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43화 - 내 보드카 돌려줘
“그래서, 뭐 할건데?”
베네치아의 공항을 나서며 현진은 그렇게 물었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은 생각이 있는 건지……’
평소의 현진도 그랬지만, 누군지 몰라도 지금 녀석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코사 노스트라 요원도 어지간히 멍청한 모양이다.
오죽하면 적인 내가 도와주고 싶을 정도일까.
나는 답답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니가 생각해 와야 되는 거 아니냐?”
“네……?”
“아니, 니가 여행 가고 싶다며? 그래서 온 거 아니냐? 근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건 너무 멍청한 거 아냐?”
“……”
그에 곧바로 입을 다무는 녀석.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너…… 왠지 좀 이상하다? 평소랑 왜 이렇게 달라 보이지?”
“그,그럴 리가요……”
“너 혹시……”
아마 적잖이 쫄릴 거다.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자연스레 화제를 바꿨다.
“멀미했냐?”
“……네?”
“멀미한 거 아니냐고? 아까부터 안색이 안 좋아 보이던데.”
“하하…… 그,그런 것 같아요. 어쩐지 컨디션이 좀……”
‘컨디션이 좀’은 놀고 자빠졌네.
멀미 안 한걸 뻔히 아는데 무슨.
그러나 그를 겉으로 드러낼 필요까지는 없었기에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일단 오늘은 뭘 하긴 힘들 것 같으니까, 숙소부터 가자. 벌써 해가 다 져간다.”
“그래…… 짐부터 풀고 생각해 보자.”
내 말에 한아름이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양 손에는 큼지막한 캐리어가 두 개나 쥐여져 있었다.
그 캐리어 위에 달린 자그마한 가방까지 감안한다면, 우리 세 명이 들고 온 짐을 다 합해도 그녀보다 부족할 것이다.
나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넌 뭘 그리 바리바리 싸들고 왔냐? 이민 온 거였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언제 또 올 수 있을 지 모르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
할 말은 많지만, 구태여 하지는 말자.
괜히 나만 피곤해질 게 뻔했으니까.
공항에는 진명그룹에서 사람이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원의 역할과 동시에 숙소의 관리까지 겸하고 있는 그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우리를 안내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수상도로와,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아름답게 눈에 띄는 시계탑.
과연 운하의 도시라고 할 만큼 베네치아의 경관은 가히 아름다웠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수상버스에서 우리는 그 풍경을 머릿속에 새기듯 눈에 담았다.
서현 역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고 있었지만, 들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났다.
배에서 내린 후, 진명그룹의 안내원을 따라 10분 정도를 걷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와…… 이런 데서 잔단 말야? 확실히 돈은 많긴 하구나……”
“당연하지! 우리 아버지가어떤 분이신데.”
“얼른 안으로 들어가기나 하자. 나도 슬슬 피곤하다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4층짜리 건물.
그 중 우리가 묵는 방은 2층에 있었다.
“뭐야, 왜 방을 두 개나 빌린 거야?”
“왜긴……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러니까, 왜?”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묻는 은서현.
옆에서 듣고 있던 한아름이 그에 대답했다.
“난 여자잖아, 여자! 당연한 거 아냐?”
“그러니까, 혼자 독방 쓰시겠다고?”
“그게 왜?”
“불공평하잖아! 나도 독방……”
거기까지 듣던 나는 은서현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쳤다.
딱!
“끄악! 왜 때려!”
“적당히 좀 해라. 빨리 들어가서 짐이나 풀어.”
“쳇……!”
우리가 빌린 방은 작은 방 하나와 큰 방 하나였다.
나란히 위치한 두 개의 방 중 작은 방 하나를 한아름이 혼자 쓰고, 나머지를 남자 셋이서 함께 쓰기로 한 것이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푼 후, 우리는 큰방에 모였다.
어느새 밖은 완전히 캄캄해 져 있는 시간이었다.
“이러니까, 왠지 수학여행온 것 같다!”
“학창시절이라…… 그립네.”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한아름이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보니 가람이는…… 우리랑 세대가 달랐지.”
이것 봐라?
못 하는 말이 없네.
괜히 기분이 상한 나는 곧바로 반박에 들어섰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세대 차이가 날 게 뭐 있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
젠장.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회귀를 감안해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한아름이 챙겨 온 과자를 집어먹으며 우리는 실없는 잡담을 이어나갔다.
정말로 예전 학창시절이 떠오르는 밤.
‘연막도 쳐야 하고…… 조금 정도는 상관없겠지?’
나는 가방 안에서 하나의 병을 꺼내들었다.
“수학여행 하면 이걸 또 빠뜨릴 수 없지……”
“자,잠깐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감시하는 선생님도 없고! 이럴때가 기회 아니겠어?”
무엇보다 이쪽은 합법이란 말이지.
내가 들고 온 것은 한 병의 보드카였다.
회귀 이후로 단 한번도 마신 적이 없었던.
간만에 마실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여왔다.
그러나 그런 나를 바라보며 한아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현이도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거기다 우리는 미성년자라구!”
“흐음…… 역시 싫은가…? 그러면 나 혼자 마시지 뭐.”
“뭐,뭐? 잠깐만! 그건 아니지!”
속으로는 자기도 마시고싶은 주제에.
그런 생각에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저,저는 잠시 나갔다올게요.”
“응?”
“어디 가는데?”
내 의문에 그는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급하게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거든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올게요!”
“뭐…… 그래라. 대신, 늦으면 네가 마실 건 없다?”
“다녀올게요!”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녀석은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이내 건물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네…… 여기서 만날 사람이 누가 있다고.”
“저놈이 이상했던 게 한두번이냐? 냅둬.”
“서현이 너도 너무 무심해. 혹시 모르잖아, 큰 일이 생겼을지도.”
걱정스럽게 말을 건내는 한아름을 나는 안심시켰다.
“워낙 스케일이 큰가족이잖아? 친척이라도 만나러 가겠지. 냅둬. 어디 가서 객사할 녀석은 아니야.”
“그런가……”
‘아니, 오히려 여기가 자기 본거지인데 뭘.’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잠깐 전화좀 하고 올 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어? 너도…?”
“그러시던지.”
“둘이서 이야기하고 있어. 그리고……”
“……?”
의아한 표정을 짓는 둘을 향해, 나는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름아, 너랑 서현이는나이차 심하니까 괜히 넘보지 마라.”
“뭣……?!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아!!”
“개자식아! 뒤질래?!”
도망치듯, 나는 문을 닫고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스마트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통화를 걸었다.
잠시간 이어진 연결음끝에 현화 쌤이 전화를 받았다.
[응. 나갔어?]
“네. 예상대로네요. 추적 가능하시죠?”
[물론이지. 나중에 좌표 정리해서 보내줄게. 그런데…… ]
“……네?”
뭔가 찝찝한 듯,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너희들 네명이서 온 거, 맞지?]
“네. 왜요?”
[아니…… 확실하지는 않은데, 뭔가 미행이 붙은 것 같기도 해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데……]
“미행이요……?”
나는 미간을 좁혔다.
설마 벌써부터 감시가 들러붙은 걸까.
아니면 우리를 빠르게 죽이고 일을 치르려는 속셈일지도 몰랐다.
[너라면 문제는 없겠지만, 일단은 조심해.]
“네. 주의할게요. 고마워요.”
[고마우면 발표회나 제대-]
뚝-
“……”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전화를 끊었다.
뭔가 상당한 양의 살기가 수화기를 통해 전해져 오는 듯했지만……
…뭐, 괜찮겠지.
그건 미래의 내가 걱정해야 할 문제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
“그러뉘까~ 이 꼬맹이 셰꺄. 어엉? 좀 마리야, 말투를 쪼끔은 고치는게 이따가 커서 도우미 된다고.”
“닥쳐. 누가 누구보고 이래라저래라야? 너도 그르다 비어버리는 수가 이써……? 후우…씨앙! 왜 이러케 더운 거야!”
“……”
저기요.
뭐, 서현이도 있으니 말이 되냐고 하셨던 분?
왜 지금 두 눈이 풀려 있는건가요?
우리 은발 꼬맹이씨는 도대체 어떤 경위로 정신줄을 놓은 걸까요?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뿐이었다.
물론, 좋아서 웃은게 아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은 거지.
아니, 어쩌면 실성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서현에게 물었다.
“우리, 서현 어린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3줄로 서술해 줄 수 있나요?”
“뭐어?! 불마닛냐! 왜, 마셔따! 그래서 뭐!”
“허허…… 어이가 없네, 허허허.”
물론 마시자고 한 건 나였다.
마셨다고 뭐라고 하는게 아니다.
왜, 으레 그렇지 않은가? 수학여행을 가면 꼭 한 명씩은 감자칩 통 안에 소주병을 담아온다던가……
그게 또 은근히 묘미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잖아.
나는 시선을 옮겨 한아름에게로 향했다.
“한아름씨, 아까 뭐라고 하셨었죠? 서현이도 있는데 마시지 말자고 하지 않았나요?”
“왜에? 아아, 뭐그럴쑤도 이찌! 음! 근데에…… 가라마 너 몸에서 살기 나온다?”
“……”
그렇겠지.
최대한 억누르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결국 나는 폭발했다.
“적어도……적어도! 내 건 남겨놔야 할 거 아냐!!”
“헤헤……그거 서혀니가 다마셔따.”
“고작 그정도……흐끅?!…마시는 걸로 안취한다고! 어떠냐, 머찌지?”
‘멋지지?’는 개뿔이!!
아주 그냥 멋져서 머리통을 자진모리장단으로 후드려버리고 싶을 정도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두세 병 챙겨 올 걸……!”
“헤헤…… 왜 울고 그르냐?”
“냅둬어. 저새끼 찌지리야.”
“꼭…… 그렇게 다 마셔야만…… 속이 후련했냐?!”
피눈물을 흘려봐도 이미 사라져버린 보드카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우…… 세상이 도라간다!”
“우웨에엑……!”
……돌아오기는 했네.
저걸 원한 건 아니었지만.
“아, 서혀니 토해써! 더러……우웨엑!”
“하……”
돌아버리겠네.
*
타워의 57층.
나는 미간을 좁힌 채로입을 열었다.
이미 내 등 뒤에는 막다른 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퇴로는 없는 상황.
[자,잠깐만……!]
쿵!
그런 내 얼굴 옆을, 그녀의 손이 스쳐 지나갔다.
[뭘 자꾸 도망치려고 그래……?]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는 그렇게 말을 내뱉었다.
숨소리가 그대로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갑자기 무슨 짓이야, 이게……?]
[갑자기라니? 이미 알고 있던 주제에……!]
[……큿…!]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며, 그녀는 입매를 말아올린다.
마치 맹수가 먹이를 노리는 듯한 눈빛과, 소름끼치는 미소.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가 되었든,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이건 위험하다.
현재의 층까지 오르며 오만 적을 다 상대해 왔던 나였지만,이제까지의 그 어떤 상황보다 지금이 더위험하다고, 본능이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리며 이성을 되찾았다.
그런 나를, 그녀는 굳이 추격해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짓고 있을 뿐.
[어차피 근방에는 아무도 없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빠르게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그렇게 발악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뭐, 좋아. 쉽게 포기하는 것 보다, 그 쪽이 더 흥분되니까……!]
[젠장할……]
대체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아니면……
언제부터──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아직 주변에는 캄캄한 어둠이 자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아……꿈이었나……”
주변에서는 두 명의숨소리만이 조용하게 방 안을 채웠다.
베네치아에 있는 숙소.
‘그래……지금은 타워가 아니었지.’
비록 꿈이기는 했지만 너무도 생생했던 탓일까,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며 그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현진이 나가고…… 시발, 내 술.’
생각해 보니 새삼 열받네.
한 병 더 있었다면 이렇게 화나지는 않았을 텐데.
‘그 짧은 시간동안 한 병을 비우니까 당연히 속이 뒤집어지지, 이 화상들아……’
물론 현화 쌤과의 통화가 조금 길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십 분이 넘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돌아왔을 때는 보드카 한 병이 호로록 사라져 있지 않았던가?
토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할 거다.
‘아아…… 뒷처리도 내가 했는데 내일 아침이면 둘은 또 숙취에……’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문득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는 얼굴을 굳혔다.
현진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황.
한아름은 옆 방에서 자고 있었으니 방 안에는 나 이외에 서현이 녀석밖에 없어야 했다.
그러나 느껴지는 인기척은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설마……?!’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안녕……?”
내 바로 앞에서 소름끼치게 웃고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