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55. 썩어빠진 물
“너야 그런 기억이 없겠지. 어련하시겠어?”
“……”
“헌터 협회의 명예를위해서라도, 제 발로 나가라. 괜히 일을 크게 벌일 생각따윈 없으니까.”
여성의 차가운 말에,강기호는 아무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의 눈 앞에는 수집된 증거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분명 자신이 그랬던 기억은 없었는데, 합성도 아닌 영상과 사진들이 무수하게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자신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은 네가 더 잘 알지 않냐.
그렇게 말을 꺼내려던 강기호였다.
그러나 돌아온 여성, 같은 S급 헌터인 성유리의 목소리는 차갑기만 했다.
“변명하는 것 까지 추하다, 진짜.”
성매매 업소의 이용이나, 자잘한 범죄 현장.
성추행 현장.
심지어 다른 여자와손을 잡고모텔로 향하는 모습까지.
그런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스스로는 그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좋은 말로 할 때 헌터 협회에서 꺼져. 아니, 아예 타워로 사라져 버리라고! 안 그러면 후회할 줄 알아?!”
그렇게 말을 던진 그녀는 매몰차게 걸음을 옮겼다.
하루 아침에 자신의 세계가 무너져 버린 강기호.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그는 타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 일어설 여력이, 그에게는 없었다.
다음 날, 그는 공중파 방송에서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
“네? 안계신다고요?”
이진명의 집사, 최 현의대답에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평소와 같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네. 오늘 아침부터 회의에 참석하러 가셨습니다.”
“회의라뇨?”
내가 알기로,그는 대외적으로 환자였다.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얼마 전 부터 꽤나 유명한 사실이 되어 있었다.
당장에 내가 마법학회에서 일을 벌이기 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은 이슈화 되어 여기저기 떠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그를 대체 누가 부른다는 말인가?
“헌터 협회에서 긴급하게 회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이상은 저도 잘 알지 못하는군요.”
“뭐라구요?!”
나는 얼굴을 굳혔다.
헌터 협회.
평소라면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것이다.
이진명 회장은 S급 헌터였고, 원래부터 헌터 협회 소속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중 2명은 타워로 향하고, 한 명은 죽었네.]
알렉시스의 말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3년 후라고 했지만, 벌써 한 명은 타워로 올라갈 것을 밝혔어. 안이하게 상황을 지켜볼 때가 아냐……!’
나는 최 현을 다그쳤다.
“헌터 협회! 혹시 어디인지 아시나요?”
“본사라면 위치를 잘 아시지 않나요? 하지만 보안상의 문제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구요.”
생각해 보면 이진명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최 현이었다.
그런 그를 다시 돌려보낼 정도라면, 헌터 협회에서 단단히 일을 벼르고있다는 소리가 된다.
“감사합니다!”
“살펴가십시오.”
나는 이를 갈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다리에 힘을 불어넣으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쩌겠어? 제대로 해명도 안 하는 걸 보면, 본인도 찔리는게 있다는 건데.”
“약속한 게 있으니까 밝히지는 말자고. 불쌍하잖아?”
고급스러운 원탁 테이블에 앉아, 천 후에이와 타카하시 세츠나는 그렇게 말했다.
바로 옆에서 성유리가 침울한 표정으로 있음에도, 그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회의라는 게 그런 시답잖은 일이었나?”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이진명은 미간을 좁혔다.
그의 안색은 평소보다 더 좋지 않았다.
“워우, 우리 젠밍 화난 거야? 몸 안 좋다고 하더니 다 죽어가네?”
“몇 번이나 말했지만,젠밍이 아니라 진명이다.”
“그거나 그거나. 어차피 우리 글자 갖다 쓰는 주제에 말이 많아?”
“……”
평소라면 한 마디를 더 쏘아줬을 이진명이었지만 그는 말을 아꼈다.
그에 천 후에이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싱겁네. 죽을 때 다 되어 가는게 맞나봐?”
빈정대는 그를 향해 이진명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냐고 물었다. 왕신휘.”
“왕신휘가 아니라 우앙 천 후에이라고! 몇 번을 말하게 하나!”
쾅!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치며 이를 가는 천 후에이.
이진명은 나지막히 중얼거리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거나 그거나.”
“미친 새끼!”
그런 그들을 향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
“둘 다 조용히 해. 일단은 오늘부로 강기호는 헌터 협회에서 제명됐어. 앞으로는 여기 있는 네 명과, 남은 켈벤까지 해서 총 다섯 명이 헌터 협회를 이끌어가게 될 거고.”
“그렇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진명.
성유리의 말을 듣고 있던 타카하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것도 조금 고려해 봐야 할 것같은데.”
“뭐?”
“일단은 여섯 명에서 다섯 명으로 줄어든 것도 큰 문제이기는 한데…… 앞으로의 일을 정하기 이전에 켈벤에 대한 부분도 조금 알아봐야 할 것 같아.”
“그게 무슨소리지?”
타카하시의 말에 이진명이 질문을 던졌다.
그에 타카하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오늘도 안 왔잖아? 수상한 점도 한두가지가 아닌데.”
“그것도 그러네. 원래 점잖은 척 폼 잡는 애들이 뒤가 구린 경우가 많지?”
그 말에 동조하는 천 후에이.
그는 이진명을 바라보며 옅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진명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
“……?”
세 명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날 불렀다는 말인가? 최 현 집사까지 돌려보내면서?”
그의 몸에서 조금씩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살기.
아무리 몸이 좋지 않아도 역시 철혈금강은 철혈금강이라는 걸까.
세 명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고,고작그런 이유라니? 협회의 시스템이 완전히 뒤바뀌게 될 거야.”
그런 그를 향해 성유리가 말했다.
“어떤 식으로?고작 사람 한두 명 빠진다고 크게 달라질 이유는 없을 텐데.”
“아니지. 일단 3명…… 아니, 네 명으로 줄인다는 가정 하에 전체적인 협회의 시스템을 갈아엎을 생각이야. 서로 담당하는 영역에 구분을 두는 것이라던지……”
“풋.”
설명을 이어나가는 성유리의 말에 이진명은 웃음을 흘렸다.
“……뭐가 우스운 거야?”
“너무 티나는 것 아닌가? 아직 확실치않다고 했던 주제에 켈벤의 제명은 결정났다는 듯이 이야기하는군.”
“……”
세 명의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몸도 안 좋은 환자를불러내서는, 그 경호를 맡는 집사까지돌려보내고…… 한다는 소리가 고작해야 그런 소리라면,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는 상황 아닌가?”
“무슨 말인지모르겠는데?”
“인원조정에 대해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을 뿐이야. 넘겨짚지는 말아줬으면 하는데……?”
타카하시와 천 후에이의 몸에서도 조금씩 살기가 피어올랐다.
S급 세 명이 뿜어대는 살기가, 헌터 협회 최상층을 가득 메워 갔다.
“그렇다면, 세 명은 대체 뭐지? 나 역시도 미리 제명해 둔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 힘 뺄 필요가 있나?”
“그건 단순히 말 실수였을 뿐이야.”
“그렇겠지. 본심을 말해버린 거니까. 거기다 켈벤 스트라이커는 왜 여기 없는 걸까? 혹시 모르지? 이미 싸늘하게 죽어 있을지.”
확신을 담은 이진명의 말.
잠시 그를 지켜보고 있던 타카하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이지 짜증나네.”
그리고는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당당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역시 철혈금강이야? 모처럼이니까 살수 있는 기회를 줄게. 어떻게 할래? 끝까지 저항하다가 명예도 가족도 잃고 비참하게 죽을래…… 아니면 우리와 뜻을 같이 할래?”
“뭐야, 젠밍도받아주는 거야? 많이 후해졌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던 듯, 웃음을 흘리는 천 후에이.
그를 무시하며 이진명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글쎄, 그건 네가 우리와 손을 잡는다면 말해주지.”
“어차피 내가 거절한다면 죽일 생각 아닌가? 듣고 결정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철혈금강의 위용이 강하다고 한들, 그는 현재 환자였다.
더군다나 자신들 역시도 같은 S급의 헌터.
말해줘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고 그들이 생각하던 찰나였다.
“일단은 생각할 시간을 좀 주는게 좋지 않나?”
이진명이갑자기 말을 돌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젠밍, 정신 이상해진 거냐?”
“지금 섣불리 대답을 주기는 곤란하다고 판단되어서 그렇다, 왕신휘.”
“왕신휘가 아니라 우앙……!”
그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밖이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막아!”
“저,저 자식…!”
쾅!
“……?”
갑작스레 난입한 누군가.
세 명의 시선이 일제히입구로 향했다.
이 곳은 헌터 협회의 최상층.
일반인들이마음대로 올라올 수 없는 장소였다.
아니, 일반인은 고사하고 웬만한 헌터조차 출입이 통제된 구역.
그런 삼엄한 경비를, 무대포로 뚫고 온 사람이 있었다.
“죄,죄송합니다!”
“저희도 막으려고 했으나……”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급하게 사과를 건내는 정장의 남자들.
다시금 침입자에게 손을 대려던 그들은 성유리의 손짓에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만요.”
“예……?”
“괜찮으니 돌아가셔도 됩니다. 저희가 알아서 하죠.”
차가운 그녀의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들은 깍듯하게 인사를 남기고는 물러갔다.
“그래서…… 이 당돌한 꼬맹이는 대체 누굴까나?”
홀로 숨을 몰아쉬는 청년을 향해, 타카하시는 그렇게 물었다.
그녀의 입에는 묘한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
“후우……”
달칵-.
나는 숨을 고르며 회의실의 문을 닫았다.
회의실 안에는 낯익은 네 명의 얼굴이 있었다.
‘아이고, 이 귀여운 개자식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이진명을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며 입매를 말아올리는 그.
나는 똑같이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진명 회장님? 급하게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진명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낮게 기침을 흘렸다.
“쿨럭……! 그래. 그럼 먼저 들어가 보도록하지.”
저 양반 연기 꽤나 늘었네.
아프지도 않은 주제에 꽤병이 장난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준비한 것 치고는 수준급이다.
“뭐……?”
“잠깐만! 회의아직 안 끝났는데 어딜 가는 거야?!”
“그보다 넌 누구야!!”
그렇게 따지는 우앙 천 후에이.
나는 그에게 말했다.
“왕신휘 헌터님! 이진명 회장님은 현재 위독한 상태입니다. 오늘도진료가 있으셔서 가 보셔야 합니다.”
그에 그의 얼굴이 팍! 구겨진다.
아마표정으로 소리를 낼 수 있다면 귀에서 이명이 들리지 않았을까.
“왕신휘가 아니라 우앙 천 후에이다! 똑바로 발음 못하냐?!”
“아아, 죄송합니다. 왕신휘…… 아니, 천 헤이 헌터님. 제가 중국어는 잘 못해서요.”
물론 거짓말이다.
일부러 빡치라고 그렇게 말한 거니까.
회귀하기 전부터 그는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는 성격이었다.
이진명을 젠밍이라고 부른다거나, 한국을 한꿔라고 부른다던가.
‘그놈의 썩어빠진 중화사상이 마음에 안들어서 몇 번이나 쥐어패기도 했었지.’
중국인들을 비하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왕신휘 저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 자리에 있는 전부 눈꼴시린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말하며 나는 쓰러질 듯한 이진명을 부축했다.
“죄송하지만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응…?”
“잠깐만, 진짜로 가려고?!”
“못 들었나…? 쿨럭…! 내가 죽으면 책임을 지기라도 할 텐가?”
“……”
이진명 회장의 말에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들.
그들끼리 있다면모를까, 외부인이 있는 상황에서 본심을 드러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철통같은 헌터협회 본사 건물을 무식하게 치고 올라왔으니 쉽사리 맘을 놓지도 못하겠지.
‘죽이는 거야 둘째 치고, 혹시라도 도망가 버리면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닐 테니까.’
그랬기에 조금 무리하면서도 정면을 뚫은 것이었다.
‘최 현 집사님의 도움이 없었으면 그것도 못했겠지만 말이지.’
나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을 나서기 전 몸을 돌려 한 마디를 던졌다.
“아, 그리고 저……”
“응…?”
“S급의 헌터분들! 정말 존경하고 있습니다! 성유리 헌터님, 타카하시 세츠나 헌터님…… 그리고 왕.신.휘. 헌터님두요!”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며 문을 닫았다.
뒤쪽에서 쾅! 하고 뭔가가 문으로 날아와 부딪히는 소리가 낮지만 애써 무시했다.
“넌 뭘 그렇게 믿고저자식을 건드냐?”
“괜찮아요. 제가 이기니까.”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면 그 말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헌터 협회 본사 건물을 나서자, 최 현 집사가 우리를 맞았다.
그에게 부축을 맡긴 후, 나는 그와 함께 차의 뒷자석에 탔다.
집사가 문을 닫고 출발하자마자, 이진명 회장은 투덜대기 시작했다.
“어우~ 진짜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네!”
“그런 것 치고는 꽤나 연기 잘 하시던데요? 내심 즐기시는 것 아닙니까?”
“하핫,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이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그런데…… 확실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