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
이수암 회장에게 강선건설을 만나보겠다는 답을 줬는데도 한진영에게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만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는 강선건설을 보며 한진영은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음이 급한 곳은 강선건설이었으며 한진영이 조급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연락을 먼저 할 게 분명했다.
한진영은 그때까지 차분히 그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한진영이 강선건설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이 먼저 두선그룹이 움직였다.
LZ그룹과 두선그룹 간의 본계약이 체결되자마자 두선그룹이 투자법인을 세운 것이었다.
바로 한진영이 자리하고 있는 투자전략사업부로 투자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두선그룹은 투자법인을 세우자마자 신성증권에 투자 계약을 체결하자는 연락을 해왔다.
계약 조건을 따로 따지는 것도 없었다.
수익의 30%를 수수료로 떼어 가겠다는 조건에도 응하는 것이 아무래도 1,000억을 모두 잃더라도 두선그룹은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으로만 보였다.
그래서 실무진 선에서의 협의도 간단하게 끝이 났다.
두어 차례 만나 서로 간에 지켜야 할 부분만 협의하는 정도로 세부조정을 마친 것이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일이 진행됐고, 두선그룹의 새로운 투자법인과 계약을 체결하기로 결정됐다.
“진영아. 네가 정말 제대로 예측했다. 두선그룹이 투자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쩔 뻔했어?”
두선그룹과의 투자계약을 체결하러 가는 차 안에서 최준호 부문장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진영에게 말했다.
“나는 네 말 듣고도 설마설마했어. 그룹 본사에서 자금을 거둬들일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거든. 그런데 바로 500억을 거둬가는 걸 보고 새삼 네 통찰력에 감탄했다. 대단해.”
조수석에 앉아있는 최준호는 연신 운전하는 한진영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본사에서의 500억 운용자금 회수는 최준호를 비롯하여 투자전략사업부에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너무나 잘 운용되던 자금이었다.
비록 한 번에 큰 수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돈이라는 말을 그대로 보여줄 정도로 시간이 지나며 차곡차곡 쌓이는 금액에 모든 사람이 감탄을 낼 정도였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렇게 쌓인 금액을 본다면 수익이 낮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넉 달이 지난 지금 수익률이 원금 대비 50%를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금 500억을 모두 투입하여 돌리는 것도 아니었다.
일부 금액만 투입했으며 초기에는 테스트 형식으로 소액으로만 운용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넉 달에 원금 대비 50%라는 것은 기록적인 수익이라고 생각할 만했다.
그런데도 신성그룹에서는 운용자금 회수를 선택했다.
게다가 운용자금에 더해 수익금까지 모두 회수하는 결정을 내렸다.
투자전략사업부뿐만 아니라 신성증권의 모든 직원이 이런 결정에 의구심을 표할 정도로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회장님을 만나 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이미 결정 난 이야기였어요.”
“그래. 너한테 그 이야기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설마설마했거든. 생각해봐. 두선그룹에서 들어오는 1,000억에 기존 운용자금 그리고 수익까지 더한다면…… 웬만한 소형 증권사 수익을 우리 사업부만으로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걸 포기해? 말이 안 되잖아.”
최준호는 아쉽다는 듯이 연신 차 안에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그런 최준호와 달리 한진영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한진영은 설마라는 생각을 눈곱만치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진영은 이런 결정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수익금까지 회수라…… 도대체 얼마나 신성그룹이 안 좋은 거야?’
운용자금 회수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최준호 부문장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은 설마설마했을지 모르지만, 한진영은 그걸 염두에 두고 두선그룹의 자금을 유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수익금의 회수까지는 예상 범위 밖의 일이었다.
두선그룹이 투자를 결정하여 기존 운용자금을 회수한다지만 수익금까지 건드릴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지난 이수암 회장과 만남에서 신성그룹의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이번 일로 확신을 가졌다.
‘신성그룹은 위험해.’
한진영은 신성그룹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며 두선그룹의 본사로 차를 몰았다.
투자법인을 통한 투자이기에 거창한 투자 계약 체결식과 같은 행사는 건너뛰기로 했다.
다른 이들에게 투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두선그룹의 결정을 한진영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진영을 비롯한 신성증권 입장에서도 투자법인의 소유주가 두선그룹이라는 사실을 나서서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약서에 사인하는 일은 간단하게 관련자들만 모여 진행되게 됐다.
“또 뵙습니다.”
두선그룹에서는 기획실 실장을 맡은 김종운 사장이 대표자로 나왔다.
본사 차원의 투자이기 때문에 김종운 사장이 투자법인의 대표 자리도 함께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 뵙게 되네요. 반갑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김 사장님과 여러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지지 못해 아쉬웠지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로 만나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 되지요.”
김종운은 웃으며 한진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 서른도 되어 보이지 않는 외모의 젊은이였다.
실제로 그가 받아본 프로필상의 외모만 봤을 때 한진영은 애송이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애송이를 직접 만나 본 순간 김종운의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바꿨다.
한진영은 그저 그런 길거리 위의 수많은 평범한 애송이 중의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 우선 계약부터 체결하고 나머지 이야기를 진행할까요?”
김종운은 웃으며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최준호에게도 말을 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쨌든 표면적으로 사업부의 수장은 한진영과 함께 온 최준호였기 때문이다.
안에 마련된 공간에는 한진영과 최준호를 환영하는 문구들이 적힌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비록 외부 기자들을 부르지 않았지만 두선그룹 내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내 기자단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들어오는 한진영과 최준호를 뜨겁게 맞으며 두선그룹은 신성증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뜻을 보였다.
“그냥 계약만 체결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최준호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 없이 찾아온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달랑 둘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사업부 직원 몇을 더 데리고 오는 편이 구색을 갖추기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회장님께서 이런 것도 다 사진으로 남겨 놓아야 한다고 하셔서요. 회장님께서 신성증권과 한 부부문장님께 관심이 많으십니다.”
“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한진영은 멋쩍게 웃었다.
두선그룹에서 어떤 의미로 관심이 많다는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숨에 3,000억이라는 돈을 올려치기 한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한진영이었다.
그래서 두선그룹의 회장이 궁금해한다는 것에 말 대신 웃음만 전할 뿐이었다.
뜻하지 않은 반응 속에서 계약을 체결하는 사진을 찍은 한진영 일행은 간단한 행사를 마무리한 이후 다음 장소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따르릉.
한진영의 전화기 벨이 울리자 안내를 하려던 김종운 사장은 잠시 서서 한진영이 전화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한진영은 미안하다는 뜻을 김종운 사장에게 전한 후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벨이 울리기 전까지 웃던 한진영의 얼굴이 통화하며 점차 웃음기를 지워갔다.
그리고 전화를 마친 뒤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김종운 사장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네? 왜 그러시죠?”
“지금 바로 가볼 곳이 생겨서요.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자리를 이동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문장님.”
“어?”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최준호는 한진영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최준호의 팔을 붙잡고 부탁했다.
“저 대신 이야기 잘 나누고 와 주십시오.”
“나? 나 혼자?”
최준호는 김종운과 한진영을 번갈아 바라봤다.
자기는 더미에 불과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최준호 스스로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 그에게 두선그룹의 김종운 사장과 식사 자리를 부탁하는 한진영이었다.
최준호는 어떻게 그러냐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한진영의 부탁을 받고 말았다.
김종운은 한진영을 향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회사 문제라면 최 부문장님과 함께 가시겠다고 하실 텐데, 따로 가겠다는 것을 보니 회사 문제는 아닌가 보군요. 외부에서 일이 있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럼…….”
한진영은 더 이야기하면 쓸데없는 정보까지 두선그룹에 제공하게 되는 것 같아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최준호는 그런 한진영을 잡지 못했다.
잡고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한진영이 자리를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최준호의 곁에서 김종운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진영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
한진영은 두선그룹을 나오자마자 남원석 사장이 전화로 알려준 곳을 향했다.
종로구에 자리한 한식집으로 한옥과 음식이 잘 어울린다고 하여 젊은 사람들에게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지난번에 만났던 강선건설의 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에 한진영은 김종운과의 식사 자리도 뒤로하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한옥마을에 차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기에 멀찍이 떨어진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했다.
“한진영 씨?”
주차하고 차에서 내린 한진영을 향해 누군가가 찾아왔다.
한진영은 문을 잠근 뒤 찾아온 사람을 살피고는 대답했다.
“맞습니다만…… 누구신지…….”
“안녕하십니까? 강선건설 직원입니다.”
“아.”
한진영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긴 왜…….”
“전무님께서 한진영 씨를 모시고 오라는 지시를 내리셔서요.”
“전무님이요?”
“네. 그럼 가시겠습니까?”
한진영은 먼저 몸을 돌리는 강선건설의 직원의 뒤를 따랐다.
한진영은 주차장을 나와 약속된 곳으로 향했다.
약 10여 분을 걷고 나서야 도착한 한식집 마루에는 들어오는 한진영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기입니다.”
한진영은 앉은 채로 손을 든 상대를 향해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지난번에는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저는 천정모라고 합니다. 마침 시간 맞춰 잘 오셨습니다. 도착하셨다는 이야기에 제가 알아서 주문했습니다. 식사 전이시죠?”
“네. 아직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두선그룹에서는 밥도 안 주던가요?”
한진영은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넨 강선건설의 천정모 전무를 바라봤다.
“제가 두선그룹에서 오는 것도 알고 계셨군요.”
“그런 것도 모르고 뵙자고 하지는 않죠. 뜻밖이셨습니까?”
한껏 기대에 찬 표정을 한 천정모였다.
한진영은 그런 천정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천 전무님께서 모르고 계셨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보다 다른 게 궁금합니다.”
“네. 말씀하세요.”
한진영은 방석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기대에 찬 천정모를 향해 물었다.
“제가 어느 주차장에 차를 댈지는 어떻게 아신 겁니까? 주변에 주차장이 꽤 많은데 제가 대놓은 주차장에 직원이 나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좀 뜻밖이었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천정모는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뜻밖의 상황을 만들어 낸 것에 자부심이라도 생긴 듯한 모습이었다.
천정모는 그게 궁금했냐는 듯이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제가 어떻게 한진영 씨가 어느 주차장으로 도착하는지 알겠습니까? 단지 모든 주차장에 직원들을 보내 한진영 씨를 찾은 것뿐입니다.”
“모든…… 주차장에요?”
“네. 한진영 씨의 차가 특이하니 한두 명만으로도 주차장에 들어오는 차를 확인하기 쉬울 테니까요. 누구나 다 타는 일반적인 국산차였다면 찾기 어려웠을 겁니다.”
한진영은 자부심이 담긴 천정모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성격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
‘이벤트를 좋아하는구나.’
지난 시절에 알고 있던 천정모의 성격도 지금과 마찬가지였다.
뜻밖의 일을 즐겼고 그로 인해 이득도 얻었지만, 손해를 더 많이 본 케이스가 바로 천정모였다.
한진영은 알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하나하나 나오는 음식들을 지켜봤다.
룸이 아니라 트여있는 공간에 자리한 만큼 주변의 모습들이 모두 보였다.
대부분 연인끼리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나오는 음식들의 사진을 찍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한진영은 왜 이런 곳을 약속장소로 잡았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자 천정모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한진영에게 물었다.
“트여있는 공간이 불편하십니까?”
“제가 불편할 건 없지요. 전무님이 불편하면 모를까요.”
“저도 불편한 것 없습니다. 제가 연예인도 아니고 제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불편해할 이유가 없지요.”
“알아보는 게 불편한 게 아니라 앞으로 할 이야기가 불편할까 봐 그렇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천정모는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번에도 특별한 무언가를 준비하다가 정말 단순한 것을 놓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한숨이 나올 것만 같은 천정모의 모습에 앞에 놓인 차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멈춰버린 천정모의 머리가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국화 잎이 띄워진 찻물의 반을 다 마실 동안에도 천정모의 머리는 멈추지 않은 듯했다.
차가운 날씨에 머리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만 같게 계속 머리를 쓰고 있지만, 답을 찾지 못하는 천정모였다.
한진영은 고개를 젓고는 젓가락을 들고 천정모의 머리 위와 같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깻잎 전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우선 여기서는 식사만 하시고 이야기는 걸으면서 하시죠.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면 누가 우리 이야기를 듣겠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천정모는 눈이 번쩍 뜨이는 모습을 하고는 무릎을 쳤다.
“역시 한진영 씨입니다. 제가 한진영 씨를 잘못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명쾌한 해결법입니다.”
천정모는 한진영의 말에 기쁜 듯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