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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는 종말에 적응했다-104화 (104/222)

# 104

104화

일행은 초모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다음, 숙소로 복귀했다. 병사와 기사들이 어째서 자신들을 데려온 것이냐고 물었더니 초모가 한 말이 이랬다.

“제가 지금 몸을 뺄 수가 없어서요.”

“그럼 나 혼자 왔어도 되잖아?”

“그렇게 말했는데, 기사님들이 실수하신 모양이네요.”

“근데 왜 기사들이 움직인 거야? 엘론드의 지배자와 안면이 있어?”

“아뇨? 아··· 시민들의 치료를 마친 다음 식사가 예정되어있긴 합니다. 아마 아침이 되어서야 숙소에 돌아갈 것 같네요.”

알란은 숙소로 일행과 함께 돌아오고 나니 묘하게 진이 빠졌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뭐가 뭔지···.”

“시조가 활동을 시작했다니? 믿어야 하나요?”

“일단 날이 밝는 대로 협회에 보고하자고. 초모가 수상한 자긴 해도 신성력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으니.”

“그런데··· 혼자서 그 많은 인원을 치유할 수 있는 거예요? 못해도 수백 명은 되어 보이던데···.”

“그건···.”

알란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어엿한 진주의 모험가. 신관은 아니더라도 신성력을 가진 이들과 활동해보기도 했다. 그들의 신성력은 정말 신비로웠다.

철철 흐르던 피가 멎고 갈라진 살점이 아물기도 했다. 아마 스칸다에서 가장 신비로운 힘을 꼽자면 신성력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신비로운 건 신비로운 거고 효용력을 따지자면 글쎄라고 고민할 것이다.

‘원래라면 금세 바닥나야 정상인데···.’

신성력의 약점.

대신관급이 아니고서야 기적을 물 쓰듯이 발휘할 수 없었다. 분명 환자 둘 정도, 혹은 전투 중이라면 큰 상처 두 번 정도.

그런 상황이니 사제회들이 똘똘 뭉쳐 신성력을 남발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힘을 가져다주었고.

‘초모는 이상해.’

평범한 모험가가 아니다. 개인이 신성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해도 스칸다에선 드문 일이니 당연하겠지만. 신기한 점은 그 신성력을 물 쓰듯이 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본 것만 해도 환자를 열이 넘게 치료했었다. 줄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고.

‘막대한 신성력··· 아니, 신성력뿐만 아니야.’

무력.

귀상어는 비취이고 범죄자이긴 했지만 약한 모험가는 아니었다. 그가 전위에 있을 땐 분명 든든할 것이다.

그런 귀상어를 한 수에 날려버렸다.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봤어도 지금과 기분이 달랐을 것 같지는 않다.

실력을 숨기는 모험가는 많다. 당시에는 그런 모험가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이상하리만큼 능력 있는 남자다.

분명 파견대의 일원이니 기뻐해야 마땅하지만, 급변하는 상황 때문에라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대체 일이 어떻게 풀리려고 그러는 건지···.’

생각을 멈춘 알란이 탁자에 앉은 자신을 제외한 16명의 사람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이봐, 마녀. 이시스라고 했나?”

“예. 말씀하세요.”

“초모에 대해 뭘 좀 아나? 출발하기 전에 점을 쳤을 거 아니야?”

“제가요? 음··· 무엇을 궁금해하시는 건가요?”

“다. 아니, 말할 수 있는 것만. 마녀의 입을 억지로 열면 재액이 닥친다고 하니까.”

이시스는 말을 골랐다.

어디까지 얘기해주어야 할까.

그녀도 추상적인 부분만을 눈치챘고, 대부분이 허황한 얘기다. 적당한 말을 던졌다.

“그는 구원자예요.”

“그게 끝이야?”

“더 말하게 되면 미래가 뒤틀려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럼 하나만! 그가 우리에게 해를 입히나?”

“방금 제 말을 듣지 못한 건가요?”

“아니, 됐다. 적이 아니라면 문제 될 건 없지.”

초모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주로 그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 요정 드루이드 아키라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동방에 존재하는 사원 중에서 무지개 사원을 들어본 사람?”

“무지개 사원?”

“그게 뭔데?”

“귀상어 때부터 나름 이리저리 생각해 봤는데 거기밖에 안 떠오르더라고. 강한 무력, 그만큼 강한 신성력. 워낙 신비로운 존재들이고 세상에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타났다 하면 폭풍을 일으키는 존재들.”

꽃의 사원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현재까지는 아키라의 의견이 가장 그럴듯했다.

“초모 수도사 아니다.”

“뭐?”

잭이 반박했다.

여기서 초모와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눈 건 잭일 테니 모두 그의 말에 귀기울였다.

“초모, 호흡 몰랐다.”

“호흡을 모른다고? 뭐야, 그럼. 수도사가 아니었네?”

“제길, 나 말고 다른 놈 정체가 궁금할 줄이야. 그것도 동료인데 말이지.”

“어쩌겠어요. 일단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협회에 보고하고 어떻게 할지 다시 정하죠.”

“그러자고.”

****

밤부터 새벽까지 사람들을 정화했다.

심장에 자리 잡은 악은 성진의 찬란한 빛에 소멸했다.

물론 그때마다 사람들이 격통에 시달렸지만, 결국 초모에게 감사하고 떠났다.

“어떻게···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저희가 가진 게 없어서···.”

초모의 가면 아래 입꼬리는 웃음 지었다.

신아름이 말했듯, 성진은 이제 곧잘 웃는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삶을 소중히 하세요.”

별다른 의도 없이 그저 ‘행복하세요, 여러분.’ 같은 의미였는데 사람들은 초월적인 존재라도 목격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 성자님! 으흐흑···.”

“엘론드에 성자님이 오셨다! 부패한 사제회를 보아 넘기시지 못하고 직접 오신 거야!”

“이제 우린 살았어!”

혹시라도 성국 바스카리에 가기 전부터 문제가 생길까 봐 사제회와는 관련이 없다고 했는데도 저랬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또, 구원자의 존재는 그들에게 가장 달콤한 신앙일 테고.

성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은 이곳의 영주이신 다타온님께서 건물을 내어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두의 상태를 확인하고 가장 심각한 이들부터 진료했으니 다른 분들은 내일 그곳으로 찾아와 주시길.”

당장 치료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도 있었으나, 병사들이 제지했다. 또 성진이 위급한 사람들을 우선해서 처치했기에 증상이 약한 자들만 남아있었으니, 그들로서도 수긍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타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새벽에 찾아가도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마 반기실 겁니다. 가시죠.”

‘스라버지들, 자요?’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자요? 자냐고?]

- 안 잔다, 이놈아!

- 스칸다 때 취업 준비하느라 안 해봤는데, 저기도 영주가 있나요?

- 음··· 다르다. 국가라는 개념은 거의 희미하고 연맹이나 군벌이라고 보면 된다

- 그냥 실세라고 보면 된다는 거죠?

- 옳지, 우리 손주. 이해가 빠르구나

‘영주가갑자기’님이 5,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왜 보자고 하는 거지? 아; 치료해서인가?]

- 사제회가 쌩까던 도시에 성자가 나타났으니 ㅋㅋ

- 원래 말라 죽어가던 사람한테 물을 건네주면 극도의 감사를 받는 법이야

- 가면 호사 좀 누리겠구만 ㅋㅋ

삐익···

삐익···

쪽지함에 쪽지가 쌓여갔다.

[제목: 게섯거라, 영주! 영주한테 꿀리지 않는 법]

[제목: 있어 보이는 대화법. 영주를 홀리는 50가지 방법]

대부분이 필요 없는 내용이었다.

성진은 잠시 커뮤니티의 알림을 꺼두고 이동했다.

“다 왔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예.”

영주성은 휘황찬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건물들과 조화로웠고, 그것이 영주의 성품을 보여주었다.

- 뭐, 청렴한 사람인가 보네

- 평범한데 좋은 사람 취급받는 걸 보면 현대 사회가 얼마나 헬인지 알 수 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영주가 기다리고 있는 접객실로 갔다. 영주는 편한 차림으로 쇼파에 앉아서 성진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 다리가 불편해서 일어나기 어려운 점 양해 부탁하네.”

“괜찮습니다.”

영주의 다리는 오래 전부터 아파 온 것 같다. 신성력을 써도 고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나는 다타온이라고 부르게. 그래, 초모라고 했던가?”

“예, 말씀 낮추십시오.”

“지금도 낮추고 있네. 더 낮추면 불편해서 말이야.”

성진은 다타온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피곤한 상황에서도 그와의 대화는 평온한 마음을 갖게 했다.

“엘리온의 시민들이 자네를 칭송하더군.”

“영주님의 은덕입니다.”

“내가 한 거라고는 사제회와 협회에 구원을 요청한 것밖에 없네. 물론 사제회는 묵묵부답이지만.”

상황이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사제회는 성국에서 문을 걸어 닫고 재난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신관인가?”

“아닙니다, 아직은.”

“아직. 알아들었네. 혹시 엘리온에 퍼진 질병의 정체를 파악했나?”

“시조의 짓입니다.”

“크윽··· 역시···.”

“조치는 어떻게 취하셨습니까?”

“조치라 할 만한 게 있나? 저건 전염병이 아니야.”

- 엥? 전염병이 아니었다고?

- 감염에 감염에 감염 아니었음?

다타온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전염병이었다면 감염자들을 격리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야. 저들은 대삼림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당한 거야.”

“바람이요?”

“그래, 밤이면 대삼림에서 바람이 불어오지. 그 공기를 들이마신 사람 중 일부가 감염된 거야.”

“그렇다는 얘기는 원흉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같은 상황이 계속될 거라는 것이군요.”

“그래. 그래서 협회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지. 초모, 모험가 맞지?”

“네, 모험가입니다.”

“협회에는 이미 말해두었네. 자네는 지금부터 잠시 엘리온을 도와줬으면 해. 괜찮겠나?”

“그러려고 했습니다. 이쪽의 문제도 심각해 보였으니까요.”

- 그럼 이제 파견대 ㅃㅇㅃㅇ임?

- 들어 봐 임마

다타온이 차를 권했다.

성진은 정중하게 사양했고 다타온은 미소지었다.

“초모, 치료만을 말하는 게 아니네. 대삼림에 길을 내는 동부 상인회의 계획은 실패했어.”

“그런 것 같습니다.”

“동부 상인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 여전히 엘론드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네. 엘론드의 경제는 어느새 그들에게 장악당한 상황이야. 내 불찰이지.”

“돈에 영혼을 판 사람들이군요.”

“욕할 수만은 없지. 나도 거들었으니까. 박수도 마주칠 손이 있어야 소리가 나는 법이잖나.”

“그들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까?”

“엘론드는 문제가 아닌 게 없어. 병들어 고통받는 시민들. 뿐인가? 빈곤도 큰 문제야. 지척에는 시조가 깨어났고··· 엘론드는 이미 내가 손 쓸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어.”

“······.”

“나를··· 나를 도와줄 수 있나, 초모? 나처럼 무능한 지도자를 믿는 시민들이 안타까워··· 몇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 해야 하나?

- 걍 임무만 끝내고 가면 되지 않나?

- 거시적 미시적의 문제인가용

간단하게 시작한 파견 임무가 조금 복잡해졌다. 이제는 엘론드의 문제에 더 깊숙이 관여해주기를 요청받았다. 그것도 엘론드의 지도자 다타온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부담스럽겠지, 사실 시민들의 치료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야. 하지만··· 이 멍청한 나도 알 수 있었어.”

“어떤···.”

“동부 상인회가 오늘 흔들렸어. 이유를 짐작하겠나?”

“저 때문인가요?”

“그래! 바로 그거야! 무능한 지도자에게 붙는 사람은 없지. 엘론드의 부유층과 유력자들은 나에게서 멀어진 상황이야.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대삼림의 질병이 찾아온 거지. 질병은 빈곤층이든 부유층이든 가리지 않고 집어삼켰어.”

- 잠만; 뇌가 못 따라가는데;

- 그럼 거깄어 ㅎㅎ. 정치라면 이골이 난 스라버지들이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 ㅇㅋ 할아부지들만 믿어용

질병이 엘론드를 휩쓸었다.

번쩍이는 금은 사태를 해결하지 못했고, 엘론드의 권력을 쥔 이들도 빈곤층과 마찬가지로 죽어갔다.

사라락···

다타온이 책상에 시뻘건 인장이 찍힌 편지들을 꺼내놓았다. 척 보기에도 양이 꽤 많았다.

“이 편지들이 오늘 하루 동안에만 받은 편지들이야. 지금도 계속 쏟아지고 있지.”

“설마 그 편지들은···.”

성진은 저 편지가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병에 걸린 귀족들이 내게 요청하는 거야. 초모에게 부탁해서 자신의 병을 우선해줄 수는 없냐고.”

“······.”

“내가 데려온 줄 아는 거지. 아니, 내가 데려온 건 맞지. 우습게도 사제회가 아니라 협회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아직 몰라.”

“그들을 우선해서 치료해달라는 겁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지. 어차피 급한 불도 껐다고 했잖나? 그럼 죽고 사는 문제는 뒤로 밀리게 돼. 그들을 이용해야 해.”

“어떻게요?”

“내일 동부 상인회와 만남이 있어. 정기적으로 해오던 거긴 한데, 내일은 중요한 얘기가 오갈 거야. 원래 그들이 대삼림 사업을 벌이면서 엘론드의 시민들을 동원한 것은 아나?”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단순히 사업을 벌였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모릅니다.”

“대삼림 사업은 시민들을 동원한 거야. 계약 내용은 대삼림에 시민들을 동원하는 대신 임금을 지급할 것이고 엘론드에 지원도 하기로 했어. 하지만, 동원한 사람 중 대다수가 죽었고 임금은 미지급. 엘론드에 지원키로 했던 당초의 약속들에도 침묵하고 있지.”

“빈곤이 그들로 인해 생겨난 겁니까?”

“아니,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 빈곤하기는 해도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하지만 대삼림 사업 때문에 엘론드는 지옥이 되어버렸어. 힘없는 지도자는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도 못하고 말이야.”

“제가 할 일은?”

“내일 자리에 함께해주게. 그리고 그들을 규탄해줄 수 있는가? 지금 엘론드에서 가장 힘이 센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야.”

- 엥? 하루 만에 엘론드에서 힘이 젤 세졌다고요?

- 사막에선 물 가진 놈이 왕이야. 진리지.

- 병 많은 놈 사이에서는 약장수가 왕이라는 거군요, 스승님

- 옳다.

- 그러니까 동부 상인회를 압박해서 미지급된 임금과 엘론드의 지원을 받아낸다는 거네. 그럼 병은 초모가 치료하고 빈곤도 초모가 해결하면 ㅅㅂ 재주는 초모가 부리고 이득은 엘론드가 다 보는데?

- 애송이 녀석. 한 치 앞만 보는구나. 네 녀석이 그러고도 초모 방송 보는 놈이 맞느냐?

- 뭐, 뭐요? 그럼 뭘 얻는데?

- 고결함을 잊고 있진 않으냐? 이름만 들어도 선행을 베풀었을 때 얻는 능력치가 분명하거늘!

- 허헉!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역시 온 종일 방송만 보는 분한테는 못 따라가는군요!

성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삼림에 머무는 시조에게 향하는 길은 다른 일행들로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엘론드가 무너지면 그게 더 큰일이니 자신은 엘론드에 남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돕도록 하죠.”

“고맙네, 고마워···.”

****

“이런 개 같은 상황이···.”

“왜 그래요, 알란? 무슨 상황이길래.”

“협회에서 초모 없이 일을 진행하라는군. 초모는 엘론드에 와서 따로 맡은 일이 있는 모양이야.”

“역시 협회 쪽 사람이었네요. 뭐, 엘론드의 상황도 심각하니 협회의 결정도 그럴 만하지만.”

“누군 개고생하는데 후방에 남겠다니···.”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알란. 그러면 당신이 엘론드를 구원하던지요.”

알란에게 신성력은 없다.

아니, 엘론드의 모두를 구원할 정도의 신성력은 누구에게도 없다. 초모를 제외하고는.

알란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차렸다. 초모에게 구원받아 기뻐하던 시민들을 떠올려보았을 때 자신의 반응은 분명 과했다.

“내가 실언을 했군.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인데···.”

“부담이 가중되어서 그런 걸 거예요. 이런 대규모 파견은 처음일 테니까.”

“그래, 그런 거겠지. 아무튼, 오늘 정비를 마치고 대삼림으로 떠날 거니 그렇게들 알라고.”

“그렇게 전할게요.”

“아 참, 그래도 좋은 소식도 있다고. 진리의 수호자가 조금 일찍 합류한다는군.”

“그건 다행이네요.”

알란의 얘기를 들은 이시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목자는 찾았는데···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하지만, 특별한 사유 없이 임무에서 이탈할 순 없었다. 그랬다가 미래가 바뀌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방법을 짜냈다.

‘방법을 찾아야 해.’

하필 임무의 점괘에서 일(一)을 뽑은 게 문제였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야 대비를 하든 할 텐데···. 한 번 점을 친 일은 그것으로 끝이다. 위대한 분께 어떤 조언도 구할 수 없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쩌면 재앙은 이미 지나갔을 수도 있다.

엘론드의 질병이 그 재앙일 확률도 있었으니까.

‘아니, 분명 뭔가 더 있어.’

뒤집힌 사신의 카드.

모두 죽는다는 재앙이다.

‘초모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는 수밖에.’

그녀가 방에 틀어박혀 만든 것은 작은 인형 팔찌였다.

팔찌에 장식된 인형은 총 17개. 초모를 제외한 파견대 숫자만큼 만들어졌다. 마법적인 처리를 하자 인형은 파견대의 용모를 쏙 빼닮게 변모했다.

팔찌는 기괴했지만, 어쩔 수 없다. 급하게 만든 것치고 이 정도면 훌륭했다.

그녀는 자신의 사역마(事役魔)인 날개가 넷 달린 까마귀의 발에 편지와 팔찌를 매달았다.

“초모에게 가. 그에게 이것을 전해줘.”

파견대는 정비를 마치고 대삼림으로 향했다.

****

동부 상인회와의 교섭이 바로 오늘이다. 당초의 예정과는 달리 아침 일찍부터 만나기로 결정되었다. 성진이 시민들을 치료해야 했기 때문이다.

- 파견대에서는 아싸였던 내가 엘론드에서는 초-인싸?

- 목자긴 목잔데, 양이 졸라 많다

- 뭐, 포인트는 그대로 주기로 했으니까 나쁘진 않네

성진은 영주성에서 잠들고 아침에 일어났다. 커뮤니티에는 수많은 쪽지가 와 있었다. 대부분 이번 상인회와의 만남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조언하는 내용이었다.

‘많이도 왔네.’

고마운 사람들이다.

자기 일도 아닌데 발 벗고 나서주니 성진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여기서부터 갑자기 쪽지가 늘었네?’

시간대를 계산해 보니, 어제 다타온이 넘긴 동부 상인회의 간부 정보들을 본 이후였다.

[제목: 거기 간부 중에 쥐처럼 생긴 놈 약점을 압니다]

[제목: 치부를 공격하죠. 제가 정보를 쥐고 있습니다]

[제목: 마누라가 셋인 놈이 있습니다. 부럽··· 아니 이걸 파고들죠.]

시청자들은 과거의 연결 고리를 만난 반가움이지 더한 공격성을 드러냈다. 그 중, 눈에 띄는 쪽지가 있었다.

[제목: 초모님, 중요한 얘기입니다. 모험가 등급이 낮아 다른 분의 닉네임으로 말씀드립니다.]

쪽지를 보내온 아이디도 그렇게 높은 등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인지 내용이 궁금했다. 감이라는 게 이런 곳에서 발휘되는 것 같다. 내용을 확인할 때, 미소짓는 성진과는 달리 채팅창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잠시 후, 다이렉트 메시지가 왔다.

「초모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맡기세요.”

「감사합니다.」

성진은 영주성의 회의장에서 다타온의 뒤에 시립했다. 이제 엘론드에 도착한지 고작 하루. 상인회와 나란히 앉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잠시 후, 거드름을 피우며 권력자들과 상인회가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기름이 번들거리는 자들 사이로 눈이 충혈된 사람들도 있었다.

‘저 사람들이 감염자.’

충혈된 이들은 다타온의 눈치를 보며 성진을 계속 힐끗거렸다. 자신들의 편지를 읽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상인회의 간부 중 한 명이 다타온에게 말했다.

“그쪽에 초모인가 뭔가 하는 분 때문에 아침부터 죽겠군. 나는 늦잠을 자는 체질인데.”

쥐가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다타온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미안합니다. 내가 그러자고 했어요.”

“쳇··· 너스레는. 그래서 오늘 무슨 얘기를 하기로 했더라?”

“몰라. 매번 하는 얘기 똑같이 하겠지. 바쁜 사람들을 앞에 두고 말이야.”

눈이 충혈된 사람 중 한 명이 그들에게 말했다.

“저··· 얘기에 집중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시끄럽게 굴던 동부 상인회의 간부들은 인상을 찡그렸다. 나이가 일흔이 넘었을 텐데도 지독한 인상이었다.

“허허··· 이거 왜 이러실까··· 그간 받아먹은 게 꽤 되실 텐데···.”

“돈도 돈인데 목숨이 더 중하다는 것이겠지. 동부의 사고방식으로는 박쥐 같은 놈이라고 할 것이고.”

“그런··· 그런 모욕적인!”

박쥐 같은 자가 맞을 것이다.

여태 시민들을 외면하다가 본인이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다타온의 편을 드니.

“그만해라, 이금, 삼금.”

“형님!”

“저 자식들이 여태 받아처먹···.”

“그만하래도! 내 말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냐?”

“알겠습니다.”

“예, 형님. 조용히 있겠습니다.”

간부는 총 다섯.

그중에서도 일금(一金)이라는 자는 기세가 달랐다.

그는 무거운 분위기를 풍겼다.

“다타온,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허허··· 약속한 것만을 받아 가려는 것입니다. 그것조차 어려우십니까?”

“약속한 것? 웃기는군. 대삼림에 길을 내겠다고 할 때는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굴더니, 일을 그르치니 태도가 변하는구나.”

“태도가 변한 것은 당신들이요. 잘 지내던 엘리온에 재앙을 일으킨 것은 당신들이란 말이요!”

“그래서, 너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이냐?”

다타온은 이를 갈았다.

그가 일금에게 나직이 얘기했다.

“내 잘못이지. 금에 미친 자들에게 도시를 팔아넘겼으니.”

“알긴 아는구나.”

“하지만,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인으로서 어찌···.”

“상인은 손해를 보지 않는다. 엘론드는 끝났다. 우리와 거래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

“미친 작자들!”

성진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감정이 격해진 다타온과 일금이 서로를 물어뜯을 때도 성진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것을 눈여겨 보던 이금이 말했다.

“허이고··· 일금 형님. 저놈인가 봅니다. 어제 엘론드에 와서 병자들을 구제했다는 놈이.”

“말을 삼가라! 어디 성자 님에게!”

“성자? 이봐, 다타온. 우리가 모를 줄 알았나? 상인은 정보에도 능한 법. 소문은 모두 우리를 거치지. 저놈은 초모. 신관도 성자도 아니야. 그냥 모험가지.”

“크윽···.”

다타온이 분노를 억눌렀다.

상인회는 이미 성진이 일개 모험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막 나오는 것이고.

사금이 성진에게 물었다.

“안 그런가 마술사님? 성자라는 호칭은 낯부끄러우니 부르기가 영 껄끄러워서.”

성진이 그에 답했다.

“저도 그렇습니다.”

“크큭··· 저 얼간이보단 얘기가 통할 것 같군그래. 얼만가? 자네를 사지. 다타온 놈은 가진 게 없어서 얼마 챙겨 주지도 못했을 거야.”

“저는 돈에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좋은 재주를 가지고?”

신성력을 발휘하는 것을 단순히 재주라 표현하는 것에 불쾌했지만, 평정심을 유지했다. 아직 때가 이르다고 판단했다.

일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초모, 엘리온에 온 이유는 들었다. 맡은 일만 하면 그뿐인 것을 왜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느냐.”

“재주가 많아서 그런 것이니 이해를 바랍니다.”

“고작해야 신성력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재주밖에 없는 놈이 무슨 재주가 많기는···.”

성진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일금은 어째선지 그 미소에 소름이 돋았다.

“뭐, 뭐냐?”

“믿지 않으시니 재주를 보이겠습니다.”

“재주?”

“제가 과거를 보여드린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구나. 과거는 무슨··· 어디 한 번 보여봐라.”

“형님! 광대 놈의 수작입니다. 그냥 무시하시죠.”

“맞습니다. 다타온한테···.”

“조용하거라.”

“······.”

“······.”

일금이 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어서 재주를 보이란 얘기.

성진은 더 진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럼···.”

「금은 무겁다.」

“금은 무겁다.”

「그렇기에 금에 짓눌리는 것이지.」

“그렇기에 금에 짓눌리는 것이지.”

“···너 뭐야.”

“형님, 저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게 듣지 마시라니까요?”

「금은 가볍다.」

“금은 가볍다.”

「그렇기에 금을 쥐고 웃는 것이지.」

“그렇기에 금을 쥐고 웃는 것이지.”

“어떻게 그분이 하신 말씀을 아는 것이냐?”

“형님!”

“닥쳐라! 저 분 외에 누군가 입을 열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것이다.”

「나는 만금(萬金)이다. 많은 돈이지.」

“나는 만금(萬金)이다. 많은 돈이지.”

쿵-!

일금이 고개를 탁자에 처박았다.

“형님!”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혀, 형님들 저자가 방금 만금이라고···.”

“뭐?”

「너는 일금(一金)이라 하겠다. 금이 가진 능력과 모순을 깨닫거라. 그리고···」

“너는 일금(一金)이라 하겠다. 금이 가진 능력과 모순을 깨닫거라. 그리고···.”

“‘리치킹은부자왕’ 어른!”

“만금검(萬金劍) 어르신이라고?”

“형님들 그게 무슨?”

“어서 머리를 조아려라!”

성진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네 동생들을 부탁한다. 그들이 금으로 세상을 기쁘게 하거라.」

“네 동생들을 부탁한다. 그들이 금으로 세상을 기쁘게 하거라.”

쿵-! 쿵-! 쿵-!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부 상인회의 간부들이 탁자에 머리를 처박았다. 다타온과 엘론드의 유력자들은 돌아가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왜, 왜 저러는···.”

“만금검? 아까 만금검이라고 하지 않았나?”

성진이 일금에게 물었다.

“할 수 있지? 일금아.”

“어,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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