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시장은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2,000에 대한 열망이 휩싸여 있는 이들과 악재를 인정하고 물량을 정리하는 진영 간에 팽팽하게 힘겨루기가 온종일 이어진 것이었다.
그 결과 외국인이 4,700억의 물량을 뱉어냈음에도 개인과 기관이 물량을 받아내며 겨우 1,950대는 지켜내고 말았다.
그러나 어쨌든 시장은 반등이라고 부를만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모습에 대경TV는 기다렸다는 듯이 최석영의 방송을 재방송으로 내보내는 결정을 보여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진영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여튼 대경TV 놈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조지훈은 한진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음에 안 드시면 지금이라도 항의 전화라도 하도록 할까요?”
“마음에 안 들기는 왜 안 들어? 나는 너무 흡족한데?”
“흡족하시다고요?”
“우리에게 잘 보이려고 저러는 모습이 귀엽지 않아?”
한진영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조지훈에게 말했다.
“저렇게 대놓고 밀어주는 데 거기에 맞는 호응을 해줘야지. 보자.”
한진영은 고개를 돌려 달력을 바라봤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 부근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날짜를 확인한 것이었다.
“다음 주 금요일 방송 출연 가능하다고 연락해. 장이 끝난 후 저녁 타임이라면 딱 좋겠다고 전하고 시간 잡아봐. 물론 그 전에 최 차장님에게 스케줄 먼저 물어보는 거 잊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지시를 받고 달력을 슬쩍 돌아봤다.
아무리 봐도 한진영이 달력을 보는 것이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지훈은 최석영에게 한진영의 뜻을 알린 후 대경TV 측에 이와 같은 계획을 전했다.
대경TV에서는 최석영의 출연 소식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만약 최석영의 말대로 시장이 빠져 내려간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출연 시기가 절묘했기 때문이다.
최석영의 말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대경TV 측에서는 상관이 없었다.
왜 예상이 틀렸는지를 가지고도 알차게 시간을 뽑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도 이득이 나는 패를 쥔 대경TV는 이런 세이지 자산운용의 선택에 감사를 전하며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을 몇 차례에 걸쳐 이야기했다.
조지훈은 한진영의 지시를 모두 처리한 뒤 조수아 이진경 등과 함께 잠시 모여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세이지 자산운용은 보수적인 포지션을 잡아 들어가 장중에도 크게 긴장을 하지 않아도 되는 덕분이었다.
조수아는 커피를 마시며 조금 전 건넨 조지훈의 말을 되물었다.
“그러니까 굳이 한 대표님이 달력을 보고 다음 주 금요일을 콕 집었다 이 말이지?”
“네. 제가 보기에는 일부러 그날로 정하신 것처럼 보였어요.”
이진경은 조수아와 조지훈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확대하여 해석한 것 아니에요? 그냥 그때가 가장 여유 있는 날이라서 그런 것 아니에요?”
“아뇨. 그럴 리가 없어요.”
“왜요? 왜 그렇게 확신하세요?”
조수아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진경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봐요. 아무 이유가 없다면 굳이 다음 주 금요일을 지목할 이유가 없어요. 당장 재방송 대신에 최 차장님을 불러서 새로 방송하나 만드는 게 가장 좋죠. 안 그래요? 사람들이 그걸 더 좋아할 게 뻔하잖아요.”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그런 것 아니에요?”
“그럼 내일이나 모레도 괜찮죠. 왜 굳이 다음 주 금요일에 나가겠다고 하겠어요? 그것도 달력까지 보고 날짜까지 계산하신 뒤에 날을 잡았다고 하잖아요. 조 비서. 맞지?”
조수아가 고개를 돌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조지훈에게 물었다.
조지훈은 조수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제 눈에는 분명 무언가를 계산하는 모습이셨어요.”
“그거 봐요. 다음 주 금요일에 뭐 있다니까요.”
“그것만이 아니었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조수아에 이어 조지훈이 이야기하며 그때 느꼈던 또 하나의 특이한 것을 떠올렸다.
“뭐? 뭐가 또 있는데?”
“그냥 금요일도 아니라 저녁 타임으로 잡으라고 하셨어요. 장이 끝난 뒤에 나가겠다고 콕 집어 말씀하셨어요.”
“거봐. 이거 뭐 있네. 뭐 있어. 어휴~”
이진경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일로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이진경의 눈에는 이상하게만 보인 것이었다.
이진경이 하는 일의 특성상 모든 일의 사소한 것까지 의심하고 꼼꼼히 따진 뒤에야 믿는다고 하지만 이건 그럴 필요까지도 느끼지 못하는 일이었다.
꼼꼼히 따질만한 것까지 찾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진경의 눈에는 너무나 당연히 그냥 아무렇게나 날짜를 정하다 보니 걸린 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수아는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큰일 났네. 큰일 났어. 다음 주 금요일 사람들 충격 좀 받겠어.”
“저도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파생팀은 뭐 하고 있으려나? 풋 좀 잡고 있으려나? 궁금한 데 가봐야겠다. 지훈아 가자.”
조수아는 조지훈을 붙잡고 파생팀이 자리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진경은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서서 바라봤다.
한진영을 심하다 싶은 정도로 맹신할 때는 그래도 이유라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유가 명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명확하지 않은 모습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이진경의 눈에는 이상하기만 했다.
이렇게 이진경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950대까지 갭으로 빠져 내려왔던 지수가 비록 강보합이기는 했지만 바로 다음 날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선에 좌파가 승리한 것에 호들갑을 떨었던 아시아 시장과 달리 유럽 시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보인 것에 시장이 다시 차분히 숨을 고르며 다시 오를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진경은 이런 시장의 모습에도 여전히 한진영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 않는 조수아와 조지훈을 보며 그들이 단단히 뭐에라도 홀린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만약 여기서 지수가 오르게 된다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사이비에 빠졌다가 불현듯이 깨우치게 된 집안이 풍비박산 난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일 지 그게 아니라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아 끝까지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게 될지 이진경은 두 사람의 모습이 궁금했다.
그러나 이진경의 궁금증은 영원히 해결되지 못한 채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1,967까지 올랐던 지수가 다시 1,950선을 위협하는 자리까지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불거졌던 유로존의 위기가 중심지인 그리스로 다시 옮겨지고 말았다.
그리스가 연립정부 구성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주요 수급 주체들이 잔뜩 움츠러든 모습으로 시장을 관망한 것이었다.
외국인은 여전히 3,000억 이상을 내던지며 지수의 하락을 견인했다.
지난번에는 이렇게 나온 외국인의 매도 물량을 개인과 함께 기관이 받아 주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기관도 이번에는 500억의 매도우위를 보이며 매도에 힘을 보태는 모습을 보이며 하락이 조금 더 깊을 수도 있다는 뜻을 시장에 흘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장 참여자들은 이번에는 쉽게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유로존 문제에 미국까지도 영향을 받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 것쯤으로 여겼던 미국도 이번에는 유럽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유럽에 이상기류가 발생하여 자기들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냐는 걱정으로 6거래일 연속 하락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결국 120일선이 자리한 1,940대까지 빠져 내려오고 말았다.
연일 좋은 소식이라고는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미국까지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자 하락세가 조금 더 이어지기 시작했다.
***
“외국인들이 도대체 오늘로 며칠째입니까? 8거래일째입니다. 8거래일째. 이 기간에 외국인이 정리한 물량만 2조예요.”
“이거 심상치가 않습니다. 기관조차도 이 기간에 약 5,000억의 자금을 정리했어요. 기간을 최근 3거래일로 좁힌다면 3,000억이 최근 3일 동안 나온 물량이에요.”
“아무래도 그리스 문제가 다시 한번 시장을 침체로 몰아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작년 우리를 그렇게 괴롭혔던 이야기가 올해도 다시 우리를 괴롭힐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시장에 대한 시각이 단숨에 바뀌어 버렸다.
방송에 나와 시황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이제는 2,000을 넘어 2,500을 이야기하던 것을 그만두고 말았다.
지수가 120일선마저 깨고 내려가며 1,910선까지 주저앉고 말았기 때문이다.
연간 최저점을 갱신한 지수는 여기서도 멈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지훈은 급히 한진영이 있는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
“대표님. 저 조 비서입니다.”
“어. 들어와.”
조지훈이 노크를 한 뒤 자기임을 알리자 문 안에서는 한진영의 목소리가 바로 들렸다.
조지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간 뒤 한진영을 향해 찾아온 이유를 바로 이야기했다.
“대표님. 대경TV 측에서 오늘은 안 되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뭐가?”
한진영이 모니터를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조지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조지훈은 한진영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와 대경TV에서 연락해 온 것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오늘 1,900이 깨졌으니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해야 할 것 같은데 오늘 나와주시면 안 되냐고 연락이 왔습니다.”
“1,900 깨졌다고 호들갑은…… 바쁘다고 약속대로 이번 주 금요일 날 나가겠다고 전해.”
1,900이 깨진 것에 별것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하는 한진영을 보고 속으로 놀란 조지훈은 인사를 하고 조심스럽게 대표실을 나왔다.
“뭐라셔?”
“뭐래?”
대표실 문 앞에는 최석영과 조수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막 나온 조지훈을 향해 한진영의 입에서 무슨 대답이 나왔는지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번 주 금요일에 출연한다고 전하래요.”
조지훈의 대답에 사람들 사이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요.”
“아니. 왜? 이쯤에서는 한번 정리해 볼 타이밍 아니었나?”
“이거로는 부족하다 이거죠. 고점 대비 이제 겨우 5% 빠진 건데 이 정도에 호들갑 떨었어야 되겠어요?”
“그냥 5%가 아니잖아. 4개월 동안의 횡보 뒤에 1,900이 깨진 건데…… 그러면 여기서 더 떨어진다는 이야기인가?”
“당연하죠.”
조수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최석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석영은 조수아가 내민 손을 모른 척 외면하고는 조지훈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래?”
“변한 거 없어요. 이번 주 금요일 출연이요.”
“아~ 그래?”
최석영이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런 최석영을 조수아가 잡아챘다.
그리고 최석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요.”
“어? 왜?”
“주세요.”
“뭘?”
“아~ 이러기에요? 이러면 앞으로 재미없어요.”
조수아가 눈을 부라리며 손을 최석영의 눈앞까지 치켜올리자 최석영이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언제 안 주겠다고 했나? 사람 참 무안하게 왜 이래?”
최석영은 오히려 조수아를 향해 큰소리를 치고는 주섬주섬 옷 속에서 돈을 꺼냈다.
꼬깃꼬깃 접혀 있는 지폐를 꺼낸 최석영은 아쉽다는 듯이 조수아의 손에 돈을 놓으며 혼잣말했다.
“그냥 좀 출연하라고 하면 안 되나?”
조수아는 손 위에 지폐가 올라가자마자 빼앗듯이 돈을 낚아채고는 말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니까요. 대표님하고 제일 오래 함께했으면서 아직도 모르세요? 그런데 여기서 출연해봐요. 그럼 애매한 상황에서 나가는 것밖에 안 된다니까요. 그렇다고 오늘 출연하고 금요일 또 출연해요? 그럼 차장님이 너무 없어 보이잖아요. 차장님은 딱 중요한 때 한번 나가야지요. 그런 면에서 대표님 눈에는 지금이 전혀 중요한 순간이 아니라고 판단이 내려지신 거죠.”
조수아는 꾸깃꾸깃 접힌 지폐를 바르게 펴면서 즐거워했다.
그리고 조지훈을 향해 돈을 흔들며 말했다.
“지훈아. 누나가 쏜다. 오늘은 비싼 커피 마셔보자. 가자.”
조수아는 신난 표정으로 최석영에게서 받은 돈을 흔들어 보이며 앞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조지훈이 따랐으며 자기가 낸 돈이기에 자기도 얻어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최석영이 제일 뒤를 따랐다.
이진경은 가만히 서서 멀어져 가는 조수아 일행과 한진영의 대표실을 번갈아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
조수아의 생각이 맞았던 것인지 다음날도 하락은 계속 이어졌다.
1,900을 깨며 여기저기서 지금이 바로 주식을 매수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떠들어 댔던 기관들은 매수 리포트를 내밀고는 뒤로는 물량을 집어 던지며 지수를 끌어내린 것이었다.
1,880까지 빠져 내려온 지수는 20일선은 물론이고 60일선과 이격이 충분히 벌어진 만큼 이격을 좁히려는 움직임에 기대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그리스발 악재가 사그라들 기미 없이 오히려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더 활활 타올랐기 때문이다.
계속된 연정 실패에 그리스 은행에서는 하루에만 7억 유로의 예금이 인출되며 뱅크런이 가시화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지수를 아래로 짓눌러버렸다.
외국인이 11거래일 연속 매도에 5,000억이 넘는 매도물량을 쏟아냈으며 하락을 견인했으며 기관들조차 두려움에 매수하지 못하고 1,840선까지 지수가 빠져 내려가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개인만이 지수를 떠받치려 했지만, 개인만으로는 역부족으로 하루에만 -3%가 넘는 폭락을 보이며 시장을 공포로 몰아갔다.
이제 시장은 마지막으로 미국의 3차 양적완화에 기대를 걸었다.
미국이 3차 양적완화를 시행만 한다면 유럽의 악재를 비롯하여 경기침체와 실업 관련 문제들 모두가 한방에 해프닝쯤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기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불안해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난 방송에 나와 최석영이 했던 말이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