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102. 동작그만
[설마 이겼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
회심의 일격에도 멀쩡한 아라크네를 보며 한아름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속도 면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현진과, 정밀하면서도 강직한 검술을 구사하는 세바스찬.
그리고 그들의 연격 직후에 이어지는 자신의 육중한 타격.
제 아무리 삼각수라고 한들, 자신들의 공격을 버텨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같은 또래에 비해서는 월등히 강하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학생이었다.
갑작스럽게 뒤집힌 상황에 패닉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이게 어떻게 된…?”
[후후, 우선은 너부터!]
쐐애액!
“!!”
바로 코 앞에서 서 있던 한아름.
그런 그녀에게로, 날카로운 거미줄이 쇄도해 들어갔다.
피하기는 이미 늦은 상황.
“비켜!”
스걱-!
아라크네의 공격을, 현진이 이를 악물고 베어냈다.
간발의 차로 빠져나가는 한아름.
그리고 다시 한 번 세바스찬의 공격이 이어졌다.
후웅- 카가가각!
[쯧, 벌레같은 놈들!]
몸을 뒤쪽으로 물리며 거미줄을 쏘아대는 아라크네.
어느새 끈적한 거미줄이 하나 둘씩 쌓이기 시작하는 공간.
재빠르게 몸을 놀리며, 세바스찬은 두 눈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덩치는 크고 몸집은 단단하지만, 계속해서 근접전은 피하고 있다. 결국 주 무기는 배에서 뽑아내는 거미줄…… 그렇다면!’
사정거리 안쪽으로 파고든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현진과 아름에게 그 사실을 신호로 전달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지는 전투.
금방이라도 끝날 것만 같았던 셋은 가진 전력을 끌어올려 아라크네와 맞서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지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세바스찬이, 아라크네의 빈틈을 정확하게 파고들어 접근했다.
순식간에 거미줄이 닿지 않는 거리로 파고든 그.
그의 손에서 기사의 검이 빛을 발하려던 순간이었다.
[멍청하긴.]
“!!”
분명 빈틈을 보인 줄로만 알았던 아라크네가,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다리를 휘둘렀다.
퍼컥!
“크억!”
미처 예상치 못한 공격에 나가떨어지는 세바스찬.
벽까지 날아가 박힌 그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주 잠시간 드러난 한아름과 이현진의 빈틈.
아라크네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이어갔다.
[일단 먹잇감을 잡아 볼까?]
슈아아악!
미처 대처할 새도 없이 날아드는 거미줄.
그러나 앞서 그녀가 날렸던 강철같은 거미줄과는 달랐다.
유연하면서도 끈적이는 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던 전세가 한 순간에 뒤집어졌다.
“큿……!”
“제,젠장할!”
정신을 잃은 세바스찬과, 온 몸을 묶인 나머지 둘.
간만의 만찬을 바라보며 아라크네는 입맛을 다셨다.
[자아, 그러면 어떤 것부터……]
그리고 그 때.
달칵.
굳게 닫혀 있던 문 하나가 열렸다.
차현화와 은가람이 들어가지 않은, 마지막 문이었다.
***
“하아…… 더럽고 추악한 커플 같으니.”
자신의 트라우마에 갇힌 라우라를 끌어올리는 서현.
정신을 차리는 그들을 보며 현화는 그런 감상을 내뱉었다.
올해로 만 29세.
남자친구, 혹은 남편 없음.
그런 그녀의 눈에 아직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꼬맹이들이 꽁냥대는 모습이 마냥 흐뭇하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에휴, 내 팔자야.”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만에 마력을 쏟아부어서인지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그럼에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말로야 커플이니 뭐니 했지만, 그녀로서도 서현이나 라우라가 그렇게 미쳐 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면…… 어디 다른 녀석들은 무사히 있나?”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그녀는 바깥 상황을 보기 위해 다시금 투시를 발동시켰다.
“……어…?”
은가람의 부재를 발견한 그녀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쯤이면 벌써 나와서 날뛰고 있어야 할 시간인데……?’
밖에서는 여전히 세 명이 한 마리의 아라크네를 상대하고 있었다.
평소 서로 티격태격 하기는 해도, 나름 친해졌기 때문일까 그들은 꽤나 남다른 호흡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상대가 삼각수이기 때문일까, 그들의 상황은 그리 좋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쯧……! 은서현! 라우라! 그만 정신 차리고 일어나!”
“으으…… 머리 아파.”
“……”
아직 정신적인 부하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그들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현화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이제 막 정신 차린 둘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나머지 셋이 죽을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젠장할…! 하여간, 나약해 빠졌다니까?”
“불평할 때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문 앞에 전개되어 있는 결계를 열었다.
완전한 컨디션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 돌대가리는 뭘 하고 있는 거야?’
굳게 닫힌 문을 열며, 그녀는 투시의 범위를 넓혀 은가람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 옘병할.”
나지막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이미 진즉에 일을 처리한 은가람과 그런 그에게 바짝 붙어 안겨(?) 있는 한주희의 모습이었다.
“진짜 커플 다 터져버렸으면.”
***
[이…이게 뭐지……?!]
일순간 굳어버린 자신의 몸.
분명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하던 차였기에 그녀의 표정에는 의아함이 가득 물들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아교라도 잔뜩 발라 놓은 것 처럼 온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크윽…! 큿! 젠장!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자신의 거미줄에 속절없이 묶여 있는 둘에게, 아라크네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런 그녀의 귀에, 차가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 거 없어요. 당신이 한 거랑 똑같이 묶어 둔 것 뿐이니까.”
[……?]
옅은 웃음기를 머금은 여성의 목소리.
자신의 눈 앞에 여유롭게 걸어 오는 그녀의 모습에, 아라크네는 이를 빠득 갈았다.
[네 년 짓이구나! 하찮은 인간 따위가…… 고작 이런 것에 내가 무너질 것 같으냐?!]
끼이이익…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녀의 몸.
거대한 몸에서 나오는 힘으로 자신의 구속에 저항하는 아라크네를 보면서도, 여성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훗…! 마력에 타격이라도 온 모양이지…?! 그러게 왜 주제도 모르고…!]
화악!
공간 속에 고정되 있던 아라크네의 몸이 일순간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금 무언가에 걸려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
뒤늦게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여덟 개의 다리 중 세 개가, 예리하게 잘려나갔다는 사실을.
촤아아아……
[크아아악! 크으으… 아아아악!!]
시꺼먼 색의 피를 뿜는 다리.
한 박자 늦게 내달리는 격통에 그녀는 몸부림쳤다.
아니, 그런 몸부림조차 제대로 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떨어야만 했다.
그런 그를 차갑게 바라보던 여성.
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해주는 게 늦었네요. 그건 ‘은사’라서, 섣불리 움직이려 들면 잘려나간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크으…! 인간 따위가…!!]
“후훗. 정말 재미있으시네요?”
살짝 웃어 보이는 연.
“─고작해야 삼각수 따위가.”
[…!!]
그리고는 은사에 주입된 마력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그녀의 손 끝에서 뻗어져 나온 수십, 수백 갈래의 은사가, 단숨에 아라크네의 몸을 옥죄었다.
퍼컥!!
순식간에 조각조각 분리되는 아라크네의 몸.
상대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묶여 있는 두 명에게로 다가섰다.
단단히 굳어버린 거미줄을 향해, 그녀는 품 안에서 자그마한 나이프를 꺼내 그었다.
대충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선 하나를 그었을 뿐인데도 현진과 아름을 구속하던 거미줄이 후두둑- 잘려 나갔다.
“고생 많으셨네요.”
“……?”
“그 쪽은 분명…… 어디선가…?”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 둘.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으나, 정확하게 언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들이 연을 마주했던 것은 코사 노스트라의 품평회를 습격하기 전이었으니까.
“연 이라고 합니다. 부족하게나마 흑사회의 수장을 맡고 있는 몸이죠.”
“……!”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는 이현진과, 경악한 표정의 한아름.
잠시 후, 한아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그 쪽이 ‘그’ 연…이라는 거죠?”
“……? 정확히 어떤 연을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맞지 않을까요?”
고개를 갸웃하는 연.
“신월과 어느 정도 연관이 되어 있는?”
“부정할 수 없네요.”
“은가람과의 거래 때문에 은가람을 데려가기도 했구요?”
“그것도 맞네요.”
“그리고 한동안 단둘이서, 이 주 가량을 ‘끈적하게’ 보냈다는 그 연…?”
“……”
처음으로 대답을 망설이는 연.
그녀의 뒷편에서, 은가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현진이나 서현같은 애들이랑 있다 보니 너도 헛소리가 옮았냐?”
“어…? 가람아! 언니?!”
기절한 한주희를 업고 온 은가람.
걱정스런 표정으로 단숨에 달려오는 한아름에게 그는 말했다.
“걱정할 건 없어. 잠시 기절한 것 뿐이니까.”
“기절이라니…… 언니가?”
한주희의 몸을 받아들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 한아름.
그녀의 입장에서는 천하의 한주희가 ‘기절’이라는 것을 한다는 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아, 좀 많이 힘들었나 보더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사실 한주희가 기절한 것은 트랩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자신이 잘못 건낸 묘약만 없었어도 단숨에 파훼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덮치려고 들지도 않았겠지.’
결국 한주희를 기절시킨 것은 은가람 본인이었다.
그랬기에 괜히 한아름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고.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안 오실줄 알았는데.”
우앙 천 헤이의 죽음과 샤오레이를 족친 사건 이후, 연락이 되지 않던 그녀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은가람에게, 연은 고개를 옅게 웃으며 말했다.
“파티의 주최자가 파티에 빠질 수는 없잖아요?”
“하긴, 파티로 치자면 이 던전이 하이라이트기는 하겠네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지만요.
그렇게 덧붙이는 은가람.
그 즈음, 라우라를 구하러 들어갔던 현화와 서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물에 젖은 솜마냥 지친 모습으로.
“뭐야? 서둘러야 한다고 하더니…… 다 끝났잖아?”
“다행이네. 그래도 누구 하나 다치지 않아서.”
“……쌤, 저기 세바스찬 씨는…”
현진의 말에 현화는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었다.
“에이, 괜찮아. 그래도 명색이 귀족가의 기사님인데 저 정도에 죽을까?”
“……”
물론, 그녀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세바스찬의 상태가 위중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챈 후였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녀의 귀에, 은서현의 아니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무책임한 교사 아니냐?”
“조용히 해라, 꼬맹아?”
“이…노처녀가?!”
“이런 썅?!”
서로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조금은 긴장감이 풀어진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사이로, 조용히 대화의 중심에서 빠져나간 은가람.
남의 시선을 피해, 그는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날카로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날아와 박혔다.
“야, 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