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회
뜻밖의 동행162.
“응? 있어도 되는데?”
그로부터 수 시간 뒤 아침.
일어나자마자 가레스의 집무실에 불려온 레니안느는, 눈을 껌뻑였다. 에우드와 가레스를 번갈아 보며,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더 있어도 돼요......? 진, 진짜루......?!”
“레니안느가 원하면. 애초에 레니안느가 더 머문다고 해서 우리 저택이 딱히 부담될 리가 없지.”
가레스가 가벼이 그것을 말했다.
눈을 비비면서 졸음을 날리기 위해 노력하던 레니안느는, 그 말에 잠기운이 다 사라질 기세로 화악 밝아졌다.
더 있어도 된다- 라는 말은, 포에닉스 저택에 더 머물러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새벽에 레니안느가 너무 아쉬워하기에, 에우드가 한번 의논해보려 했는데. 가레스 쪽에선 의외로 흔쾌히 수락해줬다.
“아 물론, 데우트한테 허락은 맡아야 하겠지만. 딸을 맡는 만큼 우리끼리 정하면 안 되는 거니까.”
가레스의 말대로였다.
현재 메투리우스 가도의 상태는 호전되는 중이다.
길드에서 밤에 추가로 전달된 전서에 따르면, 오늘 저녁으로 상황을 종결시킬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
가장 기승을 부리던 놀들의 무리도, 어젯밤 우두머리를 처리했다고.
그렇다면, 웬만해선 레니안느의 마중은 저녁에 출발할 테니까.
혼선이 일지 않도록, 그 전에 전서를 보내 허락을 맡는 게 나으리라.
레니안느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붕붕 끄덕였다.
“바로 아빠한테 전서 보낼래.......!”
레니안느가 너무 들뜬 덕에, 에우드와 가레스가 큭큭 웃어버렸다.
그리곤 집무실의 펜을 빌려, 단 1분 만에 호다닥 글씨를 써 내려간다. 그 와중에도 글씨가 정갈한 것이 참 귀족 아가씨다웠을까.
에우드는 그것과 가레스 자필의 전서를 받은 후 와이즈를 불렀다.
소리 없는 피리가 울리자, 와이즈가 어느새 가레스의 집무실로 날아왔다. 그러다 편지를 보자 와이즈의 눈가가 약간 찌푸려졌다만.
와이즈의 표정을 해석하면, ‘아니, 물주. 최근 좀 일 많이 시키는 거 아냐......?’라는 눈빛이었다.
에우드도 최근 와이즈의 일이 많아진 것에, 조금 미안함이 앞서고 있었다.
“구우우우.”(콕콕콕콕)
“아야, 아얏. 미안미안미안.......!”
와이즈가 에우드의 손등을 따꼼따꼼 콕콕 찌른다.
그래도 꼬박꼬박, 바로 전서를 들고 날아간다.
삐지긴 잘 삐져도, 일은 저버리진 않는 프로 반려동물(※몬스터)이다.
다른 전서구들보다도 훨씬 빠른 와이즈다. 메트리우스까지의 왕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그렇게 와이즈를 보낸 후, 에우드는 조심스레 가레스에게 물었다.
“......제가 부탁한 거긴 한데. 정말 괜찮은가요, 아버지......?”
“투구의 난쟁이 때도 그렇고. 얘는 항상 부탁하고서 걱정을 한다니까.”
콕콕 찔린 손등을 문지르며 아들이 걱정스레 바라보자, 가레스는 한 번 더 큭큭 웃었다.
“이런 건 너도 좀 어리광 피워도 돼. 걱정 마. 복잡한 건 아빠가 다 해결해줄 테니까.”
가레스는 에우드의 실내복 옷깃을 정리해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레스는 이 친아들 같은 양아들이, 언젠가는 두 누나처럼 어리광 피우거나 떼 써주길 바랐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아카데미를 비롯해 여러 사건들을 무사히 정리해야겠지만.
에우드에게도 가레스의 마음이 전해진 건지. 쓰담쓰담 받으면서, 부끄러운 듯 웃었다.
곧, 가레스는 전서의 답장이 오면 알려주겠다고 말하곤, 에우드와 레니안느에게 방에서 쉬고 있으라고 전한다.
그로부터 3시간 정도 후.
아이들이 나가고부터 쉬지 않고 서류를 확인하던 가레스에게, 와이즈가 메트리 가문의 전서를 가져왔다.
가레스는 와이즈에게 수고와 먹이를 전하며, 그 전서를 받아 책상 위에 놓았다.
내용은 당연했을까.
레니안느가 머무는 걸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물론 허락하지. 우리 레니안느가 자네의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건, 정말 축하할 일이지 않은가. 자네의 저택에 있는 거라면 더더욱 걱정이 없고.]
예전에도 사교회에서, 딸이 친구들이랑 노는 일이 많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건 ‘그러니까 자네 아이들과 잘 만났으면 하는데~’의 의도였지만.
어쨌든 딸이 거의 처음으로 친구 집에서 더 머물고 싶다는데. 데우트가 그걸 허락해주지 않을 리가 없다.
애초에 허락하지 않을 거면, 가레스에게 하루 맡아달라는 말도 안 했으리라.
묘하게 글씨와 문체에, 데우트의 들뜸이 전해지긴 했다만.
가레스는 그것을 슬쩍 무시했다.
그러다 가레스는 전서를 읽던 중, 후반부에 적힌 말에 잠깐 눈을 비볐다.
[그럼 내일 왕도에 들린 후에, 레니안느를 마중하러 나도 포에닉스 저택에 가겠네. 이거 어.쩔.수.없.이. 가레스 자네와 같이 돌아가게 되겠군! 내일의 짧은 마차 여행이 기대된다네!]
“아. 엑.”
가레스는 상당히 실수했다는 듯 짧은 비명을 내버렸다.
* * *
그리고 포에닉스 저택의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정오.
페리아는 방에서 살짝 콧노래를 불렀다.
연휴인 만큼, 포에닉스 저택은 어제부터 다들 최소인원만을 두고 근무 중이다.
가레스는 매년 이 시기엔, ‘다들 많이 쉬어야 해!’라고 소리친다. 일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용인들의 편의에 최대한 맞춰준다.
근데 정작 그런 가레스는 사용인들보다도 업무량이 많다만.
실제로 살펴보면, 이번 연휴에도 가레스는 제대로 쉬는 날도 없다. 지금도 서류 작업 때문에 뻐근한 눈을 꼭꼭 누르고 있을 테고.
이런 주종관계가 전도된 상황에, 사용인들 모두 쓴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을까.
물론 가레스가 항상 그런 식이기에. 솔선수범하며 앞장서기에, 헌터도 메이드들도 모두 그를 더욱 따르는 거다만.
어쨌든 그런 포에닉스의 풍조 덕분에, 오늘은 페리아도 근무가 없다.
항상 입던 녹색 메이드복을 벗곤, 실내용 평상복 차림으로 편히 방에 있었다.
녹색 메이드들은 평소 업무가 많은 만큼, 다른 메이드들보다도 우선적으로 돌아가면서 쉴 수 있었다.
페리아도 열네 살이지만, 그런 저택을 이끄는 녹색 메이드 중 한 명.
동시에 추후 조안의 뒤를 이을 사용인 중 한 명으로서 전력의 교육을 받고 있다. 최근엔 조안과 알베르토에게 헌터대의 관리 또한 배우는 중.
명실상부, 사용인들 사이에서도 확실하게 ‘간부급’으로 여겨지는 소녀였다.
그런 위치를 증명하듯. 페리아의 현재 방은 3년 전과는 달리 무려 개인실이었다.
녹색 메이드 이상의 사용인들은, 현재 각자의 희망에 따라 개인실을 사용할 수 있었다.
포에닉스의 규모가 커지면서, 부지 내의 건물을 다수 리모델링 했으니까. 그만큼 숙소의 여유가 충분히 생긴 덕이었다.
페리아로선 포에닉스 저택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한 호화 개인실이었다.(포에닉스는 다른 사용인 숙소도 전부 깨끗하고 호화롭다만.)
물론 다 같이 숙소 생활을 하는 것도 나름 재밌었다.
선배들도, 나중에 들어온 나이 많은 후배들도 다들 가족 같고.
함께 방에 오순도순 모여,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는 것도 정말 좋았다.(사실 지금도 자주 다른 메이드들의 숙소에 찾아간다.)
다 같이 놀다가 조안에게 혼나는 것도, 그땐 무섭지만 돌아보면 좋은 추억.
그래도 이렇게 혼자 방을 쓰는 건, 과거 페리아의 작은 꿈 중 하나였다.
이제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홀로 방을 써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덕에. 개인실로 옮겨도 된다고 조안이 말했을 땐, 조금 철딱서니 없을 정도로 기뻐했다. 그 정도로 마음이 각별한지라. 페리아는 이 방을 항상 소중히 다루고 있었다.
“으으, 그만큼 책임도 막중하고 일도 많지만....... 그래도, 이번 비번을 통해 꼭 푹 쉬어야지.”
그걸 위해서, 다들 페리아에게 비번을 많이 약속해준 거니까 말이다.
페리아의 비번 기간은 오늘부터 하여, 삼남매들이 돌아가는 날까지. 즉 오늘부터 시작하여 사흘은 비번.
언제든지 에우드와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에우드와의 외출에 대해선, 아직은 약속만 했을 뿐 날짜를 안 정했다만. 페리아는 이따가 조심스레 약속에 대해 여쭤볼까 하며, 행복한 고민을 했다.
아예 너무 마음이 앞선 덕에, 페리아는 벌써 외출복들을 침대에 펼쳐두고 있었다.
언제 나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옷을 입을까 고민하고 있던 것이다. 쉬는 날이기도 하니, 이런 식으로 잠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름의 재미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아직 기반을 잡아야 할 것이 많아 옷이 얼마 없었는데.
지금은 모아둔 급료도 많고, 옷 입히기를 좋아하는 로로나 덕도 있고.
그 덕에 페리아도 최근엔, 방에 여러 옷을 구비할 수 있었다.
개인실에 옷장도 잘 갖춰져 있는 터라, 더욱 거리낌 없이 모으기도 했다.
기존 숙소에서도 각자의 개인 옷장은 있었지만, 역시 ‘조금 부끄러운 옷’은 보관하기 어색했으니 말이다.
-그렇다, 부끄러운 옷.
현재 페리아가 꺼낸 옷 중에는, 조금 과하게 팔랑거리거나 노출이 있는 옷들도 있었다.
본격적이라 해야 할까. 마을 처녀들의 연애용이라 해야 할까.
특히나 그중 세트인 하늘색의 소매 없는 와이셔츠와, 허벅지가 다 보이는 스커트. 그것들은 용기 없이는 쉽사리 도전하기가 어려웠다.
팔 쪽의 노출도 있고 다리도 맨살이 엄청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페리아도 막상 사긴 샀는데 입지를 못 했다.
입어본 건 옷가게에서 점원의 추천과 극성에 떠밀려 입은 것이 한 번.
그리고 거기서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받아, 괜히 의욕에 앞서 구입했다만.......
지금 와선 약간 후회도 있다.
옷을 사 왔는데 왜 입지를 못 하니.
“역, 역시 이건 뒤로 미루는 게....... 좋겠어. 부, 부끄러워.......!”
항상 그랬을까. 옷은 참 이쁘지만 망설이게 된다.
노출 이외에도 과하게 귀여운 분위기를 내는 옷 같달까.
한 번 손에 집었던 와이셔츠와 짧은 스커트를, 페리아는 다시 침대 위로 내려둔다.
페리아가 그냥 마을에서 사는 평범한 소녀였으면 몰라도.
귀족가에 종사하는 소녀인 만큼, 아직은 가벼운 옷에 다소 저항이 많았다.
오죽하면 메이드복이 더 마음이 편할 정도다.
로로나에게 옷 갈아입히기를 당할 때조차도, 예쁘면서 정숙한 옷이 대부분이다. 이런 옷은 웬만해선 귀족가에서 입지 않는다.
그렇게 살짝 한숨을 내쉬며, 페리아는 회중시계를 꺼냈다.
과거엔 좀 컸던 회중시계도, 지금은 손에 딱딱 맞았다.
시간을 확인하자, 비번 사용인들의 점심시간이 가까웠다.
슬슬 방에서 나가야 하리라.
“.......”
그런 중. 페리아는 하늘색 와이셔츠와 스커트를 마지막으로 한번 바라봤다.
“어흠.”
그렇다. 아직 마음을 다 접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페리아는 생각한다.
솔직히 이곳은 자기가 혼자 쓰는 방인데.
혼자 입고, 혼자 거울 보고, 그러다가 혼자 갈아입으면 되는 건데.
괜히 부끄럽다며 못 입을 건 없는 법이다.
“그, 그래. 부끄러워할 게 뭐 있어!”
듣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색한 목소리.
페리아는 오랜만에 잠깐만 입어보자고, 서둘러 자신의 평상복을 벗으며 침대 위로 던졌다.
그리곤 속옷 차림으로 잠깐 더 고민한 후- 그것들을 입어봤다.
“.......에헤헤☆”
자신도 모르게 거울을 보며 쑥스럽게 웃어버렸다.
역시 과하게 가볍다. 그리고 과하게 옷이 귀엽다. 노출이 많다.
팔다리의 맨살도 많이 드러나고. 어쩌면 상스럽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시 예쁜 건 예쁜 거다.
항상 입어보는 옷하고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물론, 도련님 앞에서 입기엔 여전히 각오가 필요했다만.
페리아는 거울 앞에서 몸을 돌리며, 짧은 치마폭을 팔랑팔랑해본다.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나는 것이, 괜히 페리아가 더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기를 1분 정도 만족스럽게 거울 앞에 있었을까.
페리아는 일단 갈아입자 싶어, 침대 위에 던진 평상복을 가지러 가려 했다.
똑똑똑-
그때 정갈한 노크 소리가 방에 들려왔다.
‘응? ......아, 언니구나!’
헌터들도 대부분이 비번- 특히나 어제 막 야수 몬스터 토벌에 다녀온 엘리리도 사흘간 완전히 프리다.
때문에 오늘 점심 식사는, 페리아와 함께 사용인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어젯밤에 엘리리 쪽에서, 식사 전에 먼저 방으로 찾아온다고 했으니까. 아마 지금 찾아온 거겠지.
비번 메이드들의 점심의 경우, 요리사 사용인의 휴식도 보장하자는 차원에서 마리가 간단히 만들기로 했다.
마리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교양 요리를 가르쳐줄 정도의 실력자니 말이다. 다들 오늘 마리가 해주는 요리를 기대하고 있었다.
페리아는 살갗이 많이 드러나는 차림인지라 잠깐 머뭇거렸지만, 상대가 언니라면 별문제 없다.
이참에 언니라면, 혹시 좋은 조언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봬도 엘리리는 인기가 많은 여성이다.
헌터 길드에서도 특유의 털털한 성격과 세련된 복식이 유명했는지. 남자 헌터들은 물론, 심지어 길드 직원에게 구애를 받는 일도 있다.
물론 엘리리는 포에닉스 쪽에 집중하기 위해, 다 거절하고 있다.
그런 언니의 인기는 페리아가 생각해도 꽤 신기했다.
.......포에닉스 헌터들은 엘리리의 과도한 털털함을 알기에, 전부 고개를 절레절레한다만. 특히 디안이.
어쨌든 엘리리라면, 페리아의 옷들을 보곤 어떤 식으로 입어야 할지 친절히 알려줄 게 분명하다.
또 의외로 귀엽다고 칭찬해줄지도 모르고.
동생을 아끼는 만큼, 엘리리는 평소에도 페리아를 칭찬하는 것에 대해 절대 인색하지 않다.
똑 부러진 동생으로서 잔소리도 하는 페리아지만, 그래도 페리아는 언니의 칭찬을 듣는 걸 참 좋아했다.
“응, 언니. 지금 열게-”
살짝 들뜬 기분을 내며, 페리아는 치마를 팔랑이며 방문을 활짝 열었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면-
덜컹.
“-에.”(페리아)
“네? 언니? 앗-”(에우드)
찾아온 건 언니가 아니라 에우드였다는 거다.
콰아아아앙!
페리아가 엄청난 속도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곤 방문 앞에서 쭈그려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질렀다.
페리아 알피타. 14세.
포에닉스 저택에선 간부니 뭐니, 수년 뒤 떠오를 실세니 뭐니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