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회
접촉194.
악시우스는 어느새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아마 조각용 칼. 수수한 나무 칼집에 쏙 들어간 칼날을, 악시우스가 조심스레 드러낸다.
그리곤 적당한 천 하나를 꺼내더니 무릎 위에 폴싹.
그 위에서 에우드가 지적했던 부분을 재빨리 깎아갔다.
나무 조각이 복도에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준비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아하하, 그래도 다행이네, 있어야 할 게 없는 게 아니라, 없어야 할 게 있는 거니깐!”
실수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꽤나 상쾌했다.
악시우스는, 에우드가 지적한 것에 대해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우드의 몬스터 지식이 상당한 것에 더 흥미를 가질 정도였다.
“-그럼 무예나 마법을 제외하면, 지금은 미궁 이론이 거의 전공이라 해야겠네. 어려운데 대단한걸.”
“네, 아카데미 오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공부하다보니...... 아, 그럼 악시우스 선배도 미궁 이론을 배우시나요?”
“응응, 작년부터 강의 듣고 있어. 이번 해엔 제시카 교수님 강의.”
의외로, 악시우스도 제시카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건 즉-
“......그래서 더 죽을 맛이지.”
“그 지옥 과제군요......”
“오늘 새벽에 겨우 끝냈어.......”
이번 지옥 기간에 달달 시달리고 있다는 거겠지.
게다가 악시우스가 이번에 밤샌 이유가, 제시카가 낸 과제 때문이었다고.
.......저희 제시카가 죄송합니다.
“혹시 아까 복도에 쭈그려 중얼거리던 복수 대상이......”
“에이, 그건 반쯤 정신이 없어서 한 농담이지!”
그 ‘반쯤’이라는 게 중요하다 싶었다만.
“-어쨌든. 아무리 이론을 공부하고, 몬스터를 공부해도. 현재 아카데미에서도 에우드군만큼 자세하게 아는 학생은 손에 꼽을걸?”
“에이, 그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에우드의 너스레에, 악시우스가 조각칼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건 과소평가지. 이 세상의 몬스터가 대체 몇 마리인데. 그것들의 사소한 특징도 기억하고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야. 지금도 헌터 길드에 기록되는 몬스터들도 매년 늘어나고 있잖아? 미지가 가득하다는 거지. 그래-”
악시우스는 조각칼을 잠시 멈췄다.
“.......이번 사건에서 나타났던 녀석들처럼.”
저번 연휴, 몬스터의 도시 습격-
그 막판에 나타난 ‘거대 몬스터’들을 말하는 거였다.
건물 크기의 미노타우로스는 에우드도 처음 봤으니까.
로로나와 디에스 쪽에서 처리한 거대 놀도 그렇고.
포에닉시안과 비슷하게 피해가 일어난 워스레인 가문 관리 도시- 워실디아에서도, 몇몇 거대 몬스터가 나타났었다고 한다.
현재는 헌터 길드에서 임시로 정보를 종합해둔 상황.
이후 일시적 돌연변이가 아니란 게 확정되면, 헌터 몬스터 자료실에도 그들의 페이지가 추가될 예정이라 한다.
그 외에도 위험도 S에 해당하는 몬스터들은, 아직 정보가 확실치 않은 게 대부분.
악시우스의 말대로, 여전히 세상은 몬스터- 그리고 던전에 대한 미지로 가득하다.
“물론. 그 거대 몬스터들이랑, 이번 짐승형 몬스터들은 아무리 봐도 어떤 개자식들의 고의지만.”
“.......”
계속 친근했던 악시우스의 표정은, 이 순간 조금 섬뜩하게 보였을까.
“-자, 끝! 좋아, 덕분에 틀린 부분 없이 완성할 수 있겠어!”
조금 뒤, 악시우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수정이 끝난 조각을 짜잔하고 보여준다.
돌기는 잘 깎여 나갔고, 어느새 도마뱀 피부와 같은 질감이 보인다.
에우드는 다시 거기에 감탄했다.
악시우스의 조각칼을 다루는 솜씨는 매우 뛰어났다. 검 자체에 조예가 깊어 보였을까.
‘......어라? 하지만 이 사람 분명 활을 쓸 텐데.’
에우드가 거기에 잠시 의문을 띄울 때였다.
“악시우스, 일어나 있어? 어디야? .......너 또 설마 복도에서 쓰러진 거 아니지?! 악시우스!”
멀리서 악시우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소벨이네.”
“소벨......?”
“소벨 아이롱. 우리 파벌 멤버야. 내가 아침까지 기숙사 안 돌아오면 마중 좀 와달라고 부탁했거든.”
악시우스는 또 가볍게 말했다만.
아이롱이라 함은 분명, 그리피너의 최측근 가문의 이름.
포에닉스로 치면 케인즈 가문, 메트리로 치면 하우스볼트 급의 가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목소리의 주인은 사실상 ‘그리피너의 넘버2’라고 불리는 게 맞겠지.
“.....근데 복도에서 자주 쓰러지셨나요?”
“작년에 가끔.......”
악시우스는 가방을 챙기면서 쓴웃음 지었다.
그러면서, 쓰레기 하나라도 떨어진 거 없는지 확인하는 게 참으로 꼼꼼하다.
이후엔 잠깐 기숙사에 돌아가서 씻은 후, 강의에 나갈 거라고.
“도와줘서 고마워, 지옥 기간 끝나면 나중엔 우리 아지트에도 놀러 와~”
그렇게, 악시우스는 에우드의 등을 퐁퐁 두드리곤 자리를 떴다.
여전히 과하게 가까운 거리감이었을까.
곧 다른 복도에서 소벨과 만난 모양인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다행히 안 쓰러져 있었구나! 근데 어디 있었어, 악시우스?”)
(“잠깐 잠 깨는 겸 잡담. 에우드군이랑.”)
(“잡담? 너 또 별로 안 친한 애 잡고 무섭게 억지로 대화하고 있었다던가- .......응? 뭐?! 에우드?! 포에닉스 막내?! 눈 마주치면 기절이랑 있었다고?!”)
(“기절 안 해~ 사탕도 받았다?”)
멀리서 들려온 친근한 대화에, 에우드는 뺨을 부끄럽게 긁적여버렸다.
이윽고 악시우스와 소벨의 대화가 안 들릴 때쯤, 에우드도 자리를 정리했다.
악시우스와 이야기한 덕분에, 어느 순간부터 잠이 깨긴 했으니까.
이르지만 강의실로 가자 싶어, 의자에 앉아 찌뿌둥한 몸에 기지개를 쭉 켠다.
그리고 그때였다.
폴폴폴폴.
폴폴폴폴.
“.......엉? 어?!”
에우드 혼자 남은 복도에, 묘하게 리듬감 넘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에 깜짝 놀랐던 게 아직 다 안 가셨던 건지.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에우드는 몸을 히끅 떨어버렸다.
그러나 조금 뒤, 어디서 소리가 들리는지를 깨닫는다.
‘설마 시계에서?’
기묘한 소리는, 에우드의 카틀레야 회중시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 근데 어째서.
이 3년 동안 소중히 써 오면서, 고장 한 번도 없던 시계인데.
아니아니, 이건 고장이라 표현할 일이 아니지.
애초에 회중시계에 이런 소리가 나는 기능 따위 없다.
에우드가 들고 있는 건, 유서 깊은 카틀레야의 회중시계지.
결코 오르골이라던가, 소리가 나는 매직 아이템이 아니다.
곧 에우드가 숨을 삼키며 회중시계를 열자-
거기엔 어느새 ‘정체 모를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마법진을 나름 공부한 에우드다만.
그래도 이건 전혀 본 적 없는 고도의 마법진이었다.
곧, 그 마법진에서 재차 소리가 울렸다.
[“어, 어흠.......! 받, 받았나......? 받은 건가?”]
“-”
에우드는 순간 숨을 크게 들이킬 뻔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새벽에 본 현상임을 걸 기억해낸다.
“혹시 체리니아님?”
[“그, 그 이름은 안돼요!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요?!”]
회중시계에서 들려온 ‘의뢰 대상의 목소리’는, 다급하게 명칭 정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에우드는 복도 멀리서도 소리가 들려오는 걸 눈치챘다.
회중시계에서 들리는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언제부터 계셨어요?”
복도 한쪽의 모퉁이.
쏙 주황 머리를 내미는 체리니아- 아니아니, 체르니가 보였다.
그것도 에우드와 똑같이 회중시계를 들고서.
새벽에 봤던, ‘정체 모를 목소리가 들린’ 회중시계였다.
[“새, 새벽엔 여러 가지 정말 죄송했어요.......”]
“아, 저야말로.”
모퉁이의 체르니는 회중시계를 입가에 댄 채 사과를 전했다.
회중시계에서도, 복도 멀리서도 목소리가 울려, 기묘하게 음성이 겹친다.
어떤 식의 법칙인지는 몰라도.
지금 에우드의 회중시계에 목소리가 전해지는 건 확실하다.
[“우선은 만나러 오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하, 하지만 너무 가까이는 오지 말아주세요......! 지금은 서로 조심스레, 이 회중시계를 통해서 대화를-”]
“아니, 이미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요. 그냥 가까이에서 말 하시지.”
[“안, 안돼요! 차근차근 상대를 알아야 하는 게 먼저......! 이 상태로 천천히 이야기를-”]
성큼성큼성큼-!
에우드는 체르니 말을 무시하고 모퉁이 쪽으로 향했다.
딱 느껴진다.
저 소녀, 말 하나하나 들어줬다간 절대 일이 진행 안 되는 타입이다.
답답해서라도 이쪽에서 가는 게 맞다 싶었다.
[“응?! 막, 막 오지 말라니까요, 잠깐, 스톱스톱- 히이익, 죄, 죄송- 흐에에에엑!”]
콱!
결국 또 에우드에게 붙잡힌 체르니는, 둥근 안경 밑으로 울먹울먹 사과를 전한다.
“당신 너무 무섭다고요, 눈이 너무 무섭다고요오오......”
아까 만난 다섯 살 연상의 남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만.
지금 만난 두 살 연상의 소녀는, 거리가 너무나도 멀다.
“하다 못 해 그 부엉이만큼은 제발 부르지 마세요...... 흐에에엥.”
“안 부를 테니까요.”
결국 체념한 체르니는, 그것만 어떻게든 부탁한다.
어차피 지금 와이즈는 자고 있을 거라, 딱히 부르지 못한다만.
* * *
체르니는 어제 에우드가 ‘일찍 분실물 신고를 할 생각이었다.’고 한 말을 기억했던 건지.
혹시나 해서 아침 일찍, 이곳에 방문해봤다고 한다.
그러다 정말로 에우드가 온 것을 보고, 멀리서 말을 건 거라고.
악시우스가 갈 때까지, 모퉁이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그리고 현재는 제2 도서관의 매우 구석진 자리로 이동했다.
벽과 책장에 의해, 다른 곳에선 잘 보이지 않는 구석 명당이라 나.
체르니왈, 자신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자리라 한다.
도서관 자체도 이제 밤샘했던 학생들이 돌아가는 시간이니까.
지금 도서관은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물건에 의해, ‘둘의 목소리도 줄여져’ 조용한 거였다.
“아, 이 매직 아이템은.......”
“알고 있으신가요?”
“네. 누나가 예전에 선물로 받았거든요.”
“누나분이라면?”
“티아나 누나 쪽이에요.”
체르니는, “아하, 그 연금술 좋아하는 애구나.......!”라며 중얼거렸다.
체르니가 책상 위에 꺼낸 건, 보드게임의 말처럼 생긴 작은 인형.
과거 리퀴아가, 티아나에게 가볍게 선물로 준 매직 아이템, 그것과 같은 물건이었다.
그 기능은 ‘주변으로 대화 소리가 안 퍼지게 하는 것’.
티아나는 3년이 지난 지금도 그걸 소중히 갖고 있다.
사용처가 요긴하기도 했고. “찰랑찰랑 아저씨가 준 거니까!”라며, 지금은 기숙사 방에 장식해두고 있었다.
어쨌든 주변으로 목소리는 안 퍼지게 됐으니까.
이제 무리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그런데 대체 제 시계는 어떻게 된 건가요.”
“딱히 뭘 건든 건 아니에요....... 제 회중시계에 붙은 기능이라.”
“기능?”
“일정 거리 내에만 있다면, 동일 모델의 회중시계에다가 원격으로 마법진을 발생시켜서, 통신 마법을 걸 수 있어요. 이번 건 따로 조치 없이 쓴 임시 마법이라...... 적어도 50m 이내엔 있어야 하지만요.”
“동일 모델이라면......”
“에우드 당신이 회중시계는, 카틀레야 가문의 물건이니까요. ......맞, 맞죠?”
“아, 넵.”
포에닉스 삼남매 모두에게 ‘카틀레야의 조력’이 보장된 건, 벌써 3년 전 이야기.
때문에, 그 조력의 증거인 회중시계를 가지고 있단 건, 고위 귀족들이라면 웬만해선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또 이 소녀는 이래 봬도 왕족에다가, 델베르크의 막내동생이다.
포에닉스의 웬만한 정보는, 그녀 또한 파악하고 있으리라.
“카틀레야가 만드는 회중시계는, 유그라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시계예요. 그래서, 제 시계도 카틀레야 거랑 똑같이 만들어졌어요. 사실상 같은 모델이죠.”
에우드도 거기에 대해 많이 아는 건 아니다만.
카틀레야는 이전부터 세공품 제작에도 유명하다고.
가문 내의 마안들을 이용해, 다른 상회가 못하는 정밀 작업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셀레나의 ‘거리(길이)를 재는 마안’같은 경우, 전투 이외에도 세공에 매우 적합하기도 했다.
그런 마안들을 통해, 각 세대 카틀레야 당주가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지금은 당연히 현 당주인 로로나의 아버지- 삼남매의 외할아버지가 그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그럼 그건...... 어제 그 파밀리어들의 주인이 만들어준 건가요?”
“윽.”
체르니는 잠깐 입을 오므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재 제게 조력을 해주시는 분이셔요. 오라버니의 부탁으로.”
예상대로의 답에, 에우드는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
그건 퍼즐이 맞춰지는 감각이었을까.
“아무튼! 이렇게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요......!”
체르니 쪽에서 눈을 바짝 뜨고 본론을 꺼냈다.
“실, 실은.......! 전 에우드 당신에게 보호받을 생각은 없어요!”
“.......네?”
“흐힉.”
바로 험악해지는 에우드의 눈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을 돌렸다만.
에우드로선,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싶었다.
끝나지 않을 거 같던 지옥 기간도 벌써 중반이다.
과제도 열심히. 시험 준비도 열심히.
새 마법도 준비해오고.
아버지의 의뢰도 항상 염두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지옥 기간을 거쳤는데.
그리고 드디어 의뢰 대상과도 접촉했다 싶었는데.
.......갑자기 그 대상은 보호받을 생각이 없다고?
체르니는 마치 조리 있게 설명하듯, 에우드에게 말을 이으려 했다.
“저, 저는! 델베르크 오기스트 유그라시아의 막내 동생! 왕위 계승에선 말석이라 할지라도, 명예로운 유그라시아 왕족 중 한 명-”
“(에우드, 지긋)”
“-그, 그러니까! 국민을 지키는 왕족이고요! 우선 나이도 제가 더 연상이고.......! 왕족으로서, 연장자로서! 에우드 당신에게 보호받을 처지가 절대 아니-”
“(에우드, 2차 지긋)”
“눈, 눈 무서워요! 에우드 당신 눈 진짜 무서워요!”
말하다가 압박에 못 이겨 울먹울먹거렸다만.
에우드는 자기 눈이 그렇게 무서운가 했다.
결국 에우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쭈우우우우욱-
체리니아 오기스트 유그라시아의 뺨을 쭉쭉 잡아당겼다.
“흐먀아악! 볼 아파요, 볼 아파요!”
“제 쪽은 대체 언제 오나 싶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지금 와서 안 받는다고요?”
“그, 아니, 저 나름 이 나라 왕족인데! 오라버니가 포에닉스와 친하다 해도, 그래도 조금 예의를......! 아야야야야!”
“요 입인가. 요 입이 지금 이상한 고집을 피우고 있는 건가요.”
여기까지 오니, 에우드는 왜 어제 그렇게도 도망쳤는지 이해됐다.
“아하. 처음부터 저한테 접촉할 생각이 없던 거군요.”
“에흐-”
“그러다 어제 결국 사고로 접촉해버린 거고.”
체르니는 볼이 쭉쭉 당겨지다가, ‘들켰다......!’라는 안색으로 바뀌어버렸다.
에우드, 뺨을 더 잡아당긴다.
“으야으아아-”
다행히, 매직 아이템의 능력으로 도서관엔 딱히 비명이 울리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