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명분이 될만한 선물
이성우는 고개를 꺾어 어깨에 올라앉은 긴장을 풀어내고는 대답했다.
“아니요. 아픈 데 없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정말 너 괜찮은 거 맞아? 어디 머리 크게 얻어맞고 뭐 그런 거 아니냐?”
“네. 괜찮아요.”
이정훈 회장은 아들인 이성우가 어디가 이상이 있는 게 아니냐는 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그리고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앞에 놓여있던 찻잔을 집어 던졌다.
퍽!
찻잔이 벽에 부딪히며 찻잔에 담겨 있던 찻물이 사방에 뿌려졌다.
조금 전까지 당당하게 앉아있던 이성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이정훈 회장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 멀쩡한데 그따위 말을 내 앞에서 하는 거였느냐? 이놈이 비싼 밥 처먹고 할 일이 그렇게 없나…….”
이성우의 어깨가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렸다.
그러나 이정훈 회장은 소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아주 정신이 나갔나 보구나? 요새 좀 뜸했지?”
이정훈 회장이 팔을 걷어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휘둘러 보는 것이 손에 쥘만한 무언가를 찾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이성우는 그런 이정훈 회장의 모습에 몸을 떠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성우는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며 두려움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지금 두려움에 떨고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면 평생 다시는 이정훈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이성우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골프채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이정훈 회장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직원들을 정리하면 우리는 신성증권의 껍데기만 인수하게 되는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그걸 원하셨던 거예요? 신성증권이라는 이름만을요?”
이정훈은 7번 아이언 골프채를 빼 들었다.
그리고 허공에 골프채를 휘두르며 말했다.
“껍데기만 인수하게 되는 거라고?”
이성우는 이정훈의 질문에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일부러 지지 않으려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큰 몸짓을 보인 것이었다.
얼핏 보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효과가 있는 듯했다.
움츠러들었던 이성우의 등이 펴지면서 떨리던 음성도 차분해졌다.
“네. 분명 그렇게 될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왜지?”
“여기는 달라요. 다들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다니는 곳이란 말이에요. 자존심에 목숨을 건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같이 기름때 묻은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말이냐? 고귀한 사람들이라 우리가 위에 올라앉아 있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거라고?”
“그 말이 아니에요.”
이성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려운 존재인 이정훈을 향해 오히려 걸어갔다.
이정훈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성우는 몸을 움직이자 점점 자기의 몸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한진영이 알려준 대로 하니 주눅이 들어 입이 굳어졌던 지난 시절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됐다.
이성우는 나아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이정훈 회장을 향해 이야기했다.
“굽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요. 한마디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속칭 증권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에요. 더운 날 시원한 곳에서 일하고, 추운 날 따뜻한 곳에서 일하니 생각하는 게 달라요. 여차해서 자기에게 손해 볼 일이 생길 것 같다면 참는 것 없이 그냥 다 손 털고 자리를 떠나 버릴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성우의 몸은 정상을 찾아가는 듯 보였다.
이정훈 회장의 눈에도 그런 이성우의 변화가 눈에 들어온 것인지 허공에 들고 있던 골프채를 내려뜨리고 말했다.
“그래서?”
“주식 판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손절을 빨리하는 자가 오래 살아남는다.”
“손절?”
“네. 손해를 봤다고 하더라도 더 큰 손해를 볼 것 같으면 가지고 있던 것도 그냥 던져 버리고 몸을 빼버린다 이 말이에요. 이런 생활이 몸에 밴 사람들인데 자기 일은 어떻겠어요? 분명 자기들에게 피해가 갈 것 같다 하면 미련 없이 나가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될 거라고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신성증권이라는 껍데기만 가지게 되는 거예요.”
“내가 상관이 없다면?”
이정훈 회장이 골프채를 까딱거렸다.
이성우는 그런 이정훈 회장의 골프채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언제라도 자기에게 꼭 날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이런 모습에 주눅이 들어 이야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한진영과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몇 차례나 이정훈 회장과 이야기하는 것을 연습했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골프채에서 시선을 돌리며 이정훈 회장에게 이야기했다.
“상관이 없을 수가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기풍의 그룹화는 누가 할 건데요? LZ와 대한정유의 일은요? 그냥 무턱대고 둘을 끌어와 삼자연합을 구성한 게 아니라는 거 기억하시죠? 아직 LZ의 승계작업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고, 대한정유의 신사업 투자를 위한 주식매각은 시행도 되지 않은 상태예요.”
“한진영이 있잖아.”
“한진영이 혼자서 그 일을 다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진심으로요?”
이정훈 회장은 이성우를 가만히 바라본 후 들고 있던 골프채를 골프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소파로 걸어가 앉은 후 이성우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라. 앉아서 이야기하자.”
이성우는 이정훈의 반응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반응이 이정훈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뭐 해? 와서 앉아.”
먼저 소파에 앉은 이정훈이 여전히 자리에 서 있던 이성우를 불렀다.
이성우는 이정훈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조금 전까지 앉아있었던 소파로 돌아왔다.
이정훈 회장은 이성우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조금 전 이성우가 했던 말을 다시 물었다.
“한진영이 혼자서 하지 못할 거라고? 그래. 뭐 그건 나도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말까지 이정훈의 입에서 나오자 이성우의 놀람은 더욱 커졌다.
한진영과 연습하며 이런 식의 반응이 아버지에게 먹힐지 걱정했던 이성우였다.
괜히 뜻을 거스르는 모습을 보여 화를 돋우는 게 아니냐는 걱정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모두 덧없었다는 듯이 이정훈 회장은 이성우의 말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성우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정훈 회장은 이성우가 놀라거나 말거나 이야기를 계속이었다.
“혼자 못하면 새로운 직원을 뽑으면 되지. 그러면 되는 것 아니냐?”
이성우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이정훈의 말에 반응했다.
지금은 이정훈 회장의 반응보다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아니. 회장님. 생각해보세요. 한진영은요? 한진영은 완전한 우리 사람이던가요?”
“완전한…… 우리 사람이 아니다?”
“네. 그 친구도 월급쟁이 아니에요? 걔도 아니다 싶으면 사표 던지고 그만두면 그만이에요. 걔라고 뭐가 좋아서 계속 회사에 남아있겠어요? 동료들 머리가 마구 잘려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요?”
“그래?”
이정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성우를 노려봤다.
마치 이성우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성우는 따가운 느낌마저 느껴지는 이정훈의 눈빛에서 고개를 돌렸다.
계속 이정훈의 시선과 마주할 수 없어 이성우가 먼저 발을 뺀 것이었다.
이정훈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을 보고서도 한동안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약 십여 초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 이정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만둘 수도 있다 이 말이지?”
“네. 그래요. 그렇게 되면 손해 아니겠어요? 앞으로 중요한 일이 한가득 인대 말이에요. 그러니 아버지. 아니. 회장님. 이번은 그냥 눈감고 넘어가 주세요. 그래도 제가 비록 하찮은 지위였지만 신성증권에서 지낸 시간이 기니 제가 알아서 하도록 할 테니까요.”
“네가 알아서 하겠다? 네가 알아서 뭘 한다는 건데?”
이정훈의 말에 이성우가 마른침을 넘기고 준비했던 말을 천천히 꺼냈다.
“기풍철강의 이름이 아니라 제 이름으로 정리하게 해주세요. 그래야 기풍에 대한 직원들의 반발심을 잠재울 수 있으니까요.”
“기풍이 아니라 네가 나서서 정리하겠다?”
“네. 회사 간판이 바뀌었는데 모든 사람을 안고 갈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 목표를 임원급 일부로 한정해서 하도록 할게요. 그렇게 된다면 직원들의 반발도 잦아들 테고…….”
“네. 권위도 자연스럽게 살겠지?”
이정훈 회장은 뻔히 속이 보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네 꿍꿍이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네가 기풍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과 권위를 함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것 아니냐?”
“그게…….”
“제법 머리를 썼어.”
이성우는 이정훈 회장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기분 나빠하는지 아니면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인지 말투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이성우는 표정이 나빠 보이지 않는 이정훈 회장의 얼굴을 보고 긴장을 조금은 풀 수 있었다.
한진영의 말대로 이정훈 회장은 지금의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성우는 이제 이정훈 회장이 걸 조건을 차분히 기다렸다.
한진영의 말대로라면 이성우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이정훈 회장이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훈 회장은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이성우를 보고는 웃었다.
“네 생각은 아닌 것 같고…… 한진영이가 이렇게 이야기하라고 시키더냐?”
“아니요. 제 생각이에요.”
“네놈이 퍽 이런 생각을 했겠다. 네놈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잊지 마. 내가 바로 네 아비다. 네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자기 앞에서 거짓말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라는 듯이 윽박지른 이정훈 회장은 다리를 꼬고 손을 무릎에 얹었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무릎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신임 사장으로 취임하기 전에 권위를 세워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직원들에게 네가 은혜를 베풀었다고 한다면 직원들도 널 좋아라 할 거야. 뭐 좋다. 그렇게 해라.”
“감사합니다.”
“대신…….”
고개를 숙여 인사하던 이성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정훈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를 건 채로 이야기했다.
“그냥은 안 되고…… 그에 어울리는 명분이 될만한 선물을 들고 오너라.”
“선물…… 이요?”
“그래. 선물. 너를 기풍증권 사장으로 앉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만한 것을 들고 찾아오란 말이다. 그게 무엇이든 좋으니까.”
“실적을 올리란 말씀이신가요?”
“그건 네가 생각할 문제니까 나에게 물어보지 마라.”
“만약…… 가지고 오지 못한다면요?”
“그럼 네놈이 사장이 되는 일은 물 건너가는 거지.”
“저를 사장 자리에 앉혀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삽시간에 마음이 바뀐 것 같은 이정훈의 모습에 이성우가 당황하여 물었다.
이정훈 회장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웃는 것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거야 내 말대로 했을 때였고…… 지금은 아니지 않으냐? 네 권위를 살린 채로 직원들의 축하 박수 속에 사장 자리에 앉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내놓아야지. 안 그러느냐? 설마 내가 네놈을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장 자리에 앉힐 줄 알았어?”
“아버지.”
“일 이야기할 때는 회장님이라고 부른다고 하지 않았더냐?”
“저는 겨우 대리예요. 제가 실적을 쌓아봤자 뭘 쌓는다고…….
“내가 언제 실적을 쌓아서 가지고 오라고 하더냐?”
“그럼…….”
“그건 네가 생각해 볼 문제라고 했는데 왜 자꾸 나한테 물어봐?”
이정훈 회장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성우를 향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만 가봐. 한 달. 한 달 내에 가지고 와라.”
“한 달이요?”
“그래. 인수 마무리되고 우리 사람들 집어넣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한 달이다. 그전에 내가 너를 사장 자리에 앉힐만한 합당한 무언가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너는 물론이고 신성증권의 그 잘나신 임직원분들 목을 날려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고…….”
“저까지요?”
이정훈 회장은 책상 의장에 앉아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팔걸이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이 정도는 감수하고 왔을 것 아니냐?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거로 예상하고 온 것 아니야? 설마…… 내가 네놈의 말을 듣고 너를 설득해서 돌려보낼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이정훈 회장은 오른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가서 한진영에게 말해. 네 친구 사장 자리에 앉히고 싶으면 좋은 거로 가지고 오라고 말이야. 어쭙잖게 네놈이 있는 사업부 실적을 가지고 와서 딜 할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말도 더하는 것 잊지 말고. 사업부 실적은 네놈 실적이 아니니 말이다.”
“아버지.”
“여기 네놈 아버지가 어디 있어? 회사에는 상사와 부하직원 그리고 동료만 있을 뿐이야. 할 이야기 다 했으면 그만 가라. 나는 네놈과 달리 바쁘니 말이다.”
이정훈 회장은 이제 볼 일을 마쳤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성우는 예상하지 못한 이정훈 회장의 모습에 당황한 듯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불러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회장실을 나왔다.
이정훈 회장은 이성우가 회장실을 나가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인터폰을 켜 밖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지시했다.
“신성증권에 나가 있는 권 팀장 들어오라고 해.”
이정훈 회장은 지시를 마치고 인터폰에서 손을 뗀 후 이성우가 떠난 문을 말없이 가만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