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님의 메트리 파벌과, 악시우스님의 그리피너 파벌이, 동급의 거대 파벌에게 파벌 대전을 걸어버렸어요! 지금 기숙사 로비에 그 예정이 게시되었고요!”?124회
아지트를 살펴보자124.
“.......”
““.......””
어색한 공기라고 해야 할까.
가뜩이나 우중충한 정원인데, 분위기가 더 침침해졌다.
아나트는 담벼락 쪽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아마 저게 제시카가 말하는 쭈구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저런 아나트를 차마 무시하고 정원관리를 할 순 없겠지.
쭈그려 있는데도 간간이 무섭게 이쪽 보고 있고.
슬쩍 고개가 올라올 때마다, 분홍빛과 갈색 사이의 곱슬 단발이 푸근푸근 팔에 닿아간다.
슈가는 이전에 모시던 아가씨와 지금 모시는 도련님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말이 안 된다고........”
그러다 아나트가 겨우 입을 열었다.
“10대 귀족의 당주 자리라고........ 벌써 새로운 세력도를 만들 준비가 된 가문의 당주라고........”
아나트는 무릎으로 반쯤 가렸던 얼굴을 팍 들어 올렸다.
“메트리 가문도 그랬어! 그 가문 내의 암투와 경쟁을 이기고, 트루스 그 자식이 오른 거라고! 그리피너의 악시우스도! 또 매번 내색은 안 하지만, 이가리트의 다스트 자식도! 전부 10대 귀족의 다음 자리를 차지하려고 얼마나 이를 악물고 있는데! 말이 안 된다고, 진짜!”
사실대로 말하면, ‘포에닉스 삼남매 세 명 다 안 받으려 한다.’까지는 아니지만.
정확히는, ‘두 누나가 받기 싫어한다’는 상황이다.
두 명 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뚜렷하다 보니, 오히려 가문을 잇는 건 그리 바라지 않고 있었다. 예전에도 리퀴아가 그 대화를 듣고 빵 터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물론 티아나도 셀레나도 책임 없는 성격은 아니다.
가레스가 둘 중 한 명에게 확실하게 이어달라고 하면, 두 누나도 꾹 참고 이어주리라.
그래도 결국엔 되도록 잇고 싶지 않다가 진심이다.
이전에 이야기했듯, 가능만 하면 에우드에게 주고 싶어 할 정도다.
‘방패역이 끝났을 시기’도 고려해야 하는 에우드로선, 그게 가장 난감한 일이다.
애초에 말이 분가 출신이지, 에우드는 포에닉스 쪽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에우드가 정말로 자리를 이으려면- ‘반려가 될 사람이 포에닉스 혈통’이어야 그나마 가능한 이야기다.
가레스 말로는 반려를 찾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을 거라나.
가까이에 있다는 말 또한 에우드에게 하기도 했다.
에우드는 포에닉시안 근처 도시에 분가 가문이 있나 싶었다.
.......뭐가 됐든 에우드도 극구 반대 중이라, 그쪽으로 이야기가 더 진행되진 않았다만.
게다가 ‘반려’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두 누나도 말이 팍 줄어들기도 했고.
덕분에 요 3년, 포에닉스 가문에선 그것에 대한 여러 논의가 오갔었다. 적절한 답은 안 나왔다만.
가레스왈, “앞으로 2년 안으로만 결정하자.”라고.
어쨌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나트가 제시한 거래는, 에우드에게 큰 매력이 없는 조건이라는 것이리라.
포에닉스 삼남매는 차기 당주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지 않다.
라그나릴 가문- ‘귀족계 밖’과 ‘귀족계 안’을 서로 담당하기 위해 차기 당주를 선정한 그들과 비슷한 상황일 수 있겠지.
그쪽처럼 대단한 비전을 가지고 일어난 일은 아니다만.
그런데 분명, 아나트 토르랑은 공식전의 악마라고 불릴 정도라 했는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그런 살벌한 별명이 붙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아이다웠다.
“뭐, 왜!?”
“아, 아닙니다.”
아니, 눈빛은 살벌하긴 했다만.
아나트의 이런 모습은 슈가도 처음 보는 건지. 꽤 신선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그래도-
‘.......나와의 동맹은 둘째 친다 하고 파벌 가입인가.’
일단 조건이 어긋난 탓에 이야기가 꼬였다만.
그래도 에우드는........ ‘한 번쯤 충분히 고려할만한 사안’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만 그 이야기를 입에서 내뱉기도 전에, 아나트가 담벼락에서 엉덩이를 뗐다.
“.......이제 됐어. 시간 뺏어서 미안했어. 파벌 이야기는 잊어줘. 없었던 거로 하자.”
“아, 저기 조금 이야기를-”
에우드와 슈가에게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도 바보 같지. .......나랑 동류라고 착각하다니.”
부를 틈도 안 주려는 듯 빠른 걸음.
그리곤 부끄러움을 감추듯, 호다닥 덩굴투성이의 대문을 향해간다.
그때였다.
꼬르르르륵-
““........””
배고픔의 포효가 정원에 울렸다.
.......적어도 출처는 에우드와 슈가는 아니었다.
그보다 에우드의 밝은 귀가, 이미 그 소리의 출처를 알아채 버렸다.
“.......으으윽.”
들킨 걸 알아챘는지.
아나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고통스레 부들부들거리고 있다.
스커트 아래로 다리근육이 살짝 움직이는 게, 당장이라도 전력 대쉬를 시작할 셈이다.
그런 중, 슈가가 에우드에게 재빨리 짧은 아이컨택을 준다.
이어서 도련님과 메이드의 눈이 향하는 곳은, 상대적으로 덩굴이 없는 정원 바닥.
도시락 바구니를 놓은 장소였다.
“오늘 도시락을 많이 싸 왔습니다, 도련님.......!”
슈가의 말을 들은 에우드는, 뛰쳐나가기 직전인 선배부터 말리자 싶었다.
뭐가 됐든, 간단한 몇 마디만이라도 대화를 나누는 게 좋으리라.
* * *
도망가려는 아나트를 겨우 말리고.(도중 슈가가 부탁해서 겨우 멈춰섰다.)
현재는 세 사람 다 돗자리를 펼쳐 그 위에 앉아있었다.
돗자리는 슈가가 도시락을 먹을 때 쓰기 위해 다 챙겨왔다고.
“아가씨들도 오실 거라 생각해서 조금 큰 걸로 가져왔습니다만.”
“덕분에 딱 좋네요.”
최종적으론 세 사람이 앉게 되었으니까 별문제는 없었다.
아나트도 멀리 떨어져서 앉아버렸고. 넓은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도시락 바구니를 열자, 정말 감탄 나오는 알찬 구성이 보였다.
샌드위치라든가, 감자를 으깨 만든 샐러드라든가. 새콤달콤한 과일들이라든가.
우중충한 정원 위로 밝은색이 덧칠해진 것 같았으리라.
.......근데 분명 출발준비까지 40분이 걸렸을 텐데.
시간 내에 가능할까 싶을 만큼, 상상 이상의 퀄리티.
이 정도로 싸 왔을 줄은 몰랐다.
에우드로선 바게트에 크림만 있어도 감지덕지였으니 말이다.
역시 슈가. 요 3년 가사 실력이 엄청나게 상승했다.
슈가는 잠시 일어나 아나트에게로 향했다.
살짝 멀리 떨어져 있는 덕에, 음식을 접시에 차곡차곡 담아 가져다준 것이다.
“잘, 잘 먹을게요........”
아나트는 새빨개진 얼굴로 샌드위치를 한입 먹었다.
샌드위치를 조신하게 베어 문 아나트는, 곧바로 놀란 듯이 슈가를 바라봤다.
의외로 맛이 좋았기 때문이겠지. 이어서 에우드도 먹어보자, 확실히 맛 좋은 샌드위치였다.
“.......그러고 보니, 슈가. 당신, 원래 요리할 수 있었나요?”
아나트는 슈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어느새 다시 존대를 붙이고 있었다.
에우드에겐 존대를 하려니 답답하다고 했다만. 슈가에겐 그냥 존대하는 게 편한 걸지도.
아마 에우드처럼, 어렸을 때부터 사용인들에게 존대해 왔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간단한 것들은 원래 할 수 있었지만....... 포에닉스 저택에서 더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덕분에, 여차하면 삼남매분들의 식사 또한 도와드릴 수 있게 됐습니다.”
원래 포에닉스에는 요리사 사용인이 따로 나뉘어 있다.
그래도 마리나 매디처럼, 취미로 요리를 배우는 이들은 남녀 불문하고 여럿 있었다.
휴게실에 급탕실도 있었으니 접근성도 높았던 덕일까.
그 덕에 3년 전 에우드의 생일 때도, 요리가 가능한 사용인들이 요리사들을 함께 돕곤 했고.
참고로 슈가에게 요리를 알려준 것도 마리와 매디였다.
그 외에도 신입 메이드나 집사들이, 그녀들에게 요리나 과자 굽기를 자주 배운다나. 역시 포에닉스의 든든한 선배 메이드들이다.
“......저도 슈가한테 한 번 해달라고 말할 걸 그랬나요.”
아나트는 장난스레, 또 한편으론 정말 아쉬운 듯 그것을 말했다.
곧, 에우드는 한 가지를 물어보려 했다.
“저, 아나트 선배.”
“뭐야? .......아니지, 잠깐.”
단숨에 다시 반말로 답하는 아나트.
그러다가 아나트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갸웃한다.
“근데 너 왜 아까부터 다시 존대야? 난 존대 안 하고 있는데.”
“아-”
생각해보니, 에우드도 도중부터 자연스레 존대로 되돌아와 버렸다.
물론 처음 돌아왔던 이유는, 방금 느낀 당혹스러움 때문이다만.
“저는 평소엔 존댓말이 더 편해서........”
에우드가 말을 놓는 인물이라 해봤자 두 누나와- 메트리 남매일까.
메트리 남매는 첫 만남의 충격이 꽤 큰 나머지, 경계심이 생겨 그러는 거다만.
하지만 에우드는 지금의 아나트에게, 경계까진 크게 느끼지는 못했다. 상대(아나트) 쪽에서 큰 적의를 보내고 있지 않아서이리라.
존대가 더 편하다는 에우드의 답에, 아나트는 한숨 한 번 내쉬었다.
“......마음대로 해, 난 이대로 그냥 말 놓을 거지만. 그래서. 뭘 물어보려 했는데?”
이야기를 다시 되돌려서, 아나트는 아까 에우드가 하려던 말을 이어가달라고 했다.
“토르랑 쪽에선, 이제 사용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나....... 해서요.”
“흥, 의심 가득한 질문이네.”
아나트는 같잖다는 듯 비웃었다.
역시 슈가를 대할 때와 태도가 극명하게 갈렸다.
“어떻게 하고 자시고야. 포에닉스와 메트리가 사용인들을 전부 이직시킨 후부터, 새로 채용되는 인원은 없어. 토르랑의 만행은 완전히 다 퍼졌어. 설령 그 만행을 저지른 이들의 대부분이 죽었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곧 비웃음은 거두고, 희미한 쓴웃음만이 남는다.
“심지어 ‘머더 메이지’에게 노려졌으니까. 너희 포에닉스처럼 방어하는 데에 실패하고, 완전히 털려버렸으니까. 아무리 급료를 많이 준다고 해도, 이런 살벌한 곳에 누가 오고 싶겠어.”
즉........ 누구도 토르랑 쪽에서 일하려 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머더 메이지를 겪었음에도, 사용인들이 근무를 이어가 주는 포에닉스가 특이한 것이다.
10년 전에도. 머더 메이지의 위협이 있을 만한 곳은, 시민들 모두 일하기를 피했으니까.
하물며 토르랑. 그 악명은, 토르랑이 있는 도시에도 크게 퍼져 있었으니까.
“지금 사용인 역할을 해주는 건....... 처음에 떠나지 않고 남아줬던 사용인들뿐. 애초에, 이젠 사용하는 저택의 범위도 줄어들었고. 일손도 많이 필요 없으니, 큰 문제는 없지만.”
남아있던 사용인들.
3년 전, 머더 메이지가 죽이지 않고 도망치도록 한 이들이다.
그들 중 몇몇이 다시 저택에 돌아와 준 듯하다.
“.......”
“......아하.”
그러다 아나트는, 에우드의 표정이 바뀌는 걸 눈치챈다. 그대로, 그 표정의 의미를 이해해간다.
“머더 메이지 쪽의 이야기도 듣고 싶은 건가?”
“.......조금 악연이 있어서.”
“하지만, 머더 메이지에 대해선 나도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게 없어.”
아나트는 반쯤 감은 눈으로 에우드를 바라봤다.
“내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다 죽은 뒤였는걸.”
“네, 그렇게 들었어요.”
“이미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 대해선 말해줄 수 있지만. 그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분명, 아나트도 헤릭스의 부인과 마찬가지로 마을에 있었다고 했나.
딱히 같이 외출한 건 아니었으리라.
애초에, 헤릭스 부인에게 아나트는 자기 핏줄도 아니기에.
지금에야 구워 삶아져 달라졌다곤 하지만.......
그땐 그저, 남편의 외도로 태어난 열한 살의 ‘불청객’일 뿐.
“너희 쪽과 메트리에서 토르랑의 사용인들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거기서 얼마나 더 죽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어.”
“.......”
3년 전 머더 메이지에게 목숨을 위협당했던 슈가는, 거기에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이건 식사자리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었네. 미안해요, 슈가.”
3년 전, 머더 메이지의 마지막 포에닉스 습격.
아나트는 그 현장에 있던 인원이 누구누구였는지 알고 있던 것일지도.
자신의 말실수에 아나트는 슈가에게로 짤막하게 사과하곤, 샌드위치를 빠르게 먹었다.
역시 바로 자리를 뜨려는 것일까.
에우드에게 동맹을 제안했지만, 뭔가 엉성하게 흐지부지되어버린 상황.
게다가 감정적인 모습까지 드러낸 만큼, 오래 앉아있기는 조금 어색했으리라.
그래도 귀족 아이인 만큼, 꼬르륵 소리를 낸 것만 어떻게든 덮고 가려 한 거겠지.
사실 에우드는 파벌에 대해선 한번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아카데미에 잭스 토르랑도 있는 이상, 에우드가 함부로 이야기를 진행할 순 없다.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던 중.
에우드는 아까 전 대화에 이어 한 가지를 더 질문했다.
“아나트 선배는.”
“응?”
자리에서 일어나 스커트를 정리하던 아나트는, 또 무슨 일이냐는 듯 에우드를 내려다봤다. 곱슬곱슬한 단발머리가 품위 있게 흔들렸다.
“머더 메이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떻게라니.”
“복수심이라던가. .......증오심이라던가.”
“........”
에우드가 전한 물음에, 아나트는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글쎄다. 애초에, 딱히 그런 걸 느낄 만큼, ‘그들’과 친밀했던 건 아니니까.”
거기서 에우드는 알아챘다.
죽은 토르랑 일가의 일원들을, 아나트는 ‘그들’이라 표현했다.
‘가족’이 아니었다.
혈통 상 완전히 남남임에도, 포에닉스 일가를 가족으로 여기게 되어버린 에우드와,
혈통 상 절반은 공통점이 있음에도, 토르랑 일가를 전혀 가족으로 여기지 못한 아나트.
어쩌면 정말 그녀의 말대로, 에우드와 아나트는 동류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용인들에게도 최대한 존대를 해준다거나.
가문의 막내이면서, 또 사실상 따져보면 외부인 같은 존재라거나.
그리고- 머더 메이지 사건을 겪었던 경험이라거나.
만약 정말 에우드가 당주를 얻으려는 야망이 있었다면.
에우드는 아까 아나트가 제안한 조건에 큰 공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 현실과는 다르다.
두 사람이 설령 진짜로 동류일지라도.
겪은 일들이 비슷할지라도. 신념이 비슷할지라도.
그 결과물은 너무나도 다르다.
“잘 먹었어. .......정말 맜있었어요, 슈가.”
샌드위치를 다 먹은 아나트는 귀족 아이답게 인사를 하며, 예의를 표했다.
그렇게 대화를 재개하는 것 없이, 토르랑의 막내는 정원에서 모습을 감춰간다.
아까와 달리 뛰어서 도망가려 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을까.
“......에우드 도련님.”
슈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에우드는 슈가를 살짝 바라봤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포에닉스의 메이드에게 방긋 웃는다.
“꼭, 다시 이야기할 기회를 가져 보도록 할게요.”
“!!!”
“아, 그래도 그 전에 다들 이야기를 한 번 해야겠지만요........”
“감사합니다. 에우드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