· 또 날 방해하러 왔구나, 수도사여. 참으로 질긴 악연이다.”

휘릭···

봉을 앞세워 상대를 견제하려 했다.

하지만, 성진의 의도는 전혀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다시 한번 바람이 일었다.

“큭···.”

콰아아아앙-!

묵직한 타격에 날아간 것은 성진이었다. 그는 부서진 벽에 틀어박혀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상대는 공격해오지 않았다.

“일어서라. 대체 그때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그때엔 용케 내가 자아를 찾기도 전에 찾아내더니 이번엔 안타깝게도 늦은 모양인데?”

“넌 누구냐···.”

“하하하···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상대의 웃음은 소름 끼치는 걸 떠나서 웃을 때마다 심장이 진동했다. 엄청난 압박감이다.

“본인은 부패(腐敗)의 대공(大公) 네시온이다. 이제야 내 소개를 할 수 있으니 기쁘기 그지없구나.”

파견대가 경악했다.

“대, 대공?”

“공작이라고?”

네시온은 중년의 모습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얽매여있는 파견대를 보고 손을 휘저었다.

“시끄럽구나, 너희는 이제 필요 없으니 썩어라.”

네시온의 손에서 불길한 바람이 파견대에게 날아갔다.

텅-!

“흐음···.”

성진의 방벽이 부패의 기운을 튕겨냈다. 그의 손에는 기절한 알란도 붙들려 있었다.

휙-

알란을 파견대의 근처에 던진 성진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통··· 통···

후우웁···

눈에서 흘러나오는 정광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성수의 물결은 파문을 넘어 파도가 되었다.

“단단한 건 바위, 단단한 건 방패. 단단한 건 나···.”

“···여전하구나.”

네시온이 날아들어 성진을 찢어발기려 했다.

텅-!

텅- 터엉-!

‘막았···.’

푸화악-!

‘어?’

성진의 팔이 크게 베여 피를 쏟았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모습을 보고 네시온이 흡족해했다.

“이제야 이 빌어먹을 물건의 복수를 하는구나. 걱정하지 말아라. 복수는 천천히, 아주 오래 이루어질 것이니.”

‘빌어먹을 물건?’

네시온의 가슴팍에 그리 크지 않은 결정이 박혀있었다. 완전히 붉게 변해버린 결정은 금이 쩍쩍 가 있었다.

“이런 골치 아픈 물건을 박아넣고 사라져 버리다니, 덕분에 다시 깨어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쩌적··· 쩍···

가슴에 박혀있던 수정이 깨져나갔다.

푸스스···

“나는 봉인에서 해방됐다. 이제 다시 나를 봉인할 테냐?”

“···필요하다면.”

“가능하다면 이겠지.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다르다.”

후우웅···

성진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여전히 막대한 신성력이 그의 안에 잠들어 있다. 분명 승산이 있을 것이다.

휘릭-

흔들리는 성수와 함께 그가 움직였다. 성진의 봉과 네시온의 손톱이 부딪혔다.

챙-!

채채채챙-!

불꽃이 일 때마다 언뜻 네시온의 얼굴이 보였는데, 이 악마는 웃고 있었다. 50년 만의 싸움이 즐거운 것인지. 성진은 단단한 호흡과 빠른 호흡을 섞었다. 점점 손을 섞는 게 수월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속도를 따라가고, 공격을 막아냈지만 네시온에게 준 타격은 전무했다.

팟-!

“왜 그러지? 뭔가 생각대로 안 되나?”

치이이··· 치이익···

네시온이 뿜어내는 부패의 기운이 성수의 보호에 부딪혀 역한 연기를 만들어냈다.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휘릭-

속도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랬다간 네시온의 공격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할 터. 단단함을 포기하면 공방에서 오히려 손해를 볼 것이고 무거움을 싣지 않으면 피해를 줄 수 없다.

‘그렇다면···.’

호흡을 확장하면 된다.

레이서가 말했듯 호흡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빠르고 단단하되, 무겁다.”

쩌저적-!

“호오··· 제법···.”

콰아앙-!

네시온이 봉에 튕겨 날아갔다.

처음으로 유의미한 타격을 주었다.

“하아··· 하아···.”

우득··· 우드득···

그런데, 네시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와 성진의 앞에 섰다.

“계속하자고. 오랜만의 전투라 일찍 끝내기에는 아쉽구나.”

드드드···

사방이 진동하고 그의 몸 주변으로 부패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수도사,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죽기 전에 가진 것은 다 내보이고 가거라.”

“······.”

콰앙-!

성진이 밀려났다.

****

“흑······ 흐윽···.”

“끝이야, 다 끝이라고···.”

파견대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담력이 강한 자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희망도 찾지 못할 것이다. 시조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존재인 대공이 깨어났다. 공작은 총 네 명이 존재한다고 전해져 온다. 그것이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초모··· 미안···.”

“협회가 와도 힘들 거야···.”

초모는 초인이다.

파견대가 실제로 본 모험가 중에 가장 강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리저리 날아가 휘둘리고 있었다.

대공의 장난감이라도 된 것처럼.

정작 초모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건 아니었지만, 네시온은 초모의 모든 공격을 받아냈다. 그리고 멀쩡하게 피해를 수복했다.

초모가 공방에서 조금씩 손해를 보고 있었으니, 그가 인간인 이상 언젠가는 신성력과 체력이 바닥을 보이고 비참하게 패배할 것이다.

“으아아아! 대체··· 나는 뭐야!”

“흑··· 흑···.”

“구경만··· 구경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모험가들은 지기 싫어한다.

동료들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모험가인데 지금은 그 승부욕 보다는 비참함이 앞섰다.

동료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싸우고 있는데 특등석에서 구경이나 하는 처지라니.

“도와야 해!”

“어떻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어떻게든···.”

“우린 약해! 초모처럼 강하지 않다고! 공작이 손 한 번 휘두르면 목이 떨어질 놈들끼리 모여서 뭘 하겠다고!”

“할 수 있어요··· 방법이 있어요.”

“···뭐?”

“뭐라고요?”

울음을 뚝 그친 파견대.

비관과 끝났다는 말만 오가는 중에 전혀 다른 의도의 말을 꺼낸 건 이시스였다.

“할 수 있다고요.”

“그럼 당장 해야지!”

“어서!”

이시스는 침묵했다.

그녀가 내뱉지 못한 말을 짐작한 도나타가 눈을 감았다.

“···대가가 있는 거군.”

“예···.”

대가가 있다는 말에 다시 한 차례 망설이는 일행.

하지만, 잭이 먼저 외쳤다.

“해! 우리 해야 해!”

“잠깐만요, 대가가 뭔지도 모르고···.”

“빨리 결정해야···.”

꿈틀···

기절했던 알란이 소란에 깨어났는지 고개를 이시스 방향으로 돌렸다. 그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자··· 우리··· 모험가잖아···.”

“······.”

“알란···.”

“동료가 저기서 혼자 싸우고 있어··· 하자··· 대가가 뭐든··· 하자···.”

파견대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흐르다가 나중에는 물길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시스, 부탁해.”

“발버둥이라도 칠 수 있게 해줘.”

“제발···.”

이시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스르륵···

그녀의 안대가 자연스럽게 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눈을 떴다.

“눈, 눈이···.”

“우르드의 일족···.”

그녀의 눈에는 룬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모두 제 눈을 바라보세요···.”

이시스의 눈을 바라보던 파견대는 그녀와 함께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 여기가 어디야?”

“이시스!”

“쉿··· 함부로 입을 열면 안 돼요.”

“그게 무슨··· 허억···.”

어둠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공간에는 파견대 말고 세 명이 더 있었다. 산만큼 거대한 자들. 휘장에 몸을 가리고 있는 세 명의 거인들이 있었다.

“이시스여··· 무엇을 원하느냐?”

목소리는 천둥이 치는 듯했다.

“운명의 여백을 바랍니다.”

세 명의 거인은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돌한 것. 무엇을 바치겠느냐?”

“그건···.”

“무엇이든! 무엇이든 바친다!”

“잭!”

“잭의 말대로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 알란은 그 대가가 무엇이든 감수하겠다.”

“······.”

천둥 같은 음성이 다시 한번 몰아쳤다.

“그것이 수명이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 일 하면서 오래 사는 건 포기했다.”

“용기··· 거룩한 힘이다. 그것이 유한한 너희들을 무한하게 하는 것이지.”

“더 받아 갈 게 있나?”

“없다. 모두 동의한 것인가?”

이시스가 모두를 돌아보았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에 발을 들이는 것을 언제나 꿈꿔왔지.”

“하하하··· 다들 제정신이 아니야.”

세 거인의 휘장이 걷히고 일행과 마주 보고 있는 거인의 손이 내밀어졌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너희의 운명을 시험하겠다.”

그, 혹은 그녀가 내민 건 주사위.

이시스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심하게 떨었다.

그녀가 섬기는 위대한 존재의 기운이 그녀를 따뜻하게 감쌌다.

“이시스, 두려우냐?”

“두려워요. 제가 실수한다면 모두 끝이 나잖아요. 저뿐만 아니라 스칸다도···.”

“아이야, 무대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해선 평생 주인공이 될 수 없단다.”

“저는··· 저는···.”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붙잡았다.

진주의 검사 알란이었다.

“주사위 이리 줘.”

“알란···.”

“내가 할게.”

“호오··· 그녀를 대신해서 네가 하겠느냐? 너는 혹여 낮은 수가 나오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래, 아직까진 내가 이들을 이끄는 사람이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좋다! 주사위를 굴려라! 너희의 운명, 아니··· 세계의 운명을 시험해라!”

알란이 이시스에게 넘겨받은 주사위를 하늘로 던졌다. 한차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주사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사위가 구르며 눈이 계속 바뀌었다.

삼··· 일··· 오··· 일···

그리고 멈추었다.

육.

“육(六)이군.”

“육이야.”

“이것 또한 운명이다.”

파견대가 기뻐하기도 전에 거인 중 한 명이 모래 한 줌을 이시스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것은 운명의 공백이다. 찰나지만, 정해져 있는 모든 것들을 뒤틀 수 있지. 그것이 죽음이든, 이치이든.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겠느냐?”

망설일 필요 없다. 운명을 거스르는 사람에게 사용해야 한다.

“초모, 그에게 사용하겠어요.”

어쩐지 거인이 웃는 것 같았다.

“그의 정신으로 들여 보내주마.”

“아이야, 지켜보겠다.”

“스칸다의 첫 번째 운명은 너희의 손에 달렸다.”

부우웅···

콰아아아아앙-!

세계가 부서지며 파견대가 다시 어디론가 날아갔다. 영혼이 되어 날아간 곳은 붉은 번개가 치고 땅이 불타는 곳이었다.

화르륵···

콰아앙-!

“고통스러워··· 여기가···.”

“초모? 초모야?”

거대한 나무에 누군가 앉아있다.

붉은 번개를 바라보며··· 아니 어쩌면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가 눈빛으로 물었다.

고통스러운 이곳에 왜 찾아온 것이냐고.

파견대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날아갔다. 그러자 새하얀 사슬이 초모와 그들을 연결했다.

금지된 마법 ‘뒤틀린 운명’

기억하는 이 없는 마법이다.

이들의 운명은 이제 잠시 하나가 되었고, 초모의 신성력을 그들도 이어받게 되었다.

어두운 공간의 거인 중 한 명이 이야기했다.

“육이 나왔으니 작은 선물을 주마.”

****

성진과 네시온의 전투가 점점 치열해졌다.

성진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지만,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치명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다.

“펼칠 수 있는 재주는 그게 다인가? 지루해지는군.”

이중, 삼중 호흡을 연이어 펼쳐도 상대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이었다.

요새를 자갈로 흠집 내려는 병사가 된 기분이었다.

‘공격할 수가 없어···.’

손이 모자라다.

성진의 손은 두 개뿐인데 네시온은 적어도 손이 네 개는 있어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이번만큼은 머리가 아찔했다.

자신보다 빠르고 자신보다 무거웠으며 자신보다 단단했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존재에게는 넘치는 신성력도 소용이 없었다. 그것을 채 쏟아내기도 전에 밀릴 지경이었으니까.

그때, 시나리오가 반응했다.

[chapter 6-6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chapter 6-6을 클리어합니다.]

[보상으로 이미지: 계몽을 습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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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7. 뒤틀린 운명.]

「엘론드에서 시작된 이 일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암운을 드리웠던 존재는 부패의 대공 네시온이었습니다. 세상이 슬퍼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그를 쓰러트려야 합니다. 할 수 있다면.」

* 이 임무는 메인 시나리오입니다.

* 에어리어를 개방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해내야 하는 임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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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지루해진 네시온이 성진을 저만치 날려버렸다.

콰아앙-!

“쿨럭···.”

네시온의 손바닥에 지독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푸스으으으으···

“이만하면 되었다. 썩어라, 인간들아.”

모든 것을 썩게 하는 그 힘이 파견대와 성진에게 쏘아졌다. 성진도 이번만큼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방벽을 최대한으로 펼쳤다.

콰아아아아아-!

쩍··· 쩌적···

방벽이 깨져나가며 부정한 기운이 다가왔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는데 갑자기 성진의 앞을 사람들이 가득 메웠다.

파견대가 성진의 앞을 막아서서 부정한 기운을 받아냈다.

“크아아아악!”

“으아아악!”

그 기운에 휩쓸린 파견대의 몸이 바스러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다시 재생되었다. 성진은 자신의 신성력이 방금 그 일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지금 자신의 신성력과 연결되어있다.

“···이건.”

쒜에엑-!

깡-!

리나의 화살이 네시온의 왕관에 명중해 왕관을 날려버렸다. 네시온이 왕관을 끌어당겨 다시 머리로 가져갔다.

“호오··· 벌레들이···.”

“모험가를 깔보지 마라, 시체.”

알란과 잭이 파견대의 맨 앞에 섰다.

파견대의 눈은 성진과 마찬가지로 새하얀 정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성진은 파견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이 상황을 바꿀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보다···.’

계몽.

성진이 새로 얻은 능력은 특이했다.

스칸다에서 이런 능력을 갖춘 이는 성진이 유일할 것이다.

계몽은 자신의 신성력에 영향받은 이의 잠재력을 개화(開花)시키는 것.

잭과 알란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우득··· 우드득···

아키라의 몸이 변화했다.

거대한 순백의 늑대. 늑대의 몸은 점점 커지더니 내전의 천장을 부쉈다.

쿠구웅···

“크르르···.”

네시온의 입가에 진한 흉소(凶笑)가 그려졌다.

“···재밌구나.”

지독한 붉은 기운과 상서로운 흰 빛이 충돌했다.

퍼어억-!

아키라가 주먹에 배가 뚫린 채로 나무들을 쓰러트리며 날아갔다.

“크아아아악!”

단검을 쥔 비취 등급 모험가의 몸이 녹아내렸다가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가소로운 녀석들···.”

이시스의 저주 마법과 도나타의 암석 마법이 차례로 네시온에게 향했지만, 마법은 손짓 한 번에 허무하게 허공으로 사라졌다.

암석이 부서지자 흙먼지와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시야가 잠시 가려진 틈을 타 날카로운 검격이 네시온에게 쏟아졌다.

알란의 검이었다.

붉은 기운을 휘감은 검.

네시온은 불길한 기분을 느껴 그 팔을 통째로 뜯어버렸다.

그리고 연계해서 들어오는 잭의 숏소드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의 머리를 몸에서 뜯어버렸다.

콰지이익···

광기.

머리가 뜯긴 잭의 몸이 네시온의 몸을 끌어안았다. 팔이 뜯긴 알란도 네시온을 움직이지 못하게 온몸으로 덮쳤다.

푸스스···

뜯긴 잭의 머리는 사라지고 어느새 잭의 몸에 새로운 머리가 생겨났다.

마법이 지속하는 동안, 초모의 신성력이 있는 한 이들은 죽지 않는다.

“초모오! 지금!”

“초모!”

“제발!”

네시온은 자신이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태 자신과 맹렬하게 싸우고 있던 그 존재를.

“이런···.”

네시온의 시야에 봉이 나타났고 파육음과 함께 시야가 뒤집혔다.

푸화악-!

봉은 네시온의 머리를 몸에서 뜯어내 하늘로 날려버렸다.

“됐어!”

누군가의 외침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전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네시온이 이렇게 쓰러질 리 없다.

네시온의 날아간 머리에서 새로운 몸이 자라났다.

그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다시금 성진의 주위로 파견대가 모여들었다.

네시온의 요새는 무너졌고 반대로 성진이 요새가 되었다.

살아 움직이는 요새.

이어 두 번째 격돌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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