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돈에 의미를 두는 애가 가만히 있는 이유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한진영이 웃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너무 놀라 웃음이 터진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정도라면 프로그램이 아니라 증권사 자체 서버를 걱정할 수준이었다.
한 종목에 초당 천 건의 주문이 몰린다면 신성증권의 서버가 견디지 못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박도하는 웃는 한진영과 놀란 표정의 팀원들을 돌아보고 만족했다.
그가 원하는 반응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도하는 더 자신 있는 목소리로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초당 처리 건수나 종목의 선정 등은 외부에서 건드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프로그램 내부에 집어넣어 그야말로 자동 매매에 최적화되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종목마다 맞춤형 공식이 있듯이 프로그램도 맞춤형으로 제작하려는 것이 저의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프로토타입의 프로그램은 한 종목 한해서 최대 초당 천 건의 주문을 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짝짝짝.
한진영은 만족한 듯이 시연을 보지도 않았는데 손뼉부터 쳤다.
자기 머릿속에 있었던 박도하의 지난 프로그램이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손뼉을 치던 한진영은 손을 내린 뒤 스크린을 가리키고 말했다.
“우선 먼저 보도록 하죠.”
박도하가 한진영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동료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동료가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시연할 대상은 하이전자입니다. 유동량과 변동 폭이 지금의 프로그램을 감당할 수 있는 적절한 종목이라는 생각에서 골랐습니다.”
박도하가 이야기하는 중간에 프로그램이 실행되어 자동으로 매매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쏟아져 나오는 매수주문과 매도주문 속에서 유유히 TF팀의 프로그램이 매매에 합류했다.
매수주문이 들어가자마자 체결이 되어 계좌 속에 하이전자의 주식이 쌓여갔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흐르며 하이전자의 주가가 오르자 매수만 하던 프로그램이 매수를 멈추고 물량을 뱉어냈다.
그렇게 한동안 물량을 뱉어내던 프로그램이 하이전자의 주가가 하락하자 이번에는 다시 매수하기 시작했다.
짧디짧은 변동 폭에서의 매매였다.
사람이 한다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겠지만, 프로그램은 그 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수수료와 세금을 내고 1원이라도 남으면 무조건 들어간다는 기준을 충실히 수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매수와 매도를 자유롭게 하는 프로그램을 보며 사람들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번 매수와 매도를 보여줬던 한진영의 프로그램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초당 천 건까지 매매를 할 수 있는 처리 속도를 참석자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수준인 초당 3회 정도로 낮추어 설정해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초당 천 건의 주문을 넣는 괴물 같은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물 흐르듯이 매수와 매도를 반복하는 프로그램의 모습이 충격적으로만 보일 지경이었다.
한진영은 자연스러운 프로그램의 모습을 보며 만족감을 보였다.
한진영의 머릿속에만 담겨 있는 것을 말로 표현했을 뿐인데 그걸 현실 세상에 등장시킨 팀원들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생겨난 한진영이었다.
“좋습니다.”
한진영이 충분히 봤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좋다는 말로 그만할 것을 말했다.
박도하는 한진영의 말에 동료에게 눈짓하여 프로그램을 멈추도록 했다.
그러자 프로그램이 자연스럽게 보유하고 있던 하이전자의 물량들을 쏟아내며 계좌를 비워냈다.
약 5분여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시연이었기에 500억의 자금 중 5억 원만을 투입하여 매매를 진행했다.
한진영은 거래내역과 약 5분여간의 매매 후 손익을 확인했다.
매수와 매도를 합쳐 도합 천여 번의 매매가 5분이라는 시연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그리고 얻은 수익 20만 원.
세금과 수수료를 제한 수익이었다.
천여 번이라는 매매 숫자를 생각한다면 적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유려해 보이는 프로그램의 움직임과는 사뭇 다른 수익금에 몇몇 팀원들은 이상함마저 느꼈다.
그러나 오히려 한진영은 20만 원이라는 숫자에 매우 만족했다.
“생각보다 성적이 좋습니다. 이렇게까지 좋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는데 분석과 프로그램의 합이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 그중에서도 김석현과 김준하는 한진영이 이게 뭐냐고 할까 봐 가슴을 졸였었다.
예상은 했지만 20만 원의 수익은 그들의 예상보다도 더 적은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밖의 한진영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진영이 진심으로 한 말인지 아니면 비꼬기 위해 하는 말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차라리 ‘좋다’는 정도의 말로 끝냈다면 아직은 부족하지만 처음치고는 잘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좋다’를 넘어 ‘합이 잘 맞다’라는 말까지 하는 바람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로 한진영이 프로그램을 만족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아무리 봐도 20만 원이라는 숫자가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알고리즘에 한 발 떨어져 있는 박도하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한진영에게 물었다.
“팀장님. 정말 만족해하시는 건가요?”
“네. 만족합니다. 그런데 조금 바꿨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진영의 말에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선 팀원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좋다는 말을 먼저 건네고 이제 본격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매매 횟수를 조금 더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매매 횟수를요?”
“네. 제가 보기에는 수익이 너무 높습니다. 계량 분석이 잘 이루어져서 그런 것인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조금 부담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매매 횟수를 좀 낮춘 뒤 안정화 작업을 진행하도록 합시다.”
한진영의 말에 김석현이 참지 못하고 한진영에게 말했다.
“겨우 20만 원의 수익인데도 너무 많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겨우 20이라니요?”
한진영은 김석현의 질문에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김석현과 자리에 있는 팀원들을 향해 말했다.
“20만 원은 매우 높은 수익입니다. 이게 바로 자동매매의 무서운 점이죠. 이제 겨우 5분의 시간이 흐른 것에 불과합니다. 이 추세대로 한 시간이 흘렀다면 단순 계산으로 240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규장 시간이 6시간인 것을 고려한다면 1,440만 원을 이 프로그램 하나로 벌 수 있다는 뜻이죠. 물론 우리가 시연했던 시간대가 잘 맞아 높은 수익을 벌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1,000만 원의 수익은 무난할 것 같지 않습니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한진영이 말한 수익이 너무 많다는 말의 뜻을 알게 됐다.
5억에 1,000만원의 수익은 한진영의 말대로 하루에 벌기에는 큰 수익이 맞았다.
“지금이 상승 추세에 장이 좋아서 이런 것이고 나중에 하락 추세가 나온다면 이 정도의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런 수익률은 너무 많은 게 맞습니다. 이렇게 많은 수익을 얻다가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수익이 많은 게 문제가 되나요?”
조수아가 한진영의 말에 질문을 던졌다.
한진영은 조수아와 같은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문제가 됩니다. 너무 큰 수익은 시장에서 관심을 받기 마련이니까요.”
한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래내역 앞에 섰다.
“금융 시장에서의 관심은 독입니다. 그리고 관심은 언젠가는 내 등을 찌를 칼로 바뀌어 있을 겁니다. 저는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걸 쪼갭시다. 박도하 대리님.”
“네. 팀장님.”
“한 종목에 천 건의 매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천 개의 종목에 하나의 거래가 들어가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십시오.”
“천 개의 종목에 하나의 주문…….”
“어렵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한 종목에 천 개의 주문을 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연을 통해서 하실 수 있는 능력을 확인했으니 저는 기대하겠습니다.”
처음부터 한진영이 원하던 것이 바로 천 개의 종목에 하나의 주문을 넣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직 개념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어려운 미션을 주기 싫어서였다.
한진영의 생각대로 처음부터 박도하에게 천 개의 종목에 동시에 주문이 들어가는 것을 요구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지도 몰랐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라도 섣불리 도전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천 개의 주문을 한 종목에 넣는 프로그램을 한번 만들어 봄으로써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었다.
입구에서 생각하면 까마득해 보이는 결승점이 반환점을 돌면 가깝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효과였다.
박도하는 한진영의 말에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계획했던 것과 다르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반대니까 오히려 더 쉽게 접근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간단하게 만들어 속도를 높이는 것을 유지한 채 연결된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알고리즘과 종목을 설정하고 수치 등을 입력하는 보조 프로그램 말입니다.”
“아~ 나무처럼 뿌리를 만들자는 이야기군요. 맞습니다. 파편화가 속도적인 측면에서 빠르기는 하지만 천여 개의 종목을 하나하나 따로 설정하여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것은…… 제가 너무 단순하게 접근한 것 같습니다. 운용하는 프로그램과 설정을 하는 프로그램 등을 따로 두어 속도도 확보하고 설정과 수정 등을 간편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진영이 던진 말에 박도하의 눈에서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펼쳐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박도하는 허공에 손까지 휘저으며 눈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프로그램에 심취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야기 속의 것이 박도하에게는 새로운 것이었지만, 사실 한진영에게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바로 박도하가 여러 차례 수정과 업데이트를 통해 발전해간 프로그램을 이야기 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지난 시절 프로그램이 출시한 뒤 수년에 걸쳐 업그레이드된 사항이 지금 이 순간 몇 마디 말로 끝이 났음을 알게 됐다.
한진영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이야기했다.
“첫 시연치고 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테스트 차원에서의 단순한 분석이었을 뿐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확인이 되었으니 이걸 바탕으로 강우건설과 미래차에 맞는 알고리즘도 시작하도록 합시다.”
한진영은 손뼉을 치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리고 모인 시선의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한 달 뒤 다시 이곳에 모였을 때는 세 종목이 동시에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겁니다. 자 시작합시다.”
한진영이 손을 들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회의실에서 빠져나갔다.
한진영이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것 등을 모두 알려준 만큼 팀원들은 앞으로 한 달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움직여 나갔다.
***
첫 시연이 펼쳐지고 난 뒤 FICC 본부에는 알 수 없는 소문 하나가 흘러 다녔다.
한진영이 만든 프로그램만 있으면 돈을 억수로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회사에 다닐 필요도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하루에 수천만 원에서 수백만 원의 돈은 우습게 번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퍼졌다.
이런 소문은 돌고 돌아 TF팀의 귀에도 들어갔다.
“진영아. 그 프로그램 있잖아. 그거…….”
“아니. 이제는 너도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냐?”
한진영의 말에 이성우가 팔짝 뛰었다.
“내가 뭐? 나 아무 소리도 안 했어.”
“아무 소리도 안 하기는…… 네가 무슨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지 뻔히 보이는데 뭘 아무 소리도 안 해?”
“어? 진짠데. 준하야. 나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지?”
같이 밖에 나와 있던 김준하는 이성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분명 저도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요.”
이성우는 김준하까지 한진영의 말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피우고 있던 담배를 급히 끄고는 화를 냈다.
“아니. 이것들이 단체로 뭘 잘못 잡수셨나?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그래?”
이성우가 팔짝 뛰고는 있지만 누가 보더라도 괜한 모습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의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
“입으로 내뱉지 않았다고 말 안 한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는데 어떻게 말을 한 게 돼. 나는…….”
“됐어. 그만해.”
한진영은 손을 저어 이성우의 말을 자르고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이성우를 바라보고 말했다.
“안 돼.”
“어? 뭐가…….”
조금 전까지 당장에라도 화를 낼 것 같던 이성우가 한진영의 말에 멈칫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진영은 그런 이성우를 향해 얼굴을 굳힌 채 고개를 저었다.
“네가 지금 생각하고 하려고 하는 거. 그거 안 돼.”
“내가 뭘 생각했다고…….”
말로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지만 얼굴은 이미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성우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도움을 줄 것 같은 김준하를 바라봤다.
그러나 김준하는 이성우의 눈을 피하기만 했다.
이성우는 도움을 줄 것 같았던 김준하마저 시선을 피하자 결국 참지 못하고 마음에 있는 말을 꺼냈다.
“야. 그렇게 좋은 거 있으면 그냥 돌리자. 너도 알다시피 내가 회사 연봉이나 성과급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인데도 그건 좀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니. 가만히 돌리고만 있으면 돈을 버는 건데 얼마나 좋아. 법으로 걸리는 것도 아니고…… 집에 돌려놓고 출근해서 시간 보내다 보면 알아서 돈이 벌려 있는 거 아니야? 게다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한진영은 이성우의 말에 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김준하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얘가 왜 가만히 있는지 알아? 그게 되면 얘가 먼저 말했지. 너는 그저 돈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수준이지만, 얜 그렇지가 않거든. 돈에 의미를 많이 두는 애야. 그런데 가만히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이성우는 한진영의 말을 듣자 그제야 김준하가 가만히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