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105. 궤변
“뭐?”
자신이 틀렸다는 말에 현화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니지. ‘약자’가 죽은 것 뿐이다. 그게 뭐 그리 큰 대수란 말이지?”
“미친 새끼…!”
“후후후……”
낮게 웃음을 흘려며 그는 허공에서 크리스탈로 된 와인 잔을 꺼내들었다.
그의 반대쪽 허공에서는 와인 병이 하나 나타나 저절로 열리더니, 그가 든 잔을 채워나갔다.
피처럼 새빨간 와인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얼마나 발전을 이루든 약육강식의 법칙은 변하지 않아. 강자는 취하고, 약자는 뒤쳐질 뿐. 지금이라고 다른가?”
“다르지. 적어도 너처럼 사람 목숨을 벌레 보듯이 하는 시대는 진즉에 지났거든! 조선시대냐?”
“그렇게 사람 인권을 존중한다는 양반들이 돈에 환장해서 헌터를 게이트 너머로 보낸다는 거군.”
“……”
그의 말에 현화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라고, 게이트로 파견되는 헌터들은 그저 던전의 균열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스스로도 그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그런 건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협회도, 그에 따르는 헌터들도.
대다수의 헌터들은 돈과 자원, 그리고 정치적인 이유로 움직였다.
“애시당초 너희들이 말하는 그 협회도 허구한 날 떠들어대는 ‘정의’와 그리 가까운가? 멋대로 누군가를 빌런으로 지정하게 된다면, 그 사람 인생은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말이지.”
“…그건 그만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야.”
“어떻게 알지? 과연 그게 진짜로 벌어졌을지, 정말로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했을지 말야.”
와인을 한 모금 들이킨 그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말을 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강기호 헌터가 타워로 들어갔지. 과연 왜 그랬을까?”
“……뭐?”
“갖가지 범죄에 연류되어 있었거든. 누가 봐도 확실한 증거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지. 그걸 협회 상층부에서 알게 되었고, 비밀유지를 조건으로 협회를 나가달라고 한 거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결국 협회에서 범죄를 덮어줬다, 이거냐?”
그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니지. 오히려 반대야. 그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강기호가 타워로 간 것…… 근데 사실 그건 그가 저지른 범죄가 아니었거든. 내가 설계한 것들이니까.”
“……!”
뒤로 갈 수록, 그의 웃음은 점차 커져 갔다.
“큭큭…! 그런데도, 아무런 말 한 마디도 못하고! 자신이 가진 직장, 연인, 지위 그 모든 것을 잃고 타워로 도망치는 꼴이란! 크하하하핫!!”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베르톨도.
그는 왕좌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마치 연설자라도 된 듯이,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이었다.
“어때, 이래도 너희들이 그렇게 추앙해 마지않는 협회가 정의로 보이나? 그런 잘못 하나 제대로 분간하지 못해서, S급 헌터를 내쫓는 것이?”
“……”
“결국 너희들과 나는 다르지 않아. 차이가 있다면…… 내가 강하다는 것 뿐. 그렇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
그는 자신의 말을 마치며 손에 든 와인을 단번에 들이켰다.
“약자의 인권이니 뭐니 하는 개소리는 다 가식일 뿐이지. 피식자는 그저, 포식자의 식량으로 전락할 뿐이야. 그게 싫다면, 스스로 강자가 되어야 하는 세상이고.”
“궤변이야! 그딴 불공평한 논리가 어디있어?!”
듣다 못한 한아름의 외침.
그에 베르톨도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풋…… 착각하나본데, 세상은 단 한 번도 공평했던 적이 없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빈 와인잔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챙그랑!!
바닥과 부딪히며 산산조각나는 잔.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은가람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할 텐가?”
* * *
“미친 소리 하지 마! 가람아, 저 개자식-”
“약자는 빠져 있어라.”
버럭 화를 내는 한아름을 향해, 베르톨도가 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 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빛의 전격.
순간 굳어버린 그녀의 앞에, 차현화가 끼어들었다.
파지지지직!!
“큿……!”
아슬아슬한 순간에 전개한 실드로 그의 공격을 막아내는 차현화.
전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운 그녀의 마법이었음에도, 일순간 흘러 들어오는 격한 마력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공격을 내지른 베르톨도는 다시금 은가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선택권은 전적으로 네게 달렸다. 조금 더 간절하게 해 줘야 하나?”
“……?”
“네가 따른다고 약속하기만 한다면, 나머지 녀석들의 목숨까지도 보장해 주지. 아니, 거기에 더해서 각자 원하는 만큼의 힘과 재력, 그리고 권력까지도 줄 수 있다.”
“거절한다면?”
“다 죽는 거지. 다른 결말이라도 생각했나?”
은가람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 전원을 상대로 여유만만하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비록 연이 갑작스레 적으로 돌아서기는 했지만, 그들의 전력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아카데미 학생이기는 하나, 꽤나 재능이 있는 한아름과 세바스찬.
그리고 괴물같은 전투력의 한주희.
세계 최고의 마도사이자 공학자, 차현화와 은가람 자신까지.
어디 내 놨을 때 밀릴 만한 스펙이라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르톨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내가 더 강하다. 정 궁금하면 시험해 봐도 좋고 말이지.”
물론, 그에 대한 댓가는 죽음이다.
그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렇게나 잘나신 양반이 뭐 때문에 내 도움이 필요한 걸까? 뭐, 최고의 자리에 있으니 막 고독하고 그러냐?”
“후훗…… 그런 것도 없잖아 있긴 하겠지. 하지만 그게 이유는 아냐.”
“……?”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들을 향해 그는 앞서 말했던 말들을 반복했다.
“재밌으니까. 단지 그 뿐이다.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오면 어떨지, 혹은 어떤 저항을 할 지. 어느 쪽도 흥미가 있으니 너의 선택이 자유라는 말이다.”
노골적인 장난감 취급.
은가람은 구태여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
그에 일행들의 속은 점점 더 타들어만 갔다.
“한 가지 미리 알려주자면, 마인에 대한 연구는 이미 진즉에 마쳤다.”
“뭐라고…?”
경악한 표정으로 묻는 현화.
단지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코사 노스트라에 소속되어 있던 라우라조차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얼마 전. 그녀가 아직 코사 노스트라에 있을 때만 해도 마인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갈피를 잡은 정도였으니까.
“마인이라면…… 그 품평회에서 봤던…?”
“그건 고작해야 시험작이었을 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수십 명의 마인이 전 세계 곳곳에서 출현할 수도 있지. 네가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그에 대한 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의의 용사 행세라도 해 보는게 어떤가? 크하하핫!”
그것이야말로 너희들이 말하는 ‘정의’가 아닌가.
그런 말과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베르톨도.
그것은 일종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겠다면 일을 저질러 버리겠다는 것.
그는 선심쓰듯이 말을 이었다.
“이것도 다 네가 만들어 준 혁신적인 마력의 체계변화 덕분이지. 그런 의미에서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네게 나쁠 것 없는 제안이지 않나?!”
그는 은가람이 자신의 아래로 들어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만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따를 터!’
힘과 권력.
필요하다면 재료나 재력.
그리고 언젠가 도래할 자신의 이상적인 세계에서의 뚜렷한 입지까지.
이제까지 모든 이들이 그래 왔듯, 은가람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이제 그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은가람을 어떻게 가지고 놀 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싫은데?”
꽤나 긴 고민 끝에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 * *
“지금 필요한 건 생존기. 전, 이걸 이용해서 살아남을 생각이에요.”
은가람이 한국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
필요한 스킬 북을 받기 위해 그는 이진명을 방문했었다.
그렇게 얻어낸 스킬로 대규모의 던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말인데요.”
마지막에 문을 나서기 전, 그는 이진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음? 뭐지? 더 필요한 거라도 있나?”
“그건 아니고요. 미리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지도 몰라요.”
의미심장한 그의 말에 이진명은 미간을 좁혔다.
“누가?”
“‘누구’라는 표현 보다,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지만요. 본래라면 시간이 더 남아 있겠지만…… 슬슬 때가 된 것 같아서요. 마인.”
그의 말에 이진명은 잠시 두 눈을 크게 떴다.
“마인이라……”
“긴장하시는게 좋을 거에요. 어쩌면 세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올 수도 있으니까.”
사실 그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회귀 이전, 처음 마인이 출현했을 때 그러했으니까.
“휘하의 길드원들이나… 다른 헌터들과 조금은 연락을 취해 두시는게 좋을 겁니다.”
* * *
“거절하겠다고? 이런 조건을 듣고서도?”
그래, 당황스럽겠지.
겉으로야 어떤 선택을 하든 변화는 없다고 했지만 과연 속이 그럴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거기다가 마인이 나올 것 정도는 예상했단 말이지.’
회귀 이전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아직은 시기가 아니기는 했다.
본래 그 기반이 되는 이론, 즉,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케히빈의 이론이 깨지는 순간이 훨씬 뒤였으니까.
그러나 그 이론을 내가 발표해 버린 지금, 마인에 관한 연구 역시도 알아서 속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나머지는 철댕이 아재가 알아서 잘 해줄테고.’
몰랐다면 또 모를까, 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이상 S급 헌터, 그 중에서도 최강이라는 명성이 어딜 가지는 않겠지.
나는 삐딱한 자세로 물었다.
“어제 봤던 샤오레이, 그 놈도 너랑 한 패 아니었냐?”
“그런 녀석도 있었지. 꽤나 능력이 있는 녀석이었고.”
“능력이 있다기 보다는 적당히 쓰고 버리기 좋은 말이었겠지.”
내가 그 놈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비록 지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거의 모든 것이 파악될 정도로 어설픈 녀석이었다.
내 말에 베르톨도는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부정할 수는 없군. 역시 너도 나와 같은…”
“그러니까 싫어.”
“…뭐?”
“딱! 봐도 복지가 엉망이잖아? 월급이고 힘이고 간에! 사내 복지나 근무 환경이 좋아야 직원들의 능률도 오른다고? 하긴, 제대로 사람을 써 본 적 없으니 모르려나?”
“고작 그딴 이유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하겠다? 크하핫! 확실히 재미있는 녀석이야.”
“거기다가 너 같은 놈이 마음에 안 들어. 누구 밑에서 일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니 밑에서 일하라고? 어림도 없지, 암! 아암!”
내 비아냥에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웃음을 흘렸다.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듯이.
“정말이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놈이야. 그런 사소한 이유로 남의 목숨줄을 간단히 놓아버리다니. 그런 주제에 정의?”
“정의라니? 난 그딴 말 한 적 한 번도 없는데? 너 혼자 과대망상 한 거잖아?”
“……”
“난 원래 내 꼴리는 대로 살아. 니 말 마따나 그게 재밌거든.”
내 말에 한참이나 웃음을 터뜨리던 그는 이내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서늘한 한기가 그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어리석군. 그렇다면 이제 죽어라.”
그의 말에 나는 입매를 말아올렸다.
“글쎄. 너같은 늙다리한테 질 것 같진 않아서.”
그리고는 인벤토리에 넣어 뒀던 두 개의 단도를 꺼내들었다.
검은 색의 도신을 자랑하는 이빨.
오각수의 뿔로 만들어 진 그것은, 바로 전 까지 삼각수의 뿔 가루를 잔뜩 머금고 있던 상태였다.
겨우 습득해 낸 스킬, ‘흡수자’ 덕분이었다.
“아따, 고놈 살이 잘 붙었네! 이제 일 해야지?”
우웅……!
내 말에 반응하듯, 도신이 미미하게 진동했다.
앞서 마인들의 피를 먹기는 했지만 그로 인한 영향은 거의 미미한 수준이었던 것에 반해, 흡수자의 효과는 확실히 달랐다.
도신 전체의 예기가 남달라지기도 했고, 마력을 흘려 보냈을 때의 느낌 역시도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아직 먹은 재료가 그리 좋지 않아서 성장이 더디기는 하지만, 조만간 에고가 깃들 수도 있으리라.
나는 마력을 양 손 끝에 모아 단도 쪽으로 불어넣었다.
전보다 훨씬 가벼워 진 듯한 양 팔.
나는 베르톨도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지었다.
“뭐 해? 안 싸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