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는 종말에 적응했다-103화 (103/222)

# 103

103화

“강아지 이름은 왜? 강아지 키우게?”

“아니, 갑자기 기억이 안 나서.”

“오빠도··· 금세 까먹은 거야? 설기였잖아. 백설기.”

“아, 그랬지.”

이제야 기억났다.

강아지의 이름은 백설기였다.

설기는 유기견이었는데 신아름이 비 오는 날 쓰레기통을 뒤지던 걸 데려왔다.

원래 병약했던 건지 얼마 못 살고 떠났다.

이걸 이제야 기억하다니, 많이 무심해 보일 것이다.

“아름아, 우리 강아지 키울까?”

“음··· 싫어!”

“왜?”

“무서워. 설기 떠날 때 생각하면 가슴 아파서 못 키울 것 같아.”

신아름은 설기가 움직이지 않던 날, 탈수 증상이 올 정도로 울었다. 그녀가 부둥켜안은 자신의 팔에 그녀의 손톱자국이 났다. 그만큼 그녀는 무언가의 상실을 괴로워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5년을 마음 졸였다. 그녀의 속은 타다 못해, 재만 남았을 것이다.

“오빠. 오빠가 나랑 같은 사람이라 다행이야. 다행히 나이 차이도 거의 안 나고···.”

“왜? 떠날까 봐?”

“응. 나는 오빠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거북이나 소나무처럼.”

“뭐야, 그게···.”

“내가 오빠보다 먼저 떠났으면 좋겠다는 말이야. 그럼 나는 죽는 날까지 행복할 텐데.”

“그럼 남겨진 나는?”

“하하··· 그러게··· 너무 이기적인가?”

아마 먼 훗날의 일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 거동도 힘들어지고, 사는 게 덧없어 질 때쯤. 아마 신아름과의 끝은 그런 날 찾아오지 않을까?

‘그때엔.’

그때엔 그녀의 소중함도 흐릿해질까?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지쳐 곁에 있는 사람에 무뎌지지는 않을까?

‘아니.’

늘 같을 것이다.

자신이 거북이나 소나무처럼 오래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들처럼 변하지 않을 순 있다.

“응? 오빠!”

“···왜 그래?”

“방금 오빠랑 나랑 같은 생각한 것 같아! 아니야?”

“무슨 생각 했는데?”

“나이 들어서도 함께일까 하는 생각.”

“비슷하긴 하네.”

“어쨌든 같은 생각 했다는 거네, 이제 생각도 닮아가나 봐.”

“그랬으면 좋겠다.”

세상에 어쩜 이리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있을까.

자신에게 있어 모든 가치는 그녀의 다음이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자연스러운 미소가 입에 걸린다.

“오빠, 그거 알아?”

“뭘?”

“오빠 요즘 자주 웃는다는 거.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응, 목석같은 사람이었잖아. 마음은 따듯해도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얼굴에 다 드러난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스칸다에서 생활하는 게 활력소가 된 것 같다.

그게 얼굴로 드러나는 거고.

“그냥 힘이 나네.”

그녀가 입술을 한 번 삐죽 내밀었다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얼른 힘내서 일어나주세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신아름 씨.”

“좋아요. 그거에요, 최성진 씨. 약속이에요.”

“네, 약속입니다.”

떠나기 아쉬운지 그녀가 투정을 부렸다.

“집에 가기 싫다··· 안아줄래?”

신아름이 품으로 쏙-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

성진이 그리핀의 머리를 손끝으로 긁적였다.

그리핀이 머리를 쓱 내밀어 성진의 품에 대고 비볐다.

구우우··· 구우···

“설, 설이다. 네 이름.”

설(雪).

차마 백설기라고 짓지는 못하겠고 완전히 다른 이름을 짓기도 싫었다. 글자를 따온 것도 있고 그리핀이 눈처럼 새하얗기에 설이라고 지었다. 성진은 훌륭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어때?”

구우우··· 구우우···

따스한 감정이 전해져 왔다.

그리핀도 이름이 마음에 든 것 같다.

- 설? 설이라고?

- 흰둥이가··· 아니라고? 그럼 그 녀석은 누구였어?

- 흰둥이는 솔직히 짱구 표절이지 ㅋㅋ 설이는 뭔가 있어 보이긴 하는 이름이네

- 아··· 설이 기여워··· 우리 설이 넘 귀엽죠?

- 오늘도 설이 움짤 몇 장 건졌고~ 네이스~ 출근하면서 봐야징

성진은 설을 떼어놓고 말했다.

“설아, 당분간은 부르지 않을 거야. 기다릴 수 있지?”

구우우··· 구우···

설이 아쉬운지 구슬프게 울어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파견대와 함께하는 동안엔 설의 존재를 감출 생각이었으니까. 순혈 그리핀을 타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되면 다들 충격받을 것이다.

“그럼, 갈게.”

성진이 설과 작별하고 별채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짐을 꾸리고 있었다.

“초모, 어딜 갔다 오는 거지?”

진주 등급의 검사(劍士) 알란이 물어왔다.

그의 눈초리는 딱히 호의적이지 않았다.

“잠시 밖에 다녀왔습니다. 이제 출발하는 겁니까?”

“그래, 당분간은 내가 파견대의 대장을 맡았으니 보고는 꼭 하도록 해.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권위를 내세우는 인물이라고 할 순 없었다. 어디까지나 성진이 얘기하지 않은 잘못이니까.

“어이! 다들 모였나?”

“숫자라도 셀 생각이오?”

“필요하다면 그럴 생각이야. 잠시 출발 전에 모여서 얘기 좀 하지.”

모든 인원이 발디스의 숙소를 떠나기 전 모였다.

총원 18명.

알란이 사람들이 적어낸 이름과 직업, 그리고 할 수 있는 역할을 보면서 이야기했다.

“리나, 사냥꾼. 늑대를 이용한 척후와 추격 그리고 활도 수준급.”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요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의 이야기라 저러는 것 같다.

“도나타, 원소술사. 대지의 원소술 일체와 정령술 조금. 정령술?”

“쪼끄만 녀석들이 나와서 거드는 정도요, 큰 도움은 안 될 거요.”

“아니, 그건 내가 고민해보지.”

난쟁이 원소술사가 수염을 매만졌다.

다음은 요정 드루이드.

“아키라, 드루이드. 회복 능력 아주 약간, 변신술. 변신은 어떤 동물로 가능하지?”

“그날 기분 따라 다르지. 오늘은 표범과 올빼미.”

“내일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거잖아.”

“물론이야.”

- 먼뎈ㅋㅋ 랜덤 드루이드냐?

- 아침에 일어나서 확인하는 거임?ㅋㅋㅋ

- 아 오늘은 표범 마려우니 표범 해야지

“이것도 변수군. 응? 이 세 명은 뭐야?”

알란이 눈매를 찡그렸다.

종이에 적힌 사람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세 명이 있었다.

“잭, 싸움꾼. 가능한 것, 싸움···.”

잭이 손을 들었다.

“내 거.”

“좀 더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나?”

“아니.”

“······전위로 쓰지. 다음, 이시스. 마녀, 가능한 건··· 뭐가 이렇게 많아?”

알란은 지금, 다음 사람 것과 내용이 합쳐진 건지 의심할 정도로 많은 내용에 놀랐다.

“점술, 저주, 날씨 예측, 전술 조언, 흑마법, 소환··· 그 외 다수. 이것 말고도 또 있나?”

“애매한 재주라면 꽤 있어요.”

“···후위로.”

다음으로 성진이 적어낸 내용이었다.

“초모, 지원가. 지원 전반.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

“두루두루 합니다.”

“그러니까 그 두루두루가 뭐냐니까? 듣자 하니 신성력이 있다고 했지? 근데 또 그런 것치고는 귀상어를 한 수로 처리할 정도의 실력이라··· 지원가는 위장이지?”

“아닙니다.”

“동부의 어딘가에 박혀 있는 사원에서 흘러들어온 수도사인가 보군.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하는 동안엔 동료다. 동료의 뒤통수는 치지 말라고.”

“예.”

- 진짜 두루두루 두루미 두루치기 다 하는데···

- 에··· 이게 진짜 좋은데 어떻게 말할 방법이 없네;

- 틀린 말 한 건 아닌데 ㅋㅋ

- 아예 수도사로 인식이 굳어졌네욥 초모님

- 가지고 다니는 대봉 때문에 그런 듯. 수도사들이 자주 사용하는 무기니까

알란이 사람들의 정보를 줄줄이 읽고 말했다.

“대강 전위 여섯에 후위 열둘. 나쁘지 않은 구성이다.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가는 내내 얘기해보자고.”

“그래요.”

“그러지.”

성진이 동의하는 일행을 둘러보는데 이시스라고 말한 여인이 두리번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안대를 하고 본다고 표현하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고개를 왔다 갔다 했으니 그렇게 말할 수밖에.

‘누굴 찾는 거지?’

일행은 역할을 소개하는 자리를 끝으로 발디스를 떠났다. 가는 길은 그리 고되진 않았다. 주로 마을까지 걸어 묵었고 다들 기본 이상은 하는 모험가라 그런지 체력들도 훌륭했다. 밤이 어두워졌는데도 마을까지 군소리 없이 걷는가 하면,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 번은 특이한 일이 있었다.

“초모.”

“잭?”

“대련, 수도사.”

“대련하자고요?”

노숙하는 날에 있었던 일이었는데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다들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성진은 잠이 오지 않아 밤하늘을 보고 있다가 잭의 대련 요청을 받았다.

- 먼데 훅 들어와;

- 얘도 귀상어처럼 시비 걸라 그러나?

- 그건 아닌 듯?

- 애는 착해

마침 성진도 심심하던 차였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일행이 잠을 자는 곳에서 벗어났다.

잭이 가볍게 몸을 풀며 물었다.

“무기?”

“저는 괜찮습니다.”

“난 써.”

숏소드 두 자루를 허리에서 뽑는 잭.

성진은 몸을 풀 생각이라 봉을 쓰지 않았다.

“간다.”

“네.”

잭이 제자리에서 가볍게 위로 뛰었다.

통··· 통···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호흡··· 소리···.”

그리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훅···

‘온다.’

성진이 오른팔을 내뻗어 사각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쳐냈다.

팍-!

공격이 막힌 것에 개의치 않고 잭이 팔다리를 놀려왔다.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훅-

팍-! 파파팟!

수차례 공방을 주고받은 후, 잭이 재주를 넘으며 뒤로 물러났다.

“초모도 공격해.”

“예.”

상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했다.

기세로도 대강 가늠이 되었지만, 혹시라도 손을 쓰는 데 실수할 수도 있으니 조심한 것이다.

‘대충 이 정도.’

이제 자신이 몸을 풀 차례다.

통··· 통···

특이한 호흡과 함께 잭이 또 사각을 노려왔다.

성진이 한 손으로 발차기를 잡아채 공중으로 날려 보내자 잭이 빙글 회전하고 숏소드를 두 번 휘둘렀다.

쉬이익-!

야성적인 몸놀림이었으나, 훌륭한 수였다.

덕분에 성진에게 틈을 내주지 않은 잭이 이번엔 자세를 낮추었다.

훙-!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자 하체를 노려왔다.

성진은 잭의 낮은 발차기를 몸을 회전해 더 빠른 발차기로 대응했다. 물론 전력을 다하면 잭은 불구가 될 테니 적당히.

턱···

성진의 발끝이 잭의 오금에 기척 없이 닿았다.

휘리릭···

타격점에서 속도를 늦췄다가 접촉한 후에 속도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잭이 중심을 잃고 회전했다. 그도 당황한 듯 성진의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쉬이익-!

그러나, 결과는 나왔다. 회전하며 내뻗은 잭의 팔을 가볍게 흘린 성진이 한 손을 잭의 흉갑에 가져다 대었다.

너무도 사뿐하게 닿아 깃털이 내려앉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이겼습니다.”

“······졌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손이 강철로 이루어진 갑옷에 닿는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었지만, 둘은 알았다.

성진이 힘을 썼으면 잭은 그대로 죽었다는 걸.

팍-!

잭은 숏소드를 흙바닥에 꽂고 쪼그려 앉았다.

그 모습이 애처로웠다.

“수련 부족.”

“훌륭했습니다.”

“초모 이상해. 호박 아니야.”

- ㅎㅎ 그게 사정이···

- 제가 중고 신인이라···

- 저쪽에서 좀 날렸었어영 ㅋㅋㅋ

- 초모한테 패배한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 가슴을 펴라 소년! 패배는 더 큰 승리로 나아가는 길이다!

- 밀수들이 생색내고 있네 ㅋㅋ

성진은 잭의 말투가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실례일 수 있지만, 그것을 질문했다.

“원래 말이 없습니까?”

“수다쟁이야.”

- 엥?

-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런데 왜···.”

“수련. 호흡 때문에.”

- ㅇㅎ 먼지 알겠네

- 호흡이 머에여? 스라버지들?

- 전위 중에서 몇몇 직업이 사용하는 특색임. 변주곡에서 빨라지거나 느려지거나 화려한 느낌적인 느낌 알지? 그런 거 호흡으로 조절할 수 있음

- 암튼 만능이라는 거군

- ㅇㅋ 이해가 빨라

잭이 숏소드를 허리의 검집에 집어넣고 자리를 떴다.

“다음엔 봐주지 마.”

“예.”

다음에도 대련을 한다면, 또 봐줄 생각이다.

잭의 실력을 얕잡아 보는 게 아니라 봐주지 않으면 몇 수 나누기도 전에 잭이 터질 것이다.

잭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그의 동작에서 안 좋은 습관을 몇 개 발견했다. 나중에 그가 원한다면 조언을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지랖이겠지.’

성진도 그를 따라 불가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

마차를 다음 행선지까지 빌려 타기도 하며 동부로 달렸다. 하루도 움직이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곧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 왔군. 저기가 엘론드다.”

알란이 손가락을 뻗어 가리켰다.

엘론드는 웅장한 도시였다.

고고하게 뻗은 첨탑과 새하얀 대리석을 이용한 건축물들. 여태 들렀던 도시 중에 규모가 가장 컸다.

일행은 임무 확인서를 내밀어 정문을 통과하고 숙소를 찾았다. 거리에 헐벗은 아이들이 많았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게 하루 이틀 사이에 이렇게 된 건 아닌 것 같았다.

“뭔 거지들이 이렇게 많아? 어쨌든 숙소는 저기로 결정하지, 다들 어때?”

“좋아요. 일단 씻고 싶네요.”

“밥부터 먹자고.”

피죽도 못 먹은 것 같은 아이들을 지나쳐서 걸어가는데, 채팅창에 경고등이 켜졌다.

‘첫판부터장난질이여’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싸늘하다. 저 꼬마가 난쟁이 돈주머니를 뽀렸다. 잡아야 함]

- 뭐? 우리 도적이 봤다! 저 새끼가 훔쳤다!

- 오함마를 가져와! 감히 눈깔이 수십만 개 달린 관제탑 초모에게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느냐!

- 젊은 친구, 신사답게 행동해

- 어케 일행 중에서 아무도 모르냐?

- 사람도 너무 많고 난쟁이가 돈주머니를 존나 헤벌레 내놓고 다님. 나 돈 존나 많음~ 하고 자랑함 ㅋㅋ

성진은 알란에게 말했다.

난쟁이가 소매치기당했다는 사실은 빼놓고서.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다녀오겠습니다.”

“오래 걸려?”

“아닙니다.”

“다녀와.”

“알겠습니다.”

성진이 알란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알란이 손을 가볍게 쓰는 사람이라 그렇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자비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상황을 좋게 해결하기 위해 성진은 그 소년의 기척을 놓치지 않고 따라갔다. 복잡한 골목길을 다람쥐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소년. 성진이 따라붙은 줄 모를 텐데도 신중한 움직임이었다.

소년은 한참을 가서 빈민가의 후미진 곳에 멈췄다.

“형들! 나와봐! 이것 좀 봐!”

형제로 보이는 다른 두명이 다 무너져 가는 건물에서 나왔다. 그들은 금화가 들어 있는 돈 주머니를 보고 놀랐다.

“이, 이게 뭐야!”

“어디서 났어?”

“그게···.”

형제들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그들은 동생이 소매치기했다는 것을 바로 알아챈 것 같다.

“이제 이런 짓 안 하기로 했잖아.”

“하지만···.”

“누구야? 돌려드리러 가자.”

“엄마 약은 어떻게 사게?”

“···형들이 알아서 할게.”

성진이 그들의 앞으로 나왔다.

“누, 누구세요?”

“멍청아! 딱 봐도 네가 가져온 돈주머니 주인이잖아!”

“죄송해요! 죄송해요! 동생이 철이 없어서···.”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맏이로 보이는 남자애가 성진의 손에 돈주머니를 올려주었다.

“때리지 마세요··· 너도 얼른 잘못했다고 해!”

“잘못했어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성진은 그들을 한차례 내려보다가 물었다.

“어머니가 아프시니?”

“···예.”

“나를 어머니에게 안내해 줄래?”

“네? 엄마한테요?”

“그래, 형이 신관이거든.”

“예에? 신관님이시라고요? 하지만 사제님들은···.”

“믿어도 돼.”

형제들은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자신들의 어머니에게 성진을 데려갔다.

이들의 어머니는 죽어가고 있었다.

“누구···.”

“잠시 좀 살피겠습니다.”

“······.”

여인은 바닥이 군데군데 깨진 건물에 얇은 돗자리 같은 것을 깔고 그 위에 누워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파리가 여인의 주위에 날아다녔고 구토를 유발하는 시큼한 냄새가 맴돌았다.

“엄마···.”

여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 이거 설마?

- 눈! 아니 잘못 말했다. 입! 입 벌려서 확인하세요!

- 충치를?

- 아니, 아씨 말 끊을래? 송곳니! 송곳니이이!

성진이 여인의 입을 벌려 송곳니를 확인했다.

송곳니가 이상했다. 사람의 송곳니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돌출됐고 커다랬다.

- ㅈ대따. 엘론드 폭파 예정

- 이거 감염된 거잖아?

- 활동 안 한다며?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일··· 주일···.”

성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니?”

“···많아요.”

- ㅎㅎ 지금까지 행복 스칸다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음부턴 인간 극장(스칸다 절망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임무고 나발이고 빠져서 격리해야 함. 전염 속도를 못 따라갈 텐데?

- 이대로 냅두면 그대로 권속 되잖아?

성진은 가면을 쓴 얼굴로 여인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신성력을 흩뿌렸다.

- 정화로 안 풀려요; 서부에서도 그랬음;

- 정화로 풀렸으면 서부에서도 그 고생 안 했지 ㅋㅋ 괜히 곡창지대 불 질렀겠나?

- 암튼 이거 협회에 알리고 손절각 씨게 잡져

- 하늘이 무너졌지만 잘 싸웠다

후우우웅···

성진이 새로 얻은 능력인 정화.

흰색의 빛무리가 여인에게로 사르르 쏟아져 내렸다.

“헉··· 허어억!”

“어, 엄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여인의 송곳니가 점차 줄어들더니 평범한 크기로 돌아왔다.

“으아아아악!”

“엄마, 괜찮아?”

조금 전까지 고통에 겨웠던 여인이 숨을 헐떡이다가 성진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몸은 어떠십니까?”

“모, 몸이요? 홀가분··· 홀가분해요.”

- 에··· 정화가 원래는 안 먹히는데··· 우리 파티 신관님 정화는 안 먹혔는데···

- 그러니까··· 음··· 엥?

- 치료가 안 되는데요, 됐습니다?

- 지금까지 행복 스칸다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아쉽게도 인간 극장(스칸다 절망 편)은 방송사의 사정으로 조기 종영되었습니다. 해당 방송은 묻고 더블로 가겠습니다.

- Ask and go to the blu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상황 이상하게 돌아가네

성진이 뒤를 돌아보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어머니랑 비슷한 환자가 많다고 했지? 얼마나?”

“여기 빈민가에만 수백 정도···.”

“똑같이 일주일?”

“예, 아마 그때쯤일 거예요.”

“다 불러 모아줄래?”

****

“또야? 왜 또 안 오는 거야?”

“내버려 두라지. 어디 큰 도시에 오니까 창관에라도 달려간 거 아니야?”

“어휴··· 그런 생각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거죠? 몸에 피 대신 맥주가 도니까 그런 생각이 나오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왜 초모는 밤이 됐는데도 안 오는 거야?”

“수상하긴 했잖아요. 아무래도 임무 이탈로 협회에 신고해야···.”

콰아아앙-!

숙소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갑옷을 입은 병사 다수, 기사 몇이 황급히 누군가를 찾았다.

“알란! 알란 님 계십니까?”

“엘론드의 병사들이군. 여깄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잠시 저희와 가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따라가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알란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딱히 문제를 일으킨 기억이 없는데 병사들이 들이닥쳤다는 건 엘론드의 지배자가 자신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니까.

‘제길··· 뭐 때문이지?’

알란의 두뇌가 핑핑 도는 와중에 아예 그 두뇌를 정지시켜버리는 말이 기사의 입에서 나왔다.

“혹시 초모라는 사제님을 아십니까?”

“사제? 사제는 아니더라도 초모는 압니다.”

“그럼 맞겠군요. 이쪽으로!”

일행이 혹시 몰라 병장기를 챙기고 숙소를 나섰다. 가는 내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협회에 이를 알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병사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였다.

‘빈민가? 아니, 근데 빈민들도 빈민들인데···.’

빈민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복장으로 추정컨대 부유한 사람들도 다수 섞여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초조한 기색이었다.

“밀지마! 밀지 말라고! 거지새끼들이!”

“죽고 사는 문제 앞에 가난이 뭔 상관이야!”

“소란 피우지 마! 그냥 조용히 줄이나 서!”

사람의 파도.

어째선지 이 큰 도시의 사람들이 좁아터진 빈민가로 모여들고 있었다. 심지어 한쪽 편에는 마차가 줄지어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뭐, 뭐죠?”

일행은 사태를 확인하고자 했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알란을 찾아온 기사가 사람들을 물리쳐서 나아가게 해주었다.

‘대체 무슨···.’

줄은 빈민가의 시작부터 중심부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마침내, 줄의 시작점에 다다른 일행은 기겁했다.

“초모? 여기서 뭐 해?”

“오셨군요.”

줄을 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성자(聖者)님의 동료분들이신가 봐.”

“성자님이 저런 분들이랑 같이 다니신다고? 그럴 리가?”

“역시! 성자님께서는 남들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거야!”

파견대는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복장은 급히 나오느라 편한 복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멋져 보이긴 힘들었다.

“크윽···.”

“뭐,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예요!”

알란이 수치심에 붉어진 얼굴을 하고 성진에게 다가갔다.

“초모,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성자라니? 약이라도 팔았어?”

- 2차 전직 퀘스트 중입니다

- 성자님 바쁘니 입을 봉인하거라

- 초모: 병의 근원은 환자들이지. 파괘하겠다!

성진이 굳은 얼굴로 알란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말했다. 알란은 상황이 탐탁지 않았지만, 자신 때문에 성자님이 시간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서둘러 귀를 내밀었다.

성진이 한 말은 알란에게로, 알란에게서 일행에게로 전해졌다.

“시조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뭐? 그게 정말이야? 이 사람들은 다 뭐야?”

“엘론드에 오염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감염자들입니다. 치료받기 위해 온 거고요.”

“치료? 누구한테? 초모한테?”

“예.”

알란은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지원가라며? 성자였어?”

“지원가입니다.”

- 겸업이욥 ㅎㅎ

- 지원가(취미)

- 성자(취미)

- 파괴신(본업, 육아 휴직 중)

파견대의 임무는 시작부터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흘러갔다.

눈알이 핑핑 도는 알란의 뒤로 마녀 이시스가 싱그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조용히 독백헀다.

“찾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