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증권사 생활-65화 (65/650)

65화 준비는 마쳤으니 가슴 피고 들어가자

떠들썩한 예식이 펼쳐질 예식장이기에 조용한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나름대로 가장 조용한 곳으로 보이는 곳에 찾아간 정병선은 한진영을 향해 조금 전 이야기 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아까 저분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한진영은 말없이 가만히 정병선을 바라봤다.

미래의 정병선은 저 사람들과 엮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이내 지운 한진영은 정병선에게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좋지 않은 이야기가 제 귀로 들려서요.”

“좋지 않은? 어떤 이야기 말입니까?”

“자세히는 저도 모르지만, 사업을 할 때 자꾸 꼼수를 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제 생각에 저 사람들은 회장님께 좋은 의도로 접근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도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회장님께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정병선은 슬쩍 세 사람이 모여있는 곳을 돌아보고 말했다.

“경남산단 이야기를 꺼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습니다.”

“경남산단…….”

한진영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병선은 그런 한진영의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럽니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벌써 경남산단 이야기가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해서 말입니다.”

“벌써라고요? 그럼 앞으로 한참 남은 이야기란 말입니까?”

“첫 삽을 뜨는 시점이 지금으로부터 한 5년은 지나야 가능한 사업일 겁니다.”

‘그리고 5년 뒤에 리베이트 정황이 드러나 줄줄이 감옥에 들어갈 테고…….’

저들이 감옥에 간 사건이 바로 경남산단 때문이었다.

한진영은 그 이야기가 정병선의 입을 통해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것이었다.

“5년 뒤에나 첫 삽을 뜨는 일을 이야기하다니…… 정말 의도가 불순한 사람들이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한진영은 정병선의 말을 통해 이제 저들과 다시는 정병선이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잠시 한진영의 말에 표정을 굳혔던 정병선은 다시 환한 얼굴을 한 채로 한진영을 향해 말했다.

“아까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 감사의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꽤 짭짤했지요?”

“꽤 정도가 아닙니다. 리조트 인수 건에 더해 채권까지…… 많이 짭짤했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입맛만 다시던 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됐고요.”

“수익이 늘어 조금 더 큰 사업에 도전해 보시려 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한진영 씨를 만난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그게 다 정 회장님의 과감한 선택 덕분이지요. 저는 기회만 드리는 사람일 뿐입니다. 기회를 잡는 건 정 회장님의 몫이지요.”

“그 기회라는 것을 가져다주는 것만으로 감사한 마음이 하늘을 뚫을 지경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기회조차 잡지 못하니까요.”

한진영은 정병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엄한 사업에는 진출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프라임리츠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파리들이 많이 들러붙을 테니까요. 잘 선별해서 사업을 진행하셨으면 합니다.”

“조금 전의 그 경남산단 이야기처럼 말이죠?”

한진영은 정병선의 말에 대답 없이 가만히 웃어 보이기만 했다.

정병선은 한진영과 같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가 뭐 보답을 하고 싶은데 혹시 필요한 게 있습니까?”

“오늘 자리가 그 보답을 위한 자리 아닙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만들어드릴 수 있는 시간이 겨우 5분입니다. 그것도 예식이 시작하기 전 잠시 만나는 게 전부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한진영은 자신 있게 말하고는 멀리서 눈치를 살피는 이성우와 김준하를 손으로 불렀다.

그러나 정병선은 괜찮다는 한진영의 말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진영은 그런 정병선을 보고 생각했다.

‘지금은 정 회장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내 짐을 좀 내려줄 필요가 있겠구나.’

과한 친절이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에게도 도움이 되기에 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병선 입장에서는 한진영이 베푼 것이 더 많았고, 자기가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만으로 빚을 갚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한진영은 정병선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친절을 베푸는 것보다 빚을 갚을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찜찜하시다면 이렇게 하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돈과 같은 것은 커미션이 될 수 있으니 불편하고…… 제가 그리스에 잠시 다녀올 생각인데…….”

“표하고 지낼 곳을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한진영은 가볍게 운만 띄웠다.

그러나 정병선은 그런 한진영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고 자기가 비행기표와 숙식을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한진영은 한결 가벼워진 표정의 정병선을 보고 웃으며 부탁했다.

“그래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는 그리스가 처음이라 조금 답답했는데 다행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다 준비를 해놓을 테니 한진영 씨는 여권만 챙기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서주시니 제가 마음의 큰 짐을 덜었습니다.”

“큰 짐을 덜기는요. 이렇게라도 한진영 씨에게 갚을 기회를 주셔서 제가 고맙지요. 앞으로도 혹시 어디 여행가실 곳이 있다면 말씀만 해주십시오. 제가 다 준비할 테니 말입니다.”

조금 전과 달라진 정병선의 말투에 한진영은 그의 어깨에서 짐이 내려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비행기표와 지낼 곳 등 모두 한진영이 구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정병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짐을 덜게 해줌으로써 관계가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기회를 준 것이었다.

“괜찮으면 표 세 장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진영은 가까이 다가온 이성우와 김준하를 돌아보고 말했다.

정병선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열 명분을 요구하셨어도 제가 해드렸을 테니까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가실까요? 얼추 시간이 됐지요?”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은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가시지요.”

약속 시간인 12시 10분에 가까워진 것에 정병선이 한진영 등을 이끌고 대한정유 회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딸의 결혼식의 혼주가 된 대한정유의 윤길영은 하얀 장갑을 끼고 손님을 맞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

제자리에 서서 연신 얼굴에 웃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윤길영은 멀리서 찾아오는 정병선을 보고 먼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게 누굽니까?”

“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나이 찬 딸내미 보내는 게 뭐 큰일이라고 이렇게들 와주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찾아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던 형식적인 인사와는 다른 모습의 윤길영 회장이었다.

그는 먼저 정병선의 손을 잡고 너스레를 떨었다.

“재미 좀 보셨다면서요?”

“이거 참…… 회장님의 귀에까지 들어간 겁니까?”

“여기 식장에 온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한동안 두바이가 망한다고 얼마나 이야기가 많았습니까? 특히 우리네 같은 기름 장사 하는 사람에게는…….”

한참 이야기를 하던 윤길영의 시선이 정병선과 함께 온 젊은 사람들에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의 사람을 발견하고 말하던 것을 멈췄다.

“너는…… 성우 아니냐?”

윤길영은 정병선의 손을 잡은 채로 이성우를 향해 아는 척을 했다.

이성우는 그런 윤길영을 향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셨어요?”

“그래. 네가…… 방금 네 아버지는 네 동생과 함께 왔는데…….”

“네 저는 아버지랑 함께 온 게 아니에요.”

“이 회장님과 함께 온 게 아니라면…….”

정병선은 의아한 표정의 윤길영을 향해 말했다.

“회장님. 제가 며칠 전에 말씀드렸던…….”

“아~ 시간을 내어 달라는 게 성우 때문이었습니까? 네가 정 회장님께 부탁한 거냐?”

“아닙니다. 제가 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 회장님. 전 신성증권의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누구?”

윤길영은 자기소개를 하는 한진영을 위아래로 살폈다.

정병선은 그런 윤길영을 향해 한진영을 다시 소개했다.

“신성증권 FICC 사업부에서 일하는 친구입니다. 제가 이 친구에게 큰 도움을 받았지요.”

“그래서 저에게 시간을 내어 달라는 게 이 친구 때문이었습니까?”

“네. 괜찮으시겠습니까?”

윤길영은 여전히 정병선의 손을 잡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도 인사를 나눠야 할 손님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정병선과의 약속이 있었기에 윤길영은 잠시 부인을 향해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뒤에서 준비하고 있던 수행 비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실 하나를 비워놓고 있기는 했습니다. 그럼 가시죠.”

“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회장님은 가지 않는 겁니까?”

“저는 회장님을 여기 있는 한진영 씨에게 소개하는 데까지만 하기로 했습니다.”

윤길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병선의 얼굴을 봐서 시간을 내준 것인데, 정작 정병선은 가지 않겠다는 말에 기분이 상한 듯한 모습이었다.

“회장님. 한진영 씨와 연을 잇는 것이 회장님에게 좋은 일이 될 테니 저를 믿고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시지요.”

“저에게 좋은 일이 된다고요?”

“제가 어떻게 이번 두바이 일로 돈을 벌었겠습니까?”

정병선의 말에 윤길영은 알겠다는 듯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어쨌든…… 그럼 저는 다녀올 테니 앉아서 쉬고 계시지요. 이제 곧 예식이 시작될 테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자리로 가 앉아 있겠습니다.”

정병선은 윤길영이 한진영을 만나겠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진영을 향해 눈짓을 건넸다.

여기까지 자기가 할 일을 모두 마무리했다는 눈빛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정병선을 향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윤길영의 비서를 따라 준비된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로 가는 길에 한진영은 김준하를 잡아당겼다.

“이게 뭐예요?”

김준하는 한진영이 품 안에서 꺼낸 종이를 받아 들었다.

한진영은 김준하의 손에 들린 종이를 가리키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한정유와 대한정유 계열사들의 재무제표야. 그리고 외부로 나와 있는 주요 사업들과 예상 수익률이 적혀 있어.”

“이걸 왜 제게 주신 거예요?”

한진영은 주변을 살핀 뒤 말했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말하고 화장실 가서 될 수 있는 한 많이 외우고 와. 다 외운다면 좋은데……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거야.”

“외우라고요?”

“어서. 의문을 가지는 시간조차 아까우니까.”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앞서 나가는 윤길영의 비서를 잠시 불러 세웠다.

“이 친구가 잠시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니…….”

“다녀오십시오.”

“볼일 다 보고 제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와주시겠습니까?”

“화장실을 다녀와서 계신 곳으로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요.”

“혹시 모르니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윤길영의 비서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야기 듣기로 이 젊은 친구들에게 준비한 시간은 5분이라고 했다.

그리고 윤길영의 성격상 5분도 걸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5분 동안에 화장실을 다녀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대기실로 데리고 와 달라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윤길영이 딸의 결혼식장에서 특별히 시간을 낸 사람이었다.

계속 그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감사합니다.”

한진영은 윤길영의 비서에게 인사하고는 김준하에게 눈짓했다.

김준하는 한진영의 눈짓에 품 안에 종이를 꼭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이 하는 것을 가만히 곁에서 바라보던 이성우가 다가왔다.

“저 종이에 쓰여 있는걸 그 짧은 시간에 다 외울 수 있겠어?”

“내가 알고 있는 김준하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걸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늦게 준 거야. 일종의 테스트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우린 이제 들어가자. 가슴 펴고. 자 가자.”

한진영은 말을 마치고 열린 대기실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 안에는 먼저 대기실로 향했던 윤길영이 간이의자에 앉아 들어오는 한진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길영은 들어오는 한진영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5분을 이야기했는데…… 그건 정 회장님이 있었을 때 이야기고…… 오늘은 내 딸 결혼식인 거 알지? 3분. 이것도 첫 만남의 자리에서 파격적으로 시간을 많이 주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

“3분도 필요 없습니다.”

“뭐?”

“제 첫마디를 듣고 관심이 있으시면 저와 이야기를 나누시고 관심이 없으면 이대로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아주 자신만만한 친구구먼. 좋아. 첫마디에 결정하라 이거지? 그럼 앉아서 들을 필요도 없겠네. 일어나서 이야기 듣도록 하지.”

윤길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진영을 비롯하여 이성우와 윤길영의 비서도 자리에 서 있었다.

대기실에 있는 네 명의 사람 중 의자에 앉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자 이야기해 봐. 내 흥미를 끌지 못하면 난 바로 나갈 테니까. 그리 알고…….”

윤길영의 몸이 반쯤 틀어졌다.

딸의 결혼식이 조금 뒤에 벌어지려 했다.

윤길영은 정병선도 자리에 없기에 그냥 이야기를 듣자마자 밖으로 나가려 한 것이었다.

한진영은 그런 윤길영을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년 눈이 녹을 시기에 유럽 남부 국가의 파산 이야기가 시장에서 떠오를 겁니다.”

윤길영은 한진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발을 들어 올려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한진영의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내민 발로 땅을 디디지 못했다.

그리고 천천히 윤길영의 몸이 한진영 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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