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사업에 낭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진영이 밖에 나와 차에 올라타자 조지훈이 아무 말도 없이 차를 운전했다.
한진영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은 조지훈은 한진영이 옷을 옷 방에 걸어둔다는 핑계로 자리를 피한 후 한참 동안 한진영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동안 계속 생각을 정리하던 한진영은 눈앞에 조지훈이 보이지 않는 것을 그제야 깨닫고 조지훈을 불렀다.
“조 실장 뭐해?”
“네. 지금 갑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부름에 단숨에 달려왔다.
한진영은 허겁지겁 달려온 조지훈을 올려다봤다.
“뭐 해?”
“그냥 서류 정리 좀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이 아닌 것 같은데? 일부러 피해 있던 거야? 평소라면 이야기 잘하고 왔냐고 물었을 사람이 왜 오늘은 조용해?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제가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조지훈은 머쓱한 듯이 웃으며 뒷머리를 만졌다.
그리고 한진영의 얼굴을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장님 표정이 많이 안 좋으셔서요.”
“내 얼굴이 많이 안 좋았다고? 이야기 잘하고 왔냐고 물어보지도 못할 정도로?”
“네.”
조지훈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는 아무리 그랬어도 한진영에게 블랙문 이야기를 물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그 상황이 오더라도 조지훈은 물어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한진영의 얼굴은 말이 아닐 정도로 심각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겉으로 자기 생각이 모두 드러날 정도로 마음이 불편했었던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해. 아마 그랬을 거야.”
순순히 인정하는 한진영의 모습에 조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나 안 좋은 겁니까? 혹시 우리 일이 틀어질지도 모르는 건가요?”
한진영은 조지훈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우리 일과는 상관이 없어.”
“그럼…….”
“지금 일 이후에 일어날 일 때문에 그런 거지.”
“이후에 일어날 일이요?”
한진영은 기왕 이야기가 시작된 김에 모든 것을 말하려는 듯이 조지훈을 향해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이야기해줄 테니 조 실장은 알고 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 실장은 알고 있는 편이 나을 테니까.”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이 조용히 의자를 꺼내 앉았다.
한진영은 이제 시선이 같은 높이에 자리한 조지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블랙문이 아시아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려는 계획하고 있어.”
조지훈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아 시장은 최근 급격한 상승세를 키워가고 있었다.
과거만 해도 미국 스포츠 스타 연봉이면 우리나 대표기업을 인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농담처럼 떠돌 정도로 볼품없는 볼륨을 보여주던 곳이 우리나라 시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유럽의 웬만한 곳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규모로 성장했다.
게다가 폭풍 성장 중인 중국과 대표적인 선진 시장인 일본과 홍콩에 의해 아시아 시장의 가치는 몰라보게 바뀐 상태였다.
이런 곳을 블랙문이 놓칠 리가 없기에 그들의 아시아 시장 진출이 이해가 가는 것도 당연했다.
오히려 블랙문의 이런 모습이 한진영의 기분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조지훈이었다.
조지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한진영에게 물었다.
“어찌 보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는 것 아닌가요? 진작에 진출하고도 남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들이 이번에 진출하려고 하는 건 일반적인 외국기업의 진출과는 다른 의미야.”
“다르다고요?”
“그래. 그들이 진출하려 하는 것은 지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금융시장에 영업하겠다는 뜻이야. 기존에 주식과 채권에 투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투자자를 물색하여 자기들의 고객으로 끌어들이고, 투자의 분야도 넓혀 SOC 사업부터 기업의 인수 그리고 부동산 임대업 등등 모든 시장에 발을 담그겠다는 뜻이니까.”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지금까지 다른 곳들이 보여주던 진출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 아닌가요?”
“그래. 완전히 다른 수준이지.”
한진영은 조지훈이 놀라며 건넨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중한 표정으로 왜 표정이 좋지 못한지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일을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해.”
“우리와요? 우리와 어떻게 한다는 이야기인가요?”
“공동으로 출자하여 회사를 하나 만들고 그곳을 통해 일을 진행하자고 하는데…… 쓰읍…… 원래는 중국이었는데 왜 우리지?”
한진영은 릭 앤더슨의 제안을 떠올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래 이와 같은 일을 진행한 곳은 중국이었다.
중국의 업체와 손을 잡고 중국에 투자기업을 설립했던 블랙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설립된 회사는 무지막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시장을 맹폭했었다.
그게 한진영이 지난 시절 경험했던 일이었다.
“분명 중국이었어. 그런데 이번엔 우리에게 그 제안을 했단 말이지.”
조지훈은 혼잣말을 내뱉는 한진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리기보다 궁금한 것이 먼저였다.
“사장님. 우리에게는 좋은 일 아닙니까? 저는 사장님의 모습을 보고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한진영은 고개 들어 조지훈을 바라봤다.
“큰일이야.”
“큰일이라고요? 말씀대로라면 아시아 시장을 블랙문과 함께 하는 건데…… 우리에게는 기회 아닌가요?”
“기회?”
한진영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 담겼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얼굴에 담긴 비웃음이 자기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한진영의 비웃음은 블랙문을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진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블랙문이 어떤 놈들인데 기회를 우리에게 나눠주겠어? 그럴 일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
“그렇다면 왜 우리와 함께하자고 하는 건가요?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우리와 함께하자고 하는 건가요?”
“당연히 우리한테 빼앗아 갈 것이 있어 보이니 우리와 함께 하자고 한 거지. 그놈들이 순수하게 함께하자고 했을 것 같아?”
한진영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는 다시 비웃음을 지었다.”
“우리의 자원이 탐이 났을 거야. 특히 우리가 올리고 있는 실적을 보고 궁금했겠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좋은 수익률을 보이나 하고 말이야. 우리나라 시장을 아주 모르고 있었다면 한낱 신흥시장에서 운이 좋은 증권사쯤으로 치부하고 말았겠지만, 자기네들도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있는 게 있으니 궁금하지 왜 안 궁금하겠어?”
“그럼 합작회사를 세워 함께 투자하자는 게…….”
“우리가 투자하는 방식을 보고 따라 하든지 아니면 아예 우리 투자 방법을 가로채려 함께 회사를 설립하자고 한 거야.”
“아니. 그런 나쁜 놈들이…….”
조지훈은 주먹을 움켜쥐고 책상을 두드리려 했다.
그러나 앞에 한진영이 앉아있다는 사실에 더는 화를 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사장님께 블랙문 놈들은 좋은 놈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건 강도 아닙니까?”
“블랙문이 지금 자리에 어떻게 올라왔겠어? 깨끗한 일만 해서 지금 자리에 올라왔을 것 같아?”
“그걸 우리한테 하려고 하니…… 사장님!”
화가 치민 조지훈이 잔뜩 큰소리로 한진영을 불렀다.
한진영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소리를 지른 조지훈을 가만히 바라봤다.
조지훈은 한진영을 불렀을 때의 목소리 그대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그런 놈들하고 계속 함께하실 생각이세요? 우리를 날로 먹으려는 놈들과 같이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그냥 블랙문 빼고 우리끼리만 하죠.”
조지훈은 도저히 블랙문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조지훈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조지훈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맞아. 조 실장의 말대로 신뢰를 잃은 상대와 함께 사업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야. 하지만…….”
한진영은 여전히 조지훈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창밖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뭔 줄 알아?”
“뭐입니까?”
“사업은 무조건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는 것. 사업에 낭만은 존재하지 않아. 상대가 나를 이용하려 했다면 나도 상대를 이용하면 되는 일이야. 그리고 그 방법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길이라면 상대가 반푼이가 됐건 속이 시꺼먼 놈이 건 같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한진영의 말에 조지훈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함께 했다가는 우리를 빨아먹을 존재인데도 말입니까?”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한진영은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는 조지훈을 내려다보고 웃었다.
“누가 누구에게 빨아 먹힐지는 두고 봐야지.”
“사장님.”
조지훈의 목소리엔 걱정하는 빛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조지훈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창 쪽으로 걸어갔다.
“친해진 언론을 통해 뉴스 하나 흘려.”
한진영은 몸을 돌리고 조지훈에게 지시했다.
“테라, 공매도 세력의 표적이 되어 세이지증권과의 협상이 난항에 봉착.”
한진영은 지시를 내리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혼잣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한진영의 표정으로 보아 자기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만 받을 뿐이었다.
오히려 걱정은 블랙문 자산운용이 해야 할 것처럼 느낀 조지훈이었다.
***
뉴욕타임스의 파이낸셜란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나왔다.
[테라의 노아 스미스 CEO의 걱정이 사실로 드러나]
노아 스미스가 이야기했던 공매도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것이 기사의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노아 스미스가 괜히 죽는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던 일이 실제였음을 확인하고 흥미로운 시각으로 테라를 바라봤다.
비록 공매도의 타겟이 되었지만, 유상증자를 통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는 만큼 상승 동력 또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연 공매도 세력과 테라 중 누가 승자가 될지 궁금해하는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궁금증을 허무하게 만들만한 기사가 얼마 뒤 흘러나왔다.
[테라와 세이지증권 간의 가격 차로 인해 협상이 난항에 빠져]
사람들은 기사를 보고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공매도의 표적이 된 기업에 돈을 투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었기에 협상이 난항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계좌를 열어 테라를 함께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매도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협상이 난항에 빠진 테라는 사람들의 눈에 맛있는 과일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조지훈은 한진영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넘어가는 비행기 안에서 뉴욕 사무실에서 온 연락을 받았다.
“그래. 알았어. 계속 확인하고 이상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전화를 끊은 조지훈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한진영에게 전화로 보고받은 내용을 전했다.
“테라의 주가가 오늘도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새롭게 공매도 들어간 세력도 포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야?”
“현재 주가는 85달러입니다.”
“85달러…… 똥줄 좀 타겠어.”
한진영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조지훈은 그런 한진영을 바라보고 몸을 살짝 기울인 채 이야기했다.
“그래서 테라가 만나자고 연락한 거 아닐까요?”
“그렇겠지. 나 본부장하고 이야기가 통하지 않으니 직접 나하고 만나고 싶다고 할만해. 그러니 이렇게 전세기도 보내준 것 아니겠어?”
한진영은 테라의 노아 스미스가 만나고 싶다며 보내준 전세기의 의자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거 있으니까 좋네. 귀찮게 비행기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여기 안에 들어와서 편하게 앉아 기다리면 되니까 말이야. 그리고 해외에 나갈 때도 이건 수속이 따로라며?”
“네. 제가 알고 있기론 전세기는 일반 입출국 게이트를 통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얼마나 좋아? 수속 기다릴 것 없이 바로바로 통과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굉장한 이득일 것 같아.”
한진영은 전세기가 마음에 드는지 주변을 계속 살폈다.
“그리고 쓸데없이 다른 사람들하고 접촉하지 않아도 되고 일을 처리하면서 움직이는 것도 편하고…… 여차하면 이곳에서 비즈니스 이야기를 하며 이동도 가능하잖아.”
“제가 알아볼까요?”
조지훈은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한진영을 바라보고 넌지시 물었다.
한진영은 자기 마음을 알고 있는 것처럼 물어보는 조지훈을 향해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대하면 얼마나 하고 사는 건 얼마나 하는지 그리고 유지비 같은 것부터 해서 관련되어 필요한 것은 뭐가 있는지까지 다 알아봐. 비행기를 집에 놔둘 수는 없으니 분명 공항 창고를 빌려 보관을 할 텐데 그때 필요한 것까지 싹 다.”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의 대답에 한진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의자를 다시 쓰다듬었다.
앞으로 해외에 나갈 일이 자주 생길 텐데 이런 것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하며 한진영은 의자에서 눈을 감았다.
테라가 보낸 전세기를 탄 한진영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전세기에서 내리는 한진영을 향해 데이비드 칼슨 테라 CFO가 다가와 인사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계단을 내려온 한진영은 데이비드 칼슨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데이비드 칼슨은 한진영의 손을 잡은 채로 전세기 앞에 놓인 차로 안내하며 한진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대주주께서 회사에 방문하는데 제가 당연히 나와야지요. 노아 스미스 CEO가 직접 나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회사에 가면 볼 수 있는데 여기까지 나오실 필요는 없지요. 그럼 바로 회사로 가실까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야 그렇게 해주신다면 환영하지만 피곤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데이비드 칼슨은 한진영을 기대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어떻게든 먼저 회사로 데리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한진영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준 것에 고마운 마음이 생기기도 한 데이비드 칼슨이었다.
“이렇게 CFO께서 직접 찾아오셨는데 피곤해도 회사로 가보는 게 먼저겠지요. 회사로 가시죠.”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회사로 가겠습니다.”
데이비드 칼슨은 차에 타자마자 기사에게 회사로 향할 것을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