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54. 성장하기 위한 조건
다음 날, 세바스찬은 잠에서 깨자마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크으윽……! 후우우……”
어제의 후유증으로 온 몸이 쑤셨다.
그러나 그는 입매를 말아올렸다.
‘나쁘지 않아.’
이런 기분을 느꼈던 것이 얼마만이던가.
다소 혼란스러웠던 어제였지만, 그는 기분좋은 피로감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은가람에게 거하게 깨지고 난 어젯밤, 그는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그가 추구했던 ‘강함’이란 우직하고 곧은 모양이었다.
주변이 환경에 굴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강해지는 것.
요행과 편법을 사용하는 것은 순수한 강함이아니라고 여겨 왔던 그였다.
[인생은 실전이야, 새끼야. 제한되고 통제된 상황 속에서만 전투는 이뤄지지 않는다고.]
어제 은가람에게서 들었던 말은 그에게 있어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실전’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이제껏 자신이 임해 왔던 대련, 정정당당한 상황 하에서의 결투는 실전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실제로 게이트 너머의 적들을 상대할 때는 그런 상황이 얼마나 주어질까?
이제까지 자신이 쫓아왔던 ‘강함’은, 그저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을 여유롭게 쓰러뜨린 후, 유유하게 걸음을 옮기는 은가람의 뒷모습에서 ‘비겁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곧바로 대장장이 낑깡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
“어엉? 걔네들? 벌써 갔지.”
“예……?”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는 낑깡의 대답에 세바스찬은 허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용건 끝나자마자 바로 떠났어. 지금쯤이면 비행기 타고 있겠지.”
“그,그럴 수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세바스찬을 바라보던 낑깡.
그는 잠시 멈췄던 망치질을 재개하며 혀를 찼다.
까앙!!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제 있었던 일이 다시금 재생되고 있었다.
.
..
.
“자,자,자,자,잠까아아안!”
“네~? 왜 그러시죠?”
태연한 표정으로 되묻는 은가람.
그의 손을, 낑깡은 다급하게 붙잡았다.
“해 주마! 당장 해 줄테니까!”
“흐음…… 그렇지만 그러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텐데요?”
“아냐! 난 괜찮으니까! 5개든 6개든 만들어 주마!! 제발 오각수의 뿔을……”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 은가람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되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제가 안 괜찮다는 건데요?”
“뭐……?”
“오각수의 뿔이 뭐 산에서 캐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전 세계를 다 뒤져도 원재료 상태로 남아있는 건 손에 꼽을 텐데말이죠. 아마 팔면 부르는게 값일 거고……”
“그렇지만 그걸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아니냐!”
“저야 뭐 적당히 다른 무기 써도 크게 상관없어서요. 아, 이참에 그냥 소장용으로 보관이나 할까나?”
은가람의 말에 낑깡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말대로, 전 세계에서 재료 상태로 남아 있는 오각수의 뿔은 거의 없다.
눈 앞의 것이 유일할 가능성도 아주 높았다.
그런 만큼, 오각수의 뿔을 제련해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판다면 언제가 됐든 내 손을거칠 텐데……!’
그마저도 은가람이 소장용으로 보관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평생을 가도 오각수의 뿔은 구경하지 못할 게 분명한 것이다.
그에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열었다.
“원하는게 뭐냐……?”
“역시 말이 통하시네요. 거창한 건 아니니까 부담 가지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 후, 은가람은 다시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이내 그가 꺼내 든 것은, 무려 두 개의 오각수의뿔이었다.
“허어억!!!”
낑깡의 두 눈이 있는대로 커졌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두 개의 단도. 당연히 가진 재료의 잠재력은 최대한으로 끌어내 주시구요, 덤으로 저희 아카데미로 배송까지 해 주시면 좋을것 같아요.”
“그,그정도야 문제 없지! 배송이야 가장 빠른 업체로……”
은가람이 그의 말을 끊었다.
“아뇨.”
“……?”
“직접 가져와 주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중간에서 누가 물건을 가져가게 될 지.”
사실 재료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 재료라는게 오각수의 뿔인 만큼 더 그랬다.
본래라면 하나당 몇 천억대의 비용이 들었다.
그런 것을 공짜로 부탁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배송까지?
‘악마인가……!’
싱글싱글 웃고 있는 은가람의 표정이그렇게 사악하게 비칠 수 없었다.
더 짜증나는 점은, 그럼에도 그는 그 거래를 승낙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오각수의 뿔 두 개.
그리고 삼각수의 뿔 여럿.
엄청난 재료들을 손수 제련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으니까.
“아, 그리고 가능하면 2주일 이내로 만들어 주세요.”
“아주 날 그냥 죽여라!”
“안되나요?”
“……안될 거없지.”
그렇게 거래가 성사되었다.
당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한 편으로는 간만에 가슴이 끌어오르는 낑깡이었다.
까앙!
그의 망치에서 다시금 불꽃이 튀어올랐다.
*
낑깡에게 은가람 일행이 헬리오스를 떠났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세바스찬.
그는 곧장 걸음을 옮겨 단장실로 향했다.
보통이라면 쉽게 만나기 힘든 단장이었지만, 세바스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문에 가볍게 노크를 한 훈, 곧바로 단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세바스찬입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한 손을 가슴에 대며 경례하는 그.
자신의 오른팔 의수를 조정하고 있던 갓프리드는 그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금 나사를 조았다.
“역시 왔군.”
“……제가 올 것을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오히려 어제 밤에 찾아오지 않은게 의외였다.”
“……”
“은가람 때문에 찾아온 거냐?”
갓프리드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뭔가느낀 것이 있지? 읊어 봐라.”
잠시 미간을 좁히며 눈동자를 굴리던 세바스찬.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길과 다른 길에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갈망하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죠. 꼭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역시 그런가.”
갓프리드는 나지막히 대답했다.
세바스찬은 골든 헬리오스에서 꽤나 우수한 기사였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벌써 중급 기사에 올랐을 정도로, 그가 가진 재능은 뛰어났다.
‘하지만…… 사람은 한 번 깨져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실패가 없다면 앞으로의 성장도 바라기 힘들다.
세바스찬의 경우가 그랬다.
이제껏 대련에서 지는 경우가 잘 없었고, 상대가 그 어떤 비겁한 수를 사용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맞서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지나치게 올곧은 그의 성정.
그러나 그것이, 한 편으로는 그의 성장을 저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기사단에서 강하다고 해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갓프리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깨 부셔야만 그 세계보다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끼리릭……끼릭…
자신의 의수를 조정한 그는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조정을 마쳤다.
“그래서, 말하고자 했던 건?”
자신을 응시하며 묻는 갓프리드의 말에, 세바스찬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다음 학기에, 한국으로 가고 싶습니다.”
*
[은가람]
근력: 242 (1061) 민첩: 293 (1164)
마력: 174 (852) 체력: 201 (912)
‘나름 수익은 있었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눈 앞에 스테이터스 창을 띄워 올렸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깊이잠들어 있었다.
현재 제약은 69%
이 정도면 그래도 나름 헌터 한 명 정도의 몫은 하게 된 건가.
코사 노스트라라던지, 아발론의 교장이나 낑깡.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아직 제약을 해제할 방법은 꽤 남아 있었다.
‘아직 아카데미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본격적인 제약의 해제는 헌터 협회에 들어가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거고.’
물론, 그렇다고 계속 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남에게 피해를 줘야만 하는 제약의 해제는 그렇다고 쳐도, 개인적인 성장 자체는 제약이 없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런 쪽에서는 더 수월한 것 같기도 했다.
‘봉인된 능력치 때문에 더 성장이 빠른 건가…?아니면 단순히 한 번 해 봐서 쉽게 느껴지는 건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놈의 초월자들이 워낙 제멋대로여야지.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은 하나도 없는 초월자였다.
‘솔직히 말해, 이번에 녀석은 더 그렇고.’
이기적인 짓으로 강해진다니.
변태적인 취향이 너무도 다분한 녀석 아니던가?
[내가 뭘?]
“……”
대뜸 머릿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말끔하게 무시했다.
이번에는 상태창을 지우고 스킬 창을 띄워올렸다.
초월 권능: 이기적인 선택자
보유 스킬
-감지(B+)
-현혹(B)
-속임수(A)
-공포 잔상(A)
-은화방벽(A)
-은화 마력방벽(A)
-고위_마법
-인페르노 스피어(A)
-쇼크 웨이브(A)
-헬 플레어(A+)
-블레이징 스텝(B)
-소닉 블레이드(B+)
최근 눈에 띄게 늘어난 스킬의 양.
잠시 그것을 훑어내려가던 나는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거, 완전 마법사 아니냐?’
회귀 이전에 내가 사용할 줄 아는 마법은 거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꽤 있기는 했지만 등급이 낮았기에 굳이 사용할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강한 S급 스킬들이 넘쳐났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이다.
‘어디 보자……’
조금은 어색한 스킬 창을 바라보며, 나는현화쌤한테서 배운 마법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 중 내 눈에 띈 것은 당시 배웠던 마법들 중 가장 등급이 낮은 마법.
블레이징 스텝이었다.
[블레이징 스텝_Blazing Step(B)]
-시전자의 발길이 닿는 곳으로 뜨거운 염화가 피어오릅니다.
-불꽃의 크기와 유지시간은 시전자의 마력 상태와 마법의 등급에 비례합니다.
-불꽃은 시전자에게는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내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스킬.
나는 옅게 웃으며 스킬 창을 닫았다.
“다음 번에잘 써먹어야지.”
머릿속에서는 스킬을 어떻게 활용할 지가 선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나는 좌석을 뒤로 눕히며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인터넷 창을 켜자 눈에 익은 기사들이 헤드라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대미문의 이론! 월영의 학생을 통해 밝혀지다!]
[케히빈은 틀렸다?! 마법계를 발칵 뒤집은 이론]
[우리가 알고 있던 케히빈 공식은 정말 틀렸는가?]
[케히빈과 은가람! 이 시대의 뉴턴과 아인슈타인]
“에휴…… 아주그냥 온 천지가 내 이야기구만?”
벌써 하루가 넘게 지났는데 이놈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르네.
슬슬 졸음이 쏟아지는 눈으로 나는 생각 없이 스크롤을내렸다.
역시 잠들기 전에는 스마트폰이지.
제목만 다르고 내용은 거기서 거기인 기사들을 몇개 읽어내려간 나는 너튜브로 관심을 돌렸다.
[프로젝트 마르온_심판자 길드 vs 그림자의 바람 길드 생중계 Live.]
이런 시대에도 게임방송은 식을 줄 모르는 걸 보면 참 대단했다.
‘시간 나면 나도 게임이나 해 봐?’
그런 실없는 생각을 중얼거리며 스크롤을 계속 내렸다.
슬슬 눈꺼플이 감겨왔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영상을 발견하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부,분명 3년 후라고 그랬는데……?’
벌써 시작되었다는 말인가?
설마 코사 노스트라 쪽에서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나는 망설임 없이 영상을 클릭하고는 문제의 장면으로 돌렸다.
[저는 곧, 타워를 오를 계획입니다.]
헌터 협회 소속의 S급 헌터.
검성 강기호.
그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도착하면 곧장 이진명 회장을 찾아봐야겠어……”
*
“말했을 텐데? 몸이 안 좋다고.”
언짢은 기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진명.
그러나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그를 전혀 신경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회의 한 번으로 죽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시급한 상황이니 참석해 주세요.]
“고작해야 한 명이 타워로 떠난 것 뿐인데 뭐가 문제란말이지?”
[그 한 명이 S급이니까 그렇죠! 더군다나 협회의 헌터 아닙니까? 지금 언론이 발칵 뒤집힌 거 아시잖습니까!]
“……”
남자의 말에 이진명은 침음을 흘렸다.
대외적으로, 그는 아픈 상태였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그런 자신을 불러내야 할 정도로 시급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시급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코사 노스트라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상황.
함정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의 아내, 이숙현이었다.
이진명은 통화를 종료했다.
“여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오늘 말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아니, 백화점에 갔는데 글쎄……”
“……”
또 시작인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이진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해서 한 것이 아닌 정략결혼.
처음에야 그래도 젊고 이뻤기에 많은 것이 용서되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녀의 행보는 그런 수준을 한참이나 넘어섰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진상을 부리거나 갑질을 하고, 그것을 수습하는 건 결국 자신의 몫이었다.
아이들의 교육에도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헌터 협회와 코사 노스트라.
그에 신경쓰느라, 그는 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그리고는 되지도 않는 말을 속사포마냥 쏟아내는 그녀에게, 이진명은 조용히 내뱉다.
“일단 닥쳐 봐.”
“여……여보…?”
그의 몸에서는 옅은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원하신다면 참석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