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화
노쇠한 기색이 역력한 손성일.
정수열 박사의 지하 연구소에 오고 나서부터는 특유의 강인한 눈빛도 유지하지 못했다.
끼익···
“수열··· 왔는가?”
“궁상맞게 여기서 혼자 뭐 하시는 겁니까.”
“꾸중하지 말어. 가뜩이나 기운 없는 사람한테···.”
손성일이 집게로 얼음을 집어 유리잔에 떨어트렸다.
얼음이 어느 정도 쌓이자 옆에 있던 술을 그곳에 따랐다.
“제법 좋은 술을 가지고 있더군. 이런 후줄근한 연구소에 말이야.”
“그거 저한테 직접 주신 겁니다.”
“아, 그랬던가? 오래되니까 기억이 흐릿해지는군. 우리가 그렇게 오래됐었나?”
“어르신···.”
“어르신은 무슨··· 자네도 할 텐가?”
“저는 괜찮습니다.”
“아쉽군, 모처럼 좋은 술을 열었는데.”
손성일이 유리잔에 담긴 술을 홀짝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가끔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지루함을 일깨워줄 때, 손성일이 입을 뗐다.
“할 말이 있는가 보군.”
“병기가 필요합니다.”
“농담도···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어르신, 장난하는 거 아니라는 거 아시잖습니까?”
“암, 수열 자네가 장난과는 거리가 멀지···.”
손성일이 유리잔을 쥐고 살짝 흔들었다.
유리잔의 얼음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런데··· 내키지 않는군. 병기를 쥘 병사들은 있고?”
“올빼미와 아이들이 그레이와 접촉했습니다.”
“그레이?”
“중립을 취하고 있는 휴머노이드 집단입니다. 이들을 설득해서···.”
“수열! 나랑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어르신!”
“내가 휴머노이드를 믿지 않는다는 거 자네가 제일 잘 알지 않은가?”
“하지만··· 상황이 이렇지 않습니까···.”
“그 어떤 순간에도 선택을 내리는 건 인간이야. 상황이 아니라고.”
손성일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슈트를 입지 않으면 그는 다리가 불편한 노인에 불과하다.
“동원이가 생전에 너희를 얼마나 믿었는데··· 돌아온 건 폭주한 휴머노이드에게 자기 목숨을 갖다 바치는 결말이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그때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어.”
지팡이가 땅을 쿵 하고 쳤다.
“휴머노이드가 결국 인간을 끝장낼 거라는 걸.”
“어르신···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바로 잡을 수 있어요!”
“아니, 이게 맞는 걸지도 몰라. 휴머노이드와 인간은 서로 많은 걸 잃었어.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거지.”
“그래서 동원이에게 정을 주시지 않는 겁니까?”
“······자네.”
손성일이 멈칫했다.
지금까지 정수열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반발한 적은 없었는데, 불쾌한 감정이 혈관을 타고 머리까지 치솟았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게.”
“동원이를 원하신 건 어르신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관심조차 주지 않으시잖습니까?”
“그만······.”
“아드님이 생각나셔서 그러신 겁니까?”
“그만 하래도! 사람이 정도를 모르는 군!”
“사람이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람이니까요!”
손성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잠시 후, 노기가 잔뜩 치밀었던 표정을 풀고 감정을 가라앉힌 그가 지팡이를 짚고 몇 발짝을 걸었다.
그의 뒤에서 정수열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아닐세, 고리타분한 늙은이가 답답도 하겠지. 자네를 이해하네.”
“어르신···.”
손성일의 동공은 격한 감정을 몇 차례 표출하자 다시 맑아졌다.
“수열, 우리 동원이 기억하나?”
“기억하죠. 제가 돌잔치까지 갔었잖습니까? 잊으신 겁니까?”
“아아··· 기억나지 기억나, 싸구려 정장을 입고 찾아온 자네의 모습이 어찌나 웃겼는지···.”
“어르신도 그때 안경은 촌스러웠습니다.”
“난 그래도 비싼 거였어. 뭐, 서로 잊어주자고.”
“꿈 많은 아이였죠, 동원이는.”
“아무렴···.”
손성일이 정수열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자네를 소개해주지 말걸.”
“면목 없습니다.”
손성일은 생전의 손동원을 떠올렸다.
- 아빠! 저! 저거 봐요! 팔이 막 움직여!
- 하하, 말도 한단다? 어때, 신기하지?
- 신기해··· 나도 수열 삼촌처럼 될래요!
- 뭐?
- 안 돼요?
그때의 손동원의 눈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로 코앞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손성일은 거룩한 눈에 대항할 수 없었다.
- 안될 리가 없지··· 동원이가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해. 아빠가 전부 이룰 수 있게 해줄게. 그걸 위해 아빠가 여태껏 살아왔는걸.
“자네를··· 자네에게 데려가서는 안 됐어!”
“죄송합니다.”
손동원은 휴머노이드의 폭주로, 젊은 나이에 손성일의 곁을 떠났다.
늦게 얻은 자식에게 모든 정을 쏟았던 손성일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 동원이를 살려내! 이 개새끼들아! 너희가 죽인 거야!
- 어르신!
- 그 잘난 휴머노이드인지 뭔지, 만들어 내란 말이야!
- ···알겠습니다.
손동원의 모습을 하고, 생전의 손동원의 성격, 기호, 감정 패턴을 그대로 카피해낸 프리미엄 휴머노이드.
손동원이 연구를 위해 자신의 인격을 미리 카피해놨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 아버지, 안녕하세요.
- 말도 안돼···.
손동원이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머릿결, 웃을 때 드러나는 치아.
살짝 들어간 인디언 보조개.
그 모든 모습이 손성일을 미치게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둘은 달랐다.
“정을 주지 않는다··· 달라.”
“예?”
“정을 줬어. 근데··· 수열, 내가 미친 건지 아닌 건지 듣고 판단해주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누구에게 정을 준 걸까?”
“······.”
“죽은 내 아들 동원이? 아니면 동원이와 빼다 박은 휴머노이드?”
정수열은 모른다.
대답할 수 없다.
“잔인한 일이야. 그런 사랑은 자식에게 줘서는 안 되는 더러운 감정이지.”
“그래서 곁에 두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래··· 정체를 모르는 사랑 따위는 서로에게 상처일 뿐니까.”
“감상적이시네요. 그래서 제가 따르는 거지만.”
“그러니까 자네의 그 말도 안 되는 연구에 투자한 거 아닌가?”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퍽이나···.”
손성일은 담아 두고 있던 감정의 단면을 정수열에게 꺼내놓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래도 그것과 휴머노이드가 병기를 쥐게 하는 것은 별개야. 휴머노이드가 일으킨 재앙, 알지? 내가 무엇을 보고 그들을 믿어야 하나? 프로그램대로만 행동하는 그들을.”
“어르신···.”
삐빅···
정수열의 이어셋이 신호를 보내왔다.
남긴 메시지가 있을 때 이런 소리가 났다.
“잠시만··· 죄송합니다.”
“괜찮네.”
치익-
- 그레이와 접촉했습니다. 현재 그들의 은신처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올빼미가 신호를 보내왔네요. 그레이라는 휴머노이드들과 접촉한 모양입니다.”
-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신처에 안티들이 몰려오고 있어서 피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단 대피한 후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삑···
남긴 메시지는 끝이 났다.
“···안티가 습격해왔다는군요.”
“일이 잘 풀리는 꼴을 못 보는군.”
갑자기 정수열의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어르신 잠시만요.”
“왜 그러는가?”
쾅!
정수열이 문을 거칠게 열고 뛰쳐나갔다.
연구소의 깊숙한 장소.
외부 CCTV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까지 뛰어간 그는 빠르게 밖을 확인했다.
“빌어먹을···.”
붉은 눈의 휴머노이드들이 밖을 경계하고 있었다.
많지 않은 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응하기 어려웠다.
저들을 밀어낸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벗어나야 하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삐이···
상층 주택에 누군가 출입했다는 경고음.
안티일 것이다.
황급히 방송을 켰다.
“모두 피하세요! 안티가 이곳을 찾아냈습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지하로 뭔가가 굴러떨어졌다.
“슈트···.”
콰아아아아아아앙!
****
‘올빼미가는곳마다’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문제 졸라 터짐. 폭탄 터지고 쳐들어오고ㅋㅋ 의심해봐야 해]
- ㄹㅇ 가는 곳마다 살인 일어나는 누군가랑 닮았어
- 명탐정 코난이 손가락으로 코를 쓱 훔칩니다.
- 소년 탐정 김전일이 뒤통수를 긁적입니다.
- 오자마자 피난시켜 버리네 ㄷㄷ
그레이의 은신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곳에 성진이 있다는 것.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재성에게 일행이 다가갔다.
“안티?”
“어, 빌어먹게도 많이 왔네. 꼬리가 있었나?”
“아니, 없었어.”
“그럼 위치가 진작에 들켰었나 보네. 도망쳐야 해.”
“싸울만한 수가 아닌가 보군.”
“잃을 게 너무 많아.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싸움을 할 수는 없어.”
휴머노이드가 사람을 지휘해서 피난을 준비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성진이 물었다.
“피난 장소는?”
“일단은 북쪽으로 더 가면 안 쓰는 지하 벙커가 하나 있어. 물자는 다 이곳으로 옮겨와서 깡통이지만.”
“얼마 못 버티겠군.”
“얼마라도 버틸 수 있는 거지. 어떻게··· 도와줄 생각이야?”
“그래야지. 시간을 벌면 되지?”
성진의 물음에 답하던 재성이 당혹성을 내뱉었다.
“어, 일단··· 뭐? ···벌써 뚫릴 것 같다고?”
상황이 재성의 생각보다 훨씬 안 좋은 것 같았다.
성진이 일행을 돌아보고 얘기했다.
“도와야 할 것 같아. 피난 행렬에 따라 붙을 수 있지?”
“그것은 무척이나 간단한 일. 누워서 식은 죽 먹기입니다.”
“야, 누워서 식은 죽 먹으면 죽어. 떡을 먹어야지.”
“주인혁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합격했습니다, 기뻐해도 좋습니다.”
“이제 문제도 내냐? 어디까지 하려고?”
정유리가 성진을 보며 얘기했다.
“올빼미, 무사하십시오.”
“다녀올게.”
성진이 무장하고 있는 그레이들에게서 소총을 한 정 넘겨 받았다.
철컥-
상층으로 뛰쳐나가자 엄폐물을 사이에 두고 안티와의 교전이 이뤄지고 있었다.
투두두두두-!
“곧 뚫리겠어!”
“못 버티겠는데··· 물러나면 다 죽겠지?”
“민간인들은 다 죽겠지.”
“휴머노이드가 민간인까지 걱정해야 하는 거야?”
“넌 말은 블랙처럼 하면서 엄청 열심히네.”
“닥쳐.”
전기 신호로 전해지는 안티의 수가 꽤 많았다. 이곳을 정리하고 일행에게 따라붙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투두두두-! 투두두두-!
안티 쪽에서도 격발음이 들려오는 것을 보니 무장을 한 안티도 있는 것 같았다.
‘무장한 안티부터.’
성진이 미리 엄폐물의 측면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그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후우···
반대 편 엄폐물로 바닥을 구르며 넘어간 성진은 타이밍을 쟀다.
투두두두-!
안티의 소총이 성진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을 목표로 사격했다.
‘지금!’
기이이잉-
조준 시를 발동하자 동공에 크로스 헤어가 그려지고 목표로 했던 안티에게도 조준점이 그려졌다.
소총과 함께 몸을 솟구쳐 올린 성진이 눈 깜짝할 새에 여러 번 격발했다.
타앙! 탕! 탕! 탕!
사격을 가하고 곧바로 엄폐물로 몸을 숨겼다.
투두두두두-!
성진이 있는 곳으로 포화가 쏟아졌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소리가 작았다.
근처에 있는 그레이가 성진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바, 방금 뭔···.”
“집중해!”
“아, 그렇지.”
- 띠요옹? 우리팀 맥크리가 너무 쩐다;
- 최고의 플레이! 올빼미 (빠요엔)
- 석양 본 사람 ㅋㅋ 한 번에 네 마리 머리통 실종됨
- 좀만 더 밀어내면 걍 육탄전으로 들어가도 다 갈아버릴 듯
- 크아아 개 멋있어 ㅠㅠ 나님 가로수 다 뽑는다
- 그걸 왜 뽑아 ㅋㅋ 가만 냅둬 ㅋㅋ
성진이 재차 소총을 장전했다.
철컥-
****
정수열 박사의 연구소에 안티들이 들이닥쳤다.
“조심해! 쿨럭···.”
“슈트! 슈트 입어!”
“입었다고···.”
“물러나야 합니다!”
안티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수도 안티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교전은 어렵게 전개됐다.
투두두두!
“컥···.”
“이 사람아!”
“염병···.”
화르르륵-!
콰앙!
안티가 처음 지하에 던져 넣은 건 소이탄 계열인 것 같았다.
스프링 쿨러 펌프가 작동해 실내에 계속해서 물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불길이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화재가 커지고 있었다.
“이러다 다 타 죽겠네! 박사님!”
“이쪽으로!”
안티의 선발대를 밀어내고 다른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과정에서도 희생자가 생겼다.
“안티도 불길 때문에 진입하지 못할 겁니다! 빠져나가기만 하면 돼요!”
“그게 가능하냐고!”
화르륵···
퍼어엉!
이곳저곳에서 폭발이 일어나 불길을 더 거세게 만들었다. 천장에 매달린 구조물이 떨어져 내렸다.
콰지익-!
“끄아아악!”
누군가 불타는 구조물에 깔려 끔찍한 비명을 내뱉었다. 방금 다른 출입구로 향하는 길이 구조물 때문에 막혔다.
“······다른 길로. 다들 움직여요!”
정수열 박사는 다급한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다리가 불편한 손성일이 연구소 어딘가에 남겨졌다는 것을.
****
삑-
- 작동이 불가합니다.
삑-
- 작동이 불가합니다.
“빌어먹을! 왜 안돼!”
기껏 입은 슈트인데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어쩌면 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슈트가 연구소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손성일이 털썩 주저앉았다.
상황은 갑작스럽게 극으로 치달았고, 정신을 차리니 혼자였다.
어쩐지 서러움이 몰려왔다.
다리가 불편한 자신을 사람들이 모른 척했다기엔 그들도 제 한 몸 챙기기 바쁜 상황이었다.
괜히 불길에 소리쳐 봤다.
“여기! 여기 있어!”
타닥···
쾅!
누가 들을 리 없다.
들어도 대꾸할 리도 없고.
알지만 혹시 모른다는 희망이 정신을 갉아먹었다.
“아무도··· 없는 거야?”
슈트의 방화 기능은 정상 작동하고 있었다.
호흡기도 착실하게 보호해주고 있었고.
그래서 찾아올 죽음은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다가 몸이 타오르기 시작해 방화 기능이 뚫리는 순간, 지독한 고통에 휩싸인 채 죽을 것이다.
쿠직···
쾅!
문가가 무너져 내렸다.
이제 기어서라도 빠져나가지 않는 이상 탈출은 불가능했다.
“죽기··· 싫은데···.”
쿵!
쿵!
문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사람의 형상도 아른거리는 것 같고.
“누, 누구요! 나 손성일이요! 여기 있어!”
쿵!
쿵!
가만히 들어 보니 도끼 소리인 것 같다.
깡!
문가를 가로막고 있던 구조물이 치워졌다.
“누구···.”
“아버지!”
“···동원아?”
“빠져나가야 해요!”
문 너머에 자신을 구하러 온 게 악마였어도 반겼을 테지만, 손동원은 아니다.
슈트를 입은 손동원이 자신 앞에 서 있었다.
바이저는 어디에다 둔 건지 보이지 않았다.
“망할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얼른 나가라!”
“업히세요!”
“너라도 빠져나가!”
“제가 어딜 가요! 고집 좀 그만 부리세요!”
“이··· 이!”
“빨리!”
자신에게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는 아인데, 화를 내며 업히라 채근했다.
마음이 약해져 결국, 손동원에게 업혔다.
넓은 등이었다.
“무리야··· 둘 다 죽을 거다.”
“걱정하지 마세요. 절 믿으세요.”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차올랐다.
이상한 감정.
아직도 모르겠다.
이 감정이 죽은 아들을 향한 건지, 지금 자신을 업고 있는 휴머노이드를 향한 건지.
콰지직!
천장의 일부분이 계속 무너져 내렸다.
“큿··· 여기는 막혔네.”
“지금이라도···.”
“조용히 하세요. 화낼 거에요?”
“······미안하다.”
불길이 시야를 전부 가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을 업고 이 불길 앞에 놓인 손동원은 어떤 심정일지.
“···무섭니?”
“네, 무서워요···.”
손동원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대로 아버지를 구하지 못할까 봐 무서워요.”
“······망할 자식.”
콰직!
문득, 이 휴머노이드는 죽은 손동원과 전혀 닮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전부터 느껴온 이상한 감정은 그것에서 기인한 것 같았다. 손동원이 아닌데, 손동원으로 여겨야 했기에.
“동호야···.”
“···그게 제 이름인가요?”
“좋은 날 받아둔 이름이다. 마음에 안 드니?”
“···좋아요, 좋은 이름이네요. 손동호···.”
힘없는 노인이 말했다.
“이제 너는 손동호로 살아가라. 못난 아비 덕에 못 볼 꼴만 잔뜩 봤구나. 이제, 내려놔라.”
“아뇨. 우린 같이 나갈 거예요.”
“아직도 멍청한···.”
“그만 포기하세요. 전 해낼 수 있어요.”
손동원의 미소가 등 뒤에서도 느껴졌다.
“프리미엄이니까.”
****
안티가 오기 전에 떠나야 한다.
하지만, 정수열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박사님! 가야 합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제길···.”
펑!
화르륵···
빠져 나온 출입구에서도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자신들이 빠져나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다리가 불편하셔서··· 슈트만 제대로 입으셨다면 진작 빠져나오셨을 텐데, 아직도 빠져나오시지 못한 걸 보면··· 그만 가시죠.”
“어디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
펑!
불길이 거세게 일어나는 출입구로 검은 형체가 보였다. 사람 같았다.
“바, 박사님!”
“저기!”
정수열이 출입구를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사람을 업고 빠져나오고 있었다.
“저, 저!”
“손성일 어른이다! 살아 계셨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저기서···.”
“빨리!”
쿵!
손성일을 여기까지 업고 온 존재는 업혀있던 손성일을 거칠게 내려놓고 본인도 하늘을 보고 누웠다.
손성일은 다행히 무사해 보였다. 군데군데 화염이 침투해 화상을 입었을 수도 있지만, 목숨을 잃는 것보단 나았다.
“동호야! 동호야!”
“아··· 버지···.”
정수열은 손동호를 바라보았다.
손성일이 동호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손동호의 외견은 끔찍했다.
녹아내려 흔적도 없는 인공 피부.
그저 움직이는 기계처럼 보였다.
내부가 훤히 드러나 있었고 보기 흉한 외골격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단 하나, 손동호임을 증명하는 건 그의 눈이었다.
양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이었다.
“나는··· 손동호. ···손동원이 아닌 손동호.”
“그래, 동호야! 애비랑 가자!”
“아버지···.”
손동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슈트를 입었다지만 손성일을 업은 채로 화염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
이미 작동을 정지했어야 정상이다.
그의 입에서 마지막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호가··· 해냈어요.”
손동호의 몸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 역시 손동호의 음성이었다.
삐이-
- 프리미엄 제타 모델 손동원. 저와 함께해 행복하셨나요? 아마 전 행복했을 겁니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작동을 종료합니다.
삐이-
뚝 끊긴 음성.
눈에서 흘러나오던 푸른 빛도 사라졌다.
손성일이 잠시 멈춰있다가 정수열을 찾았다.
“수열··· 수열! 어딨는가! 어딨어요···.”
“어르신! ···여깄습니다.”
“아들··· 응, 내 아들 살릴 수 있지?”
살릴 수 있다.
휴머노이드는 연산 장치만 멀쩡하다면 얼마든지 소생할 수 있다.
하지만, 정수열은 손성일에게 확실한 대답을 요구했다.
이전에도 똑같은 요청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손성일이 머뭇거림 없이 답했다.
“그야 물론 동호지··· 동호··· 살릴 수 있지?”
정수열은 손성일에게 끄덕였다.
“외형은 다를 겁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살가죽도 없어도 돼···. 동호면 된다고.”
“알겠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보문산으로 가지. 자네가 원하는 것도 그곳에 다 있을 거야. 그리고···.”
손성일이 말했다.
“그 휴머노이드들도 불러들여. 위험하다고 했지?”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