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86. 날먹 (86/114)



〈 86화 〉86. 날먹

“어머…… 알고 계셨나요?”

은가람의 말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여성.

연이었다.



“알고 있고 자시고, 만나자고 약속을 했으면 당연히 나와있겠지.”
“후훗…… 그것도 그렇네요.”


“하아……”




옅은 웃음을 흘리는 연을 바라보며 은가람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게 된 지도  오래 되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괜찮겠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아도……”
“아아, 상관없어.”

“하긴…… 자립심을 길러 주는 것 역시도 교사가 해야 할  중 하나죠.”


“그냥 극적인 등장을 좋아해서 그런 건데?”


“어머, 그런가요?”

“……”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되받아치는 연.
정말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라고, 그는 생각했다.



“헛소리 할 시간에 빨리 출발이나 하지?”

*

일반적인 여객기와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은 전용기.
그러나  내부에 탄 인원은 은가람과 연, 그리고 흑사회의 일원들 몇 명이 전부였다.


휑한 비행기 안쪽에서 퍼스트 클래스에 버금가는 좌석에 앉은 은가람.


자신의 디바이스 위에 떠오른 창을 훑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리웨이?”

그의 디바이스에 떠오른 것은 그의 가짜 신분.
중국에서 지내는 동안 그가 사용할 이름과 신상정보들이었다.


“나름 흔한 이름 중에서 골랐어요. 굳이 특이한 이름을 고를 건 없잖아요?”
“뭐…… 나쁘지 않네. 그다지 오래 쓸 것도 아니고.”

“어머, 조금은 감회가 새로워도 좋을 텐데. 나름 고심한 끝에 정한 거랍니다?”


안색 하나 안 변하고 말하는 연에게 은가람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그러시겠지요.”
“마음에 드시는  같아 다행이네요.”

“……”



괜히 말해 봐야 입만 더 아프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디바이스의 창을 꺼버렸다.

창 밖으로 내리비치는 구름을 훑던 그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아무리 흑사회라고는 하지만 너무 큰 거 아닌가?”
“그런가요? 저는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흑사회의 인원도 꽤나 많으니까요.”


“그  이 여객기를 이용하는 사람은 손에 꼽지 않나?”


“그것도 그렇지만요. 공식적으로는 신월 아카데미 소유의 비행기니까 크게 상관은 없는걸요.”




그렇게 대답하며 연은 자신의 테이블에 놓인 와인 잔을 집어들었다.

크리스탈 잔에 든 레드와인을 음미하는 그녀를 향해 은가람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진짜 용건이 뭐야?”
“어머, 무슨 소리일까요? ‘진짜 용건’이라~?”

“말 돌리지 마시지? 설마하니 진짜로 애들이나 가르치라고 그만한 정보를  리도 없고.”

“후훗, 정보의 가치를 아는  정말 마음에 들지만……”




 끝을 흐리는 연.
잠시  그녀는 은가람을 직시하며 말했다.



“……신월에서는 너무 날뛰지 말아요. 괜히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니까.”

“……?”



분명 평소와 같은 표정.
그러나 그녀의 말에서 드러난 묘한 이질감을, 은가람은 놓치지 않았다.


‘자기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 이건가?’

신월, 혹은 흑사회 내부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스스로 말할 수 없다라……’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연은 현재 흑사회의 리더이자, S급의 전력을 가진 강자였다.

단순히 자신의 힘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런 그녀라면 기내의 다른 인원들이 모르게 전음을 보내는 것 정도는 쉬웠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정신 지배 계열인가.’


그런 생각을 삼키는 은가람.


문득, 연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은가람 헌터는 이번에 처음으로 중국에 방문하시는 거죠?”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회귀 전에는  번씩 방문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 때부터 왕천휘 자식은 마음에 안 들었지……’

툭하면 남을 깔보고 비웃기 바빴던 녀석.
꽤나 오래 전 일을 떠올리는 그를 보며, 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정말이지 불가사의하신 분이네요? 분명 방문 기록은 없던데 말이죠.”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로 돌아온 연.
은가람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대체 왜 물어본 거야?”


“후훗…… 아무것도 아니에요. 필요하시다면 가이드라도 붙여 드려야 하나, 싶었거든요.”

-통역도  겸.




그렇게 덧붙이는 연.
은가람은 간단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어머?”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북경어였다.




“예전에 기회가 돼서 배워 둔 적이 있거든.”
“그랬군요. 그런데도 한국어를 고집하셨네요? 저, 나름 불편했는데 말이죠.”


“지금도 한국어 잘만 하는 주제에.”

“후훗……”

잠시 웃음을 짓던 그녀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럼 통역은 필요 없으시고…… 중국의 문화… 아니, 신월의 교칙에 관한 것들은 알아두시는게 좋지 않을까요?”


“그거야 어딜가나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어머, 아니에요. 신월에서는 반드시 지켜야만  교칙이 있답니다?”

“……?”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은가람.

연은 평소와 전혀 다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월에서는 관계자가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 있어요. 그런 엄한 곳에는…… 절대로 발을 들여놓으시지 마세요.”
“엄한 곳이라…?”

묘한 웃음을 짓는 은가람에게 연은 쐐기를 박았다.



“자칫 들켰다가 죽을 위기에 처해져도, 저는 몰라요? 후훗…”


그녀의 말에 은가람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쯤이야, 어렵지 않지.”


*


“우…우앙 천 후에이 헌터! 확인되셨습니다! 무사하셔서……”
“닥쳐, 시끄러우니까.”


“…네,넵!”

공항에서 자신의 신분증을 확인하던 직원을 향해 우앙 천 후에이는 가차 없이 폭언을 내뱉었다.

온 몸을 덮은 크고 작은 상처들.
처참하게 부러져 무기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청룡극.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그것 자체가 그는 너무나도 싫었다.




‘젠장할…!  내가! S급 헌터 중에서도 최강인 이몸이…!!’

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공항을 가로질렀다.


자신에게 모여드는 시선들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거 봐, 결국 저렇게 된다니까?
-쎈  해도 결국은 저 꼴이지.


-킥킥…… 또 속았다지?

-멍청하지 않아?


-공부나 좀 열심히  것이지……

-쟤 부모는 그렇게 머리가 좋다더니?




주변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수근거리는 소리에, 그런 말들이 담겨 있는 듯했다.

바보, 멍청이.
머리 나쁜 놈.


그런 수식어가 자신을 맴돌며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러게, 부모가 하라고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지……

결국 그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시끄러!!! 전부 닥쳐!!”


“……?”
“……”

일순간 정적이 가라앉은 공항.
꽤나 넓은 공간이었음에도, 마력을 담은 그의 목소리가 퍼지기는 충분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과, 두려움에 떠는 이들까지.


“쳇……!”

그들을 무시하며, 우앙 천 후에이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공항을 나서고 나서야, 멈춰 섰던 공항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자신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세워진 높은 빌딩.

그 옥상에 위치한 야외 욕탕에 몸을 담그며, 우앙 천 후에이는 베이징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전경.

그 부감풍경이 그의 마음을 한결 가라앉혔다.


“후우…… 그래. 걱정할 필요 없지. 그런 꼬맹이 따위, 내가 신경 쓸 게 뭐야?”


지금은 오히려 베르톨도를 신경써야 할 때였다.

‘분명 놈도 내가 살아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지. 개같은 놈…! 내 손으로  자식을……’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꽤나 아름다운 전경이군요.”

“……?!”



낯선 남자의 목소리.

우앙 천 후에이는 일순간 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그의 뒤편에는 언제 온 것인지 후드를  눌러 쓴 남자가 서 있었다.


“겁대가리 상실했냐?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아아, 너무 그렇게  세우지 마세요, 우앙 천 후에이 헌터.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요.”


“쯧…!  집에 멋대로 들어온 주제에 말이 많아!”

촤아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침입자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물 속에서의 일격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재빠른 공격.



뻗어진 그의  끝에서 권풍이 불며, 후드의 남자를 강타했다.

후우웅- 퍼어억!


누가 집어 던지기라도  것 처럼, 한쪽 벽에 쳐박히는 남자.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조금은 만족이 되셨습니까?”
“넌…… 뭐지?”


“하하, 뭐냐니요. 저야 보잘것 없는 흑사회의 일원일 뿐이죠.”


“……원하는게 뭐야?”


그제서야 벽에 쳐박혔던 남자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벗겨진 후드의 안쪽에서는, 사람의 형상을 닮은 인형이 드러났다.


“당신의 도움을 좀 받았으면 하는데 말이죠.”
“흥! 꼭두각시를 보내는 놈과의 거래 따위, 내가 할 것 같냐?”


“글쎄…… 말씀을 들어보시면 조금 마음이 바뀌실 텐데요?”

“……?”




“은가람이 살아있습니다.”






*




베이징에 위치한 거대한 아카데미.


그 크기를 과시하기라도 하듯, 신월의 규모는 상당했다.


꽤나 크다고 알려진 아발론과도 비견될 만한 크기.

‘물론…… 딱히 비교할 만한건 크기밖에 없겠지만 말이지.’




신월을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분명 신월에도 뛰어난 인재가 많고, 교사진들 역시도 우수한 헌터들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다만 아발론은 규격 외였다.




‘애초에 아발론의 교장부터가 혜안의 선택자라 천재 중의 천재만 뽑을텐데…… 그걸 따라가려니 되나?’

그렇다고는 해도, 화려함 면에서는 신월을 따라갈 아카데미를 찾기 힘들 것이다.


고대 건축양식을 절묘하게 섞은 건물들이나, 화려한 문양을 새긴 기둥, 붉은 빛 계열의 화려한 보도블럭까지.

중국의 아카데미라는 사실을 전력으로 과시하듯, 아카데미 전체에 중국의 느낌이 진득하게 풍겼다.


‘뭐, 나쁘지 않지. 진작부터 이렇게 지네들 문화를 고집했으면 얼마나 좋아?’

조금이라도 좋아 보이면 자기들 꺼라고 우기지 말고 말이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런 내 옆에는……




“은가람 헌터? 저기로 한 번 가 보죠. 저 쪽에도 나름 볼거리들이 많으니까요.”


“……언제는 제 의사는 물어보셨나요?”


“어머, 전 항상 그랬답니다?”

항상 그러기는 개뿔이.
거의 반 강제로 끌고다녔던 주제에.

공항을 나선 이후, 그녀는 마치 여행이라도 온 것 마냥 나를 끌고다녔다.

베이징의 유명한 맛집이라느니, 유명한 관광 명소라느니…… 이런데서는 이런  먹어 줘야 한다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거기에 끌려다닌 나도 문제가 있긴 하다만……’



잠깐.
아니지.


이건 결코 내 문제가 아니다.


천하의 연이 마음먹고 끌고 다닌다면 안 그럴 사람이 지구상에 몇 명이나 있을까?


없다고 자부한다.


어디 연이 보통 미친 연이던가?

그래, 중의적 의미.

‘괜히 오한이 드는데……’




한주희와의 관계가 회귀 전처럼 가깝지 않다는 게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둘이서 치고박고 난리도 아니겠지.’


이미 반경 200미터는 난장판으로 뒤집어져 있을 테고.


‘아니지? 어쩌면 천하의 한주희도 못 당해낼지도……?’

말빨로 조지는 정신나간 연과, 진짜로 정신나간 한주희라.
새삼 둘의 격돌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음…?’


일어날  없는 일을 머릿속에서 상상하고 있던 나는, 문득 연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는 것을 눈치챌  있었다.

아니, 단순히 발걸음 뿐만이 아니었다.

걸어다니는 분위기나 몸짓, 몸에서 퍼져 나오는 기운까지.




평소의 여유만만하고 능구렁이같은 모습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설마……?’


그제서야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훤칠한 키를 가진 남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조금은 날카로운 눈매와 선명한 이목구비.


그도 마침 우리를 발견하고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아무쪼록 좋은 시간 보내시길……”

“……?”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지나쳐 가는 그.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연에게 물었다.


“대체 뭐지? 저 사람은……”

“……”


잠시 대답이 없던 그녀는 이내 평소와 같은 말투로 돌아오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사람이네요.”

“……”

그리고,  짧은 대화를 통해 나는 직감……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뭔진 몰라도 저새끼가 문제네.’




─라고.





*


흑사회의 리더라는 간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나는 가짜 신분을 가지고도 꽤나 빠르게 기간제 교사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전에 말했던 대로, 연이 가져다 준 정보에 대한 표면적인 댓가는 일정 기간동안 내가 신월에 머무르는 것.

 기간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내 천재성을 십분 활용해 보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지만.’



그녀가 진짜로 원했던 것은 중국의 헌터 양성같은 것이 아니라, 어제 봤던 그 이상한 남자에 관한 문제의 해결이겠지.



어쨌건, 아카데미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단순한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고, 덧붙여서 나는 천재도 아니었기에 제대로 수업할 마음따위, 전혀 없었다.

그랬기에─




“자습해라.”



─그  마디로, 첫 수업을 날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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