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잘 깔린 철로와 같은 스토리
한바탕 폭풍 같은 일이 휘몰아치고 난 뒤 사장실에 한진영과 남원석이 앉아 있었다.
남원석은 이해가 가지 않는듯한 얼굴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아니. 한두 번 한 일이 아니라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모를 수가 있던 거죠?”
남원석은 경찰이 도착하고 난 뒤에 벌어진 광경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동안 참았던 설움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온 것인지 리서치센터의 직원들은 서로 나서서 홍지란의 악행을 신고했다.
맞았다는 사람과 언어폭력을 당했다는 사람. 그리고 성추행 이야기까지 나오는 것이 잠깐 정리해서는 될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경찰도 사건이 작지 않음을 느끼고 피해 사실이 있는 사람의 연락처를 걷어갔다.
따로 출석 일자를 맞추어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경찰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폭력에 대한 사건만 진행하기 위해 홍지란을 경찰서로 연행했다.
남원석은 왜 사람들이 지금까지 침묵했는지, 왜 그 사실을 자기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은 몰랐던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정도의 일이라면 진작에 알려졌어도 알려져야 했던 일 아닙니까?”
“알려졌겠죠.”
“알려졌다고요?”
“밑에 직원들에게는 말입니다. 리서치센터에 갔을 때 사장님도 느끼셨을 텐데요. 공기부터가 다르다고 말입니다.”
남원석은 조금 전 리서치센터를 방문했던 때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했지요. 나는 그게 단순히 분위기가 진중한 듯한 모습이라 그런 건 줄로만 알았는데…….”
남원석은 그런 일이 벌어지는데도 한가롭게 진중한 분위기가 어쩌고 떠들었던 것이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을 붉혔다.
한진영은 남원석의 부끄러운 마음 달래주려는 듯이 괜찮다는 말을 건넸다.
“위에서는 누가 와서 알려주지 않는다면 모를 만합니다. 아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자세히 찾아보는 것도 한가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지 바쁜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 할 일이지요.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럼 누구라도 와서 알려주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일이 벌어질 때까지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니…… 아무리 내가 힘이 없고 아는 것이 없다고 하기로서니…… 이건 너무 했습니다. 너무 했어요.”
남원석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이게 곪아 터져서 외부에서 사건이 폭로됐다면…… 끔찍합니다. 끔찍해요.”
바로 지난 시절에 남원석이 걱정하던 일이 벌어졌었다.
당시 사장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을 정도로 분위기는 험악해졌으며 불매운동 때문에 회사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기도 했다.
남원석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에 감사한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최악은 면했다고 하더라도 조금 더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그냥 묻혀 흘러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남원석을 향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회사를 나가면 그만이고, 견딜만한 사람은 그냥 홍지란의 밑에서 숨죽이고 사는 것을 선택했을 겁니다. 이야기한다고 해도 무언가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직원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한진영이 일부러 남원석을 데리고 갔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위에서는 왜 이런 일을 미리 알리지 않았냐고 말할 테지만, 말로 들어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게 지금까지 위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행동이었고, 그 행동의 범주 내에 남원석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남원석이 그 상황에 휩쓸려 버렸기에 해결이 된 것이었지 그렇지 않고 보고만 받았다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건을 묻는 쪽으로 끌어갔을지도 몰랐다.
당장 지금만 해도 다행이라는 마음 한쪽에서 스멀스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걱정이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로 LZ그룹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홍지란이 난리를 피울 때야 LZ고 뭐고 간에 떠오르는 게 없었지만, 해결이 되고 나니 걱정이 떠오른 남원석이었다.
“어차피 그 사람이 있어도 LZ그룹이 만족할만한 결과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럴까요?”
“네. 분명 그랬을 겁니다.”
확신에 찬 한진영의 말에 남원석의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한진영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아있었다면 오히려 더 큰 사고를 쳤겠지.’
홍지란이 신성증권에서 나가게 된 이유는 폭력사건과는 연관이 없었다.
신성증권은 LZ그룹의 자문역을 수행하며, 두선그룹과의 빅딜을 위해 두선화학에 대한 예비심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업무에서 홍지란은 자신의 사익을 위해 두선화학의 가치를 조작하고자 했다.
그리고 조작에 대한 지시는 벌써 내려졌는지도 몰랐다.
한진영은 걱정이 가득해 보이는 남원석을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예비심사 보고서가 늦어진 이유가 무엇 때문일 것 같습니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남원석은 한진영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늦어진 것일 테지요. 그렇지 않다면 늦어질 만한 이유가 없지요. 시간이 빠듯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긴…… 그렇다고 하더군요. 충분히 답이 나왔어도 몇 번은 나왔을 만한 시간이라고요.”
일정이 빠듯한 것도 아니었다.
서로가 계산기를 몇 번이나 두드려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시간을 충분히 둔 채로 진행되는 사업이었다.
그렇게 여유 있는 일정에서 예비심사 보고서가 완료되지 못했다.
한진영은 이 부분을 남원석 앞에서 꼬집고 있는 것이었다.
“사장님. 예비심사를 진행했던 직원을 불러 확인을 해보시지요. 정말로 심사가 늦어져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말입니다. 만약 전자라면 홍 센터장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고 해도 LZ그룹에게서 신뢰를 잃는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겁니다.”
“후자라면요?”
“후자라면 어떤 이유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요. 그러니 센터 직원을 불러 물어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습니다.”
걱정만 하고 있는다고 하여 일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남원석은 한진영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비서실과 연결된 수화기를 들었다.
남원석은 수화기를 들어 올린 상태에서 잠시 한진영을 바라봤다.
“누구를…… 불러야 할까요?”
남원석의 질문에 한진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리서치센터의 산업분석팀 팀장인 임재홍 팀장을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임재홍 팀장? 아~ 들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임재홍. 임재홍.”
남원석은 수화기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비서에게 임재홍 팀장을 사장실로 올 것을 지시했다.
남원석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조금은 안심이 된 표정으로 한진영에게 말했다.
“오늘 한 팀장이 옆에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많이 당황했을 겁니다. 아무도 없었다면 이후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아직 도움이라고 할 만한 것을 드린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아닙니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센터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지금도요.”
임재홍을 알려준 것에도 고마운 마음을 느끼는 남원석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한진영이 계획해 놓은 철로처럼 이어진 하나의 스토리였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정차역을 향해 깔린 철도 위를 기차가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한진영은 느긋한 마음으로 기차 위에 올라앉아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린 뒤 비서가 들어와 임재홍 팀장이 왔음을 알렸다.
“어서 들어오시라 해요.”
남원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비서가 나간 자리에는 커다란 덩치에 산적 같은 외모를 가진 남자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남원석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임재홍이라고 합니다.”
커다란 목소리의 임재홍은 허리가 부러질 듯이 꺾어 남원석에게 인사했다.
남원석은 숙인 임재홍의 손을 찾아 잡고는 허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그런데 우선 이 허리부터 펴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임 팀장님에게 물어볼 것이 많으니까요.”
임재홍은 남원석의 말에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그러나 여전히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것이 똑바로 남원석을 바라보는 것을 조심하는 눈치였다.
남원석은 눈을 내리깔고 있는 임재홍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리고 소파가 있는 쪽으로 임재홍을 끌고 오며 한진영을 소개했다.
“여기는 FICC 본부 TF팀의 한진영 팀장님입니다. 두 분이 인사하세요.”
임재홍은 한진영이라는 말에 그제야 반쯤 숙였던 허리를 편 채 내리깔았던 눈을 올려 떴다.
그리고 응접용 소파가 있는 쪽에 서 있는 한진영을 바라봤다.
“반갑습니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네.”
임재홍의 입에서 짧은 대답만이 나왔다.
한진영은 그런 임재홍을 향해 얇은 미소를 보인 후 남원석 쪽의 자리를 임재홍에게 양보했다.
“여기 앉으시지요. 사장님께 대답하시려면 가까운 쪽이 좋으니까요.”
“네.”
이번에도 임재홍은 짧은 대답만을 건넸다.
“앉읍시다. 앉고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남원석은 임재홍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한진영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 식어버린 차를 내가고 임재홍의 몫까지 더하여 새로운 차를 내올 것을 지시했다.
임재홍은 남원석의 비서가 나가는 것을 슬쩍 돌아보고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쩐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요? 경찰에 진술을 다 했는데 혹시 경찰 진술이 궁금하셔서 부르신 겁니까?”
조금 전에 떠들썩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남원석이 자기를 부른다면 분명 조금 전 일 때문일 거라 생각한 임재홍이었다.
그래서 임재홍은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고 이곳에 오기 전에 준비했던 말을 남원석 앞에 하려고 준비했다.
“아니요. 그건 뭐 앞으로 경찰들이 알아서 할 문제고…….”
대뜸 아니라는 말부터 나오자 임재홍은 당황한 눈치였다.
남원석은 그런 임재홍을 향해 조금 전 한진영과 나누었던 대화를 임재홍에게 꺼냈다.
“혹시 오늘로 예정되어 있던 예비심사 보고서에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보고서…… 문제요?”
임재홍은 예상했던 질문과 전혀 다른 말에 잠시 당황하여 제대로 된 답을 꺼내지 못했다.
남원석은 그런 임재홍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한 팀장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무래도 예비심사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예비심사가 이렇게 늦어질 만한 이유가 없는데 보고서가 오늘 올라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 생각했고,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임 팀장님을 뵙자고 한 겁니다.”
“저에게 예비심사 이야기를 듣기 위해…….”
“네. 그러니 이야기해 보세요. 왜 예비심사 보고서가 늦어진 겁니까?”
남원석의 말에 임재홍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진영을 돌아봤다.
한진영이 있어 말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임재홍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가 불편하신가 보군요. 그럼 제가 먼저 이야기하겠습니다.”
한진영은 잠시 입술에 침을 바르며 분위기에 긴장감이 돌게 한 후 천천히 지난 시절 알고 있던 사실을 꺼내놓았다.
“홍 센터장이 원하는 보고서가 있던 것 아닙니까? 예를 들면 두선화학에 대한 가치를 판단할 때 홍 센터장이 말한 숫자대로 가치를 산출해야 한다든지…….”
“그걸…….”
임재홍은 깜짝 놀란 눈으로 한진영을 바라봤다.
한진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요. 가격을 미리 정해놓고 심사를 진행했는데 가격만큼의 가치가 나오지 않아 홍 센터장이 화를 낸 것이군요. 임 팀장님은 양심상 도저히 그 가격을 넣을 수 없었던 것이고요.”
임재홍은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서치센터에서 벌어진 은밀한 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내려다보고 있는 한진영의 모습에 당황한 임재홍이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얼마나 깎으려고 그런 겁니까?”
남원석도 한진영의 말에 놀란 것인지 급히 임재홍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임재홍이 아니라 한진영의 입에서 나왔다.
“깎으려고 그런 게 아닐 겁니다.”
“깎으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그럼…….”
“아마 올리라고 했을 겁니다. 심사에서 산출된 가치보다 더 높은 가격, 도저히 양심상 써넣을 수 없는 가격을 말입니다. 그렇지요?”
임재홍은 더는 놀랄 힘도 없었다.
모든 걸 다 알고 자기를 불렀다는 생각에 축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였다.
남원석은 임재홍의 반응에 한진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그러나 한진영이 한 말의 의미가 작지 않음에 임재홍을 향해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두선화학의 가치를 조작해서 올리라고 한 겁니까?”
신성증권은 LZ그룹의 자문역을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두선화학의 심사를 진행을 맡는다는 것은 두선화학의 정확한 가치를 매기자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한 푼이라도 두선화학 가격을 깎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선화학의 가격을 올리려고 했다니 남원석은 이야기를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리베이트라도 약속받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허어…….”
진실이 드러나자 임재홍은 힘이 빠진 모습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아시고 부르셨으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홍 센터장은 두선화학의 가치를 올리라고 했습니다.”
“허 참…….”
남원석은 두 귀로 직접 이야기를 듣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짧은 신음을 내뱉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