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대로면, 난 졸업할 때쯤에 팽당할 게 분명하거든.”?123회
아지트를 살펴보자123.
“팽당한다고?”
“지금 이대로면 아마 1년에서 2년 안으로.”
아나트는 꽤나 가벼운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토르랑의 분가 쪽까지 전부 휘어잡은 게 아니었나?”
“그거. 바로 그게 지금 가장 중요해.”
에우드가 전한 의문에, 아나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긴 맞아. 난 지금 토르랑을 휘어잡았고, 잭스나 지금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분가 쪽까지 구워삶고 있어. 하지만- 그건 지금일 뿐이야.”
마치 그건 시간제한이 있는 것 같은 말이었을까.
“학생인 내가, 지금 토르랑의 실권을 쥐고 있는 건, 한 남자의 후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야.”
“한 남자.......? 아.”
“그래, 대충 알 수 있을 거야. 에우드 너도.”
분명 헤릭스가 머더 메이지에게 죽고, 현재 임시적으로 당주를 이어받은 이가 있다고 했다.
그가 바로-
“전 토르랑 당주, 아인스 토르랑.”
“그리고 토르랑의 현 임시 당주이며, 내 할아버지지.”
또 한편, 잭스의 할아버지이며- 헤릭스의 아버지이다.
하긴, 결코 이상한 말은 아니다.
아무리 아나트가 나이에 비해 능력이 좋고, 가문을 부흥할 수완이 있어도다.
‘어린아이’에 ‘학생’. 게다가 아버지까지 잃고 정통성조차 모호해진 첩의 자식.
권력을 보장해줄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레스도 과거 말하지 않았는가.
에우드가 뭔가를 하려 해도, 지금은 아직 아이.
그렇기에 아직은 자신들에게 맡기라고.
태생적 천재성을 가지고 있어도, 나이만큼은 어쩔 수 없다.
그런 아이가 가문에서 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뒷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해준 것이 바로, 아인스 토르랑이라는 이야기다.
거기서 에우드는, 아나트가 어째서 ‘시간제한’이 있는 것처럼 말했는지 이해했다.
토르랑 임시 당주는 현재 그 나이가 상당하다.
노쇠에 더해, 여러 지병 또한 앓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아인스 토르랑은 1, 2년 안에는 세상을 떠난다- 그것이 귀족 가문 상당수의 판단이었다.
즉 아나트 토르랑은 지금 확신하고 있다.
“아인스 토르랑이 세상을 떠난 후, 분가가 바로 등을 돌릴 거라는 이야기야?”
“바로 그거야.”
아나트는 자리에서 몸을 살짝 돌리곤, 포에닉스 아지트의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지금 분가가 내 힘을 인정해주는 건, 할아버지가 있으니까. 그리고 어디까지나 ‘가문을 회복시키는 수완’이 자신들보다 뛰어나니까. 내게 맡기는 게, 가문의 살을 더 빠르게 찌울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잠자코 구워 삶아진 척하는 거지.”
무분별하게 자란 잡초나 이름 모를 풀들이 푹신푹신하게 밟혀간다.
“그리고 지금 내 계산대로라면- 토르랑은 1, 2년 안으로 다시 중견 가문 정도의 크기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건 3년 전 토르랑의 크기와는 비교 못할 정도로 작지만.......
현재 토르랑의 크기를 생각하면, 상당한 회복 속도였다.
하지만 회복에 1, 2년이 걸린다는 건- 아인스 토르랑의 남은 수명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
“그리고 분가들은, 가문이 웬만큼 회복되고, 할아버지까지 돌아가시면-”
아나트는 아까 에우드에게 내밀었던 손으로, 자신의 목을 치는 듯한 시늉을 했다.
“후견도 없고, 메이드의 핏줄을 이은 내게 더는 볼 일이 없어진다는 거지. 그렇게 되면 난 불행한 사고라도 당한다고 해야 하려나.”
“.......아나트 아가씨, 그건.”
불행한 사고라는 말에, 슈가의 표정에 흠칫거림이 올라왔다.
에우드도 그 말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나트 토르랑의 친어머니는 분명- ‘불행한 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에우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암살.
토르랑 분가가 직접 움직이든,
유그라시아 지하길드에서 암약하는 암살자 집단에게 의뢰하든,
‘어쩔 수 없는 사고’로 가장하여 죽인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아나트 토르랑은 임시 당주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팽당하지 않도록 권력 기반을 다지려 하고 있다.
정확히는 이전부터 준비는 해왔던 모양이다.
다만 최근 아인스 토르랑의 상태에 위독함이 더해지면서, 분가 쪽 움직임이 더 심상치 않아졌다고.
때문에 아나트는, 그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했다.
느긋하게 있다간 언제 분가가 자신의 등을 찌르러 올지 모르니까.
그리고 지금.
그 준비 계획 중 하나를 이루기 위해, 에우드에게 찾아온 것이다.
권력 기반- 바로 아카데미 파벌 중 하나에 합류하는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
“파벌 항쟁이라는 건 가볍게 보면 그냥 학교 안에서 학생들끼리 알력 싸움을 하는 거지만....... 알다시피 그렇게 끝날 건 아니야.”
유학생들에게는 조금 의미가 다르겠지만, 유그라시아 가문의 파벌 싸움은 정치판.
파벌에 합류한다는 건, 추후 귀족 사회에서의 길을 함께 하겠다는 의미와 같다.
이 아카데미에 미래의 권력과 협력 체계를 잡고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포에닉스 쪽도 ‘간부급’을 쉽사리 정하고 있지않는 거고.
이번 해 트루스와 레니안느의 입학에도, 무려 3년 전부터 여러 가문이 손을 써두지 않았는가.
아나트가 이 아카데미에서 권력 기반을 다지려면, 파벌 가입은 필수불가결.
그러나 토르랑은 과거 잭스와 헤릭스에 의해, 메트리 전체에게 찍혀 있는 상황이다.
중소규모 파벌에서부터 합류하여 치고 올라가고 싶어도, 메트리의 눈치를 보는 파벌이 대부분.
심지어 과거 잭스의 똘마니 역을 하던 귀족 아이들도, 토르랑과 최대한 엮이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들 또한 지금 메트리 파벌이나, 그 하위 파벌에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더는 찍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다른 10대 귀족 세력은, 아예 라인이 다르기에 탈 수가 없기에 아예 논외.
그런 중 아나트의 생각이 닿은 것이- 바로 포에닉스 가문이라는 거다.
10대 귀족이면서 3대 귀족 세력에는 거의 영향이 없는 가문.
그 메트리와 대등한 관계이면서도, 어떤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가문.
아나트 토르랑에게 있어, 포에닉스 가문은 가장 자격이 출중한 조력자였다.
다만 포에닉스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고부터 권력 기반이 뒤흔들린 토르랑인데.
적대적인 관계일 게 분명한 토르랑인데.
그런 토르랑이 역으로 포에닉스의 힘을 이용하겠다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 뻔뻔한 이야기일까.
물론 에우드는 아나트가 그저 그런 배경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아나트는 자신이 에우드와 ‘비슷하다’고 했다.
즉, 지금 이 토르랑의 소녀는 에우드에게 무언가를 공감했기에-
‘에우드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 여겼기에’, 제안을 걸어온 것이다.
에우드의 추리를 대략 읽은 것인지, 아나트는 에우드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잡초투성이의 정원을 누비던 것을 멈추곤, 에우드를 향해 다시 방향을 돌린다.
“당연하지만 나도 뻔뻔하게 도와달라는 건 아니야. 잭스의 일도 있고. 토르랑은 절대 포에닉스와 대등할 수 없음은 잘 알고 있어. 그렇기에, 거래를 부탁하려고 해.”
“거래?”
“나를 포에닉스의 파벌에 넣고, 토르랑의 실권을 쥐기 위한 밑바탕이 되어준다면-”
아나트는 에우드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왔다.
“나 또한 네가, 포에닉스의 실권을 쥐는 것을 도와주겠어.”
꼬오옥-
자신이 내건 조건의 매력을 알리듯,
에우드에게로 소녀의 몸을 꼭 붙여 속삭인다.
“나와 손을 잡자. 에우드 홀라이트 포에닉스.”
달콤한 목소리로, 소년의 귀에 목소리를 전한다.
“너 또한 나와 비슷한 처지. 나와 같은 부류야. 막내. 그것도 분가의 양자.”
“상식적으론 절대 후계의 자리를 받을 수 없는 위치지. 그러나 그것도 내 조력이 있다면 말이 달라져.”
“내 능력, 수완, 천재성- 모든 걸 걸고서.”
“다가올 검은 사자 파벌은 물론, 앞으로의 파벌 항쟁에 승리를.”
“이후 아카데미의 정상을.”
“트루스와 맞먹을 향상을 보장하지.”
“이윽고 네가 네 누나들을 제치고, 차기 포에닉스의 실권을 손에 넣도록-”
아나트는 에우드의 몸을 고혹적으로 쓰다듬었다.
“-나 아나트 토르랑이, 에우드 홀라이트 포에닉스를 위한 최적의 도움을 약속할게. 이게 내가 네게 제시하는 거래의 조건이야.”
그건, 실권을 잡을 기회가 없는 귀족 아이들이라면, 모두가 매력적으로 느낄 제안이었으리라.
***
다만........
이 순간까지 아나트는 알 수 없었으리라.
자신이 여기서 한 가지 거대한 계산 오류를 내버렸다는 걸.
“-엑.”
“......응?”
긴장을 살짝 한 채 이야기를 듣던 에우드의 표정이 난처해지기 시작했다.
그건 현 포에닉스 가문이 안고 있는 ‘문제’였을까.
요 3년 동안 포에닉스 저택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아는 슈가만이, “아앗...... 아아앗......”이라며 작은 신음을 낼뿐이었다.
***
아나트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이 정도 거래를 제안받으면, 셋 중 하나의 반응은 나와야 한다.
“내가 포에닉스의 실권을 쥘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같은 ‘가슴 벅참’이라던가.
“아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같은 ‘믿을 수 없음’이라던가.
그리고 가장 귀찮은 반응인, “난 포에닉스에 충성을 맹세했어.”- 같은 ‘우직함’이라던가.
그렇게 셋 중 하나는 분명 나오게 되어 있다.
능력이 충분함에도 후계자 가능성이 없는 귀족 아이라면, 당연히 그런 반응이 나온다.
그리고 아나트는, 어떤 반응이 나오든 설득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또한, 정말로 실권을 쥘 수 있도록 도와줄 자신도 있었다.
포에닉스의 도련님이 자신을 도와준다면, 충분히 함께 당주의 자리를 노릴 수 있다.
아나트의 머릿속엔 이미 그 과정에 대한 계산도 끝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무슨 반응일까.
예측했던 셋 중 무엇도 아닌 반응.
상정했던 오차 범위 내의 반응도 아니다.
아예 정말, ‘이걸 어쩌지.......’라고 하는 경지까지 도달한 반응이다.
예상과 반응이 너무 달라, 아나트는 지금 에우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예측되지 않았다.
계획을 확실하게 짜 왔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게다가 아까부터 몸을 꼭 붙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동요조차 없다.
아나트로선 부끄러움을 참고, 어설픈 지식으로 나름 자극해보고 있는 거였는데........
곧, 에우드가 입을 열었다.
“.......어, 저기.”
“그, 그래!”
아나트는 자신도 모르게 에우드의 행동에 격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에우드는 정말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나트, 아니 아나트 선배, 죄송합니다.”
“........????”
얼마나 난감했는지 존댓말까지 부활했다.
에우드는 최대한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지금 포에닉스는, 저희 남매 모두가 당주 자리 받기 싫어하고 있어서요.......”
그리고 아나트의 귀에 들려온 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잉?”
에우드는 의문 가득한 아나트의 눈을 살짝 피했다.
“세 명 중 누구도 후계를 받으려 하지 않아서....... 추후 가족끼리 계속 논의를 나누는 거로 합의를-”
“아니 무, 무슨 소리야, 그게?! 10대 귀족의 후계자 자리라고?! 대 포에닉스 세력의 수장이라고?! 안 받고 싶다는 게 말이 돼?!”
“으아아-”
“에우드 도련님?!”
에우드를 유혹하듯이 밀착했던 아나트는, 곧바로 자세를 바꿔 에우드의 어깨를 붕붕 흔들었다.
귀족 가문에 속한 이라면-
아니, 비단 귀족 가문만이 아니다.
포에닉스를 아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군침을 흘릴 ‘포에닉스 22대 당주’의 자리.
10대 귀족의 일각이자, 초거대세력의 수장이라는 자리.
그렇지만 현재 포에닉스 가문의 아이들은 그 당주의 자리를 이으려는 의지가 거의 없었다.
셋 중 누구 하나라도 자리를 잇겠다고 하면, 흔쾌히 허락할 정도로.
덕분에 가레스와 로로나도, 요 3년간 꽤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항상 절대 얕보이지 않도록 자신감이 가득히 표정을 짓던 아나트이지만.......
오늘, 아카데미에 오고서 처음으로 난처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
“막내, 사라졌어.”
“에우드, 얘 진짜 누나들한테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갔어~!”
티아나는 남자 기숙사의 출입증을 손가락에 걸곤 붕붕 휘둘렀다.
셀레나는 그 옆에서 함께 차분하게 걷고 있다.
.......표정은 불만스러웠지만.
둘 다, 막둥이가 훌쩍 기숙사에서 나간 것에 삐진 것이다.
대체 어디로 갔는지.
와이즈 같은 전서구 역할의 동물이 있다면 찾아달라고라고 할 텐데.
마법 중에도 특정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마법이 있다곤 하지만.......
이제 겨우 마법 3년 차에 들어선 이 누님들은, 아직 배우지 못한 경지였다.
탐색 마법은 상당한 고등 마법.
때문에, 웬만한 고위 마법사들도 쉽게 사용하진 못한다고.
제시카도 탐색 마법의 경우, 겨우겨우 중급에 들어서고 있다고 한다.
뭐, 제시카는 불 마법 전공이니까.
물론 이 누나들이 탐색 마법을 배웠다간, 그 날로 에우드의 자유는 없어지겠지.
에우드를 위해서라도, 두 누나가 탐색 마법을 배우는 날은 조금 나중인 게 좋으리라.
그렇게 불평을 퐁퐁 쏘아내며, 티아나와 셀레나가 복도를 걸을 때였다.
“앗- 티아나님, 셀레나님?!”
“라다루스다.”
“라다루스, 무슨 일이야?”
라다루스가 복도에서 호다닥 빠른 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유리카 에알레를 비롯한 라그나릴 파벌 소녀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전원, 티아나와 셀레나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남자 기숙사 출입허가증을 목에 메고 있었다.
다만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어라? 오늘은 열 명밖에 없네?”
“.......쉬는 날이라서 따로 행동하는 거야?”
요 일주일 동안, 항상 스무 명 안팎으로 우르르 몰려다녔는데.
왠지 오늘따라 라그나릴 파벌의 규모가 줄어있었다.
그걸 들은 유리카가 바로 상황을 설명해줬다.
“1개 방에 내줄 수 있는 출입 허가증은, 최대 10장이 끝이라고 하더군요. 불찰이었습니다. 때문에, 가위바위보를 통해 열 명을 선발하여 이렇게 오고 있었습니다.”
““아-””
.......아마 출입증 발행에 제한이 있다는 건, 거의 대부분의 학생이 모르고 있겠지.
라그나릴 파벌의 극성 덕에 알게 된 묘한 정보였다.
곧, 라다루스가 금발을 통통 찰랑이며 다급히 말했다.
“그, 그보다! 티아나님, 셀레나님, 에우드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두 분 모두 에우드님을 보고 오신 건가요?!”
“에우드 지금 기숙사에 없어!”
“이제부터 찾으러 가려 했어.”
“아.......! 세 분 다 보시는 게 좋을 거 같긴 한데.......! 일, 일단 두 분 먼저 함께 로비로 내려가죠!”
“대체 무슨 일인데, 라다루스?”
“파벌 항쟁! 파벌 대전의 예고예요, 티아나님!”
““.......!!!””
파벌 대전-
추후 검은 사자 파벌과 대전을 하려는 포에닉스에게 있어서도, 결코 그냥 넘길 말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