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우리에게 더 의지하게 될 거다
이성우는 사장실 앞에서 비서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나 찾지 마요.”
동우산이 왔을 때는 그래도 지시다운 지시를 내렸던 이성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도 없이 바로 한진영을 끌고 사장실로 들어가는 데 온 정신이 팔린 듯한 모습이었다.
이성우는 한진영을 끌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굳게 닫았다.
“야야. 아파.”
사장실에 들어온 한진영이 잡혀있던 손을 풀자 이성우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말해봐. 뭔데?”
“그렇게 궁금했냐?”
“궁금했지. 미치는 줄 알았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바로크 호텔하고 두리은행이 엮여있는 건 알겠는데…….”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맞아. 바로크 호텔, 두리은행이 연관이 있어.”
“그러니까 이야기해봐. 어떻게 연관이 있는데?”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이성우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지금은 궁금증이 해소된다는 것보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남들보다 먼저 안다는 사실을 즐거워하는 것만 같았다.
“두리은행이 바로크 호텔을 헐값에라도 처분하려는 이유는 알지?”
“알지. 악성 채권이 될지도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니냐?”
“그것도 있지만, 뒤에 더 큰 물건이 있어서 빨리 처리해 버리려 한다는 것 기억하지?”
“어. 그것도 기억해. 하이식스 이야기? 그거 아주 골치 아픈 물건 아니냐? 아휴~ 그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문제의 회사였잖아.”
이성우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주식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져봤고, 물려봤다는 종목이 바로 하이식스였다.
동전주의 대표로 이야기되며 100원대 단위의 가격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던 주식이 갑작스러운 감자를 발표하며 주주들의 정신줄을 놓게도 만들기도 했고, 유상증자를 발표하여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하이닉스는 하루 거래량이 수십억 주에 달해, 우리나라 거래량을 산출할 때 하이식스의 거래량은 제외하고 계산하게 할 지경에 이르게도 했다.
그래서 주식을 처음 하는 사람은 하이식스의 주식부터 사고 시작해야 한다는 농담이 스스럼없이 건네게 하던 종목.
언제 물리던 물릴 테니 먼저 물리고 생각하라는 종목.
잡주라는 말조차 쓰이기에는 주식 같지도 않은 종목이니 따로 떼어내어 거래하게 만드는 게 좋다는 종목.
제아무리 주식 고수라고 해도 하이식스로는 돈을 벌지는 못할 거라고 하는 종목.
하이식스가 바로 이런 종목임을 이성우도 모르고 있지 않았다.
이성우는 하이식스를 떠올리니 기분이 좋지 않았던지 얼굴을 찌푸리고는 이야기했다.
“그 하이식스가 왜? 나도 시흥지점에서 일할 때 그거 추천했다가 내가 욕을 얼마나 먹었는지…… 어휴~ 생각하기도 싫다.”
다시 한번 그때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저은 이성우는 한진영을 바라봤다.
그러나 한진영은 아무 말 없이 이성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성우는 그런 한진영의 시선에 이질감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이식스 매각에 온 힘을 쓰기 위해 바로크 호텔을 두리은행이 빠르게 매각할 거라는 게 네 예상이었잖아. 그런데 그게 지금 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래 맞아. 두리은행이 하이식스 매각에 온 힘을 쏟고 있어.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하이식스를 인수할 곳이 한정된 게 현실이지.”
“그건 나도 알아. 8년 전쯤에 해외에 매각하려다가 무산된 이후 국내에서만 대상자를 찾았잖아. LZ그룹이 가장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있고…… 아무래도 과거 LZ에서 떨어져 나간 LZ반도체와 미래전자가 합친 게 하이식스니까.”
하이식스 매각을 놓고 오랜 세월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천문학적인 투자를 진행해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반도체 시장의 특성상 하이식스를 인수하여 투자를 지속할 수 있는 곳이 손으로 꼽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LZ그룹이 하이식스를 인수하는 것이 가장 어울린다는 평가를 하곤 했다.
하이식스에서 만들어진 반도체를 이용하여 LZ전자가 휴대폰과 티비와 같은 전자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경쟁 관계에 있는 삼선전자가 이와 같은 라인업을 통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LZ그룹이 하이식스 인수전에 뛰어들 거라는 것이 시장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앞으로 매각 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인수전에 선강그룹이 참여할 거야. 그것도 단독입찰로…… 우리는 그 단독입찰에 들어가는 국내 최대의 매각 협상 자리에 자문역으로 참여하게 될 거야. 하이식스 실사부터 시작해서 인수 후에 진행될 투자자문까지…… 우리가 단독으로 선강그룹의 파트너가 돼야 해.”
“어?”
이성우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국내 M&A 역대 최고액인 4조짜리 인수합병. 거기에 우리가 단독으로 자문역 자리를 꿰찰 거다. 어때? 이 정도면 회장님이 내주신 숙제에 대한 해답으로 딱 어울릴 것 같지 않아?”
“4조…….”
한진영의 말을 듣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이성우는 얼굴이 밝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꿈이 깨어지지 않게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파생에 흠뻑 빠져있는 최대일 회장에게 동우산의 입지를 키워준 뒤, 동우산의 입을 통해 우리가 하려는 일을 진행하면 돼. 최대일 회장이 동우산에게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동우산도 우리에게 의지하게 될 테니까.”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에 모호했던 미래가 밝아졌음을 느꼈다.
***
한진영이 팔짱을 끼고 언제나처럼 투자전략사업부 중앙에 위치한 시세 전광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시세 전광판 속에서는 국내 시장의 움직임과 뉴스 등이 나오는 중이었다.
조수아는 그런 한진영에게 다가가 물었다.
“부문장님.”
“네?”
한진영은 시세 전광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조수아는 들고 온 A4용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거 오늘도 팩스 보내면 되나요?”
한진영은 조수아가 내민 종이를 내려다보고 잠시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대로 보내시면 됩니다.”
동우산에게 제공하기로 한 내용이 담겨있는 용지였다.
선물지수의 움직임 예상과 포지션 체결 시의 유의사항은 물론이고 한진영 개인의 의견까지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동우산이 부탁한 것 이상의 것으로 한진영은 약 보름 동안 이런 내용을 동우산에게 계속 보내는 중이었다.
한진영은 조수아가 건넨 종이를 다시 돌려줬다.
조수아는 한진영에게 받은 A4용지를 품에 넣은 후 다른 A4용지를 내밀었다.
“이건 어제 투자자별 포지션과 특이사항이요.”
조수아는 한진영에게 자료를 넘기면서 특이사항을 구두로 설명했다.
“영국과 프랑스 쪽 은행들의 계좌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보고가 있었어요.”
“영국과 프랑스요?”
“네. 아마 최대일 회장님 딴에는 해외 계좌를 여러 개 운용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 것 같은데…… 관련 은행들이 즉각 자기 고객이 배팅한 거라고 해명하는 바람에 오히려 더 빨리 정체가 드러난 것 같아요.”
“즉각 해명했다?”
한진영은 살며시 웃으며 조수아가 건넨 자료들을 살폈다.
조수아는 그런 한진영을 향해 계속 이야기했다.
“그럴 만도 한 게 동시에 200계약을 질러버리니까요. 이게 너희들의 공식 포지션이 맞냐 혹은 잘못된 거래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자전거래인지 확인하기 위해 거래소에서 연락한 모양이에요. 거기서 밝혀졌어요. 어떤 개인 고객이 계좌 10여 개를 이용해서 매매하고 있다고요.”
한진영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라던가요?”
“뭐라니요?”
“반응 나오지 않았어요?”
한진영의 말에 조수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반응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어요. 그냥 또 어떤 큰손이 시장에 재미 보려고 들어왔나 보구나 하고 넘기는 정도였어요. 우리나 특별히 주시하고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거지 아마 주시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냥 넘겼을지도 몰라요.”
아직까지는 이해할만한 수준의 배팅이었기에 다른 증권사들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드문드문 이 정도 수준의 배팅은 과거에도 수차례 나왔었기 때문이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계속 주시하시다 이상이 생기면 알려주세요.”
“네.”
조수아는 한진영이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특별한 질문을 하지 않은 채 물러났다.
한진영이 조수아와 이야기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한진영의 전화기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셨습니까? 저 동우산입니다.
“아~ 동 상무님.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오늘 시간 되십니까?
“오늘이요?”
한진영은 동우산의 말에 조수아가 들고 왔던 종이를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조수아의 설명대로 신규 진입한 계좌들의 움직임과 함께 수익도 함께 적혀 있었다.
[약 3억가량의 수익이 예상됨]
한진영이 종이에 써진 글자를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이 사장님도 괜찮으실까요?
“괜찮을 겁니다. 어디서 뵐까요?”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모실 테니 이따가 뵙겠습니다.
동우산은 기대에 찬 목소리를 건네고는 전화를 끊었다.
한진영은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성우는 동우산이 자기들을 초대한다는 소리에 뒤에 남아있던 일정을 모두 미뤘다.
한진영에게 계획을 들은 이후 모든 것에 동우산에 관련된 일이 앞서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을 비운 이성우는 한진영과 함께 동우산이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그런데 왜 만나자고 하는 거야?”
동우산을 만나기 위해 가는 차 안에서 이성우가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이성우에게 대답했다.
“내 덕분에 재미를 봤으니까 보자고 하는 거겠지?”
“네가 자료를 넘겨준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리고 자료 안에 들어가 있는 내용들도…… 별것 없던데? 그거로 돈을 많이 벌었어?”
항상 팩스로 동우산에게 자료를 보내기 전에 이성우가 한번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고는 했다.
요식행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서류 안에 있는 내용이 이상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었다.
이건 이성우가 아니라 한진영의 요청으로 시작됐다.
나중에 왜 기풍증권의 전략을 외부로 유출했냐는 말도 안 되는 딴죽에 이성우가 확인하여 보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성우도 한진영이 어떤 내용을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
“직접 보니까 말처럼 대단한 게 아니던데? 상단 가격대와 당분간 보여줄 방향성 같은 게 적혀 있던 게 전부던데?”
“맞아. 대단한 건 없었어. 너나 내가 보기엔 말이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저쪽은 엄청난 정보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엄청난 정보라고?”
이성우가 한진영의 말에 호기심이 일었는지 조수석에서 몸까지 틀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고개를 슬쩍 돌려 쳐다본 후 대답했다.
“점집에 한 번도 안 가봤다고 하니까 잘 모르겠구나. 원래 점을 볼 때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해. 그래야 듣는 사람의 상상을 자극할 수 있거든. 동우산 건도 마찬가지야. 최대일 회장 입장에서는 자세한 것을 듣고 싶어서 동우산에게 물어보는 게 아니야. 동우산이 묻지도 않은데 나서서 자세히 이야기할 이유도 없고…….”
한진영과 이성우가 탄 차가 주차장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한진영은 능숙한 모습으로 차를 주차하고는 조금 전 이야기를 계속 이어 했다.
“지금 선물지수 230에서 240까지 오른다고 말했는데 239로 멈추면 틀린 게 돼. 하지만 앞으로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하면 맞춘 게 되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정확한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방향을 알려주는 것만으로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잖아. 그럼 그거로 최 회장이 돈 얼마나 번 거야? 최 회장이니까 수천억은 벌었겠지?”
“지금 파악한 금액으로는 약 3억 정도 예상하더라.”
“3억? 에게~”
이성우는 겨우 그거 벌었느냐는 투로 소리를 지르고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뒤를 이어 내리는 한진영에게 말했다.
“명색이 선강그룹 회장인데…… 3억 벌었다고 지금 신나 한다는 이야기야? 그래서 기분 좋아서 동우산이 우릴 부른 거고?”
“네 말대로 선강그룹 회장인데 돈이 중요하겠냐? 그랬다면 파생을 하지도 않았지. 그거 말고도 돈 버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니까.”
“그럼?”
삑!
버튼을 눌러 차 문을 잠근 한진영은 차 손잡이를 잡아당겨 차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것. 그 희열 때문에 하는 거지. 3억이 아니라 300만 원을 벌었다고 하더라도 동우산의 조언을 듣고 직접 투자해서 벌어들인 것에 최대일 회장은 아마 기분이 아주 좋을 거야. 그리고 그 몹시 좋아하는 모습을 동우산이 보고 우리를 부른 거지. 더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받기 위해…… 올라가자. 기다리겠다.”
한진영은 고급 주거용 오피스텔을 올려다본 뒤 안으로 들어갔다.
***
로비를 지키고 있는 보안업체의 신분 확인을 비롯한 몇 차례의 검사를 통과한 뒤에야 동우산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동우산은 문을 열고 한진영과 이성우를 반갑게 맞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내려가서 맞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직접 오시게 했네요. 오시는데 불편하지 않으셨습니까?”
“괜찮았습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예의를 차리는 동우산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동우산과 악수를 한 뒤 안을 둘러봤다.
“여긴 어떤 곳인가요?”
“조금 특이하지요?”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벽면 그리고 높은 천장 등이 고급스러움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실에 자리한 소파와 기다란 식탁 등도 오피스텔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 외에 오피스텔의 모든 것이 다 특이해 보였다.
삼국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언월도가 벽에 세워져 있었으며 커다란 관운장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다.
촛불은 물론이고 향이 타들어 가는 곳과 작두로 보이는 것까지…… 평범함과는 거리가 한참 먼 풍경이었다.
“제가 사용하는 사무실입니다. 일종의 법당이지요.”
“법당이요?”
이성우는 법당이라는 말에 으스스함을 느꼈는지 팔을 손으로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