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104. 베르톨도 프로벤차노
“정말이지 박수를 주고 싶군. 설마하니 이 앞까지 도달하게 될 줄이야.”
중후한 중년의 목소리에 은가람이 물었다.
“너냐? 그 베르톨도인지 뭔지 하는 놈이.”
“방금 라우라가 말했지 않나? 맞다. 이 몸이 바로 코사 노스트라의 수장이지.”
“생각보다 별 거 없네?”
명백한 그의 도발에 베르톨도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후훗. 그런 당돌함마저도 마음에 들어. 과연 은가람이군.”
“날 잘안다는 듯이 말한다?”
“잘 알고 있지. 오히려 고마울 정도야. 네 덕분에 마인의 실험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으니까.”
“……”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은가람.
그의 모습을 지켜본 현화는 미간을 좁혔다.
‘이 녀석…… 어쩌면 그래서…’
처음 학술회에서 발표를 하자고 했을 때, 극구 거부하던 은가람이었다.
보통 그 정도 규모의 이론을 발표할 수 있다면 다른 일을 전부 제치고서라도 발표에 힘쓸 정도.
그만한 재능 역시도 충분했기에 처음 그는 은가람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었다.
그러나 지금 베르톨도의 말에 그는 그리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부터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언제가 되었든 벌어질 일이었다고.
‘여기까지 예상했다는 건…… 대체, 이 녀석 정체가 뭐야?’
정말로 미래에서 오기라도 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네가, 그놈이란 말이지…?”
“여기서 죽이겠다.”
“……?”
근처에서 폭사되어 나오는 두 줄기의 살기.
전에 느끼지 못했을 만큼 진득하고도 예리한 그 감각에 은가람과 차현화는 얼굴을 굳혔다.
“잠깐, 멍청한 새끼들아! 하지마!!”
은가람의 그렇게 외쳤을 때, 은서현과 이현진은 이미 땅을 박차고 나간 뒤였다.
“혈광검(血光劍)!”
일순간 붉은 빛을 머금었던 이현진의 도.
아니, 잠깐이나마 그의 몸 전체가 붉은 빛을 머금은 것만 같았다.
“침묵──”
그러나 직후, 그들은 허공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우개로 존재를 지우기라도 한 듯한 느낌.
이어서 베르톨도의 근처에서 청명한 금속성이 울려퍼졌다.
투카아앙!!
콰가각!
“?!”
새로이 습득한 스킬과 은서현이 가진 권능의 절묘한 조화.
그러나 그것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혔다.
베르톨도의 근처에서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본래 소리가 없는 공격이 자랑인 둘이었지 않은가?
일순간 당황한 그들이었으나 둘은 재빠르게 상황에 대처했다.
다시금 기척을 감추며 거리를 벌렸다.
“가소롭다.”
“?!”
그러나 그들의 도주는 시도에 그쳤다.
앞쪽으로 뻗은 베르톨도의 손.
보이지 않는 팔이 존재하듯, 그의 손이 둘의 목을 붙잡은 것이다.
“모처럼이니 대화라도 나눠 보려고 하는데 말이지.”
콰아앙!!
“은서현! 이현진!!”
순식간에 바닥으로 쳐박힌 둘.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은 그들을 향해, 베르톨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 원한다면 이 놈들 먼저 보내줘도 상관없지.”
손을 뻗는 베르톨도.
그의 손바닥에서 칼날이 뻗어져 나온 순간, 그의 몸이 멈춰섰다.
“……연인가.”
“지금이에요!”
은사로 베르톨도의 몸을 구속한 연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뒤져버려라!”
타닷!
투콰앙!!
앞서와는 차원이 다른 진동이 주변을 울렸다.
베르톨도 조차도 세 걸음 물러날 정도.
그가 놀란 표정을 짓는 동안, 은가람과 차현화가 재빨리 쓰러진 둘을 데리고 거리를 벌렸다.
“그래, 이렇게 나와 줘야지. 너무 쉽게 죽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
투웅!
“?!”
콰아앙!
이번에는 장을 내지르는 그.
정면으로 그의 공격을 받아낸 한주희가 벽으로 날아가 박혔다.
“크윽…! 빌어쳐먹을!”
입가의 핏자국을 닦아내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그.
그리고 거의 동시에 연의 몸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하악…! 학……하악…!”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연.
은사가 끊어지며 그 반탄력을 온 몸으로 받아낸 결과였다.
“그럼 인사는 이쯤 해 둘까?”
“……?!”
나지막한 그의 중얼거림과 함께, 연의 표정이 굳어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던 일행들의 앞으로,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연! 지금 뭘 하는 거에요?!”
“……”
그리고는 말 없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은 베르톨도가 아닌, 은가람 일행들을 향해서였다.
* * *
“놀랐나?”
“……”
여유로운 말투와 함께, 베르톨도는 걸음을 옮겨 다시 왕좌로 향했다.
처음부터 이런 것은 하찮은 장난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왕좌에 앉아 한쪽 턱을 괸 채로 그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알려줄까? 저항은 무의미해. 뭐, 그런 말을 해 봤자 듣기야 하겠냐만은.”
그의 말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당연했다.
처음부터 눈 앞에 있는 이들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길가에 기어가는 개미를 보고 긴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이들의 존재가 그에게는 아무런 위협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흥미가 있다.
단지 그뿐이었다.
“네 행보는 어느정도 지켜보고 있었어. 그 나이에 정말이지 대단하더군. 20대 중반의 나이에 헌터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도 모자라, 케히빈 이론을 뒤엎는 이론까지. 그 모든 과정이 전부 1년 안에 벌어진 일이라……”
“알아. 내가 좀 잘나서 말이지.”
“특히나 살바토리오를 죽였을 때는 더 놀랐지. 정말로 감탄했다니까?”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그는 웃음을 흘렸다.
“너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더군. 마치……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과도 같았어.”
“…개소리도 디테일하게 지껄이는군.”
“그래서 널 불러들인 거다. 너 같은 녀석은 눈으로 한 번 보고 싶었으니까.”
“불러들였다고…?”
은가람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지. 연은 스스로의 의지였다고 생각했겠지만…… 글쎄? 지금도 스스로의 의지와는 달리 내 뜻에 따르고 있지 않나.”
그는 턱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연을 가리켰다.
그를 호위하듯 은가람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는 연.
은가람은 낮게 혀를 찼다.
“그래서, 이 나의 천재성이 두렵기라도 하셨나? 이렇게까지 판을 벌릴 정도면 말야.”
“두려워? 하하하… 역시나 재미있군.”
잠시간 그렇게 웃음을 흘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단순히 네가 흥미로웠을 뿐이다. 그래서 한 가지 물어보도록 하지. 내 밑으로 들어 올 생각은 없나?”
“……”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힘을 줄 수도 있다. 지금 네가 가진 힘의 다섯 배 정도는 거뜬하게 말이야.”
* * *
‘안돼…! 절대로 그의 제안을 받아서는……’
은가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연은 속으로 소리쳤다.
힘에 대한 달콤함 유혹.
아니, 단순히 힘 뿐만이 아니었다.
재력이면 재력, 권력이면 권력.
정말로 그가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거짓이 없었다.
지금의 위치에 자신을 올려 준 것 역시도……
샤오레이가 아닌 그의 짓이 분명했으니까.
‘제발… 제발 움직여! 내 몸이잖아! 한 마디라도 제발……’
그녀는 마음 속으로 절규했다.
몇년 전, 가족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직접 처단해야만 했을 때의 그 기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보다 담담했다고.
흑사회를 위해서 해야 했을 일이라고.
그리고 그들의 바람 만큼, 자신은 더 굳건하게 흑사회를 이끌어야만 한다고 여겼었다.
그렇게 가진 모든 재능을 동원해서 지금의 흑사회를 만들어냈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그들 역시도, 하늘에서 보고 안심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담담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만.
소리 없이 절규하는 방법을 배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겨우, 그녀는 진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죄책감으로 가려져 있었던 탓에 알지 못했던 사실.
직접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을 빌려 베르톨도가 저지른 짓이었다.
지금처럼, 몸의 통제를 빼앗아서.
결국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흑사회를 굳건하게 일으켰든……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은 그저, 가지고 놀다가 버릴 인형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랬기에 그는, 은가람이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이제껏 봐 왔던 은가람의 모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지금, 그녀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 * *
“힘이라. 그것 참 솔깃한 제안이긴 한데 말야.”
“선택은 순전히 너의 몫이다. 이 제안을 위해 널 부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는 그렇게 덧붙였다.
“한 가지 묻자.”
“……?”
“그렇게 내 힘을 빌려서까지 하려는 일이 뭔데? 어디, 타워라도 올라가시려고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긴 했다.
물론, 그가 제공해 주겠다고 하는 힘을 받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건 결국 그의 꼭두각시가 되라는 말과 같았다.
이런 놈이랑 한 배를 타는 것이 껄끄럽기는 했지만, 적을 가장 가까이 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와 함께 갈 수 있다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많았다.
‘우선은 여기서 무사히 살아나가는 것부터가 이득이지. 다른 일행들의 목숨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고.’
그의 의지에 따른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건 곧 내게 힘으로 돌아온다.
그와 더불어서, 타워 안에서 그를 배신하게 된다면 돌아오는 것들도 있겠지.
그러나 베르톨도는 고개를 저었다.
“타워를 올라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난 그저 헌터 협회를 장악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전 세계의 통제권을 틀어쥐는 것. 그것이 내 목적이다.”
“뭐, 좋지 않은 어린 시절 때문에 세상에 불만이라도 있나봐?”
“음……? 딱히 그런 건 없다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
의아하게 바라보는 내게, 그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가장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그게 전부다. 이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뭐……?”
현화 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몇 년 전 런던에서의 일은 꽤나 재미있었지. 한국에서도 그런 일을 벌여 볼까 했지만…… 아쉽게 되었어?”
대수롭지 않은 일을 설명하듯 그는 웃음을 흘렸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현화 쌤이 이를 갈며 말을 내뱉었다.
“고작… 고작 그딴 이유로, 아니 이유조차 없이 이런 짓을 감행했다고…?”
“그렇다만? 마치 내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처럼 이야기하는군.”
“그걸 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누군가에게는 부모이자 가족, 그리고 자식이었을 사람들이! 그런데…… 그런데 너는…! ‘재미있어서’?!”
“……”
분개하는 현화 쌤.
굉장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많이 변했어.’
회귀 전이었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야 인지도가 높은, 정말이지 세계에 있을까 말까한 천재로 불렸던 그녀였으니까.
마인들이 쏟아져 나올 당시 그녀가 펼친 이론이 수많은 사람들을 구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미 알고 있던 이론을, 왜 이제서야 가져온 것이냐고.
처음 그녀가 주장한 것들을 ‘쓰레기’라고 서슴없이 불렀던 이들이, 되려 ‘왜 이렇게 늦게 발표했냐’고 그녀에게 화를 냈다.
결국 거의 빌런 취급을 당하던 그녀는 환멸을 느끼고는 타워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타워에서 그녀에게 들었던 말.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여전히 타인을 생각하고, 남을 구하려고 하는 모습.
실제로 그녀의 위상이 떨어지기는 커녕, 가히 최고조로 올라가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참…… 이런 모습도 보다보니 감회가 새롭기는 하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 생각을 떨치며, 나는 지금의 상황에 집중했다.
진득한 살기를 피워 올리는 현화 쌤.
그런 그녀를 향해, 베르톨도는 웃으며 말했다.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 마피아에게 그런 정의로운 것을 바라다니 말야.”
“……”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 말은 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