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89. 머리속이 깨끗한 것 뿐이라고
“잠시 이야기좀 하시죠.”
샤오레이가 은가람을 방문한 다음 날 저녁.
그를 찾아 온 한 여인이 있었다.
그 목소리를 알아본 샤오레이가 입매를 말아올렸다.
“의외인데? 설마 벌써부터 찾아올 줄이야.”
“마치 제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군요.”
“그야 알고 있었지.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의 속은 벌써부터 기대감으로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후후…! 설마하니 벌써부터 일을 처리했을 줄이야!’
부탁했던 일이 벌써부터 이뤄졌다고 철썩같이 믿는 샤오레이.
그를 찾아 온 사람은 다름아닌 연이었다.
들뜬 마음에 스킬 창조차 켜 보지 않은 채로, 그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야 좀 마음이 바뀌었나봐?”
“무슨 말씀이시죠?”
“다 알고 있다고. 네가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말이야. 하긴…… 너로서도 어쩔 수 없었겠지.”
연의 표정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흑사회의 리더로서 있는 만큼, 그녀 역시도 정보가 얼마나 쉽게 새어나가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개인적인 사안이었기에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어차피 그런 것 따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죠.”
“그래, 그래. 네 마음이 그렇다면 나 역시도 환영이야. 자, 그럼……”
그렇게 말하며 양 팔을 벌리는 샤오레이.
그런 그를 연은 한참 동안이나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뭐하시는 거죠?”
“뭐 하긴? 마음 놓고 안기라, 이 말이지.”
“말씀드렸을 텐데요? 당신에게는 흥미 없습니다.”
“……뭐?”
“뭔가 새삼스러울 이유라도?”
“자,잠깐, 넌 먹지 않은 거야?”
“뭘 말이죠?”
“……”
그제서야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은 샤오레이.
얼굴을 붉히는 그를 바라보며 연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네요. 어제 은가람 헌터를 만나러 간 걸 보면…… 분명 그와 모종의 거래를 시도했을 터.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것은 은가람 군이 수락했다는 것이겠지만……’
그 내용이 무엇이든, 그 거래는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확신했다.
이제껏 자신이 지켜 본 바, 은가람이라는 사람은 그리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워 보여도, 그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까.
마치 그런 그의 태도가 연막처럼 비치기도 했다.
20대 중반의 앳된 외모 뒤에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한 백전노장이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그는 자신의 이익이 있을 때에만 행동하는, 그야말로 이기적인 사람. 그러나 고작 그런 이기심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를 쉽사리 버리지는 않죠.’
그런 그라면, 자신과는 다를 것이다.
한 때 어리석고 순진했던 예전의 자신과 달리, 샤오레이의 술수에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었기에, 그녀는 그를 선택했던 것이다.
‘마침 잘 됐네요.’
*
안도하는 그녀와 달리, 샤오레이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젠장, 아니었어?!’
다급하게 스킬 창을 확인해 보는 그.
당연하게도, 은가람이 거래를 이행하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속박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그런데 어째서 찾아 온 거지? 설마 그 이야기를 발설한 건가? 하지만……’
여전히 계약서는 건재했다.
비밀 엄수에 대한 항목 역시도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었기에 그가 입을 함부로 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제 분명 연은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어. 정보가 새어 나갈 리는 없고……’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 그가 거래사항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는 말.
‘단순한 착각……?’
그런 생각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그.
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에게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온 건 거래를 하기 위함입니다.”
“음…? 거,거래?”
“네.”
“나와 거래를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는 거겠지?”
본래라면 자신 쪽에서 제안해야만 효력을 발휘하는 거래자의 스킬.
그러나 지금처럼 상대가 그에 관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경우는 그 반대의 경우도 상관없었다.
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
“흐음…… 일단은 요구사항부터 들어 보고 이야기하지.”
“제 요구사항은 은가람을 죽여달라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댓가는……”
*
“이야…… 확실히 성역은 성역인가봐? 이중 삼중으로 결계를 쳐 놓은 걸 보면 말야.”
이른 새벽부터 성역을 방문한 나는 그 주변을 맴도는 진득한 마나에 혀를 내둘렀다.
“감지.”
[감지_공간 변이 결계(A)]
[단체 캐스팅]
[감지_환영 결계(C+)]
[단체 캐스팅]
[감지_격리(B)]
[단체 캐스팅]
공간 변이에 환영, 그리고 마력이 새어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격리 스킬이라.
“안쪽에 뭘 숨겨놨을지 궁금한데?”
성역이라느니 뭐니 잘 포장했지만, 결국 뒤가 구린 놈들일 수록 숨기는 게 많은 법이다.
나는 양 손을 앞으로 뻗어 마력을 집중시켰다.
“흐으읍! 후우우우……”
깊은 심호흡과 함께 마력을 운용한다.
지금까지 꽤 많은 제약이 풀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전처럼 마구 날뛸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볼 만하단 말이지!’
아카데미 대항전에서 선보였던 기술을 떠올렸다.
마력을 조절해 이미 전개된 마법이나 스킬의 빈틈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일시적으로나마 그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라면 이론을 알고 있어도 보유 마력의 한계로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 테지만, 지금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꽤나 따라잡았다고!’
파지직…! 파직!
손 끝에서 일기 시작하는 스파크.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조금씩 일렁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스파크가 인다는 것은 결국 마력간에 충돌이 생긴다는 것.
조금 더 마력을 쏟을 필요가 있었다.
“증폭……!”
결국 나는 증폭마법까지 사용하여 한계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얼마나 힘을 쏟았을까-
츠즈즛!
“…!!”
일순간이나마 결계 사이로 빈틈이 생겨났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슬아슬하게 비치는 공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성역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흐아악?!”
츠팡!!
간발의 차로 뒷편에서 닫혀버리는 틈새.
언제 그랬냐는 듯, 결계는 건재한 상태로 성역을 격리시켰다.
“후우…… 아슬아슬하게 들어 오기는 한 건가?”
결계 밖과 비교해서 큰 차이는 없는 성역.
결계가 작동하는 방향이 바깥쪽 뿐인지, 안쪽에서는 바깥 풍경이 무리 없이 보였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신호를 확인했다.
“양호한 정도는 아니지만 신호는 잡힌단 말이지. 전파 정도라면 미미하게나마 결계를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인데……”
문제는 텔레포트 마법이나 공간 이동 계열의 마법이 어떻게 작용할지가 관건이다.
설마 그럴까 싶긴 하지만 혹시라도 여기에-
“어머, 역시 오셨네요.”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내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낯익은 목소리.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
“연…?”
나를 여기로 데려 온 연이었다.
*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엄한 곳에는 발 들이지 말라고.”
싱긋 웃으며 말하는 연.
은가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이거 어쩌나? 호기심이 워낙 강해서.”
“이 이상은 제가 통과를 허락하지 못합니다. 결계의 입구를 만들어 드릴테니 나가시죠?”
“그렇게는 못하지? 이 뒤에 뭐가 숨겨져 있는지 봐야겠거든.”
분명 서로를 향한 적개심이 담긴 문장이었지만, 정작 둘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군요. 여기서 제가 막아야겠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너와 싸워야겠네.”
손 발이 척척 맞는 둘.
마치 원래 그런 시나리오가 있기라도 한 것 처럼, 둘은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연은 평소 사용하던 은사를, 그리고 은가람은 예비용으로 소지하고 다니는 두개의 단도를.
잠시간 주변을 감싼 정적 속에서, 연이 입을열었다.
“조금은,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에요.”
“……”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은가람.
이번에 연의 말은 진심이었다.
탓!
먼저 몸을 움직이는 은가람.
재빠르게 앞으로 도약한 그를, 연은 담담하게 막아내 갔다.
키이잉!!
카가가각!
두 개의 단도와 은사가 맞부딪히며 허공에서 십수 개의 불꽃을 자아냈다.
사아악!
“……!”
은가람의 목을 휘감아가는 얇은 은사.
육안으로 분별하기 힘든 그것을, 은가람은 본능적으로 피해냈다.
아슬아슬하게 연의 은사에서 벗어난 후 공포잔상을 이용해 연의 뒷편으로 이동한 은가람.
그러나 여타의 헌터들과 급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듯, 연은 공포 잔상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의 다음 공격을 풀어나갔다.
‘쯧……! 역시 아직은 안되나…?’
협회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았을 뿐, 흑사회의 우두머리라는 위치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꽤나 많은 제약을 풀어낸 은가람이었음에도 아직 그녀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분명 죽지는 않으리라.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핏!
자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은사를 피해내며, 은가람은 빠르게 자세를 낮췄다.
쿠웅…!
바닥이 깊게 패일 정도로 땅을 박차는 그.
연도 그에 맞서 은사를 쏘아보냈다.
“헬 플레어_Hell Flare!!”
은가람의 한쪽 손에서 뜨거운 염화가 피어올랐다.
연이 뻗어낸 십수 가닥의 은사를 녹여버리는 불꽃.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다시 한 번 은사가 몰아쳤다.
“흐압…!”
콰가각!!
이번에는 한 손에 쥔 단도로 은사를 걷어내는 은가람.
옅은 마력을 둘렀음에도, 철로 만들어 진 단도는 속절없이 부서져 나갔다.
그러나 그렇게 생겨난 작은 틈.
그것이 은가람에게 필요한 전부였다.
순식간에 연의 코앞까지 접근한 은가람.
단도를 버린 그의 오른손 끝에서, 다시 한 번 마력이 터져나왔다.
“쇼크 웨이브_Shock Wave”
츠파아앙!!
“……!”
연의 복부에 고스란히 작렬하는 그의 스킬.
그녀의 몸을 관통한 충격파가 그녀의 등에서 터져 나왔다.
스르륵……털썩.
“후우……”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진 그녀.
은가람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역시 한 시도 방심할 수 없는 여자라니까……”
사실상 이번 전투는 단순한 명분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연이 자신을 부른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힘이 부족했다면 연은 가차 없이 자신의 목을 날렸으리라.
“자 그럼…… 뭐가 숨겨져 있는지 볼까?”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내며, 은가람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
“연과의 전투는 잘 봤습니다.”
“역시 너였냐?”
너무 뻔한 전개에 레파토리에 은가람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성역의 중심부에 위치한 거대한 제단.
멀리서도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제단은 평범하지 않았다.
“단순히 신같은 걸 모시려고 여기 있는 건 아닐테고.”
“뭐, 비슷하긴 하죠. 그래서, 제가 부탁한 건은 완료하셨나요?”
비릿한 미소를 짓는 은가람.
“글쎄? 생각해 보니 다시 한 번 고려하는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뭔가 꿍꿍이가 있으시군요.”
“아니? 그딴 건 없고…… 굳이 내가 너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나, 라는 회의감에 빠졌다고 해야 할까?”
“……”
그의 말에 샤오레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언제는 ‘같은 남자’라느니 하는 말로 금방이라도 들어 줄 것처럼 하더니.
‘결국은 다 연기였던 건가…!’
그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거래를 파기하시겠다는 말인가요?”
“뭘 새삼스레? 당연하지. 너도 그럴 생각 아니었냐?”
“큿……!”
싱글싱글 웃는 은가람과 달리, 샤오레이의 표정은 점점 썩어들어갔다.
그러나 그에게도 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후회하시게 될 텐데요.”
“그렇게 만들어 봐. 제발 좀. 니놈 사랑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고 말야.”
비꼬는 투가 다분한 은가람의 말에도 샤오레이는 입매를 말아올렸다.
“후후……그걸로 제가 죽이지 못할 줄 알았다면 오산입니다. 그 건은 이미 해결된 것 같거든요.”
“음……?”
“풋! 당신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했겠죠. 그 누구보다 똑똑하고, 뛰어나다고!”
은가람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대답했다.
“으음…… 어느 정도 그렇긴 해. 맞아. 솔직히 내가 짱 먹은 적이 있어서 말이지.”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회귀 이전 그를 당해낼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말을 믿을 리 없는 샤오레이는 그것으르 단순한 허세로 치부했다.
“하하핫! 바로 그것이 당신의 눈을 가렸기에,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리석군요!”
“……?”
“그거 아십니까?! 당신을 죽여달라고 한 것이 바로 연입니다! 그 거래의 댓가로,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걸었으니, 당신만 죽는다면……”
─모든 것이 저의 뜻대로 되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려던 샤오레이는 미처 뒷말을 끝맺지 못했다.
“푸하하하하!!”
“……?”
한쪽 손가락으로 귀를 파던 은가람이, 돌연 박장대소를 터뜨렸기 때문이다.
“야, 너 진짜 바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