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뛰어가며 돈을 흘리고 있다
조용재는 한참을 웃은 뒤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치고는 말했다.
“한 대표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우리가 슈퍼 을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 좋아. 한 대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한 대표가 지시한 대로 움직일 테니까 손가락으로 우리가 갈 곳을 잘 알려 줘. 알겠지?”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잘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정 회장님. 이 친구 참 재미있는 친구입니다.”
조용재가 신이 난 얼굴로 정병선에게 말했다.
정병선은 조용재가 왜 이렇게까지 신이 났는지 잘 알고 있었다.
LZ그룹의 승계 문제가 이제는 더는 걱정거리로 조용재의 발목을 잡지는 않게 됐다는 뜻이었다.
정병선이 알고 있기에 LZ그룹의 승계 문제를 한진영이 해결 방법을 알려줬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러나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하여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답안지를 보고 풀어도 어려운 문제는 어렵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승계 문제는 오랫동안 조용재의 마음을 계속 무겁게 짓누르고 있어왔다.
그런데 그 문제를 이번 일로 한 방에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LZ그룹의 미래 먹거리까지 해결해준 것에 조용재는 한진영을 업고 방안을 돌아다니고 싶은 심정일 게 정병선의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정병선은 환한 표정의 조용재를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는 아니던가요? 한 대표와 있으면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이 친구 이거…… 내 술 한잔 받아.”
조용재가 팔을 걷어붙이고 술병을 손에 들었다.
한진영은 조용재가 내민 술병에 잔을 들어 술을 받으며 조용재와 정병선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런데 이 문제로 저를 보자고 하신 건 아니실 테고…… 어쩐 일로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한진영의 술잔에 술을 따르던 조용재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는 듯이 크게 놀라고는 술병을 자리에 놓았다.
“내 정신 좀 봐. 쓸데없는 일로 정신이 팔려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네.”
한진영은 그룹 승계와 관련된 일을 단번에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하게 만든 일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우선 한잔 마셔. 그래도 내가 준 술인데 한잔은 먹고 이야기 시작해야지. 정 회장님도 한잔하시지요.”
조용재는 술잔을 들어 건배하고는 먼저 술을 들이켰다.
뒤를 이어 정병선과 한진영이 술을 들이켰고 조용재는 두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대표 다름이 아니라 한 대표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이렇게 보자고 한 거네.”
“물어볼 게 있으시다고요?”
“그래. 한 대표라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서 말이야. 정 회장님도 강력하게 자네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셨고…….”
“정 회장님께서요?”
한진영이 고개를 돌려 정병선을 바라보자 정병선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한진영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이길래 이들이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한진영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띵동.
한진영은 TV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문으로 향했다.
철컥.
“잘 다녀왔냐? 재미있게 놀았어?”
한진영은 이성우의 인사도 받지 않은 채 거실로 향했다.
이성우는 반갑게 맞아주지는 못할망정 인사도 받지 않고 바로 문만 열어주고 거실로 들어가는 한진영을 향해 눈을 흘겼다.
“야. 네가 불러놓고 왜 인사도 받지 않아? 너 땜에 와이프 눈총 있는 대로 다 받고 여기 올라왔구먼. 야. 야.”
이성우가 신발을 벗으면서 계속 투덜댔지만,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말에 한마디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의 뒤를 신발을 벗고 급히 따라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급히 한진영을 불렀을 때 한진영이 TV에 심취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뭔데 이 시간부터 TV를 그렇게 봐? 뭐 야한 거라도 TV에서 나오고 있는 거냐? 뭔데?”
이성우는 한진영을 따라 화면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난 또 뭐라고…… 네 취향이 저 여자냐? 저 여자 남자친구 있다던데? 같은 회사의 COO라나 뭐라나?”
이성우는 화면에 나온 엘리자베스 무어를 바라보고 말했다.
TV에서는 엘리자베스 무어에 관한 특집 방송이 진행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무어가 어떻게 회사를 설립했는지부터 시작해서 최근 한국에 와서 했던 강연까지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이 나오고 있었다.
방송의 제목은 의학계를 뒤집은 혁명이라고 했지만 나오는 것은 엘리자베스 무어에 관한 이야기가 전부였다.
이성우는 가만히 방송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TV에 엄청 많이 나온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 많이 나오는 거 같아. 우리나라가 밀어준다고 해서 그런 건가? 내가 본 대담만 해도 이번 달에만 세 번이야. 아무리 개발은 회사 개발진이 진행하는 거라지만 저렇게 해외 다니고 방송에 나오면서 회사 잘 운영할 수는 있는 건가 싶어. 남자친구라는 그 사람이 사실은 회사의 진짜 주인이고 저 여자는 그냥 얼굴마담이 아니냐는 생각도 든다.”
한진영은 이성우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내뱉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고개를 돌려 이성우를 향해 물었다.
“혹시 너도 제안받았냐?”
“어? 제안? 무슨 제안?”
TV를 신나게 보던 이성우는 한진영의 질문에 고개를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과 눈을 마주친 이성우는 한진영이 말한 제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
이성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고는 비어있는 소파로 가서 앉았다.
“야. 안 그래도 너한테 물어보려고 했다. 사인노스인가 뭔가에 투자하는 게 맞아?”
“너희한테도 연락이 갔구나.”
한진영은 화면을 바라본 채로 이성우의 곁에 가서 앉았다.
이성우는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집어 옷에 대충 닦고는 한입에 사과를 깨물어 먹었다.
그리고 사인노스 투자 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집 대장한테 연락이 갔나 보더라.”
“회장님께?”
“그래. 아무래도 회장님에게 연락이 가겠지 나한테 연락이 오겠어?”
“하긴. LZ도 회장님 쪽으로 이야기가 들어간 거 같더라.”
“용재 형님 쪽으로도 제안이 들어갔대?”
“그뿐이 아니야. 조 사장님의 모임 친구들 이야기로는 재계 서열 50위권 안에 들어가는 곳에는 전부 연락이 들어간 모습이야.”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입가로 흐르는 사과 과즙을 닦지도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서열 50위 내 모든 기업에? 모두?”
“그래. 모든 기업에 다 제안이 들어간 거 같다고 해. 그리고 벌써 제안에 따라 투자를 시작한 기업도 하나둘 생겨나고 있고…… 눈치 보다 나중에 한대 크게 얻어맞고 빼앗기듯이 투자하느니 그냥 잘 보이기라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먼저 넣는 곳이 있다고 해.”
“돌았네. 돌았어.”
이성우는 손으로 입가를 닦아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슬쩍 돌아보고 물었다.
“그래서 너희는 얼마나 넣으라고 그래?”
이성우는 한진영의 질문에 얼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500억.”
“흐흐흐. 생각보다 너희 평가가 박하네.”
“그러게, 말이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성우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사과를 다시 한입 베어 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물거리던 이성우는 한진영을 향해 조금 전 물었던 질문을 다시 했다.
“그래서 투자 하는 게 맞아?”
“내가 투자하지 말라고 하면 버틸 수는 있고?”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한진영의 말이 핵심을 바로 찔러 들었기 때문이다.
“버티기 힘들어. 그래서 우리 집 노인네도 걱정하는 것 같아. 다른 곳도 아니라 대통령 비서실에서 바로 내려온 연락이라서…….”
이성우는 입맛이 씁쓸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노인네가 예전 기억이 떠오르나 봐. 예전 군부 시절에 뻑하면 정부에서 돈 뜯어 가던 시절 말이야. 다행히 그때는 우리 규모가 크지 않아서 직접적인 압박은 받아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트라우마가 생겼을 정도니 뭐 말 다 했지. 재계 10위권 회사들도 말 안 들었다고 그룹이 한 방에 날아가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시절 사람들이 정권 잡고 있어서 똑같은 짓을 하는 거겠지.”
“네 말이 맞다. 그 시절 사람들이 죽지도 않고 살아서 다시 정권 잡았으니 그들 기억 속에 있는 짓을 그대로 하는 걸 거야.”
이성우는 고개를 흔들고 입안에 도는 씁쓸함을 지워내기 위해 사과를 베어 물었다.
그리고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그래. 견디는 건 그렇다고 치고…… 돈 집어넣으면 회수할 수 있어?”
“불가능해.”
“어? 불가능해?”
이성우는 이제는 씨밖에 보이지 않는 사과를 들고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사과를 먹느라 말이 헛나와 던진 질문이었다.
실제로는 회수가 가능하냐고 물을 게 아니라 회수가 언제 될 것 같으냐고 물으려고 했던 이성우였다.
그런데 잘못 던진 질문에 한진영은 불가능하다는 답을 건넸다.
이성우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불가능이라니? 저건…… 저거 가짜냐?”
이성우는 씨뿐인 사과를 들고 TV 화면을 가리켰다.
한진영은 이성우가 가리킨 TV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여전히 엘리자베스 무어의 얼굴이 보이고 있었다.
“그래. 가짜야.”
“정말? 정말 가짜야?”
“왜 몇 번이나 물어봐? 가짜 맞아.”
“아니. 나는…… 저거 우리나라가 장난 아니게 밀어주고 있는 거 아니냐? 거의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말이 있던데…….”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밀어준다고 가짜가 진짜가 되는 건 아니지.”
“미국의 유명한 사람들도 엄청 많이 투자했다며? 듣기로는 미국의 유명 투자회사들도 많이 투자했고 의학계의 유명한 사람들도 지지하기도 했다고 하고…….”
“너 기억나지 않냐? 그리니치 펀드 사건.”
“아~ 그리니치 펀드 사건.”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깊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니치 펀드 덕분에 이성우가 이곳에 앉아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바로 동생인 이유정이 그리니치 펀드에 엮여 큰 손해를 본 바람에 후계 구도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리니치 펀드는 세계 유명 투자회사들의 투자를 받아 운용하던 펀드였었다.
어쩌면 지금의 사인노스보다 더 안전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탄탄하다 못해 철옹성과 같은 이미지를 줬던 곳이 바로 그리니치 펀드였다.
그리고 버나드 헤이워드는 1년 임기의 나스닥 증권거래소 의장을 3번이나 역임할 정도로 엘리자베스 무어보다 인지도 면에서 더 유명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곳과 그런 인물이 결국은 사기꾼임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리니치 펀드가 사기로 판정된 마당에 사인노스라고 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한진영은 이성우가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리니치 펀드도 사기였었어. 그런데 저기 서 있는 저 여자가 만든다는 에디슨키트인가 뭔가가 사기가 아닐 이유가 없지.”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마지막 의문을 던졌다.
“그리니치 펀드야 실물이 없었다지만 저건 실물이 있잖아. 에디슨키트인가 뭔가 실물이 있지 않아?”
“실물이 있다고 왜 믿는 거야?”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언론과 방송을 통해 봤던 것들을 떠올리며 이성우는 말했다.
“기계 모양 보여줬잖아. 얼마 전에는 저 여자가 직접 방송에 가지고 나와 보여주기도 했고…….”
“보여줬지만 작동하는 것까지는 보여주지 않았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지금 진단하는 것들은 에디슨키트로 진단한다고 하지 않았나?”
“시료를 사인노스 본사로 보내야 하지. 그래서 본사에서 에디슨키트로 진단을 해서 결과를 다시 보내준다고 하고…… 즉, 에디슨키트로 진단이 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본사에서 에디슨키트로 진단을 내리는지 어떤지 철저히 가려놓은 상태니까.”
“어…….”
한진영의 말을 반박할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은 이성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한진영을 향해 물었다.
“그럼 집사람에게 파보라고 할까? 그래서 특종을 터트리면…….”
“아니. 그렇게는 하지 마.”
“왜? 사기라며? 지금 전 세계가 다 깜박 속고 있는 걸 우리가 터트리는 것만큼 대박이 어디 있어?”
“그랬다가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전에 얻어맞아서 서준일보는 물론이고 기풍까지도 산산이 조각날지도 몰라.”
“어?”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는 잠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진영의 말대로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그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굳은 이성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 놔둬. 언젠가는 터지게 돼 있어. 사기는 오래가지 못해. 그리니치 펀드 사건 때처럼 정체는 드러나게 돼 있으니까. 문제는 그 사건을 우리가 어떻게 이용하느냐? 그게 중요한 거다.”
“이용한다고? 저 사건을?”
“그래. 그래서 너를 부른 거지.”
한진영은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얼굴에 가득 지어 보이며 화면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엘리자베스 무어가 다시 한번 대한민국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신규 투자 소식이 대한민국에서부터 전해졌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진영은 동우 컨소시엄을 향해 무한한 감사를 전하는 엘리자베스 무어를 바라보고 말했다.
“무리를 하고 있어. 그것도 아주 큰 무리를…….”
“무리를? 누가?”
“누구긴 누구야. 우리나라 정부하고 동우 로펌이지.”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이성우를 바라보고 말했다.
“정부는 경기증권 사태로 인해 떨어진 명예와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동우 로펌은 그동안 물린 돈을 복구하기 위해 무리를 하고 있어. 저게 되겠다 싶으니 올인을 넘어 목숨까지 걸고 있는 상황이지.”
잠시 말을 멈춘 한진영은 이성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없이 사인노스를 향해 달려가는 사이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흘리고 있네? 그러니 어쩌겠어? 돈이 떨어진 것을 보고도 줍지 않으면 그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신 나간 일 아니겠어?”
“돈이 떨어져 있다고?”
“그래. 그래서 너도 주우라고 부른 거야. 새로 태어날 조카를 축복해주는 기념으로다가.”
한진영은 이성우 어깨에 올린 손을 들어 이성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