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성장하는 모습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성우는 부리나케 맞은편 건물에 자리한 커피숍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한진영이 아버지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이성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왔냐? 일찍 왔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반쯤 먹은 한진영이 앉아 다가오는 이성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성우는 한진영 앞에 서서 주변을 살핀 뒤 몸을 숙였다.
“야. 자리 옮기자.”
“왜?”
“여기는…… 기풍 직원들이 많잖아.”
“괜찮아. 아직 너를 제대로 아는 사람 많지 않아. 그리고 멀리 떨어지면 불편해.”
“멀리 떨어지면 불편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조금 뒤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하니까.”
“다시? 어디에?”
“우선 앉아. 앉아서 이야기하자.”
한진영은 웃으며 이성우의 옷을 잡아 자리에 앉게 했다.
이성우는 자리에 앉으며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눈짓으로 한진영에게 물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커피를 내줬다.
그리고 이정훈 회장과 있었던 일을 물으며 화제를 바꿨다.
“뭐라고 하시던? 명분이 필요하다고 하시지 않냐?”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깜짝 놀란 얼굴로 한진영을 돌아봤다.
여전히 얼굴을 반쯤 가린 손을 치우지 않은 이성우의 얼굴에는 놀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기는? 뻔하지. 너를 사장 자리에 앉힐 명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을 것 같은데…… 맞냐?”
“그것까지 알아? 너 내 몸에 도청기 달아놨냐?”
이성우는 자기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행동에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건 뻔한 거니까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다 예상했던 거야?”
이성우는 몸을 살피던 것을 멈추고 탁자에 양팔을 올렸다.
그리고 한진영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알았으면 미리 이야기해줬어야지.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버지 말에 심장 튀어나오는 줄 알았어.”
“미리 이야기했으면 실감 나는 표정을 지어 보이지 못했을 것 아냐? 몰랐던 게 딱 좋아.”
“내가 실감 나는 표정을 지어서 뭐 하는데?”
“뭐하긴? 회장님을 안심시키는 거지.”
“안심?”
“그래. 안심.”
한진영은 마치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됐다는 듯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 네가 거기서 미리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행동했으면 너는 영영 기회를 잡을 수가 없게 됐을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예상 밖의 행동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뜻이야.”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을 되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거기서 내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는 듯이 행동했다면…… 아버지 눈밖에 완전히 났을 거야. 아버지는 예상 밖의 일을 싫어하시니까.”
이성우가 이정훈 회장의 결정에 반발한 것까지는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이정훈 회장의 제안까지 이성우가 알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면 이정훈 회장의 성격상 농락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성우를 보려 하지 않았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이정훈 회장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이 컨트롤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차라리 몰랐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으~ 생각하기도 싫다.”
몸을 한차례 떤 이성우는 이제 남은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는 이걸 다 예상했다면…… 생각해 놓은 게 있어? 아버지가 가지고 오라는 명분 말이야.”
한진영은 여전히 태연한 자세로 앉아 이성우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있지. 있으니까 너에게 그런 말을 회장님께 하라는 것 아니겠어?”
“뭔데? 내가 올릴만한 실적이…….
“그래서 내가 불렀다.”
“뭘 불렀는데?”
“네가 사장 자리에 오를 명분 말이야. 마침 저기 오네. 여기요.”
한진영이 손을 들어 흔들자 이성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성우가 상상하지 못한 뜻밖의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왜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까? 미리 이야기하셨다면 좋은 곳을 마련했을 텐데 말입니다. 어쨌든 반갑습니다.”
프라임리츠의 정병선 회장은 비어있는 의자에 앉으며 한진영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다른 쪽에 있는 이성우를 보고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네. 회장님.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여기 계시는 한 부부문장님께 이야기 들었거든요. 그때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신분을 드러내기 전이었다고 말입니다.”
“네. 그래서 아는 척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난번 만남을 떠올리며 이성우가 성의 있는 모습으로 사과했다.
정병선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서 진심을 느끼고 이성우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성우를 향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조만간 기풍증권의 사장으로 취임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먼저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확정되지 않았다니요? 제가 듣기로는 이미 내부에서 정리는 끝이 났다고 하던데요?”
“아닙니다. 정말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장 자리에 앉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정병선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진영을 돌아봤다.
이성우가 괜히 쑥스러워하는 말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뵙자고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요?”
정병선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한진영과 이성우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 대상이 한진영임을 파악하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이성우 씨가 사장에 취임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까?”
“회장님께서 사장 자리에 앉힐만한 성과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성과라…… 이 회장님께서 주변 시선을 너무 신경 쓰고 계시나 봅니다. 성과라고 할만한 게 뭐 필요하겠습니까? 회장님의 아들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할 텐데 말입니다.”
정병선 프라임리츠 회장은 말을 하고 슬쩍 이성우를 돌아봤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생각할만한 말을 꺼냈는데도 이성우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정말로 이정훈 회장이 이성우에게 사장 자리에 오를만한 성과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농담이 아니군요. 정말로 이 회장님께서 사장 자리에 앉을 성적표를 들고 오라고 하시는 겁니까?”
“네. 지금 막 그 이야기를 듣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허허. 정말 냉정하십니다. 다른 그룹들은 주변의 반대에도 밀어붙여 오히려 구설에 휘말리고는 하는데…… 기풍은 반대로군요. 특이합니다. 정말 특이해요.”
정병선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젓고는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저를 보자고 한 겁니까? 저에게 이성우 씨의 비어있는 실적을 채워달라고 말입니까?”
정병선은 말을 마치고 마침 비서가 가지고 온 커피를 받아 앞에 놓았다.
이성우도 정병선 회장의 등장에 조금 전 말과 같은 생각을 했다.
사업부의 실적이 아니라 정병선의 투자금 유치를 개인적인 실적으로 올려 이정훈 회장에게 가지고 가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정병선은 이성우의 표정을 살피고는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병선은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 마시고는 천천히 말했다.
“그런 부탁이라면 저는 몇 번이고 들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오히려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저에게 들어오라는 말씀을 하지 않아 섭섭하던 참이었으니까요. 얼마나 들어가길 바라시는 겁니까? 100억? 200억?”
VIP들만을 위해 특별히 만든 펀드에 들어갔던 금액보다 더 큰 금액을 부른 정병선이었다.
이 정도라면 이정훈 회장에게도 할 말이 생기는 정도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진영의 생각은 정병선이 생각하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었다.
“정 회장님께 도움을 청하려 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냥 일반적인 투자금 유치는 아닙니다.”
“금액이…… 부족한가요?”
200억이라는 금액이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라고 생각했던 정병선이었다.
하지만 한진영이라면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빠르게 정병선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VIP들이 아닌 기업을 통해 투자금을 유치했을 때는 1,000억 단위의 투자를 유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병선은 급히 머릿속으로 자기가 끌어 올 만한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했다.
그러나 정병선의 계산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진영이 정병선의 모습을 보고 살며시 웃으며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정 회장님. 잠시 제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십시오.”
생각을 하던 정병선이 눈을 돌려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런 정병선을 바라보고 차분히 정병선을 이곳에 부른 이유를 설명했다.
“우선 정 회장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도움을 통해 여기 있는 성우가 사장 자리에 올라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방법은 정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방법과 조금 다릅니다.”
“금액이 다른 게 아니라요?”
“금액은…… 우선 들어보시고 결정하실 문제이니 먼저 방법부터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진영은 이야기하고 앞에 놓인 커피잔을 치웠다.
그리고 가지고 온 가방에서 서류 더미 하나를 꺼내 앞에 놓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회장님께 보고 판단하기 쉽도록 작성된 저희의 계획입니다.”
한진영은 꺼낸 서류를 정병선에게 내밀었다.
정병선은 묵직한 서류를 받아 들고는 한진영에게 말했다.
“이거 무게가 장난이 아닙니다. 허투루 살필 만한 내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정병선은 말을 마치고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상세한 투자 자료들이 적혀 있는 서류였다.
투자 범위부터 시작해서 투자자가 얻을 수익의 추이까지 하나하나 다 적혀 있었다.
간단하게 이 자리에서 훑어보는 것만으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걸 정병선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게 뭡니까?”
“이번에 새롭게 저희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PEF? 프라이빗에쿼티?”
“네. PEF. 사모펀드입니다.”
“사모펀드?”
정병선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보고 말했다.
“최근 중소형 증권사들 사이에서 PEF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는 이야기는 듣기는 했는데…… 이걸 신성…… 아니지. 이제는 기풍증권인가요? 여하튼…… 기풍증권에서 이걸 하려 한다는 말입니까?”
“네. 새로 창업한 회사나 구조조정이 필요한 기업, 부실채권, 하이리스크 프로젝트 투자 등에 진출할 계획입니다. 물론 사모펀드의 꽃이라 부를 수 있는 M&A 분야에도 발을 들여놓을 생각이고요.”
“흥미롭습니다. 기풍증권이 그런 일을 한다는 말입니까?”
“언제까지 개인 투자자들의 수수료에 기대 회사를 영위할 수는 없으니까요.”
정병선 회장은 한진영을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듣기로는 투자전략사업부의 수익도 괜찮다고 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던가요?”
“충분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성과도 성과지만 기풍증권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청사진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니까 성장하는 모습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말씀이시군요. 딱 지금 시점에 말이에요.”
정병선이 이성우에게 시선을 돌리고 웃었다.
한진영의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좋아요. 이해합니다. 그럼 제가 뭘 해드리면 되는 건가요?”
“투자자들을 모아 주셨으면 합니다.”
“투자자요? 설마…… 우리 프라임리츠의 투자자들을 요구하시는 건가요? 그건 이미 김정대 본부장님과 공유를 하고 있습니다. 새로 알려 드릴 고객이 더는 없습니다.”
정병선은 양손을 들어 내보이며 없다는 뜻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한진영이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정병선을 바라보고 말했다.
“주머니에 숨겨 놓은 고객이 있지 않습니까?”
“숨겨 놓은 고객이라니요? 저희는 그런 것 없습니다.”
“VVIP들은 따로 관리하고 계시다는 것 다 알고 있습니다.”
“VVIP라니요? 저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네요.”
정병선이 고개를 돌리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진영은 그런 정병선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한동안 그렇게 침묵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 정병선이 먼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좋습니다. 네.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 고객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내어달라는 것은 너무 무리한 말씀입니다. 그분들을 내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이야기한 정병선은 한진영을 향해 손을 내밀고 계속 이야기했다.
“충분한 기존의 고객들을 보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신성증권 VIP들만으로 펀드를 구성하기도 했고요. 듣기로는 그분들은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하고 싶었지만 신성증권 측에서 막아 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들을 통해 진행하시지요. 저희 프라임리츠가 일정 부분을 책임질 테니 말입니다.”
최근 이어진 한진영의 기세를 생각했을 때 한진영의 부탁을 모두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놓은 방법이 PEF의 설정 금액 중 일부를 프라임리츠가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진영이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진영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모습으로 이야기했다.
“물론 말씀처럼 그렇게 해도 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보이는 모습이 참신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과는 좀 동떨어진 모습이 펼쳐질 테니까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네. 필요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이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데 계속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불편하기만 한 정병선이었다.
그래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프라임리츠의 VVIP들은 대한민국에서 부동산으로는 내로라하는 큰손들이었다.
그들을 공개하여 넘긴다는 것은 프라임리츠를 넘긴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정병선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한진영을 향해 안 된다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정병선에게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PEF를 등록하여 처음 투자하려는 사업은 바로 바로크 호텔의 인수 건입니다.”
“네? 뭘 인수하려 한다고요?”
“바로크 호텔 말입니다. 거기 인수에 참여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어떠십니까? 관심이 생기지 않으십니까?”
“바로크 호텔이요?”
정병선은 한진영의 말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