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내가 부를 때까지 재미있게 놀고 있어라
한진영이 예상한 대답은 김정대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김정대와 정병선이 끈끈히 이어져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분명 정병선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름은 김정대가 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병선의 입을 통해 나온 이름은 김정대가 아닌 장근수였다.
한진영은 장근수라는 이름이 뜻밖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장근수 본부장님이 정 회장님께 연락한 겁니까?”
“저도 깜짝 놀라기는 했습니다. 장 본부장님이 먼저 연락을 주셔서 말입니다.”
“먼저 연락을 줬다라…….”
전국 각 지점에 은행주 관련 추천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장근수였다.
덕분에 오늘 뉴스에서 신성증권은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보지 않아도 내일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 은행 관련 주식들은 폭락을 면치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장 본부장님과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글쎄요. 접점이 없어서…… 친해지고 싶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먼저 연락을 하셨다고요? 장 본부장님이 먼저요?”
“네. 그래서 놀랐지요. 그리고 연락하신 뒤에 하신 말씀에 더 놀랐고요. 덕분에 큰 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일성건설에서 두바이 호텔사업을 합작으로 하자는 제안을 받아서 고민하던 차였거든요. 만약 연락을 받지 못하고 사업을 진행했다면…… 지금쯤 골치깨나 썩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정병선의 말에 한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그대로 사업을 진행했다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지금쯤 큰 고민에 쌓여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고민을 장 본부장님께서 모두 해소해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이 들어 이렇게 한진영 씨를 뵙자고 한 겁니다.”
“마침 저도 만나 뵈어야 했습니다.”
“그래요?”
“네. 제가 자리를 옮긴다는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네. 김 비서를 통해 이야기 들었습니다. 김 상무님 밑으로 들어가신다고요.”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투자금에 대한 조정을 이야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투자금은…….”
“잠시만요.”
정병선은 손을 들어 한진영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술잔에 술을 따른 뒤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자금은 전적으로 한진영 씨에게 위임한 겁니다. 어떻게 지지고 볶든 그건 한진영 씨가 알아서 할 문제이니 저와 상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이쪽 부서에서 저쪽 부서로 옮긴 수준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진영 씨를 믿습니다.”
마치 자기 다짐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정병선은 큰 몸짓으로 술잔을 들이켰다.
한진영은 물끄러미 그런 정병선의 모습을 지켜봤다.
정병선은 술잔을 내려놓은 뒤 회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두툼하게 잘린 회를 씹어 맛을 본 정병선은 한진영을 향해 술병을 들어 올렸다.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만 않으면 됩니다.”
한진영은 술잔을 들어 정병선의 술을 받았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된 겁니다. 이제 제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한진영이 만나려 한 이유를 먼저 듣고 재빨리 끝낸 이유가 자기 이유를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정병선이었다.
그는 자기 술잔에도 술을 따른 뒤 가만히 한진영을 향해 몸을 숙였다.
“조금 전 한몫 잡고 싶다는 제 말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한진영 씨에게 도움을 얻고 싶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한몫…… 잡고 싶다. 이번 사태의 결과를 알고 싶다는 것이군요.”
정병선은 한진영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진영은 정병선을 따라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 맡기신 50억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을 정도의 이익을 얻고 싶다는 말로 알아들어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정병선은 한진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결과까지 알고 있을 것으로 확신하시는 것 같군요.”
“저 자신보다 한진영 씨를 더 믿고 있습니다.”
“저를 너무 믿으시는 것 아닙니까?”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은 숙였던 몸을 세웠다.
그리고 한진영을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이거다 할 때가 찾아옵니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투자를 해야 하지요. 그런 순간까지 이리 재고 저리 재면 제대로 된 돈을 벌지 못합니다.”
“정 회장님에게는 지금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고요?”
“맞습니다. 루머로 끝날 거라고 생각되는 일이 현실이 된다면 혼란은 말도 못 할 겁니다. 이게 정말 대규모 폭발을 일으키는지 아니면 그대로 뇌관이 제거되어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지 정도만 알아도…… 사업 규모가 바뀌는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일 테니까요. 어떻습니까? 저에게 길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확실히 해야겠군요. 저에게 10%를 주십시오.”
“10%요?”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한진영이 말한 10%라는 말의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투자로 얻게 되는 수익의 10%를 저에게 맡기십시오.”
“20%. 기존에 맡긴 금액 50억에 20%를 더해 한진영 씨에게 맡기겠습니다.”
10%를 이야기했는데 20%를 주겠다고 했다.
한진영은 정병선의 제안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지간히도 저를 믿으시나 봅니다. 감을 너무 믿으시는 것 아닙니까?”
“제 감이 저를 이 자리까지 밀어 올렸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만족하십니까?”
“이렇게 통 크게 지르시는데 제가 그에 걸맞은 답을 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네요.”
한진영의 말에 정병선이 가만히 한진영의 눈을 들여다봤다.
이야기하면 자기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듣기만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모라토리엄은…… 없습니다.”
“그렇지!”
정병선은 한진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러고는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소란을 끼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미 예상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예상했지만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심상치가 않아 저도 긴가민가했지요.”
“예상하셨다면서 저에게 이렇게 크게 배팅하신 이유가 궁금하군요.”
“아무리 예상한다고 하더라도 답을 알고 있는 것과는 움직임의 폭이 다르니까요. 감사합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네. 그렇게 되면 제 책임이지요. 한진영 씨의 말을 무조건 믿은 제 잘못 말입니다.”
말을 하는 정병선의 얼굴과 달리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정병선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 비서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김 비서를 향해 무언가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한진영은 그런 두 사람을 앞에 놓고 다른 생각에 잠겼다.
‘장근수가 알려줬다? 장근수가?’
한진영은 장근수를 생각하며 젓가락을 놀렸다.
정병선과의 자리를 마친 한진영은 대리기사를 부르기 전에 잠시 차가운 바깥 공기를 마셨다.
도자기에 담겨 어떤 술인지 알지 못한 술이 꽤 독했던 듯싶었다.
차가운 공기에 얼굴을 식히는데도 올라오는 숙취에 한진영은 잠시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렇게 한동안 숙취를 허공에 날리던 한진영은 대리기사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한진영의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
한진영은 전화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정 회장하고는 이야기를 잘 마무리 했다며?
다짜고짜 정 회장 이야기를 꺼낸 상대방의 목소리가 알 듯 말 듯 했다.
“누구…… 장근수 본부장님?”
-왜 그런가? 내가 바로 전화해서 놀란 건가?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조금 전 떠난 정 회장이 장 본부장님에게 연락을 했나 봅니다.”
-고맙다고 연락하더군. 덕분에 큰돈을 벌 것 같다고 말이야. 그리고 자네에게 수익의 20%를 투자하기로 했다며? 자네도 이번 일로 꽤 이득을 보게 생겼어. 자리를 옮겼을 때 가장 걱정되는 게 새로운 곳에서 어떻게 실적을 쌓을 수 있을까인데…… 자네는 기존 투자금에 새로운 투자금까지 받게 될 테니 실적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저와 정 회장 모두 이득을 보는 일에 장 본부장님은 어떤 이득을 보게 되는 겁니까? 저는 조금 전 자리에서 그게 궁금하더군요. 왜 장 본부장님이 정 회장에게 알려줬는지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장 본부장님이 정 회장에게 알려줄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한진영은 장근수와 대화를 나누며 숙취가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만큼 오늘 자리에서 계속 이어진 장근수의 이름과 대화는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궁금했거든. 정 회장이 자네에게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말이야.
“그래서 충분히 대답을 들으셨습니까?”
-충분히 들었지. 생각보다 믿음이 크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야.
“근데 그게 왜 궁금하셨던 겁니까?”
한동안 한진영의 전화기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진영은 알 수 있었다.
같이 마주하고 있지 않았지만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장근수의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런 말이 없던 장근수가 드디어 말하기 시작했다.
-모레 본사로 출근하는 건가?
“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자주 자네를 보게 생겼구먼.
“그런가요?”
-그럴 거야. 내가 자주 자네를 부를 테니까.
수화기를 통해 장근수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한진영은 뿌옇기만 하던 장근수의 의도가 차츰 보이는 듯했다.
“제가 마음에 드시나 보군요.”
-가서 잠시 즐기다 다시 오게. 자네 자리를 특별하게 준비해 놓고 있을 테니 말이야.
“그걸 확인하기 위해 정 회장에게 두바이 이야기를 흘리신 겁니까?”
-그래. 정 회장을 통해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물어본 거지. 최준호 지점장과 김정대를 통해서 아는 것으로는 조금 부족했거든.
“그래서 충분히 답을 얻으셨습니까?”
-답을 얻었으니 자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이야기한 것 아닌가? 만족해. 자네는 나와 함께 가도 될만한 친구야.
“사업부 재편이 전체적으로 이루어지나 보군요.”
-하하하. 아주 내 마음에 커다란 쇠못을 박아 버리는구먼. 자네 이러다가 나한테서 못 벗어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신성증권의 사업부 재편은 FICC로 끝이 아니었던 기억이 떠오른 한진영이었다.
한진영은 날아갔던 숙취가 친구까지 불러와 자기를 덮쳐오는 것을 느끼며 장근수에게 말했다.
“그 이야기는 차차 나누도록 하시지요.”
-그러는 게 좋겠어. 재미있게 놀고 있게나. 내가 자네를 불러올 때까지 말이야. 그럼 푹 쉬게.
한진영은 전화기를 끊고 눈을 감은 채 어지러움을 느꼈다.
***
한진영이 시흥지점에 작별을 고할 때 사람들은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자리를 옮기는 것을 그동안 함구한 상태에서 옮기는 마지막 날 발표했기 때문이다.
섭섭함을 보이는 직원들이 대다수였다.
한진영과 친해지면 이득을 본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이제부터 친해지려 했던 사람들은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따로 전화번호를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연락을 하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성우의 경우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떠나는 한진영을 붙잡기도 했다.
“과장님. 방송에 필요한 내용이 있을 때마다 계속 연락드릴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최석영은 그동안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대던 이야기를 한진영이 답해줘 그래도 괜찮았다.
그런 최석영과 달리 최준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떠나는 한진영을 잡고 싶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나 잡고 싶다고 하여 잡힐 사람이 아니었고, 잡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최준호는 마지막 인사를 하는 한진영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모두에게 기회가 되면 다음에 볼 것을 인사한 한진영은 다음날 FICC 사업부가 위치한 신성증권 본사로 출근하게 됐다.
한진영은 신성증권 정문에 서서 신성증권을 올려다봤다.
실적 1등을 했다며 시상을 할 때 왔던 것과는 다른 기분이 느껴진 한진영이었다.
그때는 잠시 구경을 왔다는 기분이면 지금은 이곳에서 벌어질 일에 흥분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진영은 힘차게 앞으로 걸어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FICC 사업부는 기존 사업부 통합과정을 통해 신성증권의 6층과 7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사업부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의 규모였으며 조만간 본부급으로 승급된다는 소문이 도는 곳이었다.
한진영은 익숙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지나쳐 김정대의 사무실로 향했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돌아가는 사무실 풍경 속에 한진영만이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잠시만요. 어떻게 오셨어요?”
사무실을 지나쳐 오는데도 아무도 한진영을 잡는 사람이 없었다.
겨우 김정대 사무실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김정대의 비서가 한진영을 제지하고 나섰다.
그만큼 지금 사무실은 복잡했고 정신없었다.
“부문장님을 만나뵙기 위해 왔습니다. 오늘 새로 이곳으로 전출 명령 받은 한진영이라고 합니다.”
“아~ 네. 부문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비서는 한진영의 말을 듣고 김정대의 사무실에 한진영이 온 것을 알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려 했다.
그러나 그녀보다 문이 먼저였다.
“어? 왜 문이 저절로 열리지?”
그녀가 스스로 열리는 문을 보고 놀라고 있을 때 문 안에서 김정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오게. 기다리고 있었어.”
김정대가 스스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찾아온 한진영을 와락 껴안으며 FICC로 온 것을 환영했다.