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마검사 도련님-215화 (213/264)

?215회

사서215.

목소리가 들려온 한순간.

종이가 새까매지는 기분을 느꼈다.

잉크를 잘못 흘렸을 때. 텅 빈 종이 위를, 순식간에 검정이 잠식해가는 것처럼.

아니, 보고 있는 종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디에스의 추천으로 바꿨던 노트는, 그 물건이 새것임을 알리듯 여전히 하얀 빛을 띠고 있었다.

검은 것은 자신의 글씨. 하얀 것은 종이.

에우드가 보고 있는 흑백은 여전히 양분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느껴지는 반전된 감각은 무엇일까.

눈앞의 하얀색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감각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냄새.

잉크로 뒤덮은 냄새.

그리고 그 위를, 새하얀 수정용 잉크로 재차 뒤덮은.

본성을 겹겹이 감춰가는 냄새다.

에우드는 그 냄새에, 황급히 노트에서 고개를 돌렸다.

“-안색이 안 좋으시네요, 혹시 몸이 나쁘셨던 건가요……?”

“앗.”

에우드의 앞으로, 어느새 한 여성이 다가와 있었다.

아마 방금 들려 온 목소리의 주인이겠지.

걱정을 전하는 목소리는, 흡사 신전에서의 세례처럼 신성하게 들렸다.

그 목소리에, 흑백이 반전된 에우드의 시야 또한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 쓴 안경 너머에는, 평소와 같은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위화감은, 처음부터 없었던 척을 하듯 사라져간다.

……검은 잉크의 냄새 또한, 어느새 느껴지지 않는다.

남아있는 건 의심하는 것조차 바보 같다고 여길, 밝은 분위기뿐이었다.

에우드는 어리둥절하면서, 다가온 여성을 바라봤다.

찰랑거리는 여성의 머리칼은, 최고급의 염료조차도 재현할 수 없는 검정이라 해야 할까.

여성의 복식은 마치 자신의 정체를 감추듯, 온몸을 꼭꼭 싸맨 외출용 드레스였다만.

그러나 그 옷으로도 감추지 못한 몸매는, 여신상과도 같이 너무나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손짓 발짓에 따라 뒤엉키는 분위기는, 눈앞의 여성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

자칫하면 멍하니 바라볼 거 같았을까.

나이도 아직 열셋 밖에 되지 않았고.

그 이상으로 드림랜드에서의 여러 경험으로 인해, ‘성적매력’이란 것에 크게 반응하지 않는 에우드다.

그쪽 감각이 상당히 무뎌졌다고 해야겠지.

그런데도 눈앞의 여성이 드러내는 분위기는…….

한순간일지언정, 무려 에우드가 무의식중에 성적매력을 느낄 정도였다.

여성의 손에는 간단한 가방 하나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여행객이라 부르기엔 조금 부실한 모습이었을까.

오히려 외관만 보면, 마을에 잠깐 내려온 명가의 규중처자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눈앞의 여성은, 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아가씨로 보였다.

솔직히 딱 봐도, 평민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분위기가 다르긴 하고.

“괜찮으신가요……?”

“아, 네, 넵.”

그리고 에우드의 생각을 끊어내기라도 하려 한 걸까.

검은 머리 여성의 목소리는, 다시 걱정의 목소리를 전했다.

살짝 붉어진 눈시울에, 순수함이 담긴 목소리.

에우드는 순간적으로, ‘이 여성은 만졌다간 망가질 것 같다.’라고 생각해버렸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방해해서 죄송해요.”

검은 머리 여성은 에우드에게 배려를 담아 사과를 전했다.

“아뇨. 실은 그렇게 바쁜 건 아니라서…….”

에우드의 말을 인사치레라고 생각했는지.

여성은 참으로 감사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이 여성의 정체가 뭐든 간에, 무언가의 목적이 있어서 다가온 건 맞겠지.

아까 ‘부탁’이라고 하기도 했고.

“저…… 방금 부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일이신가요?”

에우드는 일단, 상대의 용건을 재차 확인하자 싶었다.

에우드가 약간 머뭇거림을 담아서 묻자, 검은 머리 여성은 사람 좋은 쓴웃음을 지었다.

“실은 제가 길을 찾고 있는데, 혹시 잠깐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길? 아, 혹시 건물을 찾고 계시나요?”

“그렇답니다. ‘정원탑’이라는 곳을 찾고 있어서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어디로 가야 도착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이번에 처음으로 아카데미에 오신 건가요?”

“네, 부끄럽게도.”

에우드의 되물음에, 검은 머리 여성은 곤란하다는 듯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정원탑이라면 에우드야 이제는 쑥쑥 다녀올 수 있는 장소다만.

실제로 에우드도, 아나트에게 듣기 전까진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 12번 보도의 경우, 알카라시아 역과 가까운 만큼 정원탑하고는 조금 떨어져 있으니까.

아카데미에 처음 오는 거라면, 그 위치를 바로 파악하긴 어려우리라.

“이번에 드디어 공적인 용무가 있어서, 이렇게 올 기회가 생겼는데. ……오자마자 길을 헤매다니, 역시 아카데미는 저에게 다소 과분한 장소네요.”

“아뇨, 과분하다니요. 전혀 그런 생각을 할 필요 없는데.”

“후훗.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딱히 에우드라고 해서 겉치레로 한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현재의 아카데미는, 시민들에게 매우 개방적이다.

강의나 연구실 등등의 공간이면 몰라도, 공공시설은 시민들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많다.

몇 년 전부터 베르네이와 하워드도 ‘외부 인원들도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늘리자’라는 방침을 밀고 있다나.

뭐, 그런 덕분에 거기에 불만을 드러내는 귀족 학생들도 꽤 있다고 하지만.

현재 학생회장의 가문- 10대 귀족 할란드 가문의 사교계 권력이 상당하니까. 대놓고 반항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워드가 파벌을 통해 ‘귀족 정치’를 준비하지 않고. 굳이 학생회장 직을 맡은 이유는, 이런 불만을 잠재우는 것도 고려한 거겠지.

그런데…….

지금 이 여성은, ‘저에게는 너무나 과분한 장소네요.’라고 말했다만.

에우드의 생각으론- ‘그 반대’라고 느꼈을까.

검은 머리의 여성은 에우드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그래서 정말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혹시, 조금만이라도 제게 길을 안내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

그게 이 여성의 본래 용건이었던 모양이다.

안내- 그렇다면 정원탑까지가 될까.

사실 길 자체는 잘 이어져 있다.

이곳 12번 도보에서부터 곳곳에 설치된 지도도 의외로 많고.

찾아가는 데엔 실제로 어려움이 없으리라.

조금만 노력하면, 눈앞의 미인은 홀로 목적지에 도착할 순 있겠지.

-라고 생각은 한다만.

‘나도 학기 초엔 기숙사로 돌아가면서도 길을 잃어버렸고…….’

그러다 결국 푸른 늑대의 영역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아루&메루를 포함한 다섯 명의 늑대 수인들에게 습격받기까지.

아니 근데.

사실 그건 에우드가 밤에 괜히, 훈련 삼아서 숲을 뛰어다녔기 때문이다만.

그보다 키루미나도 지금은 아지트에 있고, 사울드와 랜퍼스도 있다.

함부로 제삼자를 습격하는 일은 벌이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식사시간도 아닌 만큼 더욱.

그래도…… 혹시나, 라는 게 있긴 하니까.

수인족 파벌이 푸른 늑대만 있는 건 아니고.

여전히 화끈한 검은 사자라던가 등등 많다.

그 이상으로, 이 눈앞의 여성이 너무나도 곤란한 표정이었다.

덕분에 에우드도 모르게 마음이 살짝 약해져 버렸을까.

누나들의 어리광 피우기나.

라다루스의 귀여운 스피드 퀴즈 부탁이라거나.

저번 키루미나의 떼쓰기도 그렇고.

에우드는 이런 눈빛을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는 걸 최근 실감했다.

에우드는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체르니와 연락을 나누고 10분 정도가 흘렀다만.

에우드도 누나들이 씻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자주 봐서 잘 알고 있다.

체르니가 씻고, 준비하고 등등을 하면, 적어도 20분 정도는 더 걸릴 거다.

와이즈의 경우 ‘계약’에 의해 에우드의 위치를 바로 파악할 수 있고.

……그렇다면, 동시에 플로라와의 연락도 차질은 없을 테지.

고민을 거듭한 에우드는 자신의 조사 노트를 가방에 넣었다.

“그…… 적당적당한 지름길이라도 괜찮으시다면.”

“어머나, 너무나 충분한걸요.”

에우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귀족의 예를 갖추자, 검은 머리 여성은 감사의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에우드조차 처음의 냄새를 잊어버리게 할 만큼 순수했다.

“저는 ‘라줄리’라고 해요, 친절한 학생분.”

자신을 라줄리라 소개한 검은 머리 여성은, 에우드에게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에우드입니다.”

“에우드-”

연상의 여성에게 전해져온 악수를, 에우드 또한 조심스럽게 잡았다.

“아아, 정말 멋진 이름이네요.”

라줄리의 손은, 마치 예술적인 도자기처럼 하얗고 매끄러웠다.

* * *

“아카데미는 참 좋은 장소네요. 꽃도 가득 피었고. 아까 봤던 학생들도 모두 활기차 보이고~.”

“사실 바로 며칠 전까지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지만요.”

“지옥? 우후후, 에우드는 농담을 참 잘 하네요.”

“농담은 아닌데…….”

하긴.

지옥이 끝난 지금은, 풍류를 즐기는 학생들의 학구적인 공간으로 보이긴 하겠다.

그리고 지름길이라곤 했다만.

사실 엄청 대단한 건 아니고. ‘나무 정원길’이라 불러야 할 길이다.

정원탑 일대에 펼쳐진 숲 내부에, 포장도로를 깔아놓은 것이라 해야겠지.

원래 12번 보도부터 시작해 학생회관을 통해서 가면, ‘낫’ 모양으로 길을 지나게 된다.

하지만 이 정원길을 통해서 가면, 단번에 대각선 길로 다닐 수 있었다.

뭐, 나무를 많이 베지 않기 위해서였는지.

길 자체가 약간 곡선을 이루고 있긴 했다. 완벽한 대각선까진 아니고, 살짝 포물선을 그리는 것이다.

물론 에우드의 경우 이 정원길을 ‘완벽한 대각선’으로, 가장 빠른 길로 다닐 수야 있다만.

그건 와이즈와의 연계 훈련이나 혹은 몸풀기를 위함이지,

누군가를 안내하는데 할만한 행동은 아닙니다.

‘애초에 그렇게 따지면, 저 사람을 엎거나 해서 뛰면 바로 도착할 테고.’

당연하지만 낮이기도 하고.

포에닉스로서도 그건 매우 아웃.

티아나가 안다면, “막둥이 얘, 진짜! 품위를 지켜야지!”라며 화낼 것이다.

……이미 품위 할 것 없이, 저번에 5층 창문에서 키루미나를 안고 뛰어내린 전적이 있긴 하다만.

어차피 그걸 제대로 본 사람이라곤 수인 남학생들 정도고.

정작 그쪽도 다들 ‘신비한 날’ 때문에 기억이 애매모호한 상태라니까. 그리 문제는 없겠지.

뭐, 혹시라도 그걸 본 귀족 학생들이 더 있다면-

‘……좋-아, 그땐 트루스도 같이 팔자!’

트루스도 휩쓸린 거다만, 이용할 건 이용하자.

왠지 저 멀리 제1 도서관에서, “와, 에우드 너무해라~”라는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에우드는 라줄리 쪽을 봤다.

나이는 슈가나 디에스와 비슷할 텐데.

막상 보면, 행동 하나하나가 의외의 동심을 품고 있었을까.

정원길 주위를 감싼 녹음에 감탄하며. 꽃에 감탄하고.

때론 숨을 크게 들이쉬곤 숲의 내음을 만끽한다.

여성스러운 몸을 가졌음에도 행동은 소녀 같은 게, 자연스레 보호 본능을 느끼게 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라 생각하며, 에우드는 라줄리에게 살짝 물었다.

“그런데- 라줄리 씨는 어떤 용무로 아카데미에 오신 건가요?”

“아-”

라줄리는 어느새 꽃 하나를 꺾어왔는지.

그것을 살포시 쥐곤 향기를 맡고 있었다.

“용무…… 라기보다도.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업무일까요.”

“업무? 역시 아카데미 쪽에 관련된 업무인가요?”

“네, 영광스럽게도 곧 있을 아카데미의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그 일환으로 이렇게 방문을 하게 됐죠.”

“아하…….”

그렇다. 앞선 스케줄이 다 끝났으니까.

이제 이번 학기에 남은 가장 큰 이벤트는, 아카데미의 행사뿐이다.

그래, ‘그 여자’가 방문하는.

아마 현재 아카데미 학생들에겐 소문이 상당히 퍼진, 거대 무투 대회 행사다.

“-그럼 이번엔, 저도 에우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라줄리는 이 대화를 질문을 주고받는 것으로 여긴 건지.

에우드에게 흥미로운 눈빛을 밝히며 웃었다.

둘의 거리는 어느새 또다시 가까워져 있다.

정말 움직이는 기척이 순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해야 할지. 다가오는 걸 1초 정도 의식하지 못했다.

그건 악의가 없고, 아이처럼 순수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악의를 숨기는 법을 알기 때문일까.

“아, 네.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그럼 거절하지 않고- 에우드는, 평소에도 이렇게 사람을 잘 도와주나요?”

“네?”

“저처럼 처음 보는 사람을 도와주고. 이렇게 몸소 안내도 해주고. 정말 사람이 좋다- 아니.”

가까이 다가온 라줄리는 에우드의 눈높이까지 몸을 살짝 숙였다. 검은 머리칼에서 좋은 냄새가 전해진다.

갈색과 흑색 언저리의 눈동자 위로는, 에우드의 얼굴상을 띄워가며 반짝반짝 빛났다.

“정말 좋은 소년이라고 생각해서요.”

‘좋은 소년.’

아마 칭찬일 테지만…….

어째서인지 에우드에겐, 여러 의미가 많이 내포된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에우드는 그 말에 고개를 몇 차례 갸웃한 후,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까지 딱히 제가 그런 성격이라곤 생각은 한 적은 없었는데요…….”

“그런가요?”

“그랬긴 했는데…….”

라줄리의 되물음에, 에우드는 안경 아래로 난처하게 실눈을 뜨며 말했다.

“하필 어제 막 ‘귀찮은 일을 사서 한다’라는 말까지 듣긴 했네요…….”

“-푸훗!”

어제 제2 도서관에서 체르니에게 들었던 말이다.

“아하핫! 뭐야 그거, 정말 재밌는 표현이네요!”

“그, 그런가요. 아하하…….”

“뭐, 그런 덕에 이렇게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던 거겠지만요~.”

‘귀찮은 일을 사서 한다.’

체르니가 그걸 말했을 땐 살짝 놀림 받는 것 같았다만.

에우드도 지금의 자신을 보니, 정말 뭐라 말할 여지가 없었을까.

그 이전에 놀림 받는 것에 따질 처지도 아니었고.

에우드 홀라이트 포에닉스.

정말로 괜히 사서 고생하는 타입의 소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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