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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증권사 생활-117화 (117/650)

117화 설득하는 상황이 필요했을 뿐이다

의외의 표정을 짓기는 양준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둘은 당연히 한진영이 두선그룹 측으로부터 커미션을 받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둘을 번갈아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설마 제가 두선으로부터 무언가를 받고 일을 진행한다고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시겠죠? 이미 알아보셨겠지만 제안은 LZ그룹에게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조 상무를 통해 의사를 확인한 후 두선그룹에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나도 들어 알고 있네. 하지만 순서가 어떻게 됐건 간에 두선그룹에게서 무얼 받았을 텐데…….”

“제가 아무것도 받지 않은 게 아니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투자를 받은 것? 아니야. 그것을 받았다고 이해하기에는 뭔가 석연치가 않아.”

조병수 회장은 고개를 연신 좌우로 흔들었다.

“자네가 그것만 받을 바보로 느껴지지 않아. 아니. 바보가 아니니까 이런 제안을 한 것이겠지. 그런데 그것만 받았다고? 최소한 100억을 달라고 했어도 두선그룹이 거절하기 힘들었을 일을 가지고?”

차가워진 조병수의 표정에 양준이 난감한 듯 한진영을 힐끔거렸다.

조병수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한진영이 조병수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진영은 그런 양준의 마음을 뒤로한 채 조병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네. 이번 거래가 굉장히 기울어진 거래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득을 받는 두선그룹이 저에게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고 계신 것이겠죠.”

“자네 말은 이게 기울어진 거래가 아니라는 뜻이야? 두선그룹은 이 거래로 최소 4,000억의 이득을 볼 수 있어. 그것도 현금으로 4,000억이야. 우린 그만큼 손해를 보는 것이고…….”

“회장님.”

한진영은 살짝 목소리 톤이 올라간 조병수를 차분한 목소리로 불렀다.

조병수는 그런 한진영의 목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진 것을 느꼈다.

그래서 살짝 손을 들어 한진영을 향해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내가 잠시 흥분했나 보군.”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양준은 조병수와 한진영의 이런 모습에 살짝 놀랐다.

대부분의 사람은 조병수를 만나면 긴장하기 바빴다.

LZ그룹의 총수라는 위치가 주는 중압감에 조병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그저 듣기만 하는 게 전부였었다.

그러나 한진영은 주눅 든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하려는 조병수를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이 동네 복덕방 노인네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었다.

‘왜 긴장하지 않지?’

한진영이 또래와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실적을 올리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또래와 비교해서 봤을 때 많다는 거지 절대적인 영역에서 봤을 때 조병수와 같은 거물을 자주 상대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조병수와 같은 거물 앞에서 주눅이 들어야 하는 게 당연했고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숨죽이며 조병수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한진영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회장님.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한진영은 오히려 조병수를 향해 가르치는 듯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성적?”

“네. 두선그룹이 얻는 이득만 바라보지 마시고 LZ그룹이 얻을 것을 생각해보시라 이 말입니다.”

한진영의 말에 조병수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조병수의 생각을 도와주는 말을 건넸다.

“두선그룹은 우선 머릿속에서 지우십시오. 그리고 LZ그룹만 생각하십시오.”

한진영의 말에 따라 조병수는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듯 보였다.

“LZ그룹을 조용재 상무에게 상속할 때 내야 할 상속세가 얼마일까요? 제가 정확히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역사에 기록될만한 숫자가 될 게 분명합니다.”

조병수는 한진영의 말에 동의하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금액이 결코 3,000억 이하가 될 리가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맞아. 얼마 전에 양 사장이 계산하기로는 7,000억 가까이 된다고 하더군. 그렇지?”

조병수가 양준을 향해 물었다.

양준은 조병수의 질문에 가만히 대답했다.

“네. 그 정도가 현재 시점에서 예상되는 상속세였습니다.”

양준은 조병수의 말에 대답한 후 한진영을 슬며시 돌아봤다.

한진영의 말에 점차 말려 들어가는 조병수의 모습에 한진영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리는 게 아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진영은 양준의 이런 눈빛을 느끼면서도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LZ그룹이 얻는 이득은 4,000억에 가깝습니다. 결코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라는 점이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 시점에서 4,000억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시간이 흘러 회장님이 보유하고 계신 지분가치가 높아진다면…… 납부해야 할 상속세가 4,000억이 아니라 4조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요.”

“4조? 무슨 말도 안 되는…….”

조병수가 헛소리를 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듣기에 나쁘지 않은 듯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조병수를 향해 조금 더 달콤한 말을 건넸다.

“회장님. 제가 사무실에 들어와 가장 먼저 느낀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너무 초라해 보이던가?”

“아니요. 검소함을 느꼈습니다. 조용재 상무의 사무실에서 느꼈던 감정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이곳에 와서 확인했습니다.”

“검소. 그렇지. 제대로 봤구먼.”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회장님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세금 4,000억 아깝지 않으십니까? 4,000원이라도 아껴야 하는 마당에 4,000억을 아낄 수 있는 길을 왜 마다하려 하십니까?”

조병수의 표정이 많이 풀어진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그런 조병수를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마지막 마음의 문을 열어젖혔다.

“법을 위반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게 이런 기회가 생겨 합법적인 형태로 지분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런데 꺼릴 일이 뭐가 있습니까?”

한진영의 말에 조병수의 얼굴이 화사하게 펴졌다.

그리고 한진영을 옆으로 째려보며 말했다.

“왜 화제가 이쪽으로 온 건가? 나는 분명 자네가 왜 두선그룹에서 받은 게 없는지 물어보는 중이었는데.”

말속에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양준은 이미 조병수가 한진영에게 많이 기울어졌음을 깨달았다.

‘대단한 친구군.’

양준은 한진영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조용재 상무에게 LZ상사를 중심으로 한 그룹 재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무릎을 쳤다.

자기도 어렴풋이나마 그에 관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 조용재가 자기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완벽한 방법을 이야기 한 것이었다.

양준은 조용재가 어떻게 이렇게 신통방통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궁금했다.

그가 아는 조용재는 이런 류의 생각까지 할 정도의 수준이 못 됐었기 때문이다.

조용재는 궁금해하는 양준에게 숨기지 않고 한진영과 있었던 이야기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가 한 생각에 자기도 귀가 솔깃해졌다는 말을 더했다.

이미 조용재도 한진영에게 홀린 상태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었다.

그래서 양준은 한진영이 생각보다 수단이 탁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경험이 적고 어린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었다.

게다가 흐릿하게 자기가 생각하던 것을 명확하게 그려낸 것에 감탄하는 마음마저 샘솟았다.

간단하지만 명쾌한 답을 내놓은 것에 업계에서 오랫동안 굴렀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어떻게 스물 후반의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기도 했다.

그가 만났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흠뻑 빠졌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래서 수단만 좋은 게 아니라 남다른 말솜씨와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수단 좋고 탁월한 친화력의 애송이가 지금은 LZ그룹의 회장까지도 구워삶는 중이었다.

“두선그룹에게 받은 게 왜 없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조금 전 이야기를 한 겁니다.”

“관계가 있다고?”

“관계가 있지요. 저는 브로커가 아닙니다. 결코 회사를 통하지 않은 채 뒷공작을 하는 치졸한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회사를 통하지 않고 고객에게 돈을 받는 일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업무와 관련된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이득을 주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일을 하는 중인데 어째서 제가 두선그룹에게 돈을 받겠습니까?”

조병수는 가만히 한진영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회장님이 무엇 때문에 지금의 딜을 꺼리는지 알고 있습니다. 두선그룹에게도 그리고 LZ그룹에도 모두 이득이 되는 일이지만, 당장의 가치만 봤을 때 두선화학을 1조 3천억에 매수한다는 게 꺼려지는 것이겠죠.”

“그래.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조병수는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조금 전에 자네가 한 말대로 나는 아끼는 사람이야. 그래서 회사를 여기까지 키웠어. 그래. 양 사장이나 자네 생각처럼 상속세로 나갈 수천억을 아끼는 길이 그게 맞는다면 그 길로 가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그 회사를 그 돈 주고 선뜻 사지 못하겠다는 것도 솔직한 내 심정이야.”

“회장님. 저 연필은 얼마나 할까요?”

한진영은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연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병수는 한진영의 손을 따라 연필을 쳐다봤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연필이었다.

“글쎄? 개당 천 원 할까? 그것도 안 할 거 같은데? 그건 왜 묻나?”

“그렇군요.”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냈다.

그리고 연필이 있던 곳에 3만 원을 내려놓은 뒤 연필을 집어 들었다.

“제가 3만 원에 사겠습니다. 저한테 파시지요.”

조병수는 연필을 집어 든 한진영의 손과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3만 원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피식하고 웃었다.

“사회적으로 매겨져 있는 가격이 아니라 내가 필요한 가격을 생각하라는 건가? 하긴 그렇게 따지면 두선화학의 1조 3천억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가격은 아니지.”

조병수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한진영에게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3만 원을 다시 건네며 말했다.

“딜을 성공시킨다면 두선그룹이 자네의 회사에 1,000억을 투자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네. 그게 회장님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는 저의 성공보수입니다.”

“왜 나한테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지?”

양준은 조병수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조병수가 나서서 먼저 이런 류의 성공보수를 이야기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자네가 처음 조 상무네 별장에 찾아갔을 때부터 지켜보기는 했어. 그때는 아들내미의 또 다른 술친구가 생긴 줄로만 알았지. 그런데 그 술친구가 회사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개가 갸웃해지더군. 그 녀석이 술친구를 회사로 부른 적은 없었거든.”

조병수는 의자 팔걸이에 양팔을 걸치고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한진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처음 한진영이 사무실에 찾아왔을 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많이 수그러지고 따뜻함이 묻어 나오는 게 이제 완전히 한진영이라는 존재에게 넘어간 듯한 모습이었다.

“용재하고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그런 의미에서 어떤가? 자리를 옮겨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저는 지금 이 자리가 좋습니다. 그리고 자리를 옮기지 않아도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 대한그룹 윤 회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가 퇴짜를 맞았다고 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단호하구먼. 자네의 뜻은 알겠네.”

조병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허락하지. 그리고 돌아가서 잘 생각해봐. 나에게도 뭔가 받아가야지.”

“아니요. 애초에 회장님에게는 받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정을 내려주시는 것만으로 저에게는 감사한 것이니까요. 보상은 두선그룹에게 받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줬으면 좋겠는데…… 뭐 그렇게 나오니 어쩔 수 없지. 알았네. 그래도 모르니 혹시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찾아오게.”

“알겠습니다.”

한진영은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LZ그룹 회장과의 자리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한진영이 조병수에게 인사를 하고 양준 사장과 함께 회장실을 나왔다.

양준 사장은 회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한진영을 돌아보고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을 설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회장님께서는 이미 결정을 하신 상태였습니다. 그저 핑계가 필요했고 그 핑계에 제가 도움을 드린 정도입니다.”

“이미 결정을 하셨다고요? 두선화학을 인수하기로 말입니까?”

“네. 설득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설득하는 상황이 필요하셨던 것뿐입니다. 그 이유는 회장님을 오래 모신 양 사장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양준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의 말대로 조병수라면 결정을 이미 해놓은 상태에서 그런 분위기를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지금과 같이 대규모 딜의 경우에 종종 그런 모습을 보이곤 했던 조병수였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인간적인 회장.

여러 의견을 수렴하고 가장 타당한 결정을 따르는 합리적인 경영자.

어려운 결정에 심사숙고하여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하는 신중한 오너.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원하는 답이 들려올 때까지 의견을 구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다 자기와 같은 의견이 나왔을 때 마지못해 그 의견을 선택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양준은 조병수의 이런 모습을 오래전부터 보아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 부부문장님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자기는 조병수를 곁에서 모셔서 안다지만 조병수를 오늘 처음 본 한진영이 이런 걸 어떻게 아는지 신기하기만 한 양준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양준을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에게 3만 원을 돌려주실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아~”

한진영이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양준의 감탄사와 함께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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