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69. 가지가지 하네
“저……선생님, 괜찮을까요?”
한아름의질문에 현화는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백발과 한쪽 얼굴에 큰 흉터를 가진 소녀.
그 옆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서현을 바라보던 현화는 입을 열었다.
“뭐, 괜찮겠지. 서현이 저러는 것도 이유가 있을 거고.”
“그래도 영 찜찜한데……”
“어쨌건 코사 노스트라의 일원이었으니까, 어느정도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테고. 나쁠 건 없다고 봐.”
“그럴까요……?”
시칠리아에서 돌아온 지도 벌써 이틀 째.
‘라우라’라는 이름의 소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현화의 마법으로 간신히 숨을 붙이고 있기는 했으나,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이제 슬슬 수업 시작한다.”
“네.”
그녀의 말에 한아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현아, 너도 이제 가 봐야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
복잡한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던 서현은 말 없이 강의실로 향했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현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런 어린 애들이 뭐가 잘못이라고.”
*
겨우 다시 찾은 일상.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나는 기분좋게 책상에 엎드렸다.
이번에는 나름의성장도 있었고, 현진과 서현도 복수를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단락 되었다고 봐도 되겠지.
‘다행히 누군가가 죽지도 않았고 말야.’
망할놈의 초월자가중간중간 신경을 긁어대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문제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 아닐까.
“어이.”
“……”
“정신나간 꼬맹이, 왜 시부지기 여기서 잠을 청하실까?”
내 귀에 정운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써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던 나는, 뒤이어 들려오는 날카로운 파공성에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손을 휘둘렀다.
샥- 퍼억!
“……”
손에 잡힌 마커가 터져나가며 검은 색 잉크가손을 물들였다.
“아 왜요? 어차피 S클래스는 무슨 수업을 듣든 자유긴 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왜 화를 내는 거야?”
옆에서 한주희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한술 더 떠서 다리를 꼰 채로 책상 위에 올리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모처럼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니까, 나름 아카데미 생활을 즐기고 싶다구요. 향수도 느낄 겸……”
내 말에 정운성은 나지막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그래, 너희들 말이 맞아. S클래스는 사실상 어떤 수업을 듣든 자유이긴 하지. 그런데……”
또 하나의 마커가 공간을 갈랐다.
이번에는 고개를 틀어 그것을 피해냈다.
“니들은 수업 들을 생각도 없잖아, 이 망할 것들아!”
“……”
그건 그렇지.
나는 수업내내 꿀잠을 자고 있었고, 한주희는 불량한 자세로 딴청이나 피우고 있었으니까.
“그럴거면 숙박비라도 쳐 내든가!”
“……쳇. 쪼잔하게.”
“다 들린다?!”
“앗, 그런가요? 하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에휴……”
“그거! 참 현명한 선택이야!”
짝짝!
박수까지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주희.
“진짜 제발 꺼졌으면……”
그는 당당하기 그지없는 한주희를 노려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수업 마치기 전에 전달할 공지사항이 있다. 아, 모처럼 왔으니까 너희한테 따로 전달할 필요는 없겠네.”
“네?”
그는 강의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학기 실기 전형이 변경되었다.”
“네?”
“그게 무슨……”
“갑자기 변경되었다고?”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강의실.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정운성은 말했다.
“이번 학기 실기는 중간, 기말합해서 5주 후에 통합으로 이루어진다.”
“네에에?!”
그 여파는 상당했다.
의외의 사실에 나 역시도 손을 들며 물었다.
“잠깐만요! 그러면 설마 기준이 달라지는 건가요? 갑자기 왜……?”
“당연히 기준도 달라진다. 모의 던전을 방문하거나, 홀로그램 상대를 하는게 아니야.”
“그러면요?”
그는 어마어마한 소식을 들고 왔다.
“아카데미 대항전. 그걸로 대신한다.”
*
“아, 그거? 아무래도 한송희가 벌인 짓 같던데.”
“네?”
현화의 말에 한아름과 은가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듣고보니까 한성그룹에서 모든 비용을 지불했다고 하더라고. 성백과 백골, 그리고월영 세 아카데미간의 대항전이라고 봐야겠지.”
세 아카데미간의 대항전.
이제까지 이 정도의 스케일을 띤 행사는 전혀 없었다.
아니, 서로간의 교류는 둘째 치고 서로 으르렁대며 까내리기 바빴기에 그런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맞았다.
“와…… 스케일 큰 거 봐.”
“하아……”
한아름은 한성그룹의 재력에 감탄을 흘렸고, 은가람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그는 자신의 차를 마시며 학술자료를 보고 있는 현화에게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디서 그런 정보를 들은 거에요?”
“아, 내가 말 안했었나?”
“……?”
“성백의 교장이 나랑 친한 언니잖아.”
은가람과 한아름은 그 자리에 굳었다.
“……뭐라구요?”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성백아카데미의 교장, 백설하가 나랑 친하다고.”
마법의 비중을 크게 두고 있는 성백 아카데미.
그 교장인 백설하는 몇 안되는 S급 헌터 중 하나였다.
“그,그러면 선생님도 S급 헌터인 거에요?”
“아니?나는 헌터 아냐. 중간에 때려쳤거든.”
“그 이전에, 선생님은 그런 재능이 있으면서 왜 성백이 아니라 월영으로 오신 거에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묻는 은가람.
그녀가 월영에 남아있는 표면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월영의 졸업생이라는 사실이었다.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만큼 그게 거짓말일 리는 없을 터.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에게 현화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한창 어릴 때는 내가 마법사가 될 줄 몰랐어.”
“네……?”
“난 원래 너처럼 물리적인 전투가 내게 맞다고 생각했거든. 그 때는 그런 헌터가 되고 싶었었지.”
“……”
그러니까정리하자면, 그녀는 원래 물리 계열의 헌터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마법 쪽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마법 헌터로 방향을 틀었고, 그마저도 ‘헌터’라는 직업보다 ‘연구원’ 또는 ‘교사’가 더 적성에 맞아 다시 한 번 진로를 튼 것이다.
‘사람이 저렇게 결정을 바꾸기도 쉽지 않은데……’
한 편으로는 그녀가 대단하게만 보이는 은가람이었다.
“그러면…… 꽤나 일이 복잡하게 되어 버린 거네요…?”
“응? 뭐가?”
조심스레 입을 여는 한아름.
현화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렇잖아요? 대항전이 열린다는 것은 결국 서로 경쟁한다는 의미인데…… 점수를 생각하면 확실히 이기는 것이 맞지만……”
아무래도 현화와 설하의 사이를 생각한다면 그것도조금 애매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현화는 웃음을 터뜨렸다.
“풋……! 푸하하하! 얘가 뭐라는 거니?”
“네……?”
“일단 전제조건부터 맞추고 가자. 네가 필사적으로 안하면 당연히 못 이겨. 필사적으로 해도 이길까 말까 한게 성백이나 백골이라고.”
“아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한아름.
현화는 한 손가락을치켜들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
“최선을 다해서 성심성의껏, 진심으로 발라버려! 너희라면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백골을요…?”
“아니! 백골 애들 내가 알게 뭐니? 성백 학생들 말야. 그 녀석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필사적으로 짓밟으라, 이거지!”
“……”
한아름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친한 언니분의 체면이란 건…”
“그딴 건 개나 줘 버려! 당연하잖아?!”
‘당연하잖아!’라고 외치는 차현화를 바라보며 한아름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름이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라고. 경쟁이라면 응당 진심을 다해주는게 예의다, 이말이야.”
“저는 안 그래도 발라버리려고 했어요. 특히나 한송인지 두송인지 하는 그 녀석은……”
“은가람을 봐! 얼마나 이기적이야? 조금 본 받도록 해.”
“……”
이번에는은가람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 상당히 기분 나쁘게 들리는데요…?”
“천만에! 칭찬이라고.”
“……일단은 그렇게 들을게요.”
어쨌건 ‘이기적이다’는 말 한 마디로 마력이 또다시 1 성장했으니 된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혹시 실기 평가 내용이라든가, 아는 거 없어요?”
*
“좀 더! 멈추지 마, 이현진!”
“허억……네에…!”
“아름이도 똑바로안 하지?!”
“하,하고 있다고!”
A클래스의 훈련장.
의례적으로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훈련장에서 은가람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한아름과 이현진은 오만상을 쓰면서도 서둘러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흐아앗!”
탓- 캉!캉!카앙-!!
재빠르게 내질러지는 현진의 도.
한아름은 두 개의도끼로 간신히 그것을 방어해 냈다.
그리고는 곧바로 받아치는 한아름.
얼마 전 호주에서 있었던 합숙 훈련에 비해 엄청난 발전을 거듭한 둘을 보면서도, 은가람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대련을 관찰하면서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현화와의 대화가 계속 되새김질되고 있었다.
“없어.”
“네……?”
평가 기준에 대해 아는 것이 있냐고 물은 그의 질문에, 현화는 단호하게 없다고 대답했다.
“아니, 있다고 해도 못 알려주지, 그건.”
“그러지 말고 좀요! 치사하게 그럴 거에요?!”
당당하게 부정행위를 행하려는 제자를, 그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야, 이 자식아. 아주 그냥 대놓고 부정행위를 하겠다고 해라?! 엉?”
“에이, 부정행위라뇨? 삶을 윤택하게 살기 위한 방법이라고 해 두죠.”
“웃기고 있네~! 이럴 때만 잔머리 굴리기는? 아무튼 안 돼. 아니, 그 이전에 나도 아는게 없다니까?”
“……쪼잔하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였으나 현화가 듣기에는 충분한 크기.
그녀는 곧바로 역정을 냈다.
“이런 미친 친구가?! 야! 막말로 넌 그런거 없어도 다 후드려 패고 다닐 거 아냐?”
“그치만~ 상대는 그~ 강한 성백인걸요~?”
“어우, 닭살돋아! 개 소리 집어쳐! 코사 노스트라를 상대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주제에 무슨?”
“……아, 안먹히네.”
“먹힐 거라 생각했냐?”
그렇게 그녀는 끝내 알려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애들훈련이나 잘 시키라는 말과 함께.
“하여간, 이럴 때는 또 깐깐해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지친 기색이 가득한 현진과 아름의 대련을 중단했다.
그런 그의 귀에, 낯익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꽤나 열심이시네요?”
“……?!”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말을 흘리는 여성.
연이었다.
“뭐야, 또 왜요?”
“아뇨~ 아무것도.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요~.”
“열심히는 개뿔이. 그래서 뭐 때문에 온 건데요?”
퉁명스럽게 묻는 그의 질문에 연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후훗…… 단지 지난 번에 말씀드린 ‘댓가’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아……”
정보에 대한 값.
처음에야 삼각수의 뿔로 지불했으나, 그 이후 품평회에 관한 정보는 후불로 하기로 했었다.
코사 노스트라를 무너뜨릴 정도로 엄청난 정보였으니 그 댓가 역시도 만만치 않을 터.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연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그렇게 긴장하실 건 없는데…… 아마 그 쪽에도 어느정도 도움이 되긴 할 거구요.”
“그래서, 뭔데요? 말을 해야 알 거 아냐.”
“그건 바로……”
“……?”
한참 동안이나 말을 흐리던 그녀.
괜히 긴장하는 은가람을 바라보던 연은 자신이할 수 있는 최대한 귀여운 목소리로 말을이었다.
“비밀~!”
“이런 씨……”
“와~ 방금 진심으로 욕하시려 한 거에요?”
충격 먹었다는 표정을 짓는 연.
그러나 은가람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할 말 없으면 꺼지라는, 명확한 메시지와 함께.
“아아, 다음 번에 말씀 드릴게요. 이번 대항전이 ‘안전하게’ 끝난다면 말이죠.”
“……싱겁기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연은 그 자리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뭐야? 또 뭔 소리래?”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네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름과 현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은가람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푸념했다.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대체 원하는게 뭔지,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건지.
‘안전하게라……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는 건가…?’
찝찝한 감정을 안고, 그는 훈련을 속행했다.
*
잘그락- 저벅……저벅……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
완전히 무너져 버린 건물의 잔해 속에서, 남자는 담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감싸는 짙은 혈향을 맡던 그는 한쪽 잔해 더미에서 죽은 시체에 손을 뻗었다.
간신히 형체를 알아볼 정도.
꽤나 큰 덩치의 그것을,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들었다.
살아 있었을 적, ‘알론조 로톨로(Alonso Rotolo)’라는 이름을 가졌던 이.
굳게 감긴그의 눈을, 남자는 차분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이내, 새하얗게 썩어가던 그의 두 눈동자가번쩍-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